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282
◈ 282화. 잘 따라와라
쏴아아아…….
스쳐 가는 바람에 들판의 풀잎이 차르르 몸을 눕힌다.
자욱하던 혈향은 바람에 흩어졌고 피에 젖은 운화결은 상체를 바로 세웠다.
백도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셔갈 무렵.
털썩.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약환이 넋이 나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으나 신법을 제외하면 특출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십이사령이 간격을 벌린 사이 이뤄진 불시의 기습은 그의 목숨을 위협할 만큼 날카로웠다.
운화결의 도움으로 살아난 약환이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황천패의 덥수룩한 수염이 파르르 떨린다.
“감히…… 감히!”
퍽!
그의 투박한 발에 바닥을 나뒹굴던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분을 못 이긴 황천패는 식어가는 시신을 짓밟기 시작했다.
“기껏 거둬주고 내상까지 치료해줬더니 감히 나를 배신해!”
퍽! 퍽!
잔혹하게 짓이겨진 살점에서 붉은 피가 연신 튀어 오른다.
운화결은 내심을 감추며 백도의 피를 완전히 털어냈다.
일사령 주유성이 황천패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군. 진정하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천패의 용천혈로 태산 같은 거력이 쏟아졌다.
쾅!
지면이 움푹 꺼지며 흙먼지가 하늘로 솟아오른다.
이를 바드득 간 황천패가 침을 탁 뱉으며 돌아선다.
“치워.”
살기 가득한 명령이 떨어진다.
운화결이 사령들에 앞서 먼저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더욱 고독한 삶을 살다간 성유기다.
적어도 마지막은 자신의 손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진 처참한 시신.
흩어진 조각을 하나하나 주운 운화결은 웃옷을 벗어 보자기처럼 시신을 감쌌다.
운화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것을 손에 들고 협곡의 정상으로 날 듯 올라갔다.
숲으로 들어간 운화결은 땅을 파고 그 안에 보자기를 넣었다.
‘잘 가시오.’
곡절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한 무인이 이곳 복령천의 협곡에 뼈를 묻었다.
* * *
한차례 혈풍이 지나간 협곡에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피에 젖은 몸을 씻고 처소로 돌아온 운화결을 약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왔구나.’
한 번도 직접 찾아오지 않았던 약환이 이렇게 자신을 찾았다는 건, 성유기의 계획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것과도 같다.
약환은 의심이 많은 인물.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정신을 바짝 차린 운화결은 속내를 완벽히 감추고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오?”
약환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낮의 일에 감사를 표하러 왔네. 자네 덕분에 배신자의 칼날에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어.”
“할 일을 했을 뿐이오.”
대수롭지 않게 답한 운화결이 새 옷을 꺼내 입는다.
약환은 벽에 솟아난 돌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와 내가 둘이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지?”
“…….”
운화결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선 상대가 대화를 이끌어가도록 두는 게 낫다는 걸 설지량에게 배운 까닭이다.
어색한 침묵 속, 약환이 넌지시 물었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있나?”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운화결의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건 자신도, 성유기도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하지만 이 정도에 당황할 만큼 운화결의 내력은 얕지 않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한 운화결이 미간을 좁힌 채 약환을 쳐다본다.
약환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개봉의 전투에서 실종된 자네가 며칠 만에 팔령산에 나타났지. 어떻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었네.”
“그래서?”
짧은 대답에서 불쾌한 기색이 풀풀 풍긴다.
약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무당을 불태우던 날, 분명 자네와 검존은 함께 있었지. 내지가 아닌 외지를 떠돌던 두 사람이 우연히 합류해 무당을 공격했다. 이건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전혀 공교롭지 못하군. 억측이 심한 게 아닌가?”
그의 말처럼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약환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언제나 억측에서부터 추론을 시작한다네.”
운화결을 지그시 바라보던 약환이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만일에 말일세.”
“…….”
