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28
◈ 28화. 무면산왕(無面山王)
시뻘건 혓바닥을 날름거리던 화마가 심산유곡의 깊은 골짜기를 집어삼켰다.
찢어질 듯한 비명, 섬뜩하게 울려 퍼지는 거친 쇳소리.
아비규환의 전장에 도착한 진무립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젠장!’
소식을 받자마자 출발했는데 한발 늦었다.
“제발! 제발 그 아이는 안 돼!”
어디선가 들려오는 참담한 비명, 진무립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아악!”
한 손으로는 아이의 머리채를, 다른 손으로는 복부에 박힌 단검을 움켜쥔 사내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망할 계집이 감히 내 배에 칼을 꽂아? 역시 악귀의 핏줄은 어디 가는 게 아니로구나!”
사내의 손에 잡힌 아이가 울부짖으며 외쳤다.
“어머니!”
아이의 눈에 담긴 것은 바닥에 쓰러져 힘겹게 손을 내뻗는 여인이었다.
“차라리 나를, 나를 데려가라!”
그때 여인의 머리로 커다란 발이 떨어졌다.
“악!”
그녀의 머리를 짓밟은 흑의인이 복면을 내리며 히죽 웃었다.
“크크크. 착각이 심하군. 악귀의 핏줄 따위를 데려가서 어디에 써먹는단 말이냐?”
“크크크. 다 큰 년은 쓸모가 없다. 아이를 인질로 삼아야 놈들의 손발을 묶을 수 있거든.”
여인을 짓밟은 사내와 아이의 머리채를 잡은 사내는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년을 찢어 죽여 먼저 간 사형제의 원한을 갚겠다.”
흑의인의 검이 여인의 등을 찌르기 직전, 후방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가슴을 뚫고 튀어나온 검극이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사내의 목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아이를 잡고 있던 사내의 눈이 거칠게 흔들렸다.
“누, 누구냐!”
“악귀의 핏줄?”
솟구치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청년, 진무립이 이를 갈며 한 발 내디뎠다.
“그럼 내가 바로 악귀다.”
지면을 박찬 진무립은 상대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목을 날려버렸다.
허공에 떠오른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사방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하나씩 아이를 옆구리에 낀 무인들이 나타났다.
“제법 강한 놈이 남아있었구나.”
두 구의 시신을 확인한 흑의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진무립을 노려봤다.
“검을 버려라. 내 말에 따르면 아이들은 살려주지.”
좌에서 우로 움직이는 진무립의 눈에 핏발이 섰다.
인질로 잡힌 아이는 모두 열셋.
겁에 질린 눈동자에 깃든 것은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개새끼들.’
검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진무립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자 흑의인들은 일제히 아이들의 목에 검을 겨눴다.
“검을 버려라. 전부 죽이고 싶은 게냐?”
차가운 검신이 살갗을 파고들자 아이들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사, 살려주세요.”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시뻘건 주변이 점점 맑아지며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갔다.
진무립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또 그 꿈인가.’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기억.
혈천수라에게 잡힌 초유림을 보는 순간 되살아난 기억은 한동안 찾아오지 않던 악몽까지 불러냈다.
진무립은 애써 머리를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큭.”
아주 약간 움직였을 뿐인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너무 무리했다.’
평소 같았으면 냉정하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싸웠을 거다.
그러나 인질로 잡힌 초유림을 본 순간 옛 기억이 떠올라 좀처럼 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움직이길 포기한 진무립은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단전을 시작으로 전신의 혈맥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한 진무립은 예전과 빠르게 달라지는 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기운의 경계가 점점 무너지는 느낌이다.’
극양의 기운과 극음의 기운.
두 기운을 한 몸에 품고 살아남은 사람은 무림 역사상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고 있으니 진무립은 무공을 사용할 때마다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멀었군.’
남들의 시선과 달리 자신은 완벽하지 않다.
