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st Powerful God in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35
35화
중원 오악(五岳) 중 하나로서 남악(南岳)이라 불리는 형산(衡山).
과거 숭산의 소림사, 화산의 화산파와 함께 명문 정파로 손꼽히던 형산파가 자리 잡았던 명산이다.
다만, 모종의 이유로 형산파가 사라진 후 제법 유능했던 속가제자가 세운 청수문이 형산파의 빈자리를 채웠다.
물론 초창기에 형산파의 올곧은 의지와 무공을 계승하겠다는 마음가짐은 마땅히 존경할 만했다.
하지만 다들 그렇듯 흐르는 세월 속에서 안타깝게도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앞으로는 적당히 정의로웠으며 뒤로는 적당히 악행을 저질렀다.
이런 청수문의 역사도 어언 이백여 년.
소림사, 화산파와 같이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형산파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청수문에도 종말이 다가오는 듯했다.
“아, 자네 혹시 그거 알고 있나? 그러니까 내 말은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일세. 어느 누가 그 천하제일이라던 형산파가 이렇게 망할 줄 알았겠나? 아마 본인들도 몰랐을 거야. 그리고 청수문도 훗날에는 그리 기억될 걸세.”
“…….”
“혹시 나를 원망하나?”
“…….”
“무림에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당장 생사(生死)가 갈린다는 뜻인데, 설마 잊고 있었나? 천한 놈들은 죽어 나가도 자신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라도 했었던가?”
“…….”
“이보게 소문주 들었다면 단답이라도 좀 해보는 게 어떠한가? 내 말 듣고 있나?”
“…….”
“아무리 초면이라 하여도 어른이 말을 하면 답을 해야지. 아니 그러한가?”
노인의 시선이 청수문의 유일한 생존자에게 향했다.
“쯧, 고작 이런 일로 정신이 나가버리면 어디에 쓰겠나?”
바닥에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그려대던 노인이 혀를 찼다.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넋이 나간 채 땅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문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것 좀 보겠나?”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는 듯 고개를 바짝 숙이고 있던 소문주의 머리채를 붙잡아 올려서 정면을 바라보게 했다.
청수문의 한복판.
노인이 나타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여러 제자가 수련에 열중하며 땀을 흘렸던 그 장소에는 붉은 용(龍)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생생한 그림을 마주했다면 작은 감탄이라도 나올 법하건만.
“흐음……,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않은데……. 소문주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소문주는 노인의 질문에 한 번의 대꾸도 없이 반쯤 초점이 나간 상태였다.
붉은 용은 먹물 따위가 아니라 청수문의 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죽어 나간 제자들의 시체가 덩그러니 방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소문주의 시선이 한 중년인의 시체에 고정되었다.
창백하게 굳어버린 시체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혈과 아혈이 집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작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서서히 피를 흘리다가 죽은 그 사내는 바로 자신의 친부.
그가 바로 대(大) 청수문의 문주였다.
몇 년 전에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섰으며 언젠가는 다음 벽마저도 깨뜨릴 것이라 장담했었던, 정파의 축이자 청수문 최강의 무인.
그런 이가 눈앞의 노인 앞에서 검 한 번 제대로 뽑아보지 못하고 너무나도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어버렸다.
다른 장로와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
이제 청수문에서 살아남은 건 오직 소문주 한 명뿐이었다.
“도대체 왜…….”
“오, 드디어 입이 열렸나.”
노인은 감당치 못할 큰 충격으로 얼이 빠져 있었던 소문주의 반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소?”
소문주는 그저 묻고 싶었다.
왜 자신들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왜 자신만 살려둔 것인지.
저 노인은 뭔데 사람을 죽여놓고서 아무렇지 않게 그 피로 그림을 그려대는 건지.
“이유? 그래, 이유라…….”
노인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턱수염을 긁적였다.
청수문에 등장하여 점혈로 모든 이를 제압했다.
그런 뒤 제압한 백여 명의 손목을 반 치 정도 깊게 베어내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게 했다.
그리고 끝없이 흐르는 피로 거대한 화룡을 완성 시키기까지.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었던 노인이 처음으로 고심에 빠졌다.
그리고 노인은 곰곰이 그 이유를 떠올렸고.
여기에 엄청나게 거창한 이유 따위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다만, 이들의 만행에 조금 화가 났으며 자신은 화풀이했을 뿐이다.
