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177
◈ 177화. 제남의 거리
구름을 뚫고 치솟은 태산 천족봉.
발밑으로 운무의 바다가 펼쳐진 정상은 무릉도원을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롭다.
사방으로 십 장 너비의 정상, 그 한켠의 나무 밑에는 화폭에 담긴 듯 고즈넉한 초옥이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함 속에 초옥의 뒤편에서 나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오는가.”
“아무것도 안 오는데.”
“여기 말고 저 아래 말일세. 구름이 발밑에 있지 않은가?”
“눈이 구름에서 내리는 줄 아는가? 하늘에서 퍼붓는 게지.”
“그럼 구름은 뭣 허러 있는가?”
“없으면 하늘이 심심하지 않겠는가?”
선문답 같은 대화를 나누는 두 노인은 통나무를 잘라 만든 탁자에 앉아 구름을 내려보고 있었다.
선풍도골의 노인이 곡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최근 무림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흘러가는 소문을 듣다 보면 마치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일세.”
목에 길쭉한 검상을 새긴 노인, 정사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사천의 광룡. 중원의 무면산왕. 소천무군 단자룡은 오래전부터 유명했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흑사칠랑까지 새로운 흑랑을 맞이했다더군.”
“떠오르는 신진 고수들이 많다는 말인가?”
“그때도 그렇지 않았는가? 고작 삼 년 만에 무림의 절대자가 된 단소룡과 불세출의 검객 천영. 하늘이 내린 지재(智材) 화윤을 비롯한 그들은 천하대전이 벌어지기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무명에 가까운 자들이었지.”
정사륭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은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네.”
흰 수염을 쓸어내린 역이광의 노안이 맑은 하늘을 담았다.
“사람은 하늘이 내리는 것일세. 우리 모두가 날 때부터 저마다의 역할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지. 그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 또한 하늘이 내린 시련이 아닐까 생각한다네.”
정사륭의 주름진 입꼬리가 웃음을 참듯 씰룩거렸다.
“그런 애송이들이 우리를 막을 수 있다고 보는가?”
“전대의 팔성도 신룡을 그렇게 취급하다 당했지.”
“음.”
“제아무리 튼튼한 둑도 작은 구멍에서부터 무너지는 게야. 과거의 실수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개돼지와 다를 게 무엇인가?”
정사륭은 역이광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는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옳아. 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모양일세.”
역이광이 허허롭게 웃었다.
“반성할 줄 아는 것을 보니 개돼지는 아니로구먼.”
정사륭은 쓴웃음을 삼켰다.
“변수가 될 만한 자들이라면 미리 싹을 자르는 것이 어떤가?”
역이광의 노안에 주름진 미소가 떠올랐다.
“그게 내가 자네를 찾아온 이유일세. 오대표국에 들인 시간과 재화를 생각하면 작은 걸림돌 정도는 치워주는 게 좋지 않겠는가?”
“상천이라. 흘흘흘. 고마운 아이들이지.”
상천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이들의 입장에서 나쁜 일이 아니었다.
세상의 시선이 상천에 쏠린 사이 음지에서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이광이 말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게 조금 걸리지만 화결이는 똑똑한 아이일세. 상천의 머리만 잘라준다면 오대표국은 조금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게야.”
“그렇다면 손을 빌려주는 것도 괜찮겠지.”
그때 두 사람의 고개가 초옥의 모퉁이 너머로 돌아갔다.
곧이어 회색 무복을 입은 사내가 나타나더니 둘 앞에 부복했다.
“태산표국의 철사대주 자영이 팔존(八尊)을 뵙습니다.”
“자네가 이곳까지 무슨 일인가?”
고개 든 자영의 두 눈이 진중한 빛을 머금었다.
“무면산왕이 제남에 나타났습니다.”
* * *
어둑한 밀실.
일렁이는 촛불 아래로 그윽한 약 냄새가 짙게 배어난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죽은 듯 누워있던 은수련이 슬며시 눈을 떴다.
“아가씨.”
“그대로 누워 계세요.”
단려화는 일어나는 은수련을 만류하며 곁에 앉았다.
“몸은 좀 어때요?”
은수련은 애써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낯빛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처음보단 혈색이 많이 돌아온 상태였다.
“석표사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깥 상황은 어떻게 됐습니까?”
계획이 시작된 후 동진상단의 밀실로 옮겨진 그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석두와 함께 숨어 있었던 참이었다.