‘나는······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
이번과 같은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 진무립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유대하가 들어왔다.
“소공자?”
이틀간 노심초사하던 유대하는 진무립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깨어나셨군요.”
유대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무립이 말했다.
“내게 궁금한 게 많을 거 같은데.”
눈앞에서 그런 싸움을 봤으니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직접 말해주실 때까지 기다릴 생각입니다.”
유대하는 웃었으나 진무립은 웃지 않았다.
“너는 내 사람인가?”
어차피 밝히게 될 거라면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 여기서 선을 긋는 게 낫다.
진무립은 그에게 선택을 종용하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광룡대의 부대주이니 당연히······.”
말을 하던 유대하는 진무립의 눈을 마주 본 순간 그가 묻는 게 이게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이것이 그의 숨겨진 모습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어색한 정적 속, 진무립은 나직이 말했다.
“내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내일 새벽 나를 찾아와라. 모든 것을 알려주마.”
내일 새벽이라면 생각할 시간은 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유대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소식을 접한 이들이 서둘러 진무립의 처소를 찾았다.
연신 감사의 예를 표한 정가장주 부자는 진무립의 쾌유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어서 도착한 정인령은 의식이 돌아온 진무립을 보며 눈물까지 훔칠 정도로 고마워했다.
그녀가 다시 의원을 알아보겠다며 나가자 다음으로 들어온 이는 초유림이었다.
“형님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초유림이 진무립을 와락 끌어안았다.
“컥!”
전신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진무립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놔라. 놔. 날 죽이려고 작정했냐?”
초유림을 간신히 떼어낸 진무립은 연신 기침을 해댔다.
“헤헤헤. 아픈 걸 보니 감각은 멀쩡한가 보네.”
그걸 확인하려고······.
정말 열한 살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초유림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어. 배고프지?”
“아파서 모르겠다.”
“탕약이라도 준비하라고 할게.”
나가다 말고 문 앞에 멈춰선 초유림이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양기에 좋은 거로.”
“······.”
진무립은 할 말을 잃었다.
누굴 닮았는지 정말 엉뚱한 아이다.
초유림이 나가자 다음으로 조장들이 들어왔다.
“대주. 괜찮으십니까?”
풍연의 이마엔 그새 주름살이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진무립과 유대하의 공백.
그들을 대신해 광룡대를 이끌었으나 정인령과 초유림을 지키지 못했다.
중독된 상태로 세 명에게 꽁꽁 묶인 상대.
견고한 포위망.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했으나 놈은 기어코 포위망을 돌파해 두 사람을 인질로 삼았다.
‘조금 더 신경 써야 했는데.’
맡은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한 것이다.
표정에서 생각을 읽은 진무립은 웃으며 말했다.
“넌 더 늙은 거 같다.”
“죄송합니다. 대주.”
진무립은 고개를 저었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비단 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도 실수를 했으니까.
다정한 격려의 말에 울컥한 풍연은 고개를 떨궜다.
후영이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말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행여 대주가 잘못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밤낮없이 부처님께 빈 덕에 빨리 깨어난 게 분명합니다. 오늘도 안 깨어나시면······.”
참다못한 진무립이 말을 잘랐다.
“야, 누가 얘 입 좀 막아라.”
풍연이 우악스러운 손으로 입을 턱 막자 한경이 피식 웃었다.
“저놈은 항상 말이 많습니다. 대주께서 이해해주십시오.”
습관처럼 민머리를 슥슥 만진 전유가 점잖게 말했다.
“다들 걱정이 많았습지요.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들 한마디씩 말을 하는데 구석에 멀뚱히 선 주초는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후영이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걱정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새끼야.”
조장들이 나가고 실내가 조용해질 무렵 용추가 들어왔다.
“괜찮습니까?”
상천에서 진무립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주군의 상태를 누구보다 걱정한 용추는 고작 이틀 사이에 핼쑥해진 얼굴이었다.
