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243
◈ 243화. 노을진 강변에서
순간 그녀의 얼굴이 드리운 노을만큼이나 붉게 물들었다.
방금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다.
“지, 지, 지금…….”
당황한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빨개진 얼굴로 말까지 더듬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
그녀의 얼굴에 진무립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이내 입술에서 촉촉한 감촉이 피어났다.
‘아.’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을 감싼 손의 떨림과.
터질 듯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서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불어온 실바람이 두 사람을 포근히 감싸며 묘한 긴장과 흥분을 선사한다.
잠시 후, 멀어진 진무립이 애정 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젠가 내게 모든 것을 이룬 뒤 무엇이 남느냐고 물었지.”
“…….”
긴장 섞인 정적 속에 진무립이 웃었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남은 생을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함께 돌아가자.”
우수에 찬 그녀의 눈동자에 진무립의 얼굴이 애틋하게 담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상상을 한 적은 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조금 이른 감이 있으나 떨리는 마음을 숨길 생각은 없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서로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 자 남짓한 간격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쉬운 길은 아닐 거야.”
설지량이 남긴 정보에 의하면 복령천의 전력은 강대하다.
거기에 천산의 마교까지 합세한다면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단려화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알아요.”
진무립을 믿는 까닭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진무립이라면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끝까지 당신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어요.”
진무립과 함께하며 보아온 상천의 가족들은 충분히 행복을 누려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진무립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그녀에게도 진무립의 꿈은 남의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진무립을 지그시 바라보던 단려화는 배시시 웃으며 얼굴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괜찮겠어요?”
“무엇이?”
“우리 아버지 말이에요.”
물론 부친은 전적으로 자신의 뜻을 존중해줄 사람이었으나 막상 사내를 데려가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진무립이 짓궂게 웃었다.
“안 된다고 하면 둘이 몰래 탈출하지 뭐.”
단려화가 은근한 말투로 속삭였다.
“그래요. 나만 아는 탈출로가 있으니까 내가 안내할게요.”
“하하하!”
마주 보며 한참을 웃던 두 사람은 노을이 옅어질 무렵에서야 발을 돌렸다.
“여기서 화령도까지 얼마나 남았지?”
“무창에 지부가 있어요. 그곳에서 배를 타면 늦어도 사흘 안에 도착할 거예요.”
“곧 도착하겠군.”
“상천의 사람들처럼 화령도에도 좋은 사람이 많아요. 분명 당신도 좋아할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군.”
단려화가 천천히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용소협과 동소협 말이에요. 땔감 구하러 이 산으로 온 게 아니었어요?”
들판을 낀 산은 두 개.
근방에선 그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른 가지를 한 아름 품에 안은 동초개가 낑낑거리며 물었다.
“형님.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요?”
용추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그거로 되겠냐?”
동초개가 가지를 모으는 사이, 용추는 몸뚱어리만 한 나무 다섯 그루를 뽑아둔 것이다.
가만히 쳐다보던 동초개가 의문 섞인 얼굴로 묻는다.
“형님. 집 지으셔요?”
밤이 내린 들판의 숙영지가 모닥불로 밝게 빛난다.
조촐한 식사가 끝난 뒤, 여인들이 잠을 청하고자 마차에 들어간 가운데 모닥불가에 사내들이 둘러앉았다.
용추와 동초개가 한쪽에 누워 잠을 청하는 가운데 당천이 나직이 읊조렸다.
“강남인가.”
탁이신이 그를 슬쩍 쳐다본다.
‘당가의 아들.’
육 년 전, 강남에서 풍천지회가 열릴 때 당천을 본 적이 있다.
당가는 비무에 약하다는 속설을 뒤집고 무려 여섯 명의 무인을 십여 초 만에 제압한 천재.
단자룡에게 패한 뒤 많이 변했다고 들었으나 소문과는 사뭇 달랐다.
‘풍기는 기도가 범상치 않군. 절치부심한 모양이야.’
당천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일개 후기지수가 흘릴 만한 것이 아니다.
탁이신은 미소를 감췄다.
‘세월 참 빠르구나.’
천하대전이 일어난 것은 딱 자신이 당천의 연배였을 때다.
그때의 혈기왕성한 젊은 무인은 자신이 상대해 온 노회한 고수들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탁이신이 당천에게 물었다.
“그대가 함께 가는 것은 소영주 때문인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천은 고개를 저어 답했다.
탁이신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복수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왔다고 들었다.”
“한때 그런 적은 있었소. 하지만 이제 내게 신기팔신무와 같은 허명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이 되었소.”
패배하고 돌아온 당천을 기다린 것은 세간의 차가운 눈길이었다.
견디기 어려운 시선 속에 주변을 돌아볼 여유마저 잃은 당천은 앞만 보고 달려왔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목적을 위해 왈패에게 얻어맞던 사내는 지금 세상에서 북광남신이라고 부르는 절대자가 되었소.”
문득 탁이신이 진무립을 쳐다보았다.
진무립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북쪽의 절대자.”
“큭.”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당천은 탁이신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날의 패배로 나는 인정할 줄 모르고 고집과 아집에 사로잡혀 나밖에 모르는 소인배가 되었소. 그런 내게 무립은 세간의 시선 따위에 굴하지 말라는 것을 몸소 가르쳐주었지.”
“복수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인가?”
모닥불에 비친 당천의 눈동자에 여유가 엿보인다.
“새로운 목표가 생겼소.”
“새로운 목표?”
