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st Powerful God in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231
231화
옛날에 어느 박학다식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망각은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축복이라고.
내공심법을 오랫동안 수련하여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은 사람으로서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었지만, 그들 역시 본질은 사람.
그렇기에 겪은 일을 모두 기억하지는 못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너무나 강렬한 기억은 망각이라는 축복에서 빗겨나가곤 했다.
어느덧 백 년을 훌쩍 넘게 살아온 풍전 역시 마찬가지.
그가 살면서 겪어 왔던 무수히 많은 기억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몇 가지는 이 나이가 될 적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배고픔과 추위였다.
어릴 적 마주했었던 죽음의 고비는 백 년이 지나서도 쉽게 잊을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당연히 송윤천과의 만남이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무능력했던 시절에 맞이한 벽.
가장 최근의 기억은 감히 정점에 닿아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했던 시절에 맞이한 벽이었다.
물론 이외에도 풍전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기억이 제법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개방의 일원이 되어 혼자서 거리를 떠돌던 자신에게도 가족이 생겼던 시절.
천하제일이라 손꼽힐 정도의 외모를 자랑하며 만인의 찬사를 받던 젊은 날.
평화를 만끽하다가 일어난 정마대전.
그리고 천산에서 맞이한 불구대천지원수와 같은 교주의 최후.
얼떨결에 무림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던 날…….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을 딱 한 가지만 꼽아보자면 자신을 바라보던 스승의 눈빛이었다.
정확히는 풍전이 스승을 뛰어넘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순간.
“축하한다.”
현실을 받아들인 스승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을 바라보았다.
대견함, 시기와 질투 그리고 원망, 감탄.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때는 스승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 스승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네 녀석도 언젠가는 자연스레 느끼게 될 터이니 너무 섣불리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스승의 말에 알겠다고는 했지만, 이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후로 또 수십 년이 흘렀으나 풍전은 여전히 지난날 스승의 눈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방의 무공을 이어가기 위해 제자를 들이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풍전에 미치지 못했다.
이외에도 마찬가지.
역대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풍전의 눈에 찰 만한 재능은 쉽게 등장하지 않았다.
간혹 뛰어난 재능을 발견했지만, 그 재능을 만개(滿開)하지는 못했다.
그건 타고난 재능과 개인의 노력에 천운이 겹쳐야 하는 일이었으니.
……바로 조금 전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런 느낌이었군요.”
남궁연을 앞에 둔 풍전이 시선을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어쩌면 한참 전에 한 점의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너무나도 후련한 표정으로 세상을 등진 스승이 자신을 바라보며 놀리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사제, 갑자기 왜 그래?”
남궁연이 예상치 못한 풍전의 반응에 검을 내리면서 놀라 물었다.
비무 도중에 노인이 저러고 있으니 무언가 수상하게 보인 까닭이었다.
대체로 노인들은 수십 년은 거뜬히 살 것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눈을 감기도 했으니까.
“아닙니다. 청승맞게 잠시 옛 생각이 떠올랐지 뭡니까.”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자면 남궁연은 풍전의 제자라 할 수 없었다.
같은 스승 아래에서 수학하는 사형제였으니까.
게다가 남궁연이 사저였고 자신은 그녀의 사제였다.
하지만 남궁연이 지금보다도 더 어리고 약할 적부터 풍전은 그녀의 보호자를 자청해왔기에 늘그막에 거둔 제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남궁연 역시 풍전을 사제라고 부르면서도 가르침을 주는 스승처럼 대하기도 했고.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다가왔지 뭡니까.”
“…….”
남궁연은 뒤늦게 풍전의 말을 이해했다.
사형제라는 관계를 떠나서 풍전은 남궁연보다 한참 앞선 인물이었다.
나이로 보나 그 실력으로 보나 그 차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
심지어 풍전은 늙어버린 육신을 핑계 삼아서 제자리에 멈춰있지 않았다.
남궁연과 같은 처지로 송윤천이라는 하늘을 만나서 하늘에 닿아보고자 함께 노력했고, 조금 더 높이 올라서는 데에 성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남궁연은 정말 등 뒤에 거대한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행동했고 뒤늦게 발견한 재능과 함께 하늘 높이 비상했다.
