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79
◈ 79화. 내가 걸어 다니는 전낭이에요?
“상천이라고?”
육군명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다.
진무립이 말했다.
“너도 도성의 사손이나 다름없으니 들은 건 있겠지. 전쟁에 반대했던 은곡, 우리 상천은 그들이 모여 구성된 곳이다.”
육군명도 그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의 스승도 전쟁을 반대해 사천으로 몸을 피한 것이었으니까.
검파를 손에 쥔 진무립은 선택을 종용했다.
“내 정체를 알게 된 이상 선택하지 않고 돌아가는 길은 없다.”
“하, 하하하.”
육군명의 웃음소리에 복잡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진무립은 자신보다 훨씬 위험한 인간 정도가 아니라 현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혼자다.
이 넓은 세상에 자신과 같은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면 더 이상의 고독함은 없을 것이다.
육군명은 결단을 내렸다.
“좋아. 나도 상천과 함께 하겠어.”
“좋은 선택이다.”
씩 웃은 진무립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인사해라.”
“인사?”
육군명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어둠 속에서 십 인의 은무대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천주님을 뵙습니다.”
목소리에 실린 묵직한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진무립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부하들이다.”
육군명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무려 열 명의 무인이 지척에 숨어 있었는데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만일 상천에 합류하길 거절했다면 분명 저들의 칼날은 자신의 목으로 날아들었을 것이다.
‘지, 진짜 죽을 뻔했네.’
그들의 면면을 살핀 육군명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것이 은곡의 무인인가.’
누구 하나 만만한 상대가 없다.
은곡의 강함은 스승에게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나 실제로 마주하니 상상 이상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육군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천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예법은 공석에서만 지키면 된다.”
진무립이 팔을 들자 은무대가 일제히 사라졌다.
“시간이 없다. 남은 이야기는 가면서 하지.”
진무립을 따라 신법을 전개하던 육군명은 슬며시 단려화에게 물었다.
“소저는 누구의 무공을 익혔소? 검성?”
단려화는 빙그레 웃었다.
“아니요. 저는 상천의 사람이 아니에요.”
“엉?”
진무립은 놀란 육군명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녀는 화령의 무인이자 신룡의 딸이다.”
“허! 처, 천중일화?”
기묘한 인연에 입이 쩍 벌어진다.
“어째서 화령의 무인이 이곳에 함께할 수 있는 거지?”
천하대전이 끝난 뒤 가장 먼저 은곡의 수색에 앞장섰던 이들은 바로 화령이었다.
상천의 입장에선 적으로 봐도 무방한 관계.
어찌 보면 적의 수괴라 할 수 있는 신룡의 딸이 함께하고 있으니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단려화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무면산왕의 감시자예요. 무림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을 갖고 함께하는 중이죠.”
“하, 하하……. 혹시 소저의 부친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소?”
“그랬다면 이미 끌려갔겠죠.”
“…….”
육군명은 혹시나 하는 얼굴로 용추를 쳐다봤다.
“너도 혹시 화령의…….”
“난 상천의 거산채주 용추다.”
상천의 유명한 산채는 대부분 들어보았으나 거산채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거산채는 어디야?”
용추는 히죽 웃었다.
“지금은 없어. 언젠가 만들 거야.”
“…….”
* * *
진무립 일행은 예정보다 무려 이틀이나 앞당겨 나곡 인근에 도착했다.
따르는 이들 전원이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고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섯 시진을 쉬지 않고 달린 일행은 잠시 쉬어가고자 커다란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가부좌를 튼 무인들이 심법을 운용하는 사이 진무립은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여기서 지림까지 가려면 닷새는 걸리겠군.’
진무립은 하루나 이틀 안에 천무대의 전투가 시작되리라 확신했다.
거기서 패퇴한다면, 분명 지림으로 모일 것이다.
‘각 지역에서 지림까지는 사흘이면 족하다. 이대로는 늦어.’
생각을 정리한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에 다녀와야겠다. 금방 돌아올 테니 쉬고 있도록.”
