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284
◈ 284화. 든든한 아군
소화산에서 계획한 바를 모두 실행한 진무립은 단려화와 함께 서안에 도착했다.
겨울을 목전에 둔 서안은 휴식기 직전의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 상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변복하고 죽립을 눌러쓴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대로의 인파에 스며들었다.
거리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단려화가 나직이 물었다.
“불존은 괜찮을까요?”
아직 서장의 소식을 듣지 못한 두 사람이기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판천라마는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채비하고 있었을 거다. 지금쯤 무사히 사천에 들어갔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복령천과 마교의 연합이 확정적인 이상 하나라도 아군이 더 필요한 상태.
포달랍궁의 존재는 작지 않은 힘이 될 것이다.
대로를 벗어나 한적한 강변에 도착한 두 사람이 다리 밑의 개방 분타를 발견했다.
눈을 가늘게 뜬 단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 모양인데요?”
거지들로 가득해야 할 분타가 지키는 이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언덕을 내려간 두 사람이 강변에 내려설 무렵, 반대편에서 신법을 전개해 달려오는 거지가 보였다.
“육봉개 아니에요?”
머리를 제법 단정히 묶은 거지는 소걸개의 제자 육봉개였다.
“그렇군.”
한달음에 달려간 단려화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육소협!”
별안간 나타난 그녀로 인해 육봉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러났다.
“까, 깜짝이야.”
“잘 지냈어요?”
단려화가 반가운 얼굴로 죽립을 들어 보였다.
“어? 광…….”
그녀의 찌릿한 눈빛에 육봉개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변한다.
“……룡대협과 함께 다니시는 사천검화 소저가 아니십니까?”
동초개와 비슷한 면이 많은 듯하면서도 그보다 눈치는 빠르다.
단려화가 해맑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맞아요. 그런데 다들 어디에 갔어요?”
“총동원령이 내려졌습니다. 다들 임무를 수행 중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진무립이 묻는다.
“총동원령?”
가볍게 예를 갖춘 육봉개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깔았다.
“마교가 서장을 점거했습니다.”
“포달랍궁의 소식도 들어온 게 있나?”
“포달랍궁의 라마승들은 다행히 화를 입기 전에 대설산맥을 넘은 모양입니다.”
“그건 다행이로군. 근데 총동원령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한동안 독자적으로 소화산에 집중하던 진무립은 다른 정보에 취약한 상태였다.
“군사부에서 방주님께 정보전에 집중해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지금 서안의 거지뿐만 아니라 다른 분타의 거지들까지 모두 섬서에 투입해 서장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진무립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령천을 자신에게 맡긴 화윤은 전체적인 판세에 집중할 생각인 것이다.
‘적절한 대처다.’
믿을 만한 아군이 있다는 건 그만큼 신경 쓸 일이 줄어든다는 것과 같다.
‘이렇게만 해주면 나도 복령천에 집중할 수 있겠어.’
진무립이 물었다.
“소방주는?”
“감시망을 정비하고 직접 거지들의 위치를 조정하느라 바쁘십니다. 지금 어디쯤 계실지는 저도 확실히 모릅니다.”
진무립에 이어 단려화가 물었다.
“육소협은 왜 여기 남아있는 거예요?”
“저는 총단과의 연락책입니다. 노출된 분타를 안가로 옮기고 잠시 잊은 물건이 있어서 온 겁니다.”
“잊은 물건?”
“제 밥그릇입니다.”
“…….”
진무립이 물었다.
“무림맹에 서신을 전해야 한다. 다녀올 수 있겠나?”
육봉개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계산했다.
“네. 지금은 가능합니다.”
아직 감시망이 정비 중인지라 자신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진무립은 품에서 밀봉된 서신을 꺼냈다.
“이걸 군사부의 부군사에게 전해다오.”
자신의 계획을 적은 서신이다.
서신에 쓰인 밀문은 오로지 수문화만이 해석할 수 있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진무립은 돌아서는 육봉개를 잡고 전낭을 꺼냈다.
“여비로 써라.”
은자 다섯 개를 받아 든 육봉개가 헤벌쭉 웃으며 품에 넣었다.
“복 받으실 겁니다요. 대협.”