“부끄러운 얘기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사저가 마냥 어리게만 보이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어가고 성장함에 따라 달라진 외모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남궁연은 풍전과 동등한 눈높이에 서 있었으니 말이다.
“사저도 저와 똑같이 느끼지 않습니까?”
“……아직은.”
남궁연은 풍전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겸손이 들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기도 했다.
순수하게 무위만을 따진다면 어느 한쪽도 승패를 쉽게 가늠할 수 없으나 풍전에게는 거기에 더하여 풍부한 경험이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경험이란 무림에서 살아남으면서 자연스레 쌓아가는 것.
그 어떤 뛰어난 재능도 없는 경험을 더해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부족한 경험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그건 자연스럽게 얻을 겁니다.”
언젠가는.
아니, 풍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올 그 날.
남궁연은 완벽하게 풍전을 넘어서고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래도……, 저 역시 아직은 쉽게 물러날 수는 없지요.”
마석동을 시작으로 하나둘 풍전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친우, 동료들이 무인으로서 은퇴를 선언하거나 길었던 삶에 종지부를 찍으며 세상을 떠날 준비에 나섰다.
하지만 풍전은 아직 한참이었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정해진 수명의 끝을 맞이하기 전에 또다시 벽을 넘어서고 새로운 경지에 올라서는 것을 목표로 했으니 말이다.
“자, 오십시오.”
그러니 아직은 남궁연 앞에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좋아.”
풍전의 굳건한 의지를 확인한 남궁연은 차오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자칫 약해진 모습을 보이려는 풍전이 자신의 곁을 떠날까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가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니 자신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거두어 들었던 검을 앞으로 흔들림 없이 내밀었다.
풍전, 참월, 매화, 창천, 금강…….
이제는 겨울을 맞이하는 낙엽 진 나무처럼 저물어가기 시작한 절대자들이 이륙한 경지에 남궁연 역시 발을 내딛고야 말았다.
의지에 반응한 기(氣)가 검을 움직였다.
풍전은 날카로운 검 앞에서도 겁내지 않고 무릎을 굽혀 다시 정자세를 잡으면서 맨손을 앞으로 펼쳐냈다.
개방의 정수가 담긴 장법에 풍전의 뇌기가 더해졌다.
검기는 뇌기를 베어내려 했고.
반대로 뇌기는 검기를 파괴하려 했다.
설명은 단순했지만, 둘의 대치는 짧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고 처음과 같은 자세 속에서 둘은 무아지경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았다.
남궁연과 풍전을 두고 그 중심에서 맞닥트린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뒤로 물러나지 않고 서로 부닥치며 하늘로 올라갔다.
드러난 광경 사이로 비무의 주인공이 가려졌다.
식은땀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든 풍전은 그대로였지만, 남궁연은 반걸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힘의 차이가 아닌, 의지의 차이였다.
“아직입니다. 사저.”
뒤늦게 제갈과가 손님으로 찾아왔음을 발견한 풍전은 그 말과 함께 돌연 제자리에 뻗어 그대로 잠들었다.
꿈속에서 가장 먼저 보인 건 청출어람 하여 사부인 월마저 넘어선 남궁연의 뒷모습이었다.
‘꼴좋소. 사부.’
언젠가는 그날이 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날이 올 때까지 풍전은 이 삶을 버텨나가리라 다짐했다.
* * *
“남궁 소저, 축하하오. 정말 대단하시구려.”
멀리서 비무를 바라보던 제갈과가 부리나케 남궁연의 곁으로 달려왔다.
옆에 풍전이 잠들어있지만,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으면서.
“맹주님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셨어요?”
솔직한 심정으로 남궁연 역시 당장이라도 누워 잠들고 싶었다.
기운을 상당히 소진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극한으로 끌어올린 집중력이 단번에 풀리면서 전신이 흐물흐물해진 느낌이 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무려 무림맹주께서 친히 찾아왔다는데, 어찌 피곤하다고 물릴 수가 있을까.
결국, 둘은 그대로 잠들어버린 풍전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당연히 남궁 소저를 만나러 왔지 뭔가.”
너무 존대도 아니고 너무 하대도 아닌 아주 애매한 말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궁연은 무림맹에 소속되어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또, 제갈과의 직속 수하인 남궁헌의 친누이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옛날에는 편히 말을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조금 많이 달라지고 말았다.
