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328
◈ 329화. 또 다른 꿈
전쟁이 끝난 뒤, 기지개를 켜는 천하무림처럼 화령도의 거리에도 활기가 돌고 있었다.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 한잔합세!”
두 팔을 활짝 펼치며 객잔에 들어서는 이는 양삼의 둘째 아들 양춘이었다.
그와 함께 들어선 동료들이 객잔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읽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때 양춘을 알아본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위층에 그분이 계십니다.”
“그분?”
고개를 갸웃하던 양춘이 생각난 듯 눈을 치켜떴다.
“아아. 그 마녀…….”
“쉿!”
말을 꺼낸 사내가 기겁하며 양춘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양춘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입에서 손을 뗐다.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 그 말이 또 하고 싶습니까?”
눈치를 살핀 양춘이 자라목을 하고 속닥거렸다.
“들렸을까?”
“안 들렸을 겁니다.”
“후우.”
나직한 한숨이 아래층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힐 때, 이 층 창가 자리에 앉아 술잔을 쥔 채 사색에 잠긴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이하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뇌리를 지배하는 그날의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질 않는다.
‘그 눈빛은 뭐였지?’
일사령 주유성이 보인 마지막 그 눈빛과 행동.
그때 자신이 본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반격할 여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기회를 포기한 채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가버렸다.
‘대체 왜?’
답을 해줄 장본인이 죽고 없으니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길이 없다.
그때 누군가 창문을 훌쩍 뛰어넘어왔다.
“여기 있었나?”
사색에서 깬 이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거련채주 연길상이 술잔을 뺏으며 말했다.
“술도 아니고 물만 마시면서 왜 돈 아깝게 매일 객잔에 오는 거냐? 사람들 눈치 보이게.”
그의 말처럼 이 층의 넓은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깨어났다. 그 녀석들.”
이하빈이 물었다.
“누가 먼저 깨어났나?”
먼저 죽는 놈이 지는 싸움이라면 먼저 일어난 놈이 이긴 싸움이다.
연길상이 헛웃음을 흘렸다.
“동시에.”
이하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지.”
전쟁이 끝났음에도 이들이 화령도를 떠나지 못한 것은 부상의 치료도 있었거니와 백채륜과 시평이 깨어나지 못한 까닭이었다.
의방에 도착한 이하빈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약 냄새로 가득해야 할 방 안에서 때아닌 음식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한 그릇 더 주시오.”
하인에게 그릇을 내미는 백채륜에 이어 시평도 빈 그릇을 들어 보였다.
“나도.”
의방의 일을 돕는 하인은 속으로 혀를 차며 그릇을 받아들었다.
‘방금 깨어난 사람이 맞아?’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진 채 오늘내일하던 사람이라곤 볼 수 없는 기력이다.
백채륜과 시평을 번갈아 쳐다보던 이하빈이 물었다.
“뭘 하는 거지?”
화룡채주 마일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일어나자마자 밥부터 찾더군.”
그에 이어 대별채주 송조광이 말했다.
“누가 더 먼저 회복하는지 내기라도 한 모양일세.”
시평이 전신을 꽁꽁 싸맨 천을 걷어냈다.
“이 몸의 귀신같은 회복력을 따라올 사람은 없지.”
백채륜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대로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시평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뭐야?”
백채륜은 말없이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그리곤 시평을 가리키더니 검지 하나를 들어 보인다.
그것은 자신이 십이사령 중 두 명을, 너는 한 명을 죽였다는 의미다.
발끈한 시평이 지지 않고 대꾸했다.
“네가 죽인 두 놈보다 내가 죽인 한 놈이 더 강했다.”
“후후후.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진짜라니까?”
이런 상황에서조차 경쟁심을 버리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언제쯤 떠날 수 있지?”
송조광이 답했다.
“이런 추세라면 열흘 안에는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싶군. 하지만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네.”
이어서 송조광이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주군께서 흑조를 보내셨네. 지금 강남으로 오고 계시다는군.”
서신을 확인한 이하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평과 백채륜에게 말했다.
“주군께서 당도하시기 전까지 움직일 수 있게 회복해라. 움직이지 못하는 놈이 지는 거다.”
지켜보던 채주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시평과 백채륜의 두 번째 싸움이 이렇게 다시 시작된 것이다.
* * *
겨울의 강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변.
죽립을 눌러쓴 두 사내가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의 물결 따라 분주히 걸음을 옮긴다.
