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291
◈ 292화. 화령도에서
외당주 정윤이 놀란 눈을 부릅떴다.
“그,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보주의 말대로라면 고작 이틀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내에 나직한 술렁임이 번져가자 정병은 손을 들어 동요하는 그들을 진정시켰다.
“침착하게. 대군사께서 방책을 마련해주셨다고 하질 않았는가? 그렇게 당황할 것이 아니네.”
그 말에 동요가 잦아들자 내당주 성금이 애써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보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화령에서 서신을 보내온 순간부터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단소룡이 중원으로 떠난 뒤, 화령의 금릉원주 사마진은 강남의 전 방파에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내두었다.
전쟁이 가까워졌음을 안 이들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전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병이 말했다.
“그렇지. 우린 지금부터 대군사께서 마련한 방책을 이행하고 이곳을 떠나야 하네.”
외당주 정윤이 물었다.
“그 방책이 무엇입니까?”
“자네는 지금 밖에 나가 은밀히 시신을 구해오게. 숫자는 상관없네.”
“알겠습니다.”
정윤이 나가자 정병은 내당주 성금에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당장 본 보에서 키우는 짐승을 모두 잡아 연회를 준비하게. 단, 짐승의 피는 따로 모아두어야 할 것이네.”
“연회를……. 알겠습니다.”
뜻밖의 명에 잠시 놀랐던 성금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가자 소보주 정차영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보주님. 이틀 뒤면 전쟁인데 연회라니요. 출정식을 하고 그들과 직접 싸울 생각입니까?”
제아무리 부친의 명령이라지만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정병은 고개를 저으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염려 마라. 이 또한 대군사의 묘책이다.”
* * *
화윤의 서신을 받은 강남 무림의 방파가 분주하게 움직일 무렵.
형양 인근에 도착한 일사령 주유성과 운화결은 고요한 야산의 동굴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화결이 술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객잔에 머물면 될 걸 굳이 이런 산속에서 대기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밖을 힐끔 쳐다본 주유성이 담담하게 말했다.
“강남 무림은 다른 곳과 다르다. 섣불리 마을에 들어가면 놈들이 분명 알아챌 거다.”
“강남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군사는 그 말도 안 되는 무림이 바로 이곳 강남 무림이라더군.”
“…….”
십이사령은 겉보기와 달리 약환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복령천이 있을 수 있었다는 걸 아는 것이다.
운화결이 물었다.
“만일 외부를 공격했을 때 화령도에서 무인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어쩔 셈이지? 강남의 모든 방파가 화령도로 집결해 수성을 준비한다면?”
“군사가 그러더군.”
짧은 정적이 스쳐 간 뒤, 주유성의 입가에 살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길을 틀어막고 화령도로 가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놈들이 정말 강남 무림의 기둥이라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미소에 깃든 살기가 진심이라는 것을 운화결은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이자는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가.’
주유성은 한때 세상을 뒤집고자 했던 자신보다 더한 어둠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내 미소를 지운 주유성이 다시 담담하게 말했다.
“화령의 주력이 빠지면 천하가 마교를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섬에 틀어박혀 수성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화령의 무인 전원이 뭉쳐서 강남 무림을 규합하고자 움직인다면?”
“치고 빠지며 약한 부분부터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강남에서 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으냐? 소수정예의 이점은 그럴 때 빛을 발하는 거다.”
주유성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포위전이 아니라면 강남 무림은 절대 우리를 당해낼 수 없다.”
나직한 읊조림에 확신이 엿보인다.
운화결도 이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술병을 매만졌다.
듣고 보니 그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 * *
지독한 어둠이 시시각각 강남 무림의 숨통을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전운으로 먹먹한 하늘 아래.
호수 위에 떠오른 화령도에선 마지막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태천각의 대전에 령의 수뇌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한다.
둥근 원을 중심으로 사방에 계단처럼 좌석이 배치된 특이한 구조의 대전.
중앙에 서면 모두의 얼굴을 한 번에 돌아볼 수 있는 구조였다.
수뇌들이 모두 도착한 직후.
거대한 대전의 문밖에서 위사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영주께서 입장하십니다!”
착석했던 무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와 함께 등장한 단자룡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마진이 흐뭇하게 웃는다.
‘이럴 때 보면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니까.’
살짝 쳐진 눈꼬리를 비롯해 듬직한 체구까지, 단자룡은 젊은 시절의 단소룡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 단자룡이 둥근 원의 중심에 섰다.
그들이 포권을 취하기 직전 단자룡이 손을 들었다.
“예는 되었습니다. 모두 앉으십시오.”
말 한마디에 무인들이 그대로 착석했다.
단자룡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회의를 시작하지요. 금릉원주.”
“예. 소영주.”
자리에서 일어난 사마진이 단자룡의 곁에 서서 장계를 펼쳤다.
“대군사께서 보낸 서신에 의하면 복령천이 우리를 꾀어낼 생각으로 다른 방파를 친다고 합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 검황 천영이 입을 열었다.
“방책은 있는가?”
“물론입니다. 그분께서 계책을 일러두었다고 하니 우리는 이쪽에만 집중하면 될 것입니다.”
그에 이어 단자룡이 말했다.
“군사의 서신대로라면 백화무단은 이미 화령도 인근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겁니다.”
놀랄 만한 소식에도 당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숱한 위기를 겪고 천하를 구했던 그 시절의 경험이 이들을 단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의문이 들지 않을 수는 없다.
마치 산적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 산패전주 우창이 손을 들고 물었다.
“그 말은 백화무단이 장강수로채와 본 령의 비령각의 눈까지 속였다는 말이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곁에 앉은 양삼이 그를 툭 쳤다.
