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92
◈ 92화.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진설란이 도착하자 위사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었다.
“들어가십시오.”
“고마워요.”
가볍게 인사한 그녀는 한 발을 안으로 들였다.
무거운 정적 속, 나무 바닥의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직이 퍼져 나간다.
종종 찾아왔던 전각의 공기가 오늘따라 유독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삼 층에 도착한 그녀는 집무실 앞에 발을 멈췄다.
“각주님. 설란입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정중히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정연의 주름진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잘 와주었다. 앉거라.”
자리를 권한 정연은 차를 우려내며 말했다.
“서장에서 적잖은 공을 세웠다고 들었다.”
“소질은…….”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며 옥으로 깎은 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정연은 조심스럽게 주전자를 움직이며 말했다.
“겸양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 중목회에서 그에 따른 적절한 논공행상이 이뤄질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두 진무립이라는 아이 덕분이라 말하고 싶은 것이냐?”
진설란은 그제야 보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을 이곳에 부른 목적까지도.
“각주님. 설마…….”
진설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눈치챈 정연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진무립, 그 아이의 명성이 사대거파를 위협하게 둘 수는 없구나.”
“그건 아닙니다. 진공자의 전공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맹을 신뢰하고 목숨 바쳐 싸우겠습니까?”
“사천 무림의 중심, 사천맹의 중심은 언제까지나 우리 사대거파여야만 한다. 마도림에게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이 그토록 중요합니까?”
“너는 모른다. 사천제일세로 불리던 마도림이 사천 무림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 팔황문의 흉계를 막아내지도 못했고 사천 무림을 혼란에서 구하지도 못했다.”
“팔황문의 발호를 막지 못한 것은 다른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그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면 똑같이 당해야 한다는 것이냐?”
생각지 못한 질문에 진설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것은…….”
정연은 단호히 말했다.
“사대거파가 중심이 된 사천맹은 어떤 적에게도 단호히 대처할 힘을 가졌다. 다가올 혈교와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혈교는 천무대가 속절없이 당할 정도의 강적입니다. 진공자의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네 말대로 천무대가 그렇게 당할 정도의 상대다. 사대거파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과연 그들을 막아낼 수 있겠느냐?”
정연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천하대전의 혼란을 수습하고 사천 무림을 이끌어온 것은 우리 사대거파다. 뒤늦게 들어온 마도림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사대거파를 추월한다면 무인들이 느낄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각주님.”
“나 또한 불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로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괴롭단다.”
정연의 말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백지에서 시작한 사천맹이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는 그동안 충성을 바쳐온 사대거파의 제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맹의 중심이 사대거파에서 마도림으로 옮겨간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노력이 헛된 것처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문이 생긴다.
대검문을 흡수했다곤 하나 마도림의 전력은 사대거파 중 어느 곳도 넘어서지 못한다.
사대거파에게 위협적인 상대라고 볼 수는 없다.
견제하는 것치곤 너무 과하다.
잠시 생각하던 진설란은 그 이유를 추측했다.
‘진공자의 활약이 이들에게서 과거의 기억을 끌어낸 거야.’
젊은 무인들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전성기의 마도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중추를 이루는 자들은 사천제일세 마도림을 눈으로 보고 자라왔다.
이들은 과거로의 회귀를, 마도림의 잠재력을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거운 침묵 속에 정연이 입을 열었다.
“곧 중목원에서 광무대주와 천무대주의 보고서를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곧 있을 중목회에서 논공행상이 이뤄지겠지. 모든 것은 그 자리에서 결정될 것이다.”
진설란의 목소리에 옅은 떨림이 담겼다.
“진공자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그것은 보고서의 검토가 끝난 뒤 결정될 것이다.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마도림과 척을 질 때가 아닌 만큼 큰일은 없을 것이야.”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
은은히 번지는 용정차의 다향이 실내를 가득 채워갔지만 그런 것을 느낄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정연이 나직이 말했다.
“침묵하거라. 수긍하거라. 동의하거라. 단지 그뿐이다.”
“…….”
“세 가지 다 지키기 어렵다면 단지 침묵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단…….”
정연의 두 눈이 강렬한 안광을 토해냈다.
“오늘의 대화를 진무립이나 그 측근들에게 누설한다면, 나는 본산에 너의 파문을 건의할 것이다.”
같은 시각.
북천각주 진하성과 독대한 곽도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 사백께서 하신 말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저더러 상관을 배신하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배신이 아니다.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한 것이야. 따르기 어렵다면 침묵하거라. 그 이상은 바라지 않으마.”
“침묵한다면 제가 계속해서 광무대의 조장으로 남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북천각으로 자리를 옮겨줄 수도 있다.”
곽도진은 고개 숙여 참담한 얼굴을 감췄다.
더불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말도 마음속으로 감춰야 했다.
‘사백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 * *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밀려든다.
창가에 선 강유월의 눈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무인들이 담겼다.
생각에 잠긴 그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오.”
정신이 든 강유월은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진인.”
문을 닫고 들어오는 이는 바로 하종보였다.
“곡차나 한잔할까 하여 왔는데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외다.”
강유월은 애써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잘 오셨소이다. 앉으시구려.”
“날도 좋은데 창문은 그냥 열어두십시다.”
