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68
◈ 168화. 채경승과 공여소
사방의 횃불이 켜지며 장원의 어둠을 밀어냈다.
동료들과 조용히 복귀한 진무립이 은수련을 그녀의 침상에 눕혔다.
제대로 된 의원만큼은 아니지만 진무립 역시 스승에게 기본적인 의술은 배웠다.
진짜 의원이 오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야 한다.
지그시 눈 감은 진무립은 은수련의 맥을 쥐고 내력을 밀어 넣었다.
‘기혈이 크게 뒤틀려 내기의 순환을 가로막고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녀의 내력이 고강한 탓에 요혈만큼은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부하들 앞에서 내색하진 않았으나 진무립 역시 그들 못지않게 가슴 졸이고 있었다.
진무립은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뒤틀린 기혈과 막힌 맥을 조심스럽게 수복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무립이 마침내 맥에서 손을 떼고 일어났을 땐 한참 전에 도착한 의원이 뒤에서 기다리던 참이었다.
진무립은 백발이 성성한 의원에게 그 어느 때보다 정중히 예를 갖췄다.
“뒤틀린 기혈을 바로잡았습니다. 뒤를 부탁드립니다.”
“우선 살펴보리다.”
무겁게 끄덕인 의원이 은수련의 곁에 앉아 진맥을 시작했다.
안에서 진무립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문밖에서 한참이나 기다리던 녹사대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주군.”
“무슨 일이냐?”
“상단주가 주군의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 기다리라고 해라.”
“벌써 세 시진째 방 안에서 꼼짝도 않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 시진이라고?”
서진환이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출발한 직후부터 기다린 모양입니다. 다녀오십시오.”
이어서 단려화도 입을 열었다.
“이곳은 우리가 지키고 있을게요. 다녀와요.”
진무립은 짧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오지.”
채경승은 처소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석상처럼 진무립을 기다렸다.
그와 함께 앉아있던 공여소가 조용히 물었다.
“내일 다시 오는 게 낫지 않을까요?”
채경승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길을 정했으면 확실하게 성의를 보이는 것이 낫소.”
그때 문밖으로 고개 돌린 공여소가 빙그레 웃었다.
“성의를 알아줄 시간이 온 것 같네요.”
곧이어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리며 진무립이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신 모양이오.”
일순 공여소의 눈빛이 반짝였다.
‘피 냄새.’
의복은 낮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미약한 피 냄새가 확실하게 그녀의 후각을 자극했다.
‘설마 태산표국에 다녀온 것인가?’
상천이 이곳 제남에서 싸운다면 상대는 태산표국 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경승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외출이 이렇게 길 줄은 몰랐습니다.”
진무립은 아까와 사뭇 다른 정중한 말투에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마음을 정한 모양이군.”
채경승은 공손히 예를 갖췄다.
“본 상단은 앞으로 태산표국과의 거래를 끊고 대량표국과 거래를 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산동의 산채에 필요한 물품을 삼 년간 원가로 제공하겠습니다.”
채경승은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다.
상천은 어쭙잖은 표국이 아니라 천하 각지에 산채를 둔 무림의 거파.
손을 잡기로 결정했으면 확실하게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이쪽에서 먼저 성의를 보인다면 상대도 조금 더 신경을 써줄 것이다.
진무립은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영준하게 빛나는 눈빛부터 수려한 용모가 천천히 촛불 아래 드러난다.
살짝 커진 두 사람의 눈에 진무립의 미소가 짙게 들어왔다.
“동진상단을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게 해주겠다던 약조는 반드시 지키겠소.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것이오.”
“천주님을 믿겠습니다.”
태산표국과 등을 지기로 했으니 이젠 믿는 수밖에 없었다.
탁자 위의 물을 한 모금 들이켠 진무립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적절한 때에 결정을 내려주었군.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첫 번째 자리는 다른 상단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르지.”
채경승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설마 벌써 강서상단에 제안을 넣으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진무립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것이 된다.
묘한 실망감이 그의 가슴에 스며들려는 찰나였다.
“그게 아니오.”
