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nster Duke Mistook Me for His Wife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딜리언은 메마른 눈동자로 제 손을 바라보았다.
잡을 수 있었다. 짧지만, 분명 손끝이 스쳤다.
하나, 결국 잡지 못했다.
딜리언은 허상이라도 붙잡아 보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등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내가 놓친 거야.’
딜리언은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어떻게든 삼켜보려 했다.
누르고, 누르고, 또 누르고.
하지만 그럴수록 억눌린 감정은 날뛰며 날카롭게 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눈앞이 붉게 흐려지고, 숨이 가빠왔다.
심장에서 목을, 그리고 뺨을 향해 타고 올라오는 저주가 느껴졌다.
이건, 폭주의 전조현상이었다.
지금 당장 폭주를 잠재워야 한다. 딜리언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지만, 막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 느껴본 무력감에 모든 것을 놓아버리려던 그때,
“딜리언! 진정해라!”
재빠르게 날아온 나단이 딜리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진정하래도! 이 일대를 다 날려버릴 생각이냐!”
큰소리로 딜리언을 꾸중하던 나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럴 때 리아는 어디 간 거야?”
나단은 아직 몰랐다. 리아가 어둠에게 끌려갔다는 사실을.
“빨리 리아에게…….”
딜리언은 말없이 나단을 바라보았다.
빛을 잃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등골이 서늘했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나단은 그럴 리 없다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어서 아니라고 말해라!”
딜리언도 나단처럼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
“어둠, 그 새끼가 리아 씨를 데려갔다.”
“그놈이 리아를…….”
충격으로 말을 잃은 나단의 뒤로, 비틀거리는 인영이 다가와 딜리언의 팔에 매달렸다.
“단테, 단테는 어떻게 됐죠?”
나단의 치료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지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단테!”
제 아들의 손에 배가 뚫렸음에도 지젤은 단테를 믿었다. 의식을 빼앗긴 건 잠시다. 분명 돌아왔을 거야.
그녀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말이 지젤의 희망을 산산이 부쉈다.
“그건 이미 단테가 아니다. 단테의 껍데기를 훔친 괴물이지.”
서늘한 시선, 감정 없는 목소리, 뺨까지 기어오른 검은 가시.
그리고, 검 끝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
“아직도 그게 네 아들 같나?”
이토록 싸늘하고 무서운 얼굴을 본 적이 있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에 지젤의 눈동자가 떨렸다.
“전하……. 아니죠? 그 검으로 단테를, 아니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진심이 가득한 그 말에 지젤이 어깨를 떨었다.
“저, 전하…….”
“사지 멀쩡하게 리아 씨를 데리고 사라졌다. 네겐 다행이겠지.”
“아…….”
딜리언의 말대로 지젤은 안도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안도는 잠시였으니.
어둠에게 그 몸을 빼앗겼다는 절망. 어쩌면 단테를 영영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지젤을 괴롭혔다. 그녀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했다.
“흐윽. 으윽.”
모르는 이가 봐도 안타까운 장면이었으나, 딜리언은 무감정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리아가 사라진 지금, 그 어떤 것도 딜리언을 자극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나단과 반쯤 정신을 놓아버린 지젤, 뒤늦게 이곳으로 달려오는 테르제와 카시스.
그리고 폭주를 막을 생각이 없는 딜리언.
리아가 사라진 지금, 모든 게 엉망이었다.
“으윽, 퉷!”
지젤이 바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바닥을 기며 구역질을 하고 있는 렉스터였다.
“렉스터 블렌트!”
지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총알처럼 쏘아져 나간 지젤은 도망치는 렉스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윽!”
“이 개자식!”
단번에 렉스터의 위로 올라탄 지젤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죽어! 감히, 감히 우리 단테에게 독을 먹여?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시X, 먹인 건 너잖아!”
“죽여버릴 거야! 죽어! 죽으라고!”
제 손에 검만 있었다면 렉스터의 목을 베고, 심장을 찌르고, 온몸을 난도질했을 텐데.
“너도 내 아이만큼 고통을 느껴봐.”
