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b is one of the world's top ten master RAW novel - Chapter 93
◈ 93화. 알 게 뭐야
단려화가 다그치듯 말했다.
“웃기만 하지 말고 말 좀 해봐요.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구요. 방법이 있는 거죠?”
우리라는 말이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나온다.
진무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처럼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딱히 달라질 것도 없고.”
어느새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찬 객잔이 시끄러워졌다.
술잔을 입에 털어 넣은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지.”
객잔을 나선 두 사람에게 은밀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둑한 거리, 정리에 들어간 노점과 분주하게 지나는 사람들.
길 위에 올라선 진무립이 말했다.
“한 가지 묻고 싶군.”
“뭘요?”
진무립의 다음 말은 전음으로 이어졌다.
[당금 무림은 유례없는 평화를 보내고 있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마땅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진무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재밌게도 팔황문 때문이다.]단려화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패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팔황문과 손을 잡은 놈은 두 가지 부류가 있지. 하나는 놈들의 야망에 동조한 자들, 다른 하나는 팔황문의 제안을 거절했다가 식솔을 인질로 잡혀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자들이다.] [그건 알고 있어요. 천하대전이 발발한 순간 우리 화령이 그 인질들을 구출했으니까요.] [그럼 그 두 부류 중 누가 끝까지 싸웠을까?] [당연히 팔황문의 야망에 동조한 자들이겠죠.]진무립은 싱긋 웃었다.
[노회하고 세속에 찌든 자들은 대부분 팔황문의 손을 잡고 함께 죽었지. 그게 무림의 평화가 길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전혀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다.
[분란을 일으킬 만한 자들이 전부 죽어서?] [그래. 전쟁이 끝나고 천하는 새 판을 짜기 시작했다. 부패하고 탐욕에 찌든 자들, 그릇된 야망을 가진 자들을 배제하고 방파를 재구성했지. 하지만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천은 다르다.]단려화는 스승에게 들었던 천하대전 이야기를 떠올리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천하대전 마지막 전투에 사천의 방파는 하나도 없었어요. 어째서 그랬을까요?] [사천의 패자 마도림이 끝까지 버텼기 때문이다.]당시 회천대계를 진행한 팔황문은 강남과 사천을 제외한 천하의 칠 할을 손에 넣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계획을 서둘렀으나 사천의 계획은 마도림이 끝까지 버틴 탓에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거기에 강남의 패천성과 칠맥, 남궁세가에 심어둔 세작이 화령에게 발각되고 제거됐다.
조급해진 팔황문은 사천과 강남을 계획에서 배제했다.
그리곤 사천과 강남이 손을 잡지 못하도록 마도림을 공격한 뒤, 각파에 심어둔 세작으로 자중지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천 무림이 천하대전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 더불어 마도림이 몰락한 이유였다.
설명을 끝낸 진무립은 차갑게 눈을 빛냈다.
[썩은 가지를 쳐내야 새싹이 돋는 법이지. 나는 사천 무림을 바꿀 생각이다.]그 날카로운 눈빛에 단려화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서, 설마…… 사천맹과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은 아니겠죠?]현시점에서 마도림의 전력으로는 진무립이 있을지라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진무립의 진정한 정체를 알기에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천이 개입한다면, 천하를 뒤집어놓았던 은곡의 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다급하게 다시 말했다.
[상천의 힘을 이렇게 사용하면 안 돼요. 천하 무림의 공적이 될 수도 있어요.]진심이 깃든 그녀의 눈빛에 진무립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상천의 힘을 이런 곳에 이용할 것 같아?]헛다리를 짚은 단려화는 인상을 구겼다.
[그러게 왜 전부 죽일 사람처럼 말해요. 썩은 가지는 어떻게 쳐낼 생각인데요?]진무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혈교가 있잖아.]단려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이제이(以夷制夷)?]진무립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독제독(以毒制毒)이기도 하지.]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악인의 죽음을 동정할 만큼 단려화는 나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때 또 하나의 은밀한 기운이 빠르게 접근했다.
[천선각주 장유기가 정무원에 다녀왔습니다. 더불어 사대거파의 각주들이 서장에 다녀온 무인들을 하나씩 불러들이고 있습니다.]은무대 부대주 은수련의 목소리였다.
‘그들을 포섭하려는 모양이군.’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행을 처리하고 비각에 던져줘라.]이건 자신을 섣불리 건들다간 크게 다칠 것이라는 경고다.
방향을 튼 진무립은 단려화와 함께 조용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곧이어 은수련의 기척이 사라지더니 자신을 감시하던 두 명의 기운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상황을 눈치챈 단려화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봐요. 정말 사천맹과 전쟁을 벌일 생각은 아니죠?”
진무립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 * *
어둠이 내린 운룡각의 숙소.
저녁 식사가 끝났음에도 식당에 둘러앉은 후기지수들은 일어날 줄 몰랐다.
그들 모두는 진무립과 함께 서장에 다녀온 이들이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문이 열렸고 당천이 들어왔다.
연무장에 틀어박힌 그는 진설란의 부탁으로 온 것이었다.
“대주.”
진설란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났다.
“어서 오십쇼.”
국철영이 의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동료들을 둘러본 당천이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지?”
당소소가 물었다.
“소가주. 혹시 재상각주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던가요?”
“나는 온종일 지하연무장에 있었다.”
“그럼 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시겠군요.”
“짧게 설명해라.”
진설란이 입을 열었다.
“윗분들이 다가올 중목회에서 뭔가를 하려는 것 같아요.”
“무엇을?”
“당연히 진공자에 대한 것이겠죠. 상부에선 무슨 결과가 나오더라도 침묵하고 동의하라며 강요했어요. 이게 정상은 아니잖아요?”