밥그릇을 챙긴 육봉개가 순식간에 신법을 전개해 사라졌다.
“이제 우린 어디로 가죠?”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했다. 이제 당우와 합류해 때를 기다리는 거야.”
단려화가 배시시 웃으며 진무립의 팔을 잡았다.
“어서 가요.”
* * *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
신강으로 향하는 서진환은 불어오는 모래바람에 누런 피풍의를 단단히 여몄다.
‘바람이 차군.’
먼발치에 앞서가는 상인들도 상행을 서두른다.
서진환은 남쪽보다 이른 겨울이 다가옴을 실감하고 있었다.
상행의 뒤를 따라 반 시진을 나아갔을 무렵, 사막의 한가운데 커다란 녹주가 나타났다.
달빛에 은은히 빛나는 호수는 밑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했다.
먼저 온 상인들이 늦은 식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서진환도 물주머니를 채웠다.
진무립이 내린 임무는 텅 빈 천산에 침투해 어떤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신강까지는 빨라도 열흘.’
아직 전쟁이 시작되지 않은 이상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완벽한 몸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말린 고기를 꺼내 배를 채운 서진환은 피풍의를 머리끝까지 끌어 올리고 잠을 청했다.
* * *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심산유곡의 작은 분지.
새로운 근거지로 터전을 옮긴 복령천은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웅크린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화무단이 교대로 밖을 드나들며 정보를 수집하고 주변을 순찰하는 가운데, 분지의 무인들은 최상의 상태로 전쟁에 나서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초옥을 나선 운화결이 무인들로 가득한 분지를 눈에 담았다.
협곡에 머물 때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과 분위기가 새롭게 다가온다.
‘잘 따라왔겠지.’
진무립이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지금 이곳엔 복령천주와 약환을 비롯한 모든 무인이 머물고 있다.
마음 같아선 지금 진무립이 맹의 정예를 끌고 왔으면 싶었으나 외부를 드나드는 백화무단은 무림맹의 움직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백화무단은 무림맹이 움직이는 순간 바로 알아챌 것이다.
내부의 사정을 그에게 전하고 싶었으나 먼저 연락할 수단이 없는 게 아쉽다.
성유기의 희생으로 간신히 신임을 산 지금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순 없었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놈에게 계획이 있겠지.’
백궤를 내려둔 운화결이 새하얀 검을 꺼냈을 때였다.
“많이 기다렸어요?”
사사령 음묘악이 염기 짙은 미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운화결이 미간을 좁혔다.
“또 그대인가?”
일사령 주유성과 이사령 곽인평, 그리고 삼사령 평사군은 자신의 비무를 받아주지 않는다.
매일같이 다른 사령들과 비무를 치루는 가운데 가장 많이 붙어본 상대는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짐짓 뾰루퉁한 얼굴로 투정을 부렸다.
“말투가 그게 뭐예요? 기껏 상대해주러 왔더니.”
“…….”
곁으로 다가온 그녀가 짙은 분 냄새를 풍기며 살갑게 웃었다.
“아니면 혹시 침상에서 나누는 몸의 비무를 원하시는 건가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마치 혼백을 뺏어갈 만큼 달콤하다.
하지만 운화결은 이런 수에 넘어갈 만큼 내공이 얕지 않았다.
“시끄럽다.”
사령들과의 비무에서 운화결이 해낸 건 단순히 만리추종향을 묻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삼사령과의 비무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운화결은 이들과의 비무로 무공을 파악하고 허실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야 임교영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사령 음묘악의 연검은 대강 파악했다.
오늘은 오사령 자현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매몰차게 거절한 운화결이 검을 들고 돌아섰다.
“그대와의 비무는 이제 필요 없다. 다른 사령을 찾지.”
말이 끝나는 순간 음묘악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며 표정이 매서워졌다.
“화결. 그렇게 자꾸 밀어내면 재미없을 거예요.”
운화결이 그녀를 쏘아보며 살기를 드러냈다.
“자꾸 귀찮게 하면 죽이겠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운화결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미소를 되찾고 말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지요. 좋아요.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으니 이만 물러날게요. 하지만 난 아직 그대를 포기한 게 아니에요. 호호호.”