“자네의 가문, 화가보를 지운 게 무림이 아니라 주군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건 무슨 소리지?”
“뛰어난 무재를 가진 자네를 얻기 위해서?”
옛 이야기에 노기가 피어오르려는 찰나, 운화결은 약환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순간 끓어오르던 분노가 차갑게 식어 내린다.
‘나를 자극하려는 심산이로군.’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라는 느낌이 온다.
“헛소리로 나를 자극하지 마시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린 진무립을 죽이는 것이니까.”
“음.”
기묘한 정적 속에.
운화결을 유심히 관찰하던 약환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슬슬 자네에게도 부릴 만한 수족이 필요하겠지. 화무신검이 백궤를 직접 들고 다니는 것도 모양새가 안 나니 말이야.”
“밖에 있는 그자가 내 수족이 될 자인가?”
약환이 들어오던 시점부터 동굴 밖에 누군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킬킬킬! 역시 알고 있었구먼. 들어오게!”
은은한 달빛을 등지고 입구로 들어오는 이는 바로 얼마 전 같이 임무를 수행했던 구홍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약환이 구홍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조만간 십이사령에 한 자리가 늘어날지 모를 일이다. 네가 잘 보필하거라.”
임무에서 부하를 모두 잃은 구홍에겐 운화결과 함께하는 건 새로운 기회와도 같았다.
“예. 군사.”
정중한 예를 받은 약환이 킬킬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반 시진 뒤에 회의가 있을 예정이네. 앞으로 자네도 참가하게.”
마지막 말을 남긴 약환이 동굴을 떠났다.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자로군.’
운화결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스치듯 사라질 때였다.
‘잠깐. 나더러 회의에 참가하라고?’
그 말은 자신에게도 복령천의 계획을 보여주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목숨을 내놓고 시행한 성유기의 계획이 성공한 것과 같다.
운화결은 보이지 않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소.’
구홍이 재차 운화결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한다.
“다시 운공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화결이 물었다.
“날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령의 강령에 반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틀에 박힌 대답에 김이 샌 운화결이 피식 웃었다.
“나가서 물이나 떠와라.”
* * *
협곡에서 가장 깊숙한 동굴, 대전으로 사용하는 넓은 공동에 십이사령을 비롯한 복령천의 수뇌가 집결했다.
횃불에 비친 황천패의 얼굴엔 여전한 노기가 남아 있었다.
그가 약환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시작해라.”
어깨에서 느껴지는 묵직함과 목소리에 깃든 살기는 진심이었다.
움찔한 약환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이곳을 떠나야겠습니다.”
황천패의 곁에 앉아있던 팔사령 구소군이 깜짝 놀라며 쳐다봤다.
“뭐야? 여기 온 게 몇 달이나 됐다고 벌써?”
그 순간 묵직한 주먹이 구소군의 머리에 틀어박힌다.
꽝!
“악!”
황천패가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댔다.
“너 이 새끼야. 내가 군사한테 반말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
잔뜩 움츠린 구소군이 시무룩하게 답한다.
“죄송합니다…….”
“눈치 챙겨. 지금 내 기분이 아주 더러우니까.”
황천패는 턱짓으로 약환의 설명을 요구했다.
그에 약환이 설명을 이어갔다.
“검존이 배신한 이상 이곳이 상대에게 노출되었을지도 모를 일. 소화산을 아는 놈들이라면 여길 찾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겠지요.”
한쪽에 앉아있던 염기 짙은 매혹적인 여인.
십이사령의 홍일점 사사령 음묘악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온 뒤로 검존은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는걸요? 걱정이 과하신 게 아닐까요?”
그녀에 이어 이사령 곽인평이 말했다.
“놈들이 만일 이곳을 알고 있다면 소화산 인근에서 회군하지 않고 곧장 여길 찾아오지 않았겠소?”
약환은 고개를 저었다.