당천은 고개를 돌렸다.
“상부의 결정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진공자는 목숨을 걸고 이번 임무를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함정에 빠진 천무대까지 무사히 구해냈어요.”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진심이에요?”
“그를 위해 뭔가 하려는 생각은 버려라.”
진설란을 비롯한 모두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번 임무로 조금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자신들의 착각에 불과한 모양이다.
탁!
소리 나게 탁자를 내려친 조영성이 벌떡 일어났다.
“돌아가지. 저런 인간에게 기대한 우리가 바보였다.”
윗 항렬에게 절대복종해야 하는 자신들과 달리 당천은 당가의 소가주다.
재상각주 당이경은 당가의 방계.
방계에게 뭔가를 강요당할 당천이 아니었기에 한 가닥 기대를 품은 것은 사실이다.
더불어 당천은 서장에서 함께 싸운 전우가 아니던가.
하지만 당천의 냉랭한 태도에 그들은 기대한 마음과 기다린 시간을 손해 본 기분이었다.
그들이 썰물처럼 식당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진설란은 슬픈 눈빛으로 당천을 응시했다.
“당신은…….”
잠시 머뭇거린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차갑게 돌아섰다.
홀로 남은 당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사천맹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알고 있었다.
그 분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하지 못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진무립은 얕은 술수에 당할 만큼 바보가 아니다. 어설프게 끼어드는 것보다 가만두고 보는 게 더 낫다는 걸 왜 모른단 말이냐?’
만일 진무립이 도움을 청해 온다면 응할 생각은 있다.
그러나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사천을 떠난 순간부터 고원의 마지막 싸움까지.
그간의 과정을 지켜본 당천은 뭘 하지 않아도 그라면 충분히 역경을 이겨낼 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식당을 나선 후기지수들은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에 밝게 떠오른 달과 아름답게 수 놓인 별 무리도 후기지수들의 답답한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한숨을 내쉰 조영성이 결심한 듯 말했다.
“이대로는 안 돼. 정무원의 사숙조님을 만나봐야겠어.”
곽도진이 물었다.
“우리 사숙께서는 내게 당분간 정무원에 가지 말라고 하셨네. 천선각주께서는 그런 말씀이 없으셨나?”
“알 게 뭐야. 몰라.”
잔뜩 인상을 쓴 조영성은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보인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파문을…….”
조영성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대주는 우리를 위해 수백이 넘는 적을 막겠다고 뒤에 남았던 사람이다. 우린 그런 대주를 위해 무엇을 했나? 이건 동료가 할 짓이 아니야. 나는 간다.”
그의 마지막 말은 모두의 가슴에 짙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짧은 정적이 지나간 뒤, 곽도진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설마 정무원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파문까지 당하겠는가? 나도 다녀오지.”
그는 서둘러 조영성의 뒤를 쫓았다.
운룡각을 나선 두 사람은 주변을 살피며 은밀히 신법을 전개했다.
[마치 도둑질을 하는 기분이군.]곽도진의 말에 조영성은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도둑질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잖아.]모두가 알고 있다.
다만 대놓고 말을 하지 못할 뿐이다.
정무원에 도착한 두 사람이 위사에게 말했다.
“청성의 강노사님과 점창의 하노사님을 뵙고자 합니다.”
위사는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두 분께서는 지금 안 계십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종보 노사께서는 한참 전에 출타하셨고 강유월 노사께서도 조금 전에 나가셨습니다.”
* * *
중목원의 최상층.
창가에 선 한천월이 대낮처럼 밝은 야경을 눈에 담았다.
‘조용하군.’
환하게 빛나는 달과 별, 사방을 비추는 횃불도 맹 내에 드리운 무거운 정적을 쫓아내지는 못했다.
거리를 둘러보던 한천월의 눈에 진무립과 단려화가 보인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릴 때.
때마침 한천월을 발견한 진무립이 싱긋 웃으며 포권을 취한다.
한천월은 슬쩍 손을 흔들고는 창을 닫았다.
늑대 새끼인 줄 알았던 놈이 알고 보니 승천을 앞둔 이무기다.
‘광룡이라. 진짜 용이 되도록 둘 수는 없지.’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형. 접니다.”
“들어 오시게.”
문을 열고 들어온 강유월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부드럽게 웃은 한천월이 손으로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게.”
강유월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말했다.
“이번 임무의 공은 모두 광무대주에게 있습니다. 합당한 공을 인정해줘야 할 것입니다.”
한천월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걸 어찌 모르겠는가? 지금 보고서를 토대로 비각주가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네. 중목회에서 전공에 걸맞은 논공행상이 이뤄질 것일세.”
“사형.”
“말씀하시게.”
“소제가 사형과 함께한 세월도 벌써 반백 년이 넘었지요.”
“허허허. 생각해보니 벌써 그리되었군.”
“소제는 사형을 잘 압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유월의 눈빛이 진중하게 변했다.
“처음으로 사형께 불손한 말씀을 올려야겠습니다. 광무대주를 버리는 패로 만들지 마십시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소제도 가만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사제.”
이제까지 호의적이던 한천월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나를 잘 안다면, 나와 척을 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네. 부디 그릇된 판단으로 대의를 그르치지 말게.”
“대의란 말을 가볍게 입에 담지 마십시오.”
한천월의 차가운 시선에도 강유월은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펴고 당당히 말했다.
“사대거파가 아니라는 이유로 광무대주를 핍박하는 것이 사형의 대의라면, 소제는 소제가 생각하는 대의를 따를 것입니다.”
할 말을 마친 강유월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천월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어리석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