그때 내력을 갈무리한 단려화가 헐레벌떡 일어났다.
“나도 가요!”
진무립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무리에서 이탈해 이각가량을 달린 두 사람은 제법 큰 마을에 도착했다.
큰길에 접어든 두 사람은 복면을 끌어 올리고 주변을 살폈다.
이국적인 분위기는 창도와 비슷했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낯선 땅에 온 느낌이었다.
오가는 인파 사이를 걷던 중 단려화가 물었다.
“그런데 어딜 갈 생각이죠?”
“어딜 갈지도 모르면서 왜 따라온 거야?”
“저도 살 게 있거든요.”
“뭘?”
“급하게 출발하느라 제대로 준비를 못 했잖아요. 끼니때마다 사냥을 하는 것도 번거로우니 육포라도 사두려구요.”
그녀의 세심함에 진무립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쪽을 먼저 가지.”
“좋아요.”
시전에 접어든 두 사람은 말린고기를 걸어둔 푸줏간을 발견했다.
진무립은 팔뚝만 한 고깃덩이 두 개를 꺼냈다.
“얼마요?”
주인은 진무립의 말을 듣곤 미간을 좁히더니 손짓을 동원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심히 지켜보던 단려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은자 다섯 개를 달라고 하는 거 같은데요?”
“도둑놈이 따로 없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곳은 서장 불교의 가르침이 널리 퍼진 지역이라 고깃값이 금값이라오. 서장 불교는 수렵을 금기시하거든.”
고개를 돌려보니 중원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이 있었다.
단려화가 혀를 차며 물었다.
“수렵을 금기시하면서 고기는 파는군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라오. 이곳에 걸어둔 고기는 사냥한 게 아니라 목축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가져온 것이지. 여긴 은자를 받아주는 곳이 별로 없으니 아쉬운 대로 사는 수밖에 없겠구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은자 다섯 개를 꺼내 셈을 치렀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단려화의 인사에 중년인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 정도쯤이야. 보아하니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여행을 오시었소?”
진무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중년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구려.”
그 말에 문득 서로를 쳐다본 두 사람은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중년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으니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마시오.”
“무슨 일이 있소?”
“혈교와 포달랍궁의 전쟁으로 분위기가 흉흉하다오. 듣자 하니 엊그제 랍살의 본궁이 함락되어 라마승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구려. 이곳 동부도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르니 가급적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손을 휘저은 중년인이 자리를 떠났다.
단려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랍살의 본궁이…….”
생각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진무립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지 않으면 돌아가는 길이 험난하겠군. 가자.”
“그래요.”
진무립이 향한 곳은 마을 외곽의 마방이었다.
“말을 타고 갈 생각인가요?”
“시일에 맞추려면 행적이 드러나더라도 서둘러야 돼.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마방의 주인은 다행히 중원의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진무립은 생존자들의 숫자까지 고려해 오십 필의 말을 주문했다.
하인들이 말을 가지러 간 틈에 주인이 계산을 마치고 말했다.
“은자로 계산하시렵니까?”
“그렇소. 얼마요?”
“전부 합해 은자 천 개입니다.”
한 마리에 은자 스무 개라면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진무립은 단려화에게 대뜸 손을 내밀었다.
“돈.”
단려화는 가자미눈을 뜨고 물었다.
“설마…… 나를 데려갈 생각이었다고 했던 게?”
진무립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아니면 뭐겠어?”
“하!”
그녀의 눈꼬리가 샐쭉하게 올라갔다.
“내가 걸어 다니는 전낭이에요?”
결국 단려화의 돈으로 셈을 치른 진무립은 오십 필의 말을 줄줄이 묶고 마을을 나섰다.
곁을 슬쩍 쳐다본 진무립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전낭을 두고 와서 그래. 돌아가면 준다니까.”
“퍽이나 주겠네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리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그래. 그런 모습 좋아. 기대가 없어야 나중에 실망도 안 하거든.”
그 뻔뻔함에 단려화는 할 말을 잃었다.