와룡당주였던 제갈과가 이제는 무림맹주로 거듭났듯이.
남궁연 역시 이제는 과거 마주했던 대단한 후기지수 따위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말을 꺼내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무림맹과 함께하지 않겠나?”
남궁연의 성격을 알기에 제갈과 역시 빙빙 돌아가지 않고 대뜸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맹주님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알고 있네. 앞서 거절했었지.”
남궁연이 후기지수 중 최고로 명성을 떨칠 무렵에도 몇 번 마석동의 제안이 있었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우선 자신의 소속은 송윤천과 함께 머무는 장원이면 족하다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세상이 그리 단순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주 앞에서 대놓고 밝히기는 민감한 사실이지만, 정파(正派)라고 하여 항상 옳지는 않았다.
남궁연 역시 어릴 적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조금은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개인의 정의와 집단의 정의는 추구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남궁연은 자신 역시 그렇게 변하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남궁연이 거절한다고 하여 제갈과가 쉽게 물러날 인물은 아니었다.
먼 과거 한중왕 유비가 자신의 조상인 제갈량을 삼고초려(三顧草廬)하지 않았던가.
유비에게 제갈량이 그럴 가치가 충분한 인물이었던 만큼, 남궁연 역시 제갈과에게는 그러했다.
“거절해도 좋네. 하지만 먼저 제안을 들어보는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말씀하세요.”
만약 인연이 닿지 않았다면 단박에 거절했겠지만, 둘 사이에 엮인 인연이 제법 질겼다.
심지어 친동생이 남궁헌은 무림맹의 핵심인 와룡당에서 중추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었으니까.
아마 한 세대가 지나면 와룡당의 당주 그리고 천운이 따른다면 무림맹의 맹주로도 손꼽힐 수 있는 핵심 인재가 바로 남궁헌이었다.
‘헌이를 위해서라도 한번 들어는 보자. 나쁠 것도 없을 테니까.’
이런 이유에서 남궁연으로서도 단번에 거절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제 와서 남궁 소저를 무림맹에 구속할 수는 없다고 보네. 어떤 마음에서 이런 선택을 했는지도 이해를 하고 말이지.”
제갈과 역시 답답한 마음에 마석동과 풍전에게 이 상황을 하소연한 바가 있었기에 당시 그들에게 전해 들어 남궁연이 어떤 심정인지 알고 있었다.
“식객(食客)은 어떠한가?”
무림을 떠나 여러 유명한 가문 혹은 세력에서 식객은 제법 흔한 제도였다.
적당한 대우, 적당한 권리 그리고 적당한 의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성립하는 계산적인 관계.
물론, 제갈과의 제안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당연히 평범한 식객은 아닐세. 남궁 소저가 본인의 의지로 나서고 싶은 상황에만 나서는 걸세.”
무림맹은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실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누군가 들었다면 그게 무슨 식객이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이건 권리는 챙기되 의무는 덜어내는, 일종의 갑을(甲乙) 관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제갈과로서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무림에서 선택이란 오직 고수에게만 허락된 권리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단, 조건을 어기시면 그 순간 끝이에요.”
굳이 남궁연이 더럽히지 않아도 충분히 더러운 세상이다.
아무리 깨끗하게 만들려고 노력해도 깨끗해질 수 없는.
그러니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더럽히게 되느니 차라리 멀리 떨어져 더럽혀지는 세상을 지켜만 보고자 했다.
그러니 남궁연의 다짐을 깬 만큼, 확실한 약속이 필요했다.
“맹주로서 무림맹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네. 만약 이를 어긴다면 그로서 무림맹과 소저의 관계 역시 끝일세.”
그렇게 남궁연은 공식적으로 무림맹의 식객이 되었다.
이후로도 한동안 무림맹이 외부의 일에 개입하는 일은 없었다.
반대로 무림맹이 얽힌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차기 천하제일인으로 손꼽히는 남궁연이 한 다리 정도는 무림맹에 걸친 상태였던 까닭이다.
처음 송윤천이 두 남매가 각자 원하는 대로 성장하여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처럼.
남궁연과 남궁헌은 각자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송윤천이 고대하고 남매가 기다리던 그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똑똑-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과 함께.
천하제일 괴력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