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27
◈ 27화. 혈옥비(血獄飛)
달빛이 감도는 숲속의 공터.
멈춰선 혈천수라는 눈을 의심했다.
“네놈이 어떻게······.”
월광에 빛나는 검을 들고.
마치 기다린 것처럼 눈앞에 우뚝 선 사내는 바로 유대하였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초유림은 피를 닦으며 히죽 웃었다.
“옆구리가 좀 쓰리긴 한데 버틸 만해.”
혈천수라가 차갑게 물었다.
“분명 음야살귀가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네놈이 어떻게 여기 있는 것이냐?”
“음야살귀는 죽었다.”
혈천수라의 눈이 부릅떠졌다.
“뭐, 뭐라고?”
유대하는 애써 여유를 보이며 웃었다.
“별거 아니더군. 고맙게 생각한다. 네놈이 멍청하게 날 죽이지 않고 데려간 덕분에 정가장 사람들을 무사히 구해낼 수 있었거든.”
혈천수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내게 잡혀간 것부터가 모두 계획된 일이었단 말인가?’
조금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겠지만 중독된 혈천수라에겐 그런 여유가 없었다.
‘이놈을 죽이는 건 다음으로 미룬다. 우선 독을 몰아내야 한다.’
지난 싸움에서 한 번 승리한 상대였지만 자신을 상대로 무려 일각이나 버틴 놈이다.
혈천수라는 초유림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아이를 죽이고 싶거든 쫓아와 봐라.”
검을 쥔 유대하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참으로 치졸하군. 무림삼흉이라는 놈이 고작 어린아이를 인질로 삼는다는 말이냐?”
혈천수라는 히죽 웃었다.
“그렇기에 무림삼흉이 아니겠느냐?”
그때 초유림이 소리쳤다.
“식충이 아저씨! 혼자서 이길 수 있겠어?”
유대하는 초유림을 안심시키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초유림은 망설임 없이 외쳤다.
“나는 죽어도 좋으니 이놈을 여기서 죽여!”
유대하도, 혈천수라도 초유림의 예상치 못한 말에 입이 쩍 벌어졌다.
“아, 아가씨?”
당돌한 건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혈천수라가 눈을 부라리며 쏘아봤으나 초유림은 멈추지 않았다.
“이놈 말대로 보내주면 내가 살 수 있을 거 같아? 등신도 아니고 그 말을 믿냐? 시집도 못 가보고 뒈질 바엔 혼자 뒈질 순 없지. 이놈의 목을 치고 내 제사상에 올리란 말이야!”
“이년이 감히!”
진노한 혈천수라는 검파로 초유림의 뒷목을 후려쳤다.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초유림이 기절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미풍이 부는가 싶더니 초유림을 든 혈천수라의 왼팔이 싹둑 잘려나갔다.
“크아악!”
비명을 토해내는 혈천수라의 가슴으로 진무립의 발꿈치가 작렬했다.
“컥!”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혈천수라의 신형이 삼 장이나 튕겨 나갔다.
유대하가 전방에서 시선을 끄는 사이 음혼귀영공을 전개한 진무립이 은밀히 뒤로 접근했던 것이다.
가볍게 초유림을 안아 든 진무립은 상태를 확인하고는 유대하에게 넘겼다.
“아가씨!”
“정신을 잃었을 뿐이다. 물러나 있어라.”
싸늘한 목소리, 그에 못지않게 차가운 진무립의 눈빛은 지금껏 유대하가 봐온 모습 중 가장 섬뜩했다.
노인, 아이 가릴 것 없이 눈앞에서 학살을 당하던 과거의 악몽.
아이를 인질로 삼은 모습에서 옛 기억이 되살아난 진무립은 극도로 분노했다.
“크으으! 감히, 감히!”
벌떡 일어난 혈천수라는 왼팔을 지혈하고는 검파를 움켜쥐었다.
잘려나간 팔, 중독된 몸.
아무리 목숨이 중요하다지만 이런 치욕을 겪고 도망칠 바엔 여기서 죽는 게 낫다.
혈천수라는 이가 부러지도록 바드득 갈았다.
“이젠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네놈을 찢어 죽여야겠다!”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린 혈천수라의 주변으로 검붉은 운무가 피어올랐다.