당천은 도전적인 눈빛으로 진무립을 쳐다봤다.
“내 목표는 너다.”
진무립은 분명 강하다.
보통 강한 것이 아니라 신룡과 천하의 정상을 놓고 다툴 만큼의 고수다.
사천에서, 그리고 중원에서 진무립의 전투를 직접 지켜본 당천은 확신했다.
진무립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면 단자룡을 능가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진무립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당천이 미간을 좁혔다.
“나는 진지하다.”
“안다. 너는 언제나 진지하지.”
“불가능할 거라고 보나?”
“나와 싸우고 싶다면 목숨을 걸고 수련해야 할 거다.”
진무립을 지그시 바라보던 당천은 피식 웃으며 고개 돌렸다.
“물론 그래야겠지.”
그와의 차이가 크다는 것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다.
당장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도전할 생각이었다.
탁이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룡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이 아닌가?”
소영주 단자룡은 소천무군이라는 무명이 붙을 만큼 천하에 보기 드문 무재를 타고났다.
그런 단자룡을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온 것이다.
당천이 말했다.
“그를 쉽게 보는 건 아니오. 다만, 내 앞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표본이 있으니 목표를 바꿨을 뿐이지.”
당천을 바라보던 탁이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이런 자가 있다면 그럴 만하지.’
자신이 단소룡을 목표로 삼고 수련해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진무립이 사뭇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마음가짐이 훌륭하군. 원한다면 지금 한 수 가르침이라도 내려줄까?”
“잘 거다.”
“…….”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이 모닥불을 흔들고 지나가는 사이 강변에 새벽이슬이 내려앉는다.
타오르던 모닥불이 빛을 잃어갈 무렵.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며 꺼져가는 모닥불을 대신해 세상을 비춰간다.
어스름한 빛이 아침을 알려오는 시각, 잠에서 깬 서진환이 번개같이 마차 위로 뛰쳐 올라갔다.
번을 서던 금성우가 마차 밑으로 달려왔다.
“대주.”
“그래. 보인다.”
새벽안개 너머로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범선이 나타났다.
수면에서 족히 이 장 가까이 치솟은 뱃전은 마치 커다란 성을 물 위에 띄운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그 곁으로 다섯 척의 배가 호위하듯 따르고 있었다.
서진환의 가늘어진 눈동자가 큰 배의 선수에 닿았다.
“장강수로채.”
장강의 지배자.
장강수로채의 깃발을 내건 선단이 나타난 것이다.
언제 일어났는지 탁이신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경계할 것 없다.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니까.”
서진환이 미간을 좁혔다.
“대체 언제 연락을 취했단 말이오?”
탁이신은 그간 자신들의 시야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연락을 취한 적이 없다. 오면서 보질 않았나?”
“무엇을……. 아아.”
그제야 자신들을 주시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떠오른다.
탁이신이 말했다.
“이곳 강남 무림은 촘촘한 그물망과도 같지. 여기서 우리의 눈을 속이고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없다.”
그때 선수로 지팡이를 쥔 노인이 나타났다.
“왕유냐?”
대뜸 죽산채주 왕유를 찾는 노인은 바로 오십여 년이나 장강을 지배해온 수로채주 만사평이었다.
상천의 죽산채는 유일하게 강남에 위치한 거산채.
만사평이 그를 찾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유냐고 물었다.”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한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온다.
탁이신이 강변으로 달려가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만사평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놈이 왜 거기서 나와?”
탁이신이 상천의 무리와 함께 있으니 의아한 것이다.
그때 마차에서 나온 단려화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백부님!”
“으잉?”
단려화를 알아본 만사평이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려화로구나!”
의제 단소룡의 딸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부하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배를 강변에 붙여라!”
* * *
이른 아침의 따스한 햇살은 비단 강남 무림에만 비추는 것이 아니었다.
진무립 일행이 만사평의 배에 오를 무렵.
강남의 반대편에선 지저귀는 산새 소리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슬며시 눈을 뜨는 인물이 있었다.
‘여긴 어디지?’
무려 보름 만에 눈을 뜬 운화결이 천천히 사방을 살폈다.
가구라곤 침상 하나 덩그러니 놓인 작은 방.
전신에 꽂힌 침에선 검붉은 피가 새어 나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허공에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오싹하게 들려온다.
“누구냐?”
완벽히 기척을 숨긴 상대의 목소리에도 운화결은 당황하지 않았다.
“저는 흑무대 소속 장경입니다.”
“흑무대라고?”
흑무대는 복령천주 황천패를 지척에서 호위하는 자들.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은 근처에 황천패가 있다는 것과도 같다.
‘제대로 왔구나.’
운화결이 천천히 몸을 일으킬 때였다.
“기혈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활령단(闊靈團)의 약효가 완전히 몸에 녹아들기 전까지는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활령단은 상한 기혈을 보하고 상처를 수습하는 데 탁월한 효능을 보이는 영단.
운화결은 천주가 제법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주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국주께서 깨어나시면 방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들려오던 목소리가 자취를 감췄다.
‘황천패.’
단전의 기운을 조금씩 움직인 운화결은 육신의 이상을 차분히 점검했다.
다행스럽게도 전투에서 입은 외상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아물었고 내상 역시 눈에 띄게 회복된 상태였다.
‘팔천영신공을 익힌 내게 금제는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움직일 기반은 마련된 셈이다.
회수한 내력을 단전에 갈무리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햇살을 등진 사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