“한 번 들어보겠나? 형산을 둘러보는 도중 전낭이 텅 비어 저기 아랫마을의 저잣거리에서 동전 몇 푼을 받으며 초상화를 그려댔지. 한두 장만 더 그리면 딱 소면 한 그릇에 만두 한 접시를 먹을 수 있었는데 그때 저기 저 녀석이 내게 다가오더군.”
이들이 강자로서 약자를 약탈했듯.
노인은 강자였으며 이들은 약자이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느새 소문주의 시선은 노인의 손끝을 따라 어느 시체에게 향했다.
가장 먼저 제압당했고, 마지막으로 죽은 이.
두려움 속에서 죽은 탓인지 옅은 회색 도복이 피땀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그 시체는 자신과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었다.
워낙에 오냐오냐하며 컸기에 성격이 그리 좋지 못했고, 밖에서 간혹 사고를 치기도 했었지만,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피붙이였다.
“저 녀석이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이 근방은 모두 청수문의 영역이니 자신들의 허락 없이는 돈을 벌 수 없다고. 그러면서 당장 수입의 삼 할을 바치라지 뭔가?”
삼 할이라 하면 합당해 보이지만, 정작 관리들이 거둬가는 세금은 그보다 훨씬 적었다.
“자네가 듣기에는 이게 말이 되는가? 노부가 거기에 대고 무어라 했을 것 같은가? 당연히 싫다고 하였지. 그랬더니 눈앞에서 문방사우(文房四友)를 찢고 던져 부숴버리더군.”
“……. 고작 그런 되지도 않는 이유로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소? 굳이 백 명이 넘는 이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소? 도대체 왜!”
소문주는 정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물어왔다.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당연히 그럴 것인데, 대체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힘없는 무지렁이들이 약간의 노고를 바치는 게 부당한가?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에 그의 언행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대들에게 당했던 이들도 똑같이 생각했겠지. 산에 처박혀서 무식하게 검이나 휘두르는 놈들이 뭐라고 삼 할을 받쳐야 하냐고 말이야. 얼마나 고혈을 빨아왔는가? 일 년? 십 년? 백 년? 아니면 그것보다 더 오래?”
“우리는 강요한 적이 없소. 이는 정당한 보호비요.”
소문주의 음성에서는 어떠한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기에.
“호오-,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되지도 않는 삼류 무공 따위를 익힌 흑도 몇십 놈을 내버려 두고 그들을 감시하는 게 보호인가?”
“…….”
꽉 깨문 입술이 터져 턱을 타고 피가 흘렀다.
소문주는 노인의 비아냥 섞인 질문에 답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는 속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옳았고 또 억울했으며 노인은 강한 미치광이였을 뿐이다.
“우리만 그렇소? 살펴보면 우리보다 더한 이들이 이 천하에 수도 없는데. 왜 우리만? 왜!”
“너희가 뭔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노부의 눈에 띈 이들은 모두 같은 신세가 되었으니.”
“무림맹이 이 악행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소문주가 이를 악물며 외쳤다.
과연 이 미치광이 노인은 무림맹의 위엄을 무시할 수 있을까?
감히 대무림맹의 명성을 무시할 수 있을까?
“무림맹이라, 하하, 그거 참 대단하군. 참으로 대단해.”
노인은 소문주의 태도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자신은 정의이며 피해자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순수한 악의(惡意).
그래서 죽이려던 마음을 달리 먹었다.
푹-
노인의 손가락이 움직였고 곧 소문주의 점혈이 풀렸다.
자유의 몸이 되었건만, 소문주는 빈 주먹을 꽉 쥘 뿐, 끝내 코앞에 있는 노인을 공격하지 못했다.
“살려주마. 고통 속에서 나를 원망하며 목숨을 끊어도 좋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죽여도 좋다. 강요는 하지 않으마. 선택은 살아남은 자의 자유다.”
노인은 허리를 숙여 소문주와 눈을 마주치며 그리 말했다.
“……, 반드시. 내 반드시 당신을 죽이러 가겠다.”
소문주가 들릴 듯 말 듯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을 대로. 아,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가 죽기 전에 찾아왔으면 좋겠군.”
노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청수문을 떠났다.
소문주, 아니 이제는 문파가 없으니 아무것도 아니게 된 청년은 떠나가는 노인을 쫓지 못했다.