진무립이 말했다.
“나도 그럴 생각이다.”
이어서 두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죽여주마.”
말이 끝나는 순간, 진무립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한기가 치솟더니 사방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쩌저적.
밟고 있던 지면이 으깨지며 진무립의 신형이 엄청난 기세로 튕겨 나갔다.
“핫!”
검붉은 운무에 휩싸인 혈천수라도 망설임 없이 지면을 박찼다.
삼 장의 공간이 순식간에 압축되며 살기 가득한 두 사람의 검이 각자의 목을 노리며 쏘아졌다.
치치치칭!
지붕 위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듯한 쇳소리가 터져 나오며 시뻘건 검광과 새하얀 검광이 연신 충돌했다.
‘저것이 바로 천하인들의 싸움인가.’
지켜보는 유대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엄청난 싸움에 빠져들었다.
혈광을 줄기줄기 흘리는 혈천수라는 진무립의 모든 공격을 눈에 담았다.
‘어린놈이 제법이로구나.’
감탄은 잠시뿐, 이내 진무립의 검초는 혈천수라의 눈에 익어갔다.
“고작 그 정도로 본좌를 능멸했는가!”
“해볼 만한가?”
우측으로 길게 미끄러진 혈천수라는 진무립의 측면으로 접근했다.
“죽여주마.”
“이건 작업이다.”
그 순간 방향을 바꾼 검광이 가일층 가속하더니 순식간에 혈천수라의 어깨를 꿰뚫고 사라졌다.
‘아니?’
혈천수라의 눈이 부릅떠졌고 진무립의 미소에는 광기가 깃들었다.
“네놈을 절망에 빠뜨리기 위한 작업.”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비수보다 예리한 공격이 폭우처럼 쏟아지며 혈천수라의 전신을 꿰뚫기 시작했다.
“크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하늘로 솟구친다.
혈천수라의 전신에 바람구멍을 낸 진무립은 직선적인 검초를 곡선으로 변경하며 그의 전신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검상이 연이어 새겨지는 가운데 어느 순간 혈천수라의 신형이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쾅!
혈천수라가 부딪친 바위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커억!”
쓰러진 혈천수라가 울컥 피를 토하자 진무립은 운광검을 하늘로 던져 올렸다.
유대하의 눈이 솟구치는 검을 쫓았다.
‘뭘 하시는 거지?’
끝낼 상황이 왔음에도 검을 내던지는 행동이 이상했던 거다.
진무립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고민하던 유대하의 눈이 갑자기 찢어질 듯 커졌다.
머리 위로 황홀할 만큼 아름다운 핏빛 운무가 펼쳐진 까닭이다.
팔천영신공(八天映神功) 혈옥비(血獄飛)의 초식.
천하대전의 마지막, 신룡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극강의 초식이 이십육 년 만에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혈천수라의 고개가 힘겹게 하늘로 향했을 때.
‘이건······.’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진무립이 예고한 절망이었다.
진무립의 입가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천벌이다. 개새끼야.”
광기 어린 눈빛이 섬뜩하게 빛나는 순간.
쏴아아-!
빗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불길한 혈우(血雨)가 순식간에 놈의 전신을 내리찍었다.
콰콰콰콰쾅!
땅거죽이 솟구치고 지축은 뒤흔들린다.
초목이 흔들리고 잎사귀는 낙엽처럼 흩날린다.
안개처럼 피어오른 흙먼지가 바람에 휩쓸려 사라졌을 땐, 세상에서 혈천수라의 흔적이 사라진 뒤였다.
적운(赤雲)을 목격한 단려화는 눈을 의심했다.
‘혈옥비?’
천하대전 마지막 싸움에 참여한 숙부들에게 수도 없이 들어온 무공.
거목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단려화는 착지하기 무섭게 지면을 박찼다.
‘확인해야 해.’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고 옷자락에 걸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천하에 대혈겁(大血劫)을 일으켰던 그들은 이백 년이나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있었고 천하를 혼란에 빠뜨릴 귀계와 압도적인 무력도 갖췄다.
만일 그들이 다시 나타났다면, 그들이 다시 천하를 집어삼키고자 한다면 흉계를 꾸미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 한다.