“그렇다면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이곳 상단의 무인도 한 명 다녀갔으니 돌아가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거요.”
공여소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역시 태산표국과 일이 있었던 것이야.’
묘한 미소를 남긴 진무립이 먼저 일어났다.
“늦게까지 기다리느라 피곤하셨을 터인데 그만 돌아가서 쉬시오. 일 이야기는 낮에 다시 나눕시다.”
남편과 함께 진무립의 처소를 나선 공여소가 가만히 밤하늘을 응시했다.
‘얼굴은 전혀 닮지가 않았는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당당함은 마치 젊은 날의 그를 보는 것만 같구나.’
별 무리로 가득한 밤하늘, 진무립의 얼굴과 함께 또 다른 누군가가 겹쳐서 떠오른다.
“부인. 날이 추운데 얼른 돌아가십시다.”
“미안해요.”
그녀는 아련한 미소를 감추며 남편 곁으로 바짝 붙었다.
“우리의 결정은 분명 옳은 것이었소.”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공여소에게 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공여소는 슬며시 남편의 팔을 잡았다.
“그럼요. 상공의 선택은 잘못된 적이 없었지요. 이번에도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처소로 돌아온 내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들을 기다리는 두 사내를 볼 수 있었다.
행수 송현과 상단의 호위무사 영호였다.
채경승이 발소리를 내며 물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인가?”
“단주님!”
침을 꿀꺽 삼킨 송현이 긴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상천의 무인들이 태산표국 총단에서 일전을 치르고 돌아왔답니다.”
“뭐라고?”
담담한 공여소와 달리 채경승의 눈동자는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설마 그, 그가 다녀온 곳이 태산표국이었단 말인가?”
태산표국에 다녀온 영호가 입을 열었다.
“상천의 무인이 표국에서 전투가 있을 것이라 말해주었습니다. 하여 조금 전 그곳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채경승은 그를 다그치듯 말했다.
“어서 말해보아라.”
“전투는 정문 앞에서 벌어졌습니다. 백여 명의 일급표사가 나왔는데 전투 중에 무려 절반 이상이 쓰러졌습니다.”
“수십이 넘는 일급표사가 죽었다고? 분명 천주는 서너 명의 부하만 대동하고 나섰다고 들었다. 다른 무인 대부분은 숙소에서 쉬고 있질 않았느냐?”
“제가 지켜보는 동안 표국 앞에서 싸운 상천의 무인은 고작 셋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들이 전부는 아니었으나, 청옥공자와 산동거사가 일전을 치르는 동안 표사들과 싸운 건 젊은 무인 둘이 전부였습니다.”
채경승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태산표국의 일급표사는 실력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고작 젊은 무인 둘이 그들 수십 명을 죽였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 것이다.
“저 혼자만 지켜본 것이 아닙니다. 강서상단의 호위무사와 검천문의 무인을 비롯해 족히 열 명은 함께 전투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의 무위는 놀라울 정도로 강했습니다.”
채경승은 그제야 진무립이 남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였구나.’
서너 명만 데리고 태산표국을 상대로 그 힘을 증명했다.
거기에 파격적인 조건까지 내건다면 산동의 상단들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거다.
‘내 선택은 옳았다.’
채경승은 자신의 판단에 희열마저 느꼈다.
공여소가 나직이 물었다.
“무면산왕도 전투에 참여했나요?”
“그는 중간에 급히 정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내부에 침투했던 사람이 있던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던 공여소가 입을 열었다.
“정문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백표대가 몰랐을 리 없어요. 그 말은 내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었고, 그 백표대조차 무면산왕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게 되겠군요.”
그녀의 예리한 추측에 영호는 내심 감탄했다.
“듣고 보니 대부인의 말씀이 옳은 것 같습니다.”
채경승이 망설였던 가장 큰 이유는 백표대의 존재였다.
상천에 그들을 감당할 힘이 있다면 큰 걱정거리 하나가 사라지게 된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신중하게 주변을 살핀 영호가 작게 말했다.