단려화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살포시 잡았다.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어요. 그러니 은소저도 걱정하지 말고 회복에만 전념하세요.”
“그렇군요. 다친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다친 이는……”
말끝을 흐린 단려화는 일부러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많지 않아요. 동료들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는 은소저가 가장 잘 알잖아요?”
은수련은 공허한 시선을 허공으로 옮겼다.
“역시 아가씨는 거짓말이 서투르군요.”
단려화와 함께 백표대를 가장 먼저 경험한 사람이 은수련이다.
상대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단려화는 이내 우울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꿈은 가만히 앉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의 희생으로 산채의 가족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면 그보다 값진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은 동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과도 같았다.
‘이 사람들은…… 필사적이구나.’
좋은 부모를 만나 온실 속에서 자라온 그녀와 이들의 환경은 천양지차였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이 남 일 같지가 않다.
진무립과 만나고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싸우며 스며드는 가랑비처럼 이들에게 동화된 까닭이다.
‘정말로 이들의 꿈이 이뤄졌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게 뛰어다니던 산채의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상천의 꿈은 어느새 나의 꿈이 되어버렸구나.’
단려화는 처음으로 진무립 때문이 아닌, 진심으로 상천이 꿈을 이루는 데 일조하고 싶어졌다.
“은소저.”
“네.”
“지금 은소저를 찾아온 것은 상처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나 때문에 다친 걸 사과하고 싶어서 왔어요.”
“제가 임무 중에 다친 것은 스스로가 부족했기 때문이지 아가씨 때문이 아닙니다.”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단려화는 배시시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나 은소저 덕분에 제가 무사히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이제는 내가 은소저를 돕겠어요.”
은수련은 단려화가 무엇을 돕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따스한 마음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맙습니다.”
“다 나을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푹 쉬어요. 또 올게요.”
밀실을 나선 단려화는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당신들이 아이들의 미소를 지키고자 노력한다면, 나는 당신들이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눈앞에 떠오른다.
모든 것을 이룬 뒤, 맑은 하늘처럼 투명하게 웃는 상천의 무인들이.
* * *
전투가 벌어지고 이틀이 지난 날의 저녁.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북적이는 제남의 거리는 그들이 무림과는 다른 세상에 산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시골 촌부처럼 낡은 옷매무새에 죽립을 눌러쓴 두 사내가 복잡한 시전에 접어들었다.
“이쪽에 제법 맛이 좋은 노점이 있습니다. 천…… 공자.”
습관처럼 말하다 움찔한 석두가 즉시 말을 고쳤다.
천주와 단둘이 움직이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잔뜩 긴장한 모양이다.
진무립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기대되는군. 안내해라.”
“예.”
인파에 스며든 두 사람은 잠시 후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노점에 들어섰다.
“여기 소면 두 그릇 주시오.”
구석의 빈자릴 찾아 앉으니 나이 든 노파가 손을 휘젓는다.
“좀 기다리시우. 객이 많아서.”
그녀의 말대로 노점은 저녁을 해결하러 온 손님으로 가득했다.
등 뒤의 후루룩하는 소리에 이어 나직한 대화가 들려왔다.
“그래서 태산표국은 어찌한다고 하는가?”
“아직은 모르겠네. 표사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네.”
“더 큰 문제?”
주변을 살핀 사내는 자라목을 하고 나직이 말했다.
“무면산왕에게 태산표국이 불타던 날 말이야. 상천의 자객들이 태산표국과 가깝게 지내는 상단과 방파에 자객을 보냈다지 뭔가?”
‘그걸 상천의 소행으로 둔갑시키다니. 역시 국주로군.’
석두는 내심 혀를 차며 진무립을 살폈다.
구멍 난 죽립 사이로 주변을 살피는 진무립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세상에서 천주님을 당황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한 건가?’
진무립이 석두를 쳐다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보나?”
“아, 아닙니다.”
그때 등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객이라고? 나는 반대로 들었는데.”
“반대라니?”
“태산표국이 전선문과 양소방, 이가장을 공격했다고 하더군. 상천의 무인들이 그들을 지킨 모양이야.”
“에이. 그게 말이 되는가? 그 세 방파는 지금까지 태산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야 그렇지만 전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일세.”
둘의 대화에 별안간 의문이 든 석두가 진무립을 재차 쳐다봤다.
“혹시…….”
진무립이 씩 웃었다.
“당장 끝낼 수 없는 싸움일지라도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태산표국이 낸 소문과 반대되는 소문은 진무립이 낸 것이었다.