“컥.”
지젤이 떨리는 손을 들어 렉스터의 목을 조였다.
힘으로 보나, 체격으로 보나 렉스터가 지젤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분노로 눈이 돌아버린 지젤은 렉스터를 압도했다.
이성을 잃은 지젤을 말린 건, 현재 가장 이성적인 테르제였다.
“지젤! 진정하거라! 지금 렉스터를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너만큼은 내가 죽여버릴 거다!”
그리고 그 소란에서 한 발짝 물러난 카시스는 싸늘한 주검이 된 마누스를 내려다보았다.
‘결국, 이리되었군.’
예견된 죽음이었기에 카시스는 덤덤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번 습격 사건의 주동자다. 황실에 서신을 넣고, 시신을 수습하거라.”
부하에게 시신 수습을 넘긴 카시스는 딜리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상하다.’
가장 먼저 렉스터에게 달려들 거라 여겼던 딜리언은 한 곳만 노려보았다. 리아가 사라진 그곳이었다.
‘리아 양이 사라졌는데 저토록 평온할 리 없어.’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지한 카시스가 딜리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언뜻 보기엔 멀쩡해 보였으나, 딜리언의 상태는 폭풍전야와 마찬가지였다.
카시스가 다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공작, 진정해.”
길게 늘어진 딜리언의 그림자가 채찍처럼 뻗어져 나가는 모습에 카시스가 소리를 질렀다.
“공작!”
“딜리언, 안 된다. 참아야 해!”
뒤늦게 딜리언의 상태를 알아차린 테르제도 함께 그를 말렸지만, 딜리언에겐 닿지 못했다.
쏴아아아-
딜리언을 중심으로 몰아치는 바람이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며 주변을 삼키려 들었다.
그때, 붉은 끈 하나가 딜리언의 시야에 담겼다.
‘리본…….’
리아의 손목을 장식한 리본이었다.
그 순간, 바람이 잦아들었다.
춤을 추듯, 나풀거리며 내려온 리본이 딜리언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딜리언은 그 리본이 리아가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쥐며 입술을 묻었다. 코끝에 리아의 향기가 맴돌았다.
그러자 파괴적으로 날뛰던 기분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리아.”
딜리언은 그녀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제 심장에 새기는 것처럼.
“한 번은 봐줄게요.”
단테를 살리기 위해서든, 다른 이유 때문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리아가 제 손을 외면했다는 것.
딜리언은 그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고, 화가 났다.
“하지만 두 번은 없어.”
리아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다짐하듯 홀로 중얼거린 딜리언이 몸을 일으켰다.
“다음엔 절대 놓치지 않아.”
뺨을 뒤덮을 정도로 무섭게 크기를 키우던 저주는 말끔하게 사라진 후였다.
텅 비어있던 눈동자에 서서히 색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터오는 동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처럼.
붉게 일렁거리는 눈이 렉스터를 향해 물었다.
“말해. 리아 씨는 어디에 있지?”
리아가 돌아올 곳은 여기,
바로 제 곁이었다.
12장. 마지막 시험
깜박.
꺼졌던 불이 켜지듯, 멀어졌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깜박.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휘황찬란한 레이스와 번쩍거리는 보석이 눈을 아프게 했다.
‘여기가 어디지?’
당연히 독방 같은 곳에 감금당할 줄 알았건만, 눈이 부실 정도로 호화스러운 방에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순간, 눈앞이 빙글 돌고 머리가 욱신거렸다.
“윽.”
신음하며 몸을 웅크리자 실크의 부드러운 감촉이 피부에 스쳤다.
“이건…….”
나는 몸을 더듬으며 옷차림을 살폈다.
탄신 연회 당시 입고 있던 붉은 드레스가 아닌, 성녀가 입을 법한 하얀 드레스였다.
“……이런 미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건 전생의 내가 입던 옷이었으니까.
그리고 이걸 그대로 재현해낼 미친놈은 세상에 한 놈뿐.
“일어났어?”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상했던 대로 나를 부른 건 코마였다.
“꼬박 하루를 잠들어 있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벌써 하루가 지났다고?