교성을 흘린 그녀가 등을 돌려 사라지자 등 뒤에서 나직한 웃음이 들려왔다.
“허허허. 그녀의 귀혼공(鬼魂功)을 이겨내다니 자네도 참 대단하구만.”
사람 좋게 웃으며 다가온 인물은 오사령 자현이었다.
운화결이 물었다.
“귀혼공?”
“사람을 홀려 혼백을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사술이지. 우리 십이사령도 대부분 그녀의 귀혼공에 호되게 당하곤 했었다네.”
그의 말을 듣고 돌이켜보니 전투 중에도 묘한 교성이 자신의 심금을 울렸던 적이 있었다.
운화결은 그제야 그녀가 이토록 귀찮게 달라붙는 이유를 짐작했다.
이것이 그녀의 수련인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운화결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준비해라. 비무다.”
자현이 빙그레 웃었다.
“팔천영신공을 상대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 하지만 오늘은 안 되겠구만. 자네의 상대는 따로 있다네.”
“내 상대가 따로 있다?”
“따라오게.”
운화결을 이끌고 분지를 벗어난 자현은 쏟아지는 폭포수 앞의 아담한 호숫가에 도착했다.
붉은 단풍이 하늘거리며 흩날리고 기화요초로 가득한 이곳은 마치 신선이나 살 법한 절경이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아도 자현이 말한 자신의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내 상대라는 거냐?”
그때 오 장 남짓한 폭포수 위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우리다.”
별안간의 목소리에 반응한 운화결이 즉시 검파를 쥐고 고개 들었다.
‘저들은…….’
햇살을 등진 세 명의 사내.
자현은 운화결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하하. 축하하네. 오늘부터 자네는 저들과 함께 수련할 자격을 얻게 되었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훌쩍 뛰어내린 세 사람이 호숫가에 사뿐히 착지했다.
일사령 주유성과 이사령 곽인평, 삼사령 평사군이 바로 그들이었다.
“광룡 진무립에게 복수를 다짐했다고 들었다.”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평사군이 걸어오자 마치 집 한 채가 다가오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역시 이자들은 다르다.’
물론 다른 사령들도 천하에 보기 드문 강자들이었으나 이들에게선 차원이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평사군과 마주 선 운화결이 담담하게 검파를 쥐었다.
“그렇다.”
평사군의 곁으로 다가온 이사령 곽인평이 송충이 같은 굵은 눈썹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가 네 칼을 갈아주지.”
“우리라는 말은 일사령도 포함하는 것인가?”
운화결의 두 눈은 그들 뒤에 선 주유성을 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주유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와 붙고 싶다면 저들을 상대로 네 가능성을 증명해라.”
운화결을 쳐다본 주유성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날 상대해도 죽지 않겠다 싶으면 찾아와라.”
말을 마친 주유성이 훌쩍 뛰어올라 절벽 위로 사라졌다.
‘기회가 왔다.’
평사군과 마주 선 운화결이 자세를 낮추며 웃었다.
“바로 시작하지.”
평사군이 히죽 웃으며 주먹을 매만졌다.
“보아하니 일사령이 아니면 안중에도 없다는 건방진 눈빛인데.”
미소가 사라진 순간, 집채만 한 거구가 흔들린다 싶더니 예비 동작도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
쐐애액!
내지르는 주먹이 공간마저 뛰어넘고 짓쳐 든다.
운화결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놈 뭐냐?’
거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이다.
어지간한 고수라면 감지조차 못하고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평사군의 주먹이 운화결의 머리통을 박살 내기 직전이었다.
꺼지듯 사라진 운화결의 검이 어느새 평사군의 가슴을 찔러가고 있었다.
쉬익!
그 찰나의 순간 반응한 평사군이 검극에 장심을 내밀었다.
“건방지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
날카로운 검극이 장심에 부딪히는 순간.
콰아아앙!
경천동지할 굉음과 함께 쏟아지던 폭포수가 거꾸로 치솟았다.
285화. 가을
호숫가의 단풍나무가 역류하는 폭포수에 휘말려 몸을 흔든다.
붉은 잎새가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가운데 주르륵 밀려 나간 운화결이 신음을 삼켰다.
