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56
◈ 56화. 산내촌의 혈사
「서초산 동북면 산내촌 혈사. 흔적이 서쪽으로 이어진 것 확인.」
진무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서초산은 사천과 서장을 가로막은 산맥의 일부로 그곳에서 서쪽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바로 서장을 뜻함이다.
“서초산 방면에 다녀온 녀석이 누구지?”
대답은 진무립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접니다.]“자세히 말해봐라.”
[송반현으로 향하던 길에 산속 마을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 수십 구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천주님께서 내리신 명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이상해 주변을 조사하다 보니 단 하나의 발자국만이 서쪽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진무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신의 상흔에서 뭔가 알아낸 건 없었나?”
[모두 검상이었지만 일정한 형과 식은 없었습니다. 눈을 찔러 죽인 시신도 있었고 가슴과 허리, 다리 등 닥치는 대로 생각 없이 검을 내지른 듯 보였습니다.]“생각 없이…….”
나직이 읊조리던 진무립은 벌떡 일어나 서신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이걸 지부의 적모개에게 전해라.”
[예.]검은 연기가 일렁인다 싶더니 손안의 서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시부럴. 거지 체면에 목욕이라니.”
적모개가 젖은 머리를 흔들며 목욕통을 나왔다.
진무립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부장이라는 놈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처소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데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인 서신이 보였다.
“응?”
서신을 펼쳐보니 진무립과 약속한 표식이 있었다.
“산내촌?”
눈을 가늘게 뜨고 서신을 읽던 적모개는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지를 상실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명령에만 따르며, 오로지 살육만을 위해 만들어진 괴물.
‘분명 정황만 놓고 보면 혈교에서 실험한다던 무혼광인(無魂狂人)과 비슷하다. 설마 완성한 건가?’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도 떠오른다.
‘그런데 발자국이 왜 하나지? 분명 명을 내리는 술자가 근처에 있었어야 하는데.’
전쟁을 앞둔 이 시점에 굳이 사천에 들어온 것도, 마을을 소거하지 않고 흔적을 남긴 것도 이해가 되질 않는다.
‘실험 중 변고가 생긴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현장을 보지 않은 이상 단언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는 것만 적자.’
지필묵을 꺼낸 적모개는 섣부른 판단 대신 자신이 아는 정보를 고스란히 종이에 적었다.
다음 날 아침.
적모개는 식사가 끝난 뒤 동초개를 찾아갔다.
문을 벌컥 열자 벽 보고 앉아있던 동초개가 움찔하며 쳐다봤다.
“너 뭐하냐?”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던 적모개가 서신을 내밀었다.
“이거 소공자에게 전해주고 와라.”
“네.”
곱게 접힌 서신을 품에 넣은 동초개는 즉시 지부를 나섰다.
“휴우. 들킬 뻔했네.”
뛰는 가슴을 쓸어내린 동초개가 바쁜 걸음을 옮겼다.
사천맹의 입구에 도착한 동초개에게 위사가 정중히 예를 갖추며 물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흠. 본인은 개방의 동초개요. 마도림의 소공자께 전할 서신을 가져왔소.”
“죄송합니다만 외인은 출입이 불가합니다. 운룡각에 기별을 넣을 테니 사람이 올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때 동초개의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당문경을 알아본 위사는 즉시 예를 갖췄다.
“개방의 손님께서 마도림의 소공자께 전할 서신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지금 운룡각에 연락을 취하려던 참입니다.”
당문경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개방의 소형제였군. 나는 사천맹의 비각주 당문경이라고 하네.”
그를 위아래로 훑어본 동초개가 말했다.
“동초개입니다.”
“중요한 서신이면 이리 주게. 기다릴 필요 없이 내 가는 길에 전해주지.”
위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될 게 무어 있겠는가?”
당문경을 쳐다보던 동초개가 잠시 망설였다.
‘뭐 중요한 거였으면 나한테 맡기지도 않았겠지.’
생각을 정리한 동초개는 곱게 접힌 서신을 내밀었다.
“그럼 부탁 좀 합시다.”