“그러지요.”
다시 창문을 연 강유월은 다기를 가져와 차를 우려냈다.
하종보가 거리를 응시하며 말했다.
“사대거파의 각주들이 움직이는 모양이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구려.”
그가 느끼는 불안감은 강유월도 마찬가지였다.
성도의 거리에는 진무립에 대한 칭송으로 가득하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사천맹을 지탱해온 사대거파의 입장에선 탐탁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종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별일은 없겠지요?”
마치 원하는 답을 듣고자 하는 질문 같았지만 강유월은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맹주 한천월은 자신의 사형이다.
그렇기에 한천월이 얼마나 독해질 수 있는 인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유월이 어두운 얼굴로 입을 다물자 하종보는 한숨을 삼켰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로다.’
사대거파와 다른 방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그간의 사천맹은 사천 무림의 기둥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다른 듯했다.
‘부실한 지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에 불과했던 것인가.’
참으로 입맛이 썼다.
‘광무대주를 쓰고 버릴 패로 사용해선 안 된다.’
정무원의 노고수 중에도 중소방파를 경시하고 마도림을 경계하는 자들이 많았으나 자신과 강유월처럼 생각이 다른 이들도 적지 않다.
하종보가 여차하면 그들의 힘까지 빌릴 각오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 둥둥 떠다니는 찻잎.
무르익은 다향이 후각을 자극했으나 두 사람은 차를 마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복도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선각주가 두 분을 뵙고자 합니다.”
두 사람은 올 것이 왔다는 얼굴로 시선을 교환했다.
강유월이 고개를 돌렸다.
“들이게.”
곧이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정중히 예를 갖추는 장유기가 보였다.
“장유기가 두 분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오시게.”
평소와 달리 반기는 기색이 아니다.
방에 들어선 장유기는 멋쩍은 미소로 강유월을 바라보았다.
“사숙께선 소질이 찾아온 연유를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습니다.”
장유기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대적을 앞에 두고 자중지란을 벌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걸 안다면 광무대주를 그냥 두게.”
“물론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자중지란을 막기 위해선 이대로 둘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강유월이 물었다.
“자중지란을 막기 위해서라니?”
장유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안에서도 사숙과 같이 생각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
“혈교의 위협에서 사천 무림을 지키기 위해선 어느 때보다 강한 응집력이 필요합니다.”
강유월의 두 눈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이제 와서 그럴 것이라면 처음부터 마도림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소질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습니까?”
“이건 신의의 문제다. 사형께서 너를 그리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욱한 제자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모양입니다.”
장유기의 무릎이 천천히 지면에 닿았다.
“사숙. 소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드리는 부탁입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분간 침묵해주십시오.”
“거절한다면 어쩌겠느냐?”
“사대거파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것이 어찌 분열로 이어진단 말이냐?”
“소질은 생각을 돌릴 마음이 없습니다. 저와 함께하는 이들도, 그간 맹을 지탱해온 사대거파의 제자들도 대부분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만일 두 분께서 끝까지 광무대주를 감싸려 하신다면, 우리는 혈교라는 대적을 앞두고 자중지란에 빠지겠지요.”
강유월의 백미가 하늘로 치솟았다.
“네놈이 감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장유기는 허리춤의 검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불민한 소질을 죽여주십시오.”
“오냐. 죽여주마.”
강유월의 손이 거침없이 검파를 잡아갔다.
하지만 그에 앞서 하종보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진인. 노기를 가라앉히시오.”
“지금 이놈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하셨소? 이놈은 도사의 탈을 쓴 악귀가 되었소이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외다.”
가까스로 강유월을 막아낸 하종보는 꿇어앉은 장유기에게 시선을 던졌다.
“천선각주의 뜻은 알겠네.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이쯤 돌아가시게.”
천천히 일어난 장유기는 공손히 예를 갖추고 나갔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강유월은 허탈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허망하구나.”
마주 앉은 하종보의 입가에도 자조 섞인 미소가 번졌다.
강유월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무겁고 긴 침묵 끝에 하종보가 물었다.
“진인. 이대로 청성산으로 돌아가시겠소?”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구려.”
“그럼 돌아가시구려. 나도 운남으로 돌아갈 생각이외다.”
강유월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진심이시오?”
“당연히 진심이라오.”
자리에서 일어난 하종보가 빙그레 웃었다.
“다만 가기 전에 할 말은 하고 가야겠소이다. 쌍욕을 하든 개소리를 하든 돌아가서 안 보면 그만 아니오?”
* * *
하루의 끝이 다가오자 성도의 객잔들은 사람으로 득시글거렸다.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객잔의 이 층.
난간 옆의 탁자에 앉은 진무립과 단려화는 북적이는 분위기 속에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말이에요. 이렇게 느긋하게 술이나 마셔도 괜찮아요?”
“뭐가 걱정이야?”
주변을 살핀 단려화는 고개를 길쭉하게 빼고 속삭였다.
“생각해봐요. 진공자의 명성이 나날이 높아지는데 사대거파가 두고만 볼 리 없잖아요.”
“제법 똑똑한데?”
“누굴 바보로 알아요? 사천맹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거든요?”
진무립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란 말이지?”
왠지 모를 의미심장한 미소에 단려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에요? 그 웃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