바람에 섞인 혈향이 점점 짙게 느껴진 그녀는 전장에 접근했음을 직감했다.
신법에 박차를 가한 그녀는 이윽고 혈전이 벌어진 숲속의 공터에 도착했다.
“소저?”
유대하가 고개를 돌리며 쳐다봤으나 단려화의 시선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사람은 셋인데 두 발로 서 있는 이는 오로지 유대하밖에 없다.
기절한 초유림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고 무리하게 내력을 운용한 진무립은 싸움이 끝나자마자 혼절한 것이다.
단려화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 갔죠?”
“혈천수라는 죽었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느닷없는 고성에 유대하는 움찔하며 물러났다.
‘왜 이래? 그날인가?’
평소와 다른 그녀의 태도에 유대하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한달음에 달려간 단려화가 유대하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혈천수라를 쓰러뜨린 사람 말이에요. 그는 어디 갔죠?”
“혈천수라는······.”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할 순 없으나 용추처럼 눈치 없는 건 아니다.
‘이 여자. 설마 소공자를 노리고 접근한 건가?’
가급적 힘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진무립.
진무립이 펼친 무공을 보고 다급하게 달려온 단려화.
몇 개의 조각이 머릿속에서 맞춰지자 유대하는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사라졌습니다.”
진무립의 진짜 정체가 무엇이든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사라졌다고요?”
“소공자께서 놈에게 당하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꺼먼 괴인이 나타나 혈천수라를 죽였습니다. 예를 갖추려는데 꺼지듯 사라져 버려 곤란하던 참입니다. 소저께서는 그가 누군지 아십니까?”
“그는······.”
그녀는 망설였다.
만일 이곳에 그 무공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괜한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애꿎은 사람을 악귀로 몰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자를 수두룩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고개 저은 단려화는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상태는 어떤가요?”
“아가씨는 잠시 기절한 상태지만······.”
유대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소공자는 서둘러 의원에게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데려가세요. 난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고 가겠어요.”
“알겠습니다.”
진무립과 초유림을 양쪽 어깨에 올린 유대하는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그가 사라지자 단려화는 전투의 흔적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발자국이 찍힌 지점, 땅이 패인 깊이, 검흔이 남은 대지를 비롯해 주변을 샅샅이 살피던 그녀는 종국에 피로 가득한 웅덩이에 도달했다.
혈천수라가 중독된 상태로 죽었기 때문에 혈향에는 옅은 독기까지 배어 있었다.
‘뭐지?’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린 그녀의 눈에 이질적인 뭔가가 들어왔다.
조금이라도 중독을 예방하고자 손에 흙을 잔뜩 묻힌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 올렸다.
피가 잔뜩 묻은 그 물건은 땅에 깊숙이 박힌 상태.
몇 번이나 흔들길 반복한 그녀는 가까스로 그것을 꺼낼 수 있었다.
‘이건······.’
그녀의 표정이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그것은 진무립의 은광검이었다.
***
새벽하늘이 밝아옴과 함께 모든 이들이 정가장으로 복귀했다.
부친과 동생의 생환, 그리고 하나뿐인 딸까지 무사히 돌아왔으나 정인령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정가장을 구한 은인, 진무립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상에 몸을 누이는 순간부터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졌다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기사에 의원은 손조차 대지 못했다.
용추와 유대하가 번갈아 곁을 지키는 가운데 광룡대와 정가장의 모든 이들이 진무립의 무사만을 기원했다.
특히나 초유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진무립의 방문 앞을 찾아왔다.
“우리 형님 아직 안 일어났어?”
유대하는 대답조차 미안한 듯 멋쩍게 웃었다.
“예. 아가씨.”
“걱정할 거 없어. 우리 형님은 잘생겨서 금방 일어날 거야.”
초유림은 하나뿐인 앞니를 드러내며 씩 웃고 돌아갔다.
‘잘생긴 게 무슨 상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유대하는 문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았다.
그런 유대하를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담장 밑 그늘에서 유대하를 응시하던 단려화는 연소정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음, 아니야. 괜찮을까 싶어서.”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연소정에게 알리지 않았다.
우선 진무립에게 사실 확인부터 하고 난 뒤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진무립이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