“소화산에서 여기까지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일세. 주변을 수색하다 보면 얼마든지 꼬릴 잡힐 수 있는 위치야. 옮겨야 하네.”
황천패는 지체 없이 결단을 내렸다.
“이각 준다. 짐 싸.”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십이사령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을 받듭니다.”
그들 틈에 낀 운화결이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짙은 분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더니 물컹하는 느낌이 팔에 와 닿았다.
“화결.”
옆에 바짝 붙어 색기 넘치는 미소를 흘리는 이는 음묘악이었다.
“드디어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군요. 축하해요. 호호호!”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본 운화결이 손을 뿌리치고 돌아섰다.
“놔라.”
이미 두 차례 비무를 통해 그녀에겐 완벽하게 만리추종향이 묻은 상태.
더는 마주할 용건이 없었다.
멀어지는 운화결을 응시하는 음묘하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네.”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처소로 향했다.
“뭐 다음이 또 있으니까.”
이전의 근거지와 달리 자연의 협곡에 둥지를 틀었던지라 크게 정리할 것은 없었다.
복령천의 무인들은 황천패가 정한 시간보다 일각이나 앞당겨 밤이 내린 들판에 도열했다.
하늘을 슬쩍 쳐다본 약환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올 때가 됐는데.”
명을 받고 잠시 협곡을 나섰던 백화무단주와 부단주가 돌아오지 않은 까닭이다.
무거운 정적 속에 황천패가 동굴에서 나왔을 때였다.
양무화와 당명이 진법의 생문을 넘어 나타났다.
약환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갔다.
“어떻게 되었는가? 소화산은?”
양무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의 거지들이 교대로 감시를 하고 있었소.”
봉추개와 추영당이 소화산을 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약환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손뼉을 쳤다.
“옳거니!”
아직 소화산을 감시하고 있다는 건 저들이 여월의 회동 정보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킬킬킬!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역시 판천라마에게 죽은 살존이 금강적사안에 정보를 누설한 게야.’
억측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추론이 이번에도 들어맞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확실한 정보는 판천라마가 아닌, 살존이 설지량에게 누설한 것을 진무립이 입수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모르는 약환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황천패가 봇짐을 부하에게 넘기며 말했다.
“가지.”
“예.”
나직한 울림 속에 황천패를 필두로 무인들이 일제히 신법을 전개했다.
황천패의 곁을 달리는 약환은 머릿속으로 생각해둔 계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월이다. 여월이야. 킬킬킬! 마두 놈들과 무림맹을 상잔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게야!’
차오르는 흥분에 온 몸이 절로 떨려온다.
장소가 소화산이 아니더라도 마교와 무림맹의 상잔은 복령천에 있어 반드시 시행해야 할 계획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일이 이토록 완벽하게 생각대로 돌아가니 머리를 쓰는 지낭으로서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 속에, 약환의 머리는 다음 회의에 설명할 계책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후방을 따르는 운화결의 곁으로 구홍이 바짝 붙었다.
“백궤는 속하가 들겠습니다.”
운화결은 두말없이 육병백궤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몸놀림이 한층 가벼워진 가운데 밤하늘을 바라보는 운화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놓치지 말고 잘 따라와라.’
제법 쌀쌀한 밤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가늘던 초승달도 어느덧 절반이나 차오른 밤.
잠을 청하려 침상에 눕던 당우가 벌떡 일어났다.
“부, 부대주!”
다급한 외침에 문이 벌컥 열리며 은수련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죠?”
당우는 다급하게 옷을 걸치며 일어났다.
“우,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가야 합니다!”
점점 멀어지는 만리추종향이 당우의 내력에서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은수련이 소집령을 내릴 필요도 없었다.
당우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은무대 전원이 안가의 마당에 집합한 것이다.
은수련은 즉시 당우를 데리고 마당에 내려섰다.
“가자.”
“예. 부대주.”
한 무리의 검은 바람이 안가의 담을 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