동초개는 당문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몸을 돌렸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당문경이 실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개방이라. 우리 소공자께서 무슨 정보가 필요하셨을까?’
손에 쥔 서신은 마치 열어보라는 듯 밀봉조차 되어있지 않은 상태.
인적 없는 골목에 접어든 그는 천천히 서신을 펼쳤다.
내용을 살피던 당문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개방의 밀문인가?”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길가의 숲속에 들어간 동초개는 히죽거리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앗, 이게 뭐람?”
눈을 동그랗게 뜬 동초개가 혼잣말을 했다.
“내가 언제 춘화에 밀봉을?”
아무래도 적모개가 준 서신과 자신의 춘화를 착각해 잘못 전달한 모양이었다.
“시벌, 어렵게 구한 건데…….”
울상을 한 동초개는 다시 사천맹의 입구로 달렸다.
떠났던 동초개가 되돌아오자 위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보시오. 미안하지만 운룡각의 사람을 좀 불러주시오.”
“알겠습니다.”
위사가 밧줄을 당기자 안에서 대기하던 동료가 나왔다.
“운룡각의 광무대주께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해주게.”
“알겠네.”
그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동초개는 위사를 붙잡고 말했다.
“그리고 말이오.”
“또 용무가 있습니까?”
“비각주에게 내 춘…….”
그때 위사의 어깨너머로 골목에서 나오는 당문경이 보였다.
만면에 화색이 돈 동초개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봐요! 비각주님!”
그 우렁찬 목소리에 당문경의 고개가 돌아가고 지나던 무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순간.
“좀 전에 가져간 내 춘화 돌려줘요! 손에 든 그거 말이에요!”
순간 거리에 묵직한 정적이 흐르며 모두의 시선이 당문경의 손에 집중됐다.
“…….”
“각주님이…… 춘화를?”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당문경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 * *
소문은 삽시간에 사천맹 전체로 퍼져 나갔다.
워낙 본 눈이 많았기에 숨길 수도 없었다.
적모개의 서신을 손에 쥔 진무립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당황했을 당문경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 잘난 인간이 제대로 당했군. 하하하.”
한숨을 내쉰 단려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아무리 엉뚱한 사람이라지만 설마 각주에게 춘화를 넘겨줄 줄은 몰랐네요. 분타주에게 일러 모르는 사람에게는 서신을 넘겨주지 말라고 해야겠어요.”
만일 중요한 정보였다면 제법 곤란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근데 서신 내용은 뭐에요?”
“비밀도 아니니 같이 보지.”
머리를 맞댄 두 사람이 서신을 펼쳤다.
“무혼광인?”
“아는 게 있나?”
단려화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화령은 강남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요. 아시잖아요?”
천하십대고수 중 무려 절반이 화령 소속이다.
자칫 화령이 무림의 질서를 깨뜨릴까 우려한 단소룡은 팔황문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외부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힘이 있음에도 내세우지 않는다.
화령이 무림의 기둥으로 존경받는 이유였다.
단려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맹에서는 모르고 있을까요?”
“사천은 넓어. 그런 산속 마을까지 일일이 확인할 순 없는 법이지. 다만 관에서 발견하고 무인의 흔적을 확인했다면 조만간 맹에 통보할 거다.”
수십 명이 거주한다면 외부와 단절된 세상은 아닐 터.
진무립은 연락이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 * *
중목원으로 향하는 당문경에게 무인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오해라고 해명하긴 했으나 소문이란 으레 그렇듯 한 다리만 건너가도 달라지는 법.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수치심에 분노를 억누른 당문경은 빠르게 맹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허허허. 이 사람. 오셨는가?”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송구합니다.”
한천월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자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일일세. 조금만 지나면 먼지처럼 흩어질 소문이니 괘념치 마시게.”
나직이 숨을 고른 당문경이 평소의 미소를 되찾았다.
“감사합니다. 한데 갑자기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관에서 사람을 보내왔네.”
한천월은 관인이 남기고 간 서찰을 내밀었다.