“충격이 컸나 봐.”
“그게 누구 때문인데. 그리고 쓰러진 사람한테 이런 옷이나 입혀두고, 너 정말 악취미구나?”
“악취미라니. 널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해줘.”
코마는 단테의 얼굴로 가증스럽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작고 말랑한 손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소름이 끼쳤다.
“리아. 나는 그저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뿐이야. 그때 참 좋았잖아.”
“너 기억에 문제 있어?”
나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단테의 작은 몸이 휘청거렸다.
그에 놀란 나는 손을 뻗다, 씩 웃는 얼굴에 멈칫했다.
“내 기억은 멀쩡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거든. 봐봐, 이 방도 너도, 그대로잖아.”
그제야 방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벽지의 무늬는 물론이고, 장식품, 책상의 위치까지 본뜬 것처럼 똑같았다.
그때와 다른 점은 지나치게 화려한 침대뿐이었다.
“이건 내가 꼭 주고 싶어서 준비한 거야.”
마음에 드냐며 눈을 휘는 모습에 불쾌감이 치솟았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네 마음대로구나.”
“이상하다. 내가 어리광을 부리면 너는 다 받아줬잖아.”
“그건 네게 실망하기 전의 일이지. 내가 왜 너를 버렸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잘 알지. 리산드로 그 새끼 때문에 나를 버렸잖아.”
“정말 그게 이유라고 생각해?”
“그래, 네가 변한 건 리산드로 때문이야.”
기가 막혔다. 코마는 제 잘못은 생각도 하지 않고, 모든 걸 리산드로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네가 성안의 사람들을 죽였잖아! 내 눈을 피해 교묘하게 그들을 죽이고 사고인 척 꾸미고 그걸 엉뚱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운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매섭게 터져 나온 내 분노를 고스란히 받은 코마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게 잘못한 사람들이야. 죽어 마땅했다고.”
죽어 마땅했다고? 그들은 모두 착하고 선한 자들이었다.
설령, 그들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가 무슨 자격으로 벌한단 말인가.
“그런 하찮은 벌레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마음에 담고 있었어? 리아 너는 여전히 순진해 빠졌구나.”
“벌레……?”
“그래! 더러운 눈으로 너를 바라보고, 더러운 손으로 너를 만졌어! 미천한 인간 주제에, 하찮은 벌레 주제에 너를 탐냈단 말이야!”
미쳤다. 미쳐버린 거야. 나는 질린 눈으로 코마를 바라보았다.
“나도 인간이야. 네가 천하다고 여기는 인간이라고.”
“아냐, 리아. 너는 달라. 너는 내 세상인걸.”
대화가 되지 않는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결국, 제자리였다.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질 않는구나.
“나는 오벨러스가 만든 썩어 빠진 세상을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야.”
“……미친놈.”
“그 세상에서 너와 나는 새로운 세상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거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자고? 역겹고 소름 끼쳐.
더는 듣기 싫었다. 나는 코마의 멱살을 잡고 침대에 메다꽂았다.
“헛소리 작작 하고 단테를 놓아줘. 당장.”
“싫은데. 내가 이 몸을 돌려주면 당장 나를 죽일 거잖아?”
“그래, 넌 그런 녀석이지. 순순히 돌려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어.”
돌려주지 않겠다면 억지로라도 빼앗는 수밖에.
나는 단테의 가슴을 검지와 중지로 꾹 누르며 위로 당겨 올렸다.
숙주를 바꾸느라 약해진 지금이라면 강제로 끌어낼 수 있을 거다.
“크윽, 그, 그만두는 게, 좋을 텐, 컥!”
“왜? 네가 뒤질까 봐?”
코마의 말을 무시한 채, 억지로 그를 뽑아내던 그때였다.
“리, 리아 님.”
가녀린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분명, 코마가 개수작을 부리는 걸 테니까.
“단테 흉내를 내도 소용없어.”
“악! 아파요. 아파. 그만, 그만! 엄마! 흐엉.”
아까와는 다른 비명에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손을 물렸다.
“……단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