진무립은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안 죽으니 걱정 마라. 근데 내 검을 보지 못했느냐?”
혈옥비를 사용한 다음 일이 기억에 없었다.
용추는 침상 밑에서 은광검을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누가 가져왔지?”
“부대주의 말로는 면사 쓰고 다니던 여자가 가져왔답니다.”
“음.”
어쩌면 혈옥비의 흔적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달라질 건 없다.
그렇다면 차분히 다음 일을 계획할 뿐이다.
자리에 누운 진무립의 머리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회전했다.
***
정가장의 저녁이 모처럼 떠들썩했다.
대연무장에 장주 정필군의 생환을 환영하기 위한 연회가 준비된 것이다.
광룡대를 비롯해 계획에 참여했던 단려화와 연소정까지 모두 자리에 앉은 가운데 정필군과 진무립이 상석에 자리했다.
본래대로라면 장주의 좌우로 소장주와 정인령이 앉아야 했으나 그들은 한사코 진무립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실종된 이들이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에는 진무립의 공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진무립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정필군이 앞으로 나섰다.
모두의 얼굴을 감격에 벅찬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그대들과 다시 만나는 날이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소. 내가 없는 동안 애써준 모두에게, 그리고 안팎으로 고생한 령아와 마도림의 소공자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소이다.”
좌중이 미소로 박수를 보냈다.
비교적 짧은 말이었지만 먹먹한 목소리에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 까닭이다.
눈물을 훔친 정필군이 활짝 웃었다.
“오늘은 마음껏 먹고 마시시오. 술이 모자라면 내 직접 양조장의 문을 두드려서라도 가져올 것이고 고기가 모자라면 푸줏간을 인수해서라도 채워주리다.”
“예!”
우렁차게 대답한 무인들이 술잔을 들기 시작하자 비로소 연회가 시작됐다.
거창한 풍악과 무희의 춤사위는 없었으나 연회장의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밝았다.
화제의 중심은 단연 진무립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납치로 흉수를 끌어내다니.”
“상대가 정말 천하삼흉이었다지?”
“범인이라면 상상도 못 할 계획이었네. 대검문과의 전쟁에서도 가장 큰 공을 세우셨다던데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난 그분의 계획도 모르고 죄 없는 여인들에게 쌍욕을 퍼부었지 뭔가? 지금도 눈만 마주치면 죄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눈이 마주친 정가장 무인은 자라목을 하고 돌아앉았다.
연소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진무립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단려화가 고개를 돌렸다.
“응?”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은 것 같으니 우린 정말 오래 살 것 같습니다.”
“장주님 일가를 무사히 구출하고 우린 장생하게 됐으니 일거양득이구나.”
“농담이 나오시네요.”
단려화는 빙그레 웃었다.
“다들 들떠있는데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잖니.”
단려화의 잔을 채운 연소정이 물었다.
“역시나 이번 사건은 무면산왕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처럼 표국에서 그런 소문을 낸 게 분명합니다.”
“그럴지도. 하지만 헛걸음을 한 건 아니야.”
“예?”
연소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진무립을 응시하던 단려화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도 고생이 많았으니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푹 쉬렴.”
“예. 아가씨.”
조용히 앉은 두 사람에게 이따금 정가장 사람들이 찾아와 감사의 예를 표했다.
무르익어가던 그 날의 연회는 다음 날 새벽이 찾아온 뒤에야 마무리됐다.
***
새벽 공기가 제법 서늘하다.
며칠 사이에 공기가 달라진 것을 보면 이제 정말 가을인 모양이다.
이슬을 지려 밟는 유대하의 머리가 복잡했다.
‘소공자의 사람이라.’
만일 다른 사람이 묻는다면 그렇다고 쉽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질문에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을 아는 유대하는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상념 속에 걷다 보니 어느덧 진무립의 처소 앞이다.