‘느낌이 점점 강렬해진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 분명해.’
선두에서 슬며시 죽립을 들어 올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사내는 바로 당우였다.
가늘어진 눈꺼풀 사이로 강변의 고즈넉한 마을이 떠오른다.
대략 스무 가구의 작은 마을.
이른 저녁을 짓는 듯 곳곳의 굴뚝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잔뜩 긴장한 당우가 발을 멈추자 뒤따르던 검산채주 대중경이 어깨를 잡았다.
“저곳인가?”
진무립의 연락을 받고 만일에 대비해 대중경이 그를 따라온 것이다.
움찔한 당우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랐잖아요.”
“그리 놀랄 것 없다. 주군께선 십이사령이 아닐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냐?”
“그건 아니지만…….”
“가지.”
고개를 끄덕인 당우가 마지못해 발을 내디뎠다.
‘이 사람도 상당히 강하니까 괜찮겠지.’
화령도의 마지막 싸움을 직접 목도한 것은 아니지만 상천팔기의 강함은 잘 안다.
노을이 걸린 마을에 들어서자 집으로 돌아가던 어린아이가 두 사람을 쳐다보며 발을 세웠다.
“누구세요? 우리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죽립을 벗은 당우가 눈높이를 맞추며 물었다.
“혹시 이 마을에 외지 사람이 온 적이 없었니?”
잠시 생각하던 아이가 생각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무무(無無) 아저씨를 찾아왔구나!”
“무무?”
“말이 없고 표정이 없어서 다들 무무 아저씨라고 불러요. 따라오세요.”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경계 섞인 눈빛 속에 아이를 따라 작은 집 앞에 도착했다.
마당에 나와 불을 지피던 노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뉘시오?”
둘을 데려온 아이가 말했다.
“무무 아저씨를 찾아온 손님이에요.”
그 말에 흠칫 놀란 노인이 떨리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행여 이들이 해코지를 할까 걱정하는 것이다.
당우가 그를 안심시키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저희는 그 사람의 지인입니다. 결코 나쁜 마음을 품고 찾아온 것이 아니니 염려 놓으십시오.”
잠시 두 사람을 쳐다보던 노인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상대가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자신이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강에서 낚시를 하다가 발견했다오. 처음에는 죽었나 싶어서 묻어주려 했는데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어서 데려왔지. 이리 오시오.”
두 사람은 우측 방문을 연 노인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 짚단으로 얼기설기 만든 침상 위엔,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깡마른 사내가 있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당우는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용모파기를 되새겼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운화결인가?’
운화결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사실 운화결에 대해 아는 자가 왔더라도 눈앞의 사내를 그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 같았다.
실제로 중원맹의 전투에서 운화결을 본 적이 있는 대중경조차 눈앞의 사내가 그와 같은 인물일 거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성큼 다가간 대중경이 대뜸 사내의 손을 확인했다.
‘무인.’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은 분명 무인의 손이다.
손을 당겼음에도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대중경은 조심스럽게 그의 상의를 들췄다.
마치 무언가에 잡아 뜯긴 듯 움푹 패인 흉측한 검상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대중경이 물었다.
“당신이 정말 그 운화결인가?”
이름을 불렀음에도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뒤따라온 아이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해봐도 전혀 답을 안 해요.”
이어서 대중경이 몇 가지 질문을 했음에도 사내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당우가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임교영이라는 소저를 모르십니까?”
여전히 대꾸가 없다.
그러나 그 순간, 사내의 눈빛이 묘하게 일렁인 것을 대중경은 놓치지 않았다.
“아이를 가진 몸으로 그대를 기다리는 소저의 이름이 바로 임교영이다. 기억하지 못하는가?”
마치 시간의 흐름이 멎은 듯, 무거운 침묵 속에 처음으로 사내의 눈동자가 대중경을 향해 움직였다.
“임…… 교영.”
희뿌연 빛으로 가득하던 사내의 세상이 현실의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혼돈으로 가득한 머릿속이 점차 예전의 기억을 되찾아간다.
그렇게 일각이 지날 무렵, 공허한 눈빛에 정광이 떠오르며 사내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여긴 어디인가?”
대중경이 그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거운 침묵 속.
대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내가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운화결이다.”
그날 밤, 뜬구름처럼 찾아왔던 이름 모를 사내가 두 사내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 * *
중원을 떠난 진무립 일행이 달포에 걸친 여정 끝에 강남에 접어들었다.