서찰에는 산내촌의 혈사에 대해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당문경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그렇지. 서장과 이어진 변경일세.”
“이상하군요. 서장의 전쟁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라면 지금 사천을 자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 혈교의 소행이 아닐 경우도 염두에 둬야 할 게야.”
“아무래도 그래야겠습니다.”
한천월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번 일, 조금 이르긴 하지만 그 아이에게 맡겨봄이 어떻겠는가?”
“진무립을 말씀하십니까?”
“그렇지. 이 기회에 그 아이의 능력을 내 눈으로 한번 보고 싶군.”
상대의 능력을 안다면 앞으로의 계획도 한결 수월해질 터.
잠시 생각하던 당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운룡각에 명을 하달하겠습니다.”
* * *
중목원에서 첫 명령이 하달되자 우가산은 진무립을 집무실로 불렀다.
임무를 설명한 우가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소공자. 무슨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할 것이오.”
여유롭게 웃은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광무대에는 사대거파의 후기지수들도 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함정은 파지 않을 테니 걱정할 것 없어.”
다음 날 아침.
첫 임무를 앞두고 연무장에 집결한 광무대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얼마 전 지부를 찾아왔다가 용추에게 문전박대를 당했던 청성파의 노고수, 탈혼일섬 강유월이었다.
단상 밑으로 걸어간 강유월이 우가산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는구려. 빈도는 강유월이라고 하외다.”
그 명성을 모를 리 없던 우가산도 마주 예를 갖췄다.
“우가산이오. 아침부터 무슨 일로 오시었소?”
강유월은 빙그레 웃었다.
“이번 임무에 함께 하고자 왔소이다.”
우가산의 눈에 의문이 번질 때, 당소소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보통 위험이 따르는 임무를 떠날 땐 경험 많은 정무원의 노사님들이 함께 가십니다.”
강유월이 허허롭게 웃었다.
“정무원의 할 일 없는 늙은이들에게 밥값을 하라는 게요. 각주께선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구려.”
우가산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의 방침이 그렇다면 말릴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럼 잘 부탁드리리다.”
우가산의 곁에 서 있던 용추가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점 봐주러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
은명진하검을 익히는 유대하와 그를 도와줄 용추를 남겨둔 가운데, 진무립과 광무대가 사천맹을 나섰다.
목적지인 산내촌까지는 열흘이 걸리는 거리.
말을 타고 가는 대신 달리는 것을 선택한 이들은 넓은 평야를 거침없이 질주했다.
‘신법이 다들 제법이로구나.’
후방에서 뒤따르던 강유월은 흡족한 듯 빙그레 웃었다.
비록 사문은 다르지만 이들은 사천 무림의 미래.
맹 내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관심이 없는 강유월에겐 그저 후학의 성장이 기꺼울 뿐이다.
* * *
성도를 벗어난 광무대가 빠르게 이동할 무렵.
서산의 그림자가 차분히 내려앉은 산내촌에선 관병들이 철수 준비로 한창이었다.
“이러다 해가 떨어지겠군. 다들 서둘러라.”
“예!”
비록 흉수가 무인일 가능성이 높다곤 하나 마을 하나가 통째로 혈겁을 당한 만큼 관에서도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민가의 부엌을 살피다 말고 밖으로 나가던 철삼은 별안간 오싹한 기운에 사로잡혔다.
‘뭐지?’
분명 광주리 인근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다시 몸을 돌려 확인하려는 찰나, 밖에서 포두의 외침이 들렸다.
“이 봐. 철삼이! 어서 안 오고 뭐 하는가?”
고개를 갸웃한 철삼은 내딛던 발을 뒤로 돌렸다.
“예! 갑니다!”
관병들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 잃은 산내촌에 밤이 찾아왔다.
칠흑 같은 어둠과 숨 막히는 정적 속.
부엌의 광주리가 살짝 들리더니 은은한 혈광이 어둠에 빛났다.
“끄르르…….”
쇠를 긁듯 오싹한 소리와 함께 스산한 사기(死氣)가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철삼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조금 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