‘큭!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이냐?’
검극의 일점에 온 힘을 쏟아붓고도 상대의 장심에 튕겨 나왔으니 황당한 것이다.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
거구에 어울리는 강력한 힘.
상대는 권사로서 모든 것을 갖춘 엄청난 괴물이었다.
반면 평사군 또한 운화결의 날카로움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그는 손목을 매만지며 인상을 썼다.
“시큰하군. 천주께서 눈여겨보신 이유가 있었어.”
자세를 잔뜩 낮춘 운화결의 손으로 검 대신 창이 빨려든다.
‘간격을 허용하면 독이 된다.’
만리추종향을 하독하는 건 상대의 힘을 뺀 다음이다.
물론 그것도 지켜보는 이사령 곽인평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탓.
순식간에 사라진 평사군이 운화결의 우측에 나타나 주먹을 내질러 온다.
슈아아!
범인이라면 반응조차 불가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의 권영이 송곳처럼 옆구리를 파고든다.
운화결은 즉시 미끄러지며 창대를 끌어당겼다.
카앙!
의도대로 튕겨 나가며 간격을 확보한 운화결이 팔천영신공 승무관천(昇武貫天)의 초식을 전개했다.
콰지직!
일점에 온 힘을 쏟아부은 창두가 공간을 꿰뚫고 가공할 기세로 쏘아진다.
쏴아아아!
창두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위력은 평사군조차도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눈에 이채를 띈 그는 창두를 피해 좌측으로 미끄러지더니 순식간에 방향을 바꿔 짓쳐 들었다.
운화결은 창대를 회수함과 동시에 역으로 휘둘렀다.
쉬익!
자루 끝의 날카로운 칼날이 접근하는 평사군의 가슴을 노려간다.
상체를 뒤로 뺀 평사군이 좌수를 내뻗어 창대를 잡아가는 순간이었다.
별안간 눈앞에서 나타난 장력이 평사군의 가슴을 거칠게 강타했다.
콰앙!
“큭.”
불시의 일격에 세 걸음 물러난 평사군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운화결을 쳐다봤다.
창대를 쥔 왼손의 소매 아래로 운화결의 우장이 은밀히 뻗어 나온 상태.
그 찰나의 순간 장력을 퍼부어 타격을 주고 공간마저 확보한 것이다.
기습적인 공격인지라 위력은 강하지 않았으나 이런 임기응변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하하!”
이제야 사사령 이하의 사령들이 운화결에게 애를 먹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광룡과 네 차이는 어느 정도지?”
운화결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차이.”
“소문으로는 신룡과도 동수를 이뤘다고 하던데.”
“체면을 세워준 것이겠지. 아니면 신룡이 생각보다 약하거나.”
“그런가.”
작게 끄덕인 평사군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별거 아니군.”
운화결은 미소를 감췄다.
굳이 진무립의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
이들이 진무립을 가볍게 보면 볼수록 전쟁은 빨리 끝날 테니까.
목을 좌우로 우두둑 꺾은 평사군이 지면을 박차고 쇄도했다.
쾅!
“어디 오늘 제대로 놀아보자.”
비산하는 흙먼지 사이로 화살처럼 쏘아진 주먹이 강풍을 동반하며 날아든다.
쐐애액!
창의 간격을 비집고 들어온 권영이 다섯 개로 나뉘는 순간, 운화결은 손목을 튕겨 창대를 띄웠다.
그리곤 두 손으로 허공에 원을 그려 원선지벽의 초식을 전개했다.
콰콰콰콰쾅!
찰나의 순간 다섯 번의 굉음이 터져 나오며 운화결의 신형이 화살처럼 튕겨 나간다.
‘역시 정면에선 어려워.’
인상을 쓴 운화결의 손으로 봉이 빨려들었다.
두 사람이 치열한 탐색전을 시작했을 때.
비무를 지켜보던 곽인성은 몸을 돌려 절벽 위로 뛰어올랐다.
‘쓸만하겠군.’
자신들과 비교하는 건 시기상조다.
그러나 그간 무림에서 쌓아온 운화결의 경험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저 멀리 앞서 나가는 주유성이 보인다.