복중에 아이를 가진 임교영으로 인해 행보를 서두를 수 없었던 까닭이다.
중원과는 사뭇 다른, 따스함마저 깃든 강남의 바람 속에.
곧게 뻗은 관도를 느릿하게 달리던 마차가 마침내 작은 마을에 들어섰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용추가 고삐를 당겨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자 문을 열고 나온 진무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중선촌인가.”
대중경이 보내온 흑조에 따르면 그들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그들이 마을을 살피고 있을 때, 멀리 허름한 객잔 문이 열리며 당우가 나타났다.
“소공자!”
반갑게 손을 흔든 당우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오셨군요.”
진무립이 반갑게 웃으며 당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했다. 중경은?”
“상천팔기가 곧 도착한다고 해서 데리러 갔어요.”
그에 이어 뒤의 마차 문이 열리며 당천과 유대하, 육군명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형님!”
당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곳에 그가 있느냐?”
마차 안에서 그 목소리를 들은 임교영은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객잔의 별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자 단려화와 지여령이 임교영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이제 다 왔어요.”
임교영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살아있음에도 연락조차 하지 못했으니 분명 크게 다쳤던 게 분명할 것이다.
임교영은 흔들리는 마음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사이 객잔에 도착한 마차가 완전히 멈췄다.
지여령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임교영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쪽입니다.”
떨리는 가슴에 손을 올린 임교영이 마침내 별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손에 지팡이를 쥔 채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깡마른 사내가 있었다.
과거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으나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바로 운화결이었다.
“왔느냐.”
반가운 미소와 함께 거친 음성이 흘러나와 임교영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상…… 공.”
입을 여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며 눈물이 차올랐다.
천천히 다가가는 걸음을 따라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을 적셔간다.
운화결이 빙그레 웃으며 팔을 펼쳤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사정이 좀 있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달려간 임교영이 운화결을 와락 부둥켜안았다.
어느새 움직인 진무립이 휘청이는 운화결의 등에 손을 올렸다.
먹먹한 감정으로 가득한 별채.
임교영의 나직한 흐느낌 속에 운화결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안고 있던 운화결이 그녀를 살짝 떼어내며 말했다.
“내 모습이 많이 변해서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임교영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이렇게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진무립이 조금 물러서며 말했다.
“사천의 한적한 곳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꿈이라 했었지.”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진무립이 옅은 미소로 말을 덧붙였다.
“사천에 좋은 집을 알아봐 주마.”
한때 천하를 피로 물들이려 했던 운화결이었기에 공신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순 없다.
그러나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에 들어간 덕분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조용히 여생을 보내게 해주는 것이 그를 위해 진무립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진무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운화결이 지그시 눈 감으며 웃었다.
“그래.”
임교영과, 태어날 아이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 이상으로 바랄 것은 없다.
몸을 돌린 임교영이 진무립을 향해 정중히 예를 갖췄고.
고즈넉한 객잔에 저녁노을과 함께 따스함이 깃들어간다.
지여령이 두 사람을 부축해 별채 안으로 들어가자 함께 온 일행이 객잔의 숙소에 짐을 풀었다.
당우가 당천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근데 형님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약속이 있다.”
“이런 촌에서 약속이라니요?”
“술 약속이다.”
오면서 객잔에 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무립의 회복을 핑계로 단려화가 한사코 말린 탓에 아직 제대로 마신 적이 없었다.
“술?”
당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당천이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씻고 오마.”
당천이 씻으러 들어갔을 때, 유대하와 육군명은 옷도 채 갈아입지 않은 채 마주 앉아 끼니를 채우고 있었다.
부엌에 들어갔던 용추가 술병을 들고나와 탁자에 합류했다.
“술은 안 마실 거야?”
육군명이 말했다.
“의리 없이 우리끼리 마실 수 있나? 그건 이따가 주군이 나오면 함께 마셔야지.”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용추가 인상을 썼다.
“나만 나쁜 놈이야?”
유대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조금은 마셔도 괜찮을 겁니다.”
“그럼 조금만 마실게.”
히죽 웃은 용추가 마개를 열었다.
향긋한 주향과 함께 입구를 빠져나온 술이 스르륵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크으!”
탄성을 내뱉은 용추가 술병을 내려두며 웃었다.
“정말 꿀맛 같구나.”
육군명이 슬쩍 술병을 잡았다.
“나도 같이 나쁜 놈이 되어볼까.”
유대하도 웃으며 잔을 내민다.