곧이어 부하들과 합류한 진무립은 멈췄던 행보를 재개했다.
오십 필이 말이 일제히 들판을 질주하는 가운데 육군명이 곁으로 말을 몰아왔다.
“지림에 아무도 없으면 어쩔 셈이야?”
“다 죽었다고 보고 돌아와야지.”
이야기를 들은 단려화가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천무대라면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 그럴 거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진무립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서두른다!”
“예!”
속도를 올린 그들은 질풍같이 들판을 질주했다.
* * *
새하얀 눈 위로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진다.
작은 강을 낀 울창한 산자락.
사투 끝에 무혼광인 한 구를 처리한 성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그녀의 눈동자에 강변의 처참한 전장이 비친다.
눈밭에 나뒹구는 수십 구의 시신 중엔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도 있었다.
그녀는 참담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눈물을 흘렸다.
‘함정이라니.’
적의 습격은 흩어진 아군이 산을 수색하던 도중에 시작됐다.
천무대 한 명을 상대하는데 한 구의 실혼인과 다섯 명의 무인들이 협공을 가해오니 버틸 도리가 없었다.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기습에 대처할 방법은 전무했다.
‘광무대주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였어야 했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
진무립이 비각의 정보를 의심할 때 조금 더 주도면밀하게 생각했더라면 함정에 빠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부대주!”
피를 흠뻑 뒤집어쓰고 달려오는 인물은 팔조장 당자군이었다.
“자군!”
그녀의 앞에 도착한 당자군은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성연은 사죄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진무립이 비각의 정보를 의심했을 때 그에 반박한 것은 바로 당자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대의 책임이 아니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당자군의 뒤를 이어 하나둘 흩어졌던 대원들이 포위를 뚫고 돌아왔다.
그들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을 만큼 전신이 자잘한 상처로 가득했다.
그렇게 아홉 명이 돌아왔을 때, 솟구치던 비명과 쇳소리가 거짓말처럼 끊겼다.
눈앞에 모인 이들이 생존자의 전부인 것이다.
성연은 비장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곧 적의 추격이 있을 겁니다. 후방은 내가 막을 테니 모두 지림(支林)으로 이동하세요.”
강달과 송폭, 칙객의 중간에 위치한 지림은 임무를 마친 뒤 합류하기로 약속한 장소였다.
당자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사달이 난 것은 모두 저 때문입니다. 뒤는 제가 막을 것이니 부대주께서 이들을 이끌고 가십시오.”
“오늘의 일은 누구 한 명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내가 뒤를 막고 그대들이 도주하는 것입니다. 어서 가세요.”
이곳에 남겠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과 같다.
“부대주!”
“안 됩니다!”
대원들의 반발에 성연은 단호하게 외쳤다.
“명령입니다!”
그녀의 결연한 의지에 부하들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당자군이 처연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겠습니다. 다음에……. 다음에 우리 중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그땐 제가 부대주의 뒤를 따라가겠습니다.”
빙그레 웃은 성연은 당자군의 손을 밀어냈다.
“나는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어서 가세요.”
“무운을 빕니다.”
일제히 포권을 취한 무인들은 눈물을 머금고 자리를 떠났다.
그와 동시에 산비탈을 타고 적들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검을 움켜쥔 성연의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이 뒤로는 누구도 쉽게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 * *
다른 곳의 상황도 시일의 차이만 있을 뿐 강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함정에 빠진 천무대는 사력을 다해 포위를 뚫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장엄한 협곡의 설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벽.
거친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 백발의 노인이 위태롭게 올라섰다.
협곡의 거친 쇳소리와 괴로운 비명이 절벽 위로 솟구친다.
발아래 전장을 지켜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굳이 쫓을 필요는 없다. 남는 자만 죽여라.”
“명을 하달하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사적으로 후방을 막아서던 무인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전투의 끝과 함께 먼 곳을 바라본 노인이 흡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클클클. 어디 한번 열심히 도망쳐보아라. 달리던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는 희망 없는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나직한 목소리가 바람에 흩어질 무렵, 노인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