곽인성이 그의 곁을 따라붙으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주유성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물었다.
“무엇을?”
“운화결.”
“천주님과 군사가 직접 상대하라고 한 것을 보면 중히 쓰고자 하는 것이겠지.”
지금까지 운화결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세 사람이다.
그런 자신들에게 운화결을 직접 챙기라고 한 것을 보면 위에서 그를 확실하게 믿는 게 분명했다.
묵묵히 끄덕이는 곽인평의 두 눈에 서산에 걸린 붉은 물결이 들어온다.
“아름답군.”
곽인평을 슬쩍 쳐다본 주유성이 그와 시선을 공유했다.
붉게 물든 산을 바라보던 주유성이 인상을 썼다.
“기분 나쁠 뿐이다.”
“하하하.”
노을이 걸린 늦가을의 산새.
부친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좋아하던 여자아이의 손을 놓치고 도망치던 그날도 때마침 가을이었다.
‘빈아.’
세 글자였던 성과 이름 중 기억나는 것은 그 한 글자가 전부다.
언제나 그렇게 불러왔으니까.
그러나 넘어진 채 자신을 향해 손을 뻗던 아이의 눈빛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날 그 아이의 손을 놓쳤던,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 주유성이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내게 있어 아름다운 붉은색은 단 하나뿐이다.”
나른한 목소리 속 진심이 섞인 말은 누차 들어온 이야기다.
“피인가.”
언제나 표정이 없는 주유성의 입가에 모처럼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피에 젖은 천하야말로 그 무엇보다 아름답지 않겠는가?”
곽인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말리겠군.”
주유성의 검은 천주인 황천패조차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살기가 짙다.
그럼에도 황천패가 조언을 하지 않는 건, 그 강력함의 원천이 바로 증오와 복수심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건, 누가 먼저 공격을 했건 다른 자의 사정은 알 바가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천하를 피로 물들이고 그 위에 군림한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곽인성이 다짐하듯 말했다.
“이번 전쟁. 반드시 이겨서 우리의 천하를 되찾는 거다.”
“아니.”
고개 저은 주유성의 눈이 지독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전부 죽이고 죽일 것이다. 천하가 우리에게 거역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할 때까지.”
* * *
언덕 위에 올라선 이하빈이 붉게 물든 고즈넉한 마을을 눈에 담았다.
마지막 추수를 마친 농부들이 하나둘 마을로 들어오는 가운데 이하빈은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가워짐을 느끼고 있었다.
“참으로 아름답군.”
어느새 뒤로 다가온 송조광이 윤건을 고쳐 쓰며 웃었다.
“어디 절경이 따로 있겠는가? 이런 것이 바로 천하 절경이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공터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모친의 부름에 따라 집으로 달려가고.
저 멀리 노을 진 산새는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며 작은 마을을 굽어본다.
대별산의 전경도 아름다웠으니 이 또한 그에 못지않게 가슴에 와닿았다.
송조광이 이하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은가?”
“……모르겠군.”
언덕 아래로 보이는 평온한 일상조차도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의 불편한 심기에 송조광은 지난 기억을 상기했다.
‘아차.’
그녀가 머물던 은곡이 붕괴한 날도 마침 오늘과 같은 가을이었다.
뒤늦게 진무립과 함께 그곳에 도착한 송조광은 아직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산혈해의 참상 속에, 살아남은 이는 혼절한 채 시신 밑에 깔려있던 이하빈이 유일했다.
송조광은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네. 늦지 않게 돌아오게나.”
“…….”
그는 대꾸하지 않는 그녀를 뒤로하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홀로 남은 그녀가 속으로 읊조렸다.
‘복령천.’
모친에게서 부친을 빼앗아가고 자신에게서 모친을 빼앗아간 원흉의 후예.
그들이 그릇된 욕심만 품지 않았더라면 그날의 괴로움도 없었을 것이다.
주먹을 움켜쥔 그녀가 붉은 하늘에 애증의 얼굴을 그렸다.
‘아버지. 당신이 가족조차 팽개치고 탐했던 그 모든 것들, 이번엔 내 손으로 반드시 끝낼 겁니다.’