“산동거사가 아무래도 권성 대연무의 무공을 익힌 듯합니다. 나이 든 무인 중에 알아보는 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경악한 채경승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뭐, 뭐라고!”
산동 무림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친 자라면 권성 대연무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자는 없었다.
만일 팔황문이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면 이건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상공. 진정하세요.”
“부인.”
채경승을 진정시킨 공여소가 영호에게 말했다.
“상단에 이 일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는가요.”
“아직은 두 분과 행수님밖에 모릅니다.”
공여소는 습관처럼 입술을 매만졌다.
‘상천에선 국주의 무공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단순히 상단을 끌어들이기 위함이 아닌,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번 일에 나섰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상천의 천주가 계획한 일이라면 분명 어떤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외부에 섣불리 누설해선 안 될 것입니다.”
그녀가 본 진무립은 결코 생각 없이 움직이는 인사가 아니었다.
송현과 영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그들 일행에 부상자는 없었나요?”
송현이 대답했다.
“돌아온 뒤 곧장 처소로 들어가 의원을 데려온 것을 보면 다친 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내 잠시 다녀와야겠어요.”
안으로 들어간 공여소는 손바닥만 한 목곽을 들고나왔다.
채경승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부인. 그건 무엇이오?”
공여소의 주름진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상공께서 언제나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한배에 탔으면 노를 확실하게 저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서진환, 단려화가 자리한 가운데 나이 든 의원이 침상에 누운 은수련을 살피고 있었다.
피를 닦아낸 자리에 침이 꽂히고 맥을 짚은 자리 역시 침이 꽂힌다.
부어오른 늑골 주변에 여러 번 세침을 찔러본 의원은 한참이나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으음.”
나직한 침음에 단려화가 재촉하듯 물었다.
“의원님. 왜 그래요? 분명 뒤틀린 기혈은 바로잡았다고 그랬는데요.”
“…….”
“불안하니까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시라구요.”
다그치는 그녀의 말에도 의원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단려화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뒤를 돌아본 의원이 단려화를 보며 흠칫 놀랐다.
“왜 울려고 그려. 자네도 어디 아파?”
“나 때문에 이 사달이 벌어졌는데 눈물이 안 나게 생겼어요?”
“뭐라구?”
잔뜩 인상을 쓴 의원의 눈동자가 단려화의 입술에 머물렀다.
“……혹시 귀가 잘 안 들리셔요?”
그녀의 입 모양을 본 의원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지. 나이가 들다 보니 잘 안 들려.”
“그럼 은소저의 상태는?”
“갈빗대가 부러지긴 했는데 워낙 튼튼한 육신이라 알맹이는 무사해. 그 사내가 빠르게 기혈을 바로잡아 다행이다만 한동안 정양해야 할 게야.”
“그럼 괜찮은 거죠?”
“잉. 괜찮지.”
“아!”
안도한 단려화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이내 거짓말처럼 구겨졌다.
“그럼 아까는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지켜보셨는데요?”
“눈이 침침해서.”
“……아이 진짜.”
천천히 일어난 단려화가 그늘진 얼굴로 문고리를 잡았다.
때마침 진무립이 들어오며 물었다.
“어딜 가려고?”
“이 영감님 데려온 사람이랑 면담하러요.”
사천의 광녀는 아직 그녀 안에 살아있었다.
“…….”
“걱정 말아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녀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주 내외가 처소를 방문했다.
진무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직 안 주무셨소?”
공여소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부상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공여소가 의원에게 은수련의 상태를 물었다.
의원은 단려화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작게 끄덕인 공여소는 챙겨온 목곽을 꺼냈다.
진무립이 물었다.
“이것은?”
“화청단(和淸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아!”
스승에게 들어본 적이 있었다.
화청단(和淸團)은 삼백여 년 전에 멸문한 청현백화문의 무가지보였다.
공여소는 인자한 미소로 말했다.
“내력의 상승은 미약하나 혈맥을 보호하는데 탁월한 공능이 있습니다. 내상의 회복에도 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봉인을 개봉하니 청아한 향기가 빠르게 실내를 잠식했다.
의원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가운데 진무립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감사히 받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