“그럼 나도.”
세 사람의 잔이 차례로 채워지며, 술병이 하나둘 늘어가며 저녁이 무르익어간다.
육군명이 지나온 시간을 다시 떠올리며 웃었다.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지.”
사천맹에서 진무립을 만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과 몇 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수십 년은 지나온 듯한 기분이다.
유대하도 마주 웃었다.
“그래. 내겐 정말 꿈만 같은 시간이었지.”
그를 만난 후, 어느 하나 의미 없는 것들이 없을 만큼 충실한 나날이었다.
유대하가 용추에게 물었다.
“용형은 어땠습니까?”
“나?”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던 용추가 히죽 웃었다.
“과거는 모르겠고, 난 그냥 모두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좋다.”
시선을 교환한 유대하와 육군명이 약속한 것처럼 웃는다.
대답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함께해 온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더욱 많을 테니까.
그때 씻고 나온 당천이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무립은?”
육군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위에 없어?”
“…….”
미간을 찌푸린 당천이 탁자 위의 술병을 들었다.
땅거미가 은은하게 내려앉은 강변.
노을을 밀어낸 별빛이 찰랑이는 물결 속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토록 그립던 강남의 바람 소리, 탁 트인 들판과 바다처럼 넓은 강물이 단려화의 가슴을 시원하게 파고들었다.
“후아!”
크게 숨을 내쉰 그녀가 나란히 걷는 진무립에게 말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
“역시 두 사람은 쉽게 떨어질 운명이 아니었나 봐요.”
“운명이라…….”
그런 것을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말은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그날 언덕에서, 나와 당신이 만난 것도 운명이 아니었을까요?”
진무립이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당신이 나를 따라온 것도 운명이었고?”
단려화는 배시시 웃었다.
“그건 고집이고요.”
달빛과 함께 밤이 깃든 한적한 강변.
성큼 앞서 나간 단려화가 진무립을 돌아보며 뒤로 걸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런가?”
딱딱하게 얼어붙은 중원과는 다른, 멀지 않은 봄을 알리듯 부드러운 흙이 내딛는 그녀의 발을 살포시 감싼다.
“마도림을 반석 위에 올리겠다던 꿈도, 상천의 사람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꿈도. 당신과 함께할 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지키겠다는 마지막 꿈도 당신은 결국 이뤘어요.”
진무립은 뒷걸음치는 그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야.”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었기에 모두가 믿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예요.”
진무립은 멋쩍게 웃었다.
단려화가 발을 멈추자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서로의 숨결마저 닿을 정도로 근접한 거리.
진무립의 가슴에 손을 올린 단려화가 그를 올려보며 물었다.
“이제 누가 당신에게 무슨 꿈을 꾸냐고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해줄 건가요?”
“꿈이라…….”
목표로 했던 것들은 모두 이뤘다.
이제는 다음 꿈을 꿀 차례다.
잠시 생각하던 진무립이 좌측으로 고개 돌리며 말했다.
“내 꿈은 여전히 저들이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천천히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는 동료들이 있었다.
술병을 손에 든 당천과 당우.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다가오는 용추와 유대하, 그리고 히죽 웃는 육군명.
그들의 뒤로는 때마침 이곳에 도착한 상천팔기가 보인다.
과거의 꿈이었던,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도 꿈이 되어 함께 해줄 이들이다.
시선을 거둔 진무립이 단려화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당신 역시 내 꿈이지.”
단려화의 입가에 새초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으면 한 대 칠 뻔했어요.”
마주 웃은 진무립이 그녀를 지그시 눈에 담았다.
“평생 당신과 함께, 같은 꿈을 꾸며 살고 싶다.”
살랑이는 밤바람 속에.
단려화의 시선이 밤하늘을, 고요한 들판을, 별이 내린 강물을 지나 다시 진무립에게 닿았다.
“뭐 이 정도면 분위기 좋고 청혼도 완벽하네요. 좋아요.”
그녀다운 대답에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고마워.”
기쁜 마음으로 답한 진무립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다.
연모하는 여인과 평생을 함께할 동료들이 이 자리에 있다.
밝게 빛나는 달빛이 그들을, 진무립의 꿈들을 살포시 감싸 안는다.
어느덧 찾아온 여월(如月)의 끝자락.
밤이 내린 고즈넉한 강변에서.
무림의 전설이 되어버린 사내가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수상한 소공자는 천하십대고수
[ 完 ] [ 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