못난 자신에게 화가 났고 부족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으아아아아아-.”
청년은 그저 무기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워 비명을 질러댔다.
고요 속에서 울린 비명은 뒤늦게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무림맹까지 흘러 들어갔다.
혈화백(血畫伯) 강휘가 청수문의 피로 화룡을 그렸다고 말이다.
* * *
모월 모일 신시(申時) 말.
딱 배가 고파올 시간, 송윤천을 비롯한 장원 식구들은 마석동의 초대를 받아 무림맹으로 향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무림맹주의 집무실에 외부 손님이 입장했다.
다만 여기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거지야, 그런데 여기 주인은 어디 갔길래 손님이 왔는데 얼굴을 안 보이냐?”
바로 이 행사의 주최자인 마석동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무려 한 시진이나 말이다.
이에 사실상 장원과 맹의 중간다리 역할인 풍전이 괜히 민망해졌다.
“사부, 여기 열 살도 안 된 사저와 사형도 잘 기다리시는데 뭘 그리 재촉합니까.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그 말도 벌써 다섯 번은 더 들었다.”
“그럼 한 번만 더하겠소. 제발 좀 그만 재촉하고 기다리시오.”
“하~, 내가 장주님이 가만히 계시니까 참는다. 나도 참 성질 많이 죽었다.”
“퍽이나…….”
“거지야, 막내가 지금 사부한테 뭐라고?”
“왜 그러오?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재촉해오는 월을 보고 풍전이 타박해왔다.
누가 봐도 스승과 제자처럼 보이지 않는 둘 사이였지만, 이를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반 시진을 훌쩍 넘었잖아. 이럴 거면 그냥 한성 객잔으로 갔지.”
“끄응, 석동이 그놈이 아무래도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모양이오.”
사실 여기서 유일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건 월이었고, 나머지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송윤천은 무언가 추억에 잠겼는지 벽 한 편을 차지하고 있는 서재에서 고서 몇 권을 꺼내와 말없이 뒤적였다.
‘그렇다고 내가 가서 무작정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풍전도 대충 무림맹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으니 대강이나마 친구의 사정을 이해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길래.’
평소에도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만큼 워낙에 회의를 싫어하는 녀석이다.
그런데 송윤천이라는 귀한 손님을 애써 초대해놓고도 늦는다?
분명히 무슨 큰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것도 호재가 아니라 악재로.’
호재면 칭찬이나 하면 그만이지만, 악재는 다르다.
무림맹에서 직접 관여하고 대처해야만 하니 그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느라고 회의가 길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기다림에 지친 월이 두어 번 정도 더 구시렁거리고 풍전이 두어 번 정도 더 참을성 있게 기다려 보라는 말을 꺼낼 즈음.
마침내 집무실의 주인 마석동이 다급하게 등장했다.
“다들 오셨구려.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오.”
사과부터 건네고 보는 마석동은 유달리 지친 표정이었다.
이에 풍전이 물어왔다.
“석동아, 어디서 사고라도 크게 터졌냐?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어찌 알았냐?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청수문이 멸문지화 당했다는군.”
굳이 소문주가 생존했다는 사실까지는 알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나마 유일한 희망이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회생이 불가했으니 말이다.
천운이 따라주어 살아남은 소문주가 다시 청수문을 일으켜 세운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세를 보이는 건 아마도 백 년 혹은 그보다 더 긴 세월이 지난 후일 터였다.
“청수문이면 호남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문파가 아닌가? 문주도 상당한 고수라고 들었는데……. 확실한가?”
풍전이 청수문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는지 물었다.
“그래, 아무래도 그 미치광이 놈들이 이번에 제대로 작정했나 보다. 칠악(七惡) 녀석들 말이다.”
“커억-.”
이번에도 가장 격하게 반응한 건 구석에서 숨죽이고 뒤따라오던 곽범뿐이었다.
“약골아, 칠악? 그건 또 뭐냐?”
금시초문인 월이 고개를 뒤로 돌려 물었다.
곽범은 여기에 대고 대체 아는 건 뭐가 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꾹 참고 설명에 나섰다.
“칠악은 그러니까 쉽게 표현하자면 강한 악인들이 모여서 만든 건데요…….”
이미 알고 있었던 마석동과 풍전을 제외한 모두가 곽범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천하제일 괴력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