이하빈과 헤어진 송조광은 마을 외곽의 낡은 장원에 들어섰다.
이들이 안가로 삼은 이곳 장원은 오래전 대과에 급제해 북경으로 올라간 고관의 집이다.
진무립 일행은 그의 인척으로 위장해 이곳에 머무는 중이었다.
마당에 나와 고기를 굽는 진무립과 단려화, 불을 지피는 은무대와 밥을 짓는 상천팔기의 모습은 상천이 세워지기 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자주 이렇게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곤 했던 것이다.
송조광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갔다.
“아직입니까?”
콧잔등에 숯검댕을 묻힌 진무립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팔자 좋아. 주군은 앉아서 고기 굽고 있는데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들어오네.”
“하하하! 주군께서 잘하시는 일이 아닙니까?”
소매로 진무립의 얼굴을 닦아준 단려화가 송조광에게 물었다.
“이소저는요?”
“곧 돌아올 겝니다.”
마당에 상이 차려지고 있을 때, 방 안에 틀어박혀 가부좌를 틀고 있던 당우가 미간을 좁혔다.
‘느낌이 달라졌다.’
제법 멀리 떨어진 거리, 만리추종향의 연자가 뭉쳐있는 탓에 정확히 확신할 순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미세하게 달라진 감각을 보면 운화결이 뭔가 한 게 분명하다.
“나와라. 밥 먹자.”
진무립의 목소리에 당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소공자.”
문을 열고 나간 당우는 모여 앉아 기다리는 동료들을 볼 수 있었다.
단려화가 싱긋 웃으며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어서 와서 앉아요.”
“네.”
때마침 이하빈이 돌아오며 조용히 자리에 앉는다.
진무립이 고기를 나눠주며 그녀에게 말했다.
“또 옛날 생각을 하다 온 모양이군.”
그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예.”
구석에 앉아있던 백채륜이 말했다.
“지금 많이 해두세요. 머지않아 그럴 일이 없어질 테니까요.”
복령천을 완벽하게 섬멸한다면 그녀는 괴로운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때 남쪽의 큰 마을에 갔던 시평이 두 팔 가득 술병을 안고 들어왔다.
팔에 안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허리춤과 어깨, 가슴에도 묵직한 호리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시평이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치사하게 나 빼고 먼저 시작했습니까?”
연길상이 껄껄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왔구나!”
모처럼의 술이 반갑지 않을 리 없다.
마일관과 대중경이 일어나 그의 몸에 달린 술병을 하나씩 풀었다.
“수고했다.”
“아직 식사 전이다. 앉아라.”
시평이 게슴츠레 눈을 흘겼다.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먹으려 했던 거 같은데?”
백채륜은 고기를 한 점 뜯으며 손을 뻗었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호리병이 그의 손에 안착한다.
“늦은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겠습니까?”
“넌 먹지 마.”
투덜거리는 그 모습에 좌중이 웃음을 터트렸다.
차갑게 변한 늦가을의 바람도 술자리의 열기를 식힐 수는 없었다.
향긋한 주향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간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진무립이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이제 곧 겨울이 오겠군.”
단려화가 그의 어깨에 온기를 더했다.
“내년 이맘때 우린 뭘 하고 있을까요?”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때면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연길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때도 이렇게 술을 마시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에 이어 송조광이 말했다.
“어쩌면 술독에 빠져 주당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대중경의 창백한 얼굴에 술기운이 번졌다.
“살아있다면 말이오.”
“…….”
순간 장내에 싸늘한 정적이 깃든다.
단려화가 눈을 흘기며 어색한 정적을 깼다.
“분위기 좋았는데 초 치지 말아요.”
진무립이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의 웃음과 함께 무겁던 분위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무립이 모두를 차례로 돌아보며 말했다.
“살아남자. 모두 살아서 천하의 명주를 전부 맛보는 거다.”
당우가 물었다.
“소공자가 사는 겁니까?”
“물론이지.”
고개를 끄덕인 진무립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이 전쟁, 반드시 이긴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반드시 축배를 들게 해줄 테니까.”
누구도 진무립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된다고 하면 무조건 된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교차하는 눈빛들에 결의가 차올랐다.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결전의 날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