‘이 문을 넘는다면 내 운명을 그에게 맡기게 되겠지. 그를 따라가면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그에겐 명확히 선이 있는 것 같았다.
적과 아군.
적으로 규정한 이들에겐 광폭하고 자비가 없으나 아군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관대하다.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 순간 망설임 없이 과감해진다.
확실한 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봤을 때, 그와 함께 하는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닐 것이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망설인 끝에, 유대하는 결론을 내렸다.
‘마도림의 식충이라고 불리던 나를 일깨워준 사람이다. 어차피 언젠가 죽을 거라면 제대로 굵게 살아보자.’
굳은 각오를 가슴에 새기고 사립문을 여는 순간,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소협?”
“어?”
유대하의 고개가 돌아간 곳엔 단려화가, 사람들에겐 유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인이 있었다.
“소저께서 이 시간에 여긴 어인 일로······. 설마?”
거칠게 흔들리는 유대하의 눈빛, 그 의미를 알아챈 단려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물을 것이 있어서 왔어요.”
그때 사립문이 열리며 용추가 나왔다.
“두 분을 안으로 모시라는 명이 있으셨소.”
평소답지 않게 매우 정중한 태도, 유대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역시 호위장께서는······.”
용추는 웃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사립문을 굳게 닫은 용추는 앞을 지켜서며 말했다.
“이제부터 그분의 허락 없이는 나갈 수 없으니 허튼수작은 부리지 마시오.”
긴장한 유대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 그렇게 무게를 잡아요. 무섭게······.’
곧이어 방문이 활짝 열리며 진무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쌀쌀한데 얼른 들어와.”
중요한 얘기를 앞두고 태연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두 사람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서로를 힐끔 쳐다본 단려화와 유대하는 진무립의 처소에 들어섰다.
탁자에는 둘을 기다린 것처럼 김이 나는 석 잔의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무립은 유대하에게 물었다.
“이렇게 온 걸 보면 결정을 내린 모양이야.”
대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소공자를 따르겠습니다.”
진무립은 흡족한 듯 웃었다.
“앉아.”
그들이 자리에 앉자 진무립은 단려화에게 차를 권했다.
“독은 안 탔으니까 안심해.”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려화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욱 의심스럽군요.”
진무립은 피식 웃었다.
“설마 내가 신룡의 딸을 독살할까?”
유대하의 눈이 부릅떠졌다.
“시, 신룡의 딸?”
단려화는 당황한 내심을 감추고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죠?”
진무립은 말없이 묘한 미소만 지었다.
‘역시.’
현장에서 은광검을 가져온 그녀가 밤중에 찾아왔다는 것은 혈옥비의 흔적을 알아본 것일 터, 그 초식은 팔황문주가 신룡을 상대할 때 선보인 것이니 화령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화령에서, 협공이라지만 혈천수라를 상대할 만한 젊은 여고수를 생각하니 신룡의 딸부터 떠오른 거다.
진무립의 속내를 모르는 단려화는 순순히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단려화. 화령의 무인이에요.”
천천히 걷어 올리는 면사 아래로 안면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이윽고 그녀의 섬섬옥수가 완전히 면사를 걷어냈을 땐, 인세에 보기 드문 미인이 눈앞에 있었다.
‘제법인데.’
사천제일미였던 모친 밑에서 자란 탓에 어떤 미인을 봐도 감흥이 없던 진무립이다.
그러나 단려화의 미모는 그런 진무립조차 놀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눈앞의 여인은 자신의 정체를 캐내고자 온 화령의 무인.
어설픈 거짓말로 대응했다가 화령의 무인들이 몰려오면 더욱 피곤해진다.
지난 일을 돌이킬 순 없지만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싫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상황을 주도해 이 판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진무립은 그녀가 묻기 전에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상천(相天)의 천주 진무립이다. 강호에선 나를 삼두육비의 괴물 무면산왕(無面山王)이라고 부르더군.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