“머지않아 모든 진상이 밝혀질 거다.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예.”
그때 노파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면을 내왔다.
국물과 면을 입에 넣은 진무립이 흡족한 듯 말했다.
“네 말대로 제법 솜씨가 괜찮은 노점이로군. 우리 아이들을 데려오면 참 좋아하겠어.”
진무립이 말하는 아이들이 산채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석두는 모르지 않았다.
‘세상은 이분을 모르고 있다.’
삼두육비의 괴물이 부하와 가족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건 오직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무인들이 진무립을 목숨 바쳐 따르는 이유를 석두는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곧 공자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당연하지. 어서 먹자. 밤이 되기 전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 한다.”
“예.”
소면을 맛있게 먹은 두 사람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한참을 걸어간 끝에 그늘진 골목에 접어든 석두는 작은 가옥 앞에 도착했다.
‘여길 다시 올 줄이야.’
주변을 살핀 석두는 나직이 말했다.
“여깁니다.”
“일단 나는 그대의 호위다.”
힘으로 굴복시켜 협조를 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석두도 알고 있었다.
“제게 맡겨주십시오.”
차례로 담을 넘은 두 사람의 눈에 방 두 칸짜리 작은 집이 들어온다.
조용히 다가가는 그들의 귀에 좌측 방안에서 나직한 대화가 들려왔다.
“무면산왕이 전부 죽인다고 했다면서요? 우리 이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가요.”
“지금 여길 떠나서 어디로 간단 말이야.”
“당신의 무공이면 어디 발붙일 곳 하나 없겠어요?”
“사람 참 답답하긴. 오대표국의 눈 밖에 나면 표사질도 끝이라는 걸 모르는가? 나더러 다시 낭인이라도 되라는 소리야?”
“차라리 산속에 들어가서 약초라도 캐는 게 낫지요. 죽으면 표사질이고 뭐고 전부 끝이라는 걸 왜 몰라요?”
상황을 짐작한 석두는 문 앞에서 가만히 헛기침을 했다.
“흠.”
대화 소리가 뚝 끊기더니 슬며시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둘을 발견하기 무섭게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진무립이 번개같이 석두의 앞을 가로막았다.
쉬익! 타타탁!
잡으려는 손과 막으려는 손이 매섭게 교차하며 경풍을 일으킨다.
사내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방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였다.
순식간에 일 수를 교환한 진무립이 석두의 뒤로 물러나며 싸울 의지가 없음을 표명했다.
“누구요?”
여기서부턴 진무립이 아닌 석두가 나설 차례다.
“성격 급한 건 여전하군.”
석두는 천천히 죽립을 들어 올렸다.
“자, 자네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본 것처럼 부릅뜬 두 눈에 석두의 반가운 미소가 담겼다.
“용삼이. 잘 지냈는가?”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이 술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용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문이 닫혀있길래 습격인가 싶었지. 그러게 왜 담을 넘어 들어오는가?”
전쟁이 시작된 만큼 잔뜩 날카로워져 있던 것도 크게 한몫했다.
석두가 미안한 듯 말했다.
“누가 볼까 싶었네. 미안하군.”
“뒤에 선 저 사내는?”
“잠시 내 호위로 함께하는 사람일세.”
“음.”
진무립에게서 시선을 거둔 용삼은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살아있어서 참으로 다행일세. 우린 정말 자네가 죽은 줄 알았지 뭔가? 자네 가족은 괜찮을까 싶어 찾아가 봤는데 집도 텅 비어있더군.”
용삼은 석두와 십오 년 전의 낭인 시절부터 함께 해온 오랜 친우였다.
석두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말했다.
“말 못 할 사정이 좀 있었네.”
“혹시 두표사께서도 무사하신가?”
“물론일세. 우상과 장초, 정인과 원형이까지 모두 무사하네.”
“정말 다행이군. 다행이야.”
안도하던 용삼의 얼굴이 이내 어두워졌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돌아왔는가? 표국에선 자네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 이대로 죽은 척 돌아가게. 지금 돌아오기엔 상황이 좋지 않아.”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나온다.
“상천과의 전쟁 때문인가?”
“역시 알고 있었군.”
석두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말게. 표국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네. 난 두표사님과 함께 새로운 일을 시작했거든.”
용삼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새로운 일?”
나직하면서도 신중한 목소리가 용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지금 두표사님과 함께 상천에 몸담고 있네. 자네의 도움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