“입니까.”
실수를 깨달은 우창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고쳤다.
“입니까?”
화령이 세워지기 전부터 산적으로 생활했던 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예법에 서툴렀다.
단자룡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소수의 고수인 만큼 작정하고 스며들면 간파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요.”
그는 이어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대군사께서 오고 계신 이상 우리는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눈앞의 적에 집중하고 준비했던 계획대로 움직이면 될 것입니다.”
다부진 체구에 우직한 눈빛의 중년인, 영호원주 담대무영이 손을 들고 말했다.
“시행은 언제입니까?”
사마진이 답했다.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기에 확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정월이 오기 전에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마진은 차분히 수립한 계획을 재차 설명했다.
그의 말이 끝난 뒤, 모두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단자룡이 말했다.
“적이 코앞에 도착했다는 걸 알면 젊은 무인 중에 동요하는 이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회의 내용은 당분간 함구한 채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하십시오. 이상 회의를 마칩니다.”
말이 끝나자 모두가 일제히 일어나 예를 갖췄다.
“예. 소영주.”
회의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난 수뇌부가 빠르게 대전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나간 뒤 검황 천영이 단자룡에게 다가갔다.
“백화무단주 양무화는 엄청난 고수라고 들었다. 과연 내가 없어도 되겠느냐?”
계획에 따르면 천영은 자리를 비워야 한다.
단자룡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자식은 뱀에게 당하지 않습니다.”
당당한 눈빛과 말투는 과거의 단소룡을 떠올리게 할 만큼 믿음직스럽다.
천영은 대견한 듯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훌륭하다.”
대전을 나선 화령의 수뇌들이 작게 대화를 나누며 뿔뿔이 흩어진다.
양삼이 먹먹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이런 긴장감 나쁘지 않군.”
따라 나온 우창이 쌍도끼를 툭 치며 히죽 웃었다.
“그렇지. 내 도끼가 피맛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다네.”
“촌스러우니까 제발 어디 가서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우창이 껄껄 웃으며 양삼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먼저 가보겠네.”
“잠깐.”
양삼이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뭔가?”
주변을 살핀 양삼이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 저녁에 나랑 술이나 한잔하세.”
“전투가 시작되면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못할 텐데 가보지 않아도 되겠는가? 안사람이 걱정할 텐데?”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아내를 떠올린 양삼이 속삭이듯 말했다.
“집에 안 가고 싶어.”
* * *
화령도가 은밀한 준비를 시작했을 때.
감시를 피해 장강을 도강한 백화무단은 화령도 남쪽 십 리 밖의 산속에 도착한 상태였다.
양무화가 도열한 부하들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고생스러워도 며칠만 참아라. 머지않아 천하가 우리 집이 될 테니까.”
구십여 명의 백화무단원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경형.”
양무화의 부름에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인상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예. 단주.”
“강남 무림은 소문이 빠르다. 십이사령이 행동을 개시하면 곧장 소문이 돌 거야. 너는 당분간 대치현에 스며들어 소문을 수집해라.”
대치현은 화령도가 있는 호수의 입구.
섬까지 고작 일각밖에 걸리지 않는 화령의 문턱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일조장 경형이 사라지자 양무화는 이조장 문자양을 불렀다.
“너는 화령도를 주시해라. 네 은잠술이라면 접근하지 않는 이상 들키지 않을 것이다.”
“예. 단주.”
“나머지는 당분간 조용히 대기하며 휴식한다. 해산.”
양무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하들이 일사불란 흩어지며 종적을 감췄다.
이곳은 화령의 안방인 강남.
쉴 때조차도 은밀함을 유지해야 했다.
부단주 당명이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왔다.
“복수의 시간이 찾아왔군요.”
백화무단에서 양무화의 과거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천하대전에서 부친과 모친을 모두 잃은 그에게 화령은 철천지원수와도 같았다.
양무화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대업에 사사로운 감정을 끼워 넣을 생각은 없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으론 아니라는 걸 안다.
주유성이 거침없이 살기를 표출하는 부류라면 양무화는 분노를 꾹꾹 억눌렀다가 터트리는 부류였으니까.
양무화가 나무 뒤로 사라지자 당명이 한쪽 입술을 길쭉하게 올렸다.
“솔직하지 못하긴.”
거짓이든 아니든 자신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돌아선 당명이 발을 내디디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제 얼마 안 남았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천하의 정점에 올라서서, 자신을 버린 당가가 땅을 치고 후회하는 모습을 머지않아 보게 될 테니까.
당명의 시선이 어둑한 하늘로 향한다.
‘아버지. 거기서 잘 지켜보고 계시라구요. 킬킬킬!’
산새에 점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다.
큼직한 나무 위에 걸터앉은 양무화가 등을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단주.”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양무화가 슬며시 눈을 뜬다.
그의 시선에 담긴 이는 삼조장 청조였다.
“뭐냐?”
“이번 전투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 역시 양무화와 비슷한 과거를 가진 인물.
청조의 두 눈에 굳은 각오가 떠올랐다.
양무화는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피식 웃으며 눈 감았다.
“입 아프게 당연한 말은 하지 마라.”
그 평온한 표정에 청조의 얼굴에도 확신이 깃들었다.
오랜 세월 양무화를 곁에서 보필한 청조는 알 수 있다.
신룡이 없는 이상 이곳 강남 무림에서 양무화를 당해낼 인물은 없을 것이다.
콧대 높은 십이사령도 양무화에게만큼은 한 수 접어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슬쩍 고개 숙인 청조가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나무에 기댄 양무화는 장포로 몸을 감싸며 각오를 되새겼다.
‘화령도에 살아있는 것은 개새끼 한 마리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