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st Powerful God in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53
53화
진현이 주화입마에서 깨어나는 며칠 사이 화산에는 눈이 제법 내려 무릎 높이까지 쌓였다.
눈길을 해치며 연화봉으로 돌아가는 길.
수십 년 만에 마주하는 그 길이 진현에게는 가까우면서도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의 고향을 눈에 담게 되었다.
많은 게 그대로였고, 많은 게 변해 있었다.
“매화께서 돌아오셨다-!”
“화산제일께서 연화봉에 당도하셨다-!”
“진인께서 드디어 폐관 수련을 마치시고……!”
“진현 진인 감축드립니다!”
“사조님 감축드리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화산의 제자가 모두 밖으로 나와 진현의 귀환을 맞이해 주었다.
만인의 얼굴에는 기대와 행복이 가득했다.
공식적으로 지난 세월 진현은 폐관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예고도 없이 대뜸 모습을 드러냈으니 모르는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그가 목표를 성취하고 등장한 것으로 여길 터였다.
이들을 바라보는 진현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는 대체 얼마나 멈춰 있던 것인지.’
이제는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훨씬 더 많아졌다.
낯이 익은 몇몇은 모두 자신보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뭔가 심리적으로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다.
“자, 자. 다들 물러나 주시오. 사숙께서는 막 수련을 마치신 마당이라 심신이 피로하시니, 우선 휴식을 취하시고 며칠 후에 날을 잡아 정식으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소.”
옆을 지키던 장문인은 진현이 이 상황을 그리 반기지 않음을 눈치채고 금방 상황을 정리해나갔다.
그러자 사방을 가로막던 인파가 감쪽같이 해소되었다.
지인들과 있을 때는 한없이 가볍게 행동했지만, 외부에서는 권위 있는 장문인으로 정평이 자자했다.
그러니 화산에서는 장문인의 발언이 곧 법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 조금 나중에 보도록 하지.”
송윤천이 먼저 나서서 잠시 물러난다, 의사를 밝혔다.
“배려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은인이고 친우이나 화산파 내부의 문제는 장문인과 진현 둘이서 결정하는 게 맞았다.
“나도 조금 쉬다가 다시 오마.”
풍전도 눈치가 있으니 별말 없이 함께 물러났다.
둘은 곧장 숙소로 향했다.
“그런데 연이는 어디에 두고 왔나?”
의도치 않게 남궁연을 홀로 남겨둔 게 걸린 송윤천이 물어왔다.
“사저는 화산의 정기를 느끼고 싶다고 해서 숙소에 두고 왔소.”
풍전이 태연하게 답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화산파 한가운데에서 풍전과 함께 온 일행을 푸대접할 리가 없었다.
“같이 가보지.”
화산의 정기를 받는다고 하니 남궁연이 도사라도 될 작정인가 싶었다.
“연아.”
“사저.”
그런데 막상 숙소를 찾아가니 남궁연은 보이지 않았다.
“이보게, 여기 머물던 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조금 당황한 풍전이 밖으로 뛰쳐나가 주변에 청소하고 있는 하인에게 남궁연의 행방을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수련장으로 가셨지요. 저쪽으로 쭉 가시면 금방 나올 겁니다.”
“그래, 고맙네.”
하인의 안내에 따라 수련장으로 가니 남궁연과 비슷한 또래에 화산파 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여럿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들이 죄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사방에 누워있다는 것뿐.
남궁연은 그 중심에서 한껏 여유 있는 표정으로 홀로 서 있었다.
“요새는 화산의 정기를 저렇게 받나? 내가 보기에는 화산의 정기를 짓밟는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 글쎄……. 나도 금시초문이오.”
당황한 풍전이 주변을 쓱 훑었는데 크게 다친 녀석들은 보이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주님!”
둘을 발견한 남궁연이 성큼성큼 밝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 물어봐도 잘 지내고 있었구나.”
“헤헤, 그럼요. 일은 잘 끝나신 건가요?”
“그러니 이렇게 멀쩡히 왔겠지.”
“저는 당연히 장주님을 믿고 있었죠! 그런데 풍 사제가 안 그런 척하면서 안절부절못하더라고요,”
“호오……, 그래?”
“장주. 오해요. 오해. 설마 내가 그랬을 리가.”
“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아무래도 친우인 진현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풍전이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슨 일이지?”
송윤천도 남궁연이 괜히 힘자랑이나 할 정도로 고약한 심성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남궁연은 오히려 어린 시절부터 갖은 고초를 겪다 보니 어지간한 어른보다 성숙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인지는 알아야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이 대변할 수 있겠다 싶어서 이유를 물었다.
“혼자 수련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와서는 대뜸 화산파가 천하제일이니 뭐니 하면서 무시하길래 듣고 있으니 괘씸해서요.”
남궁연이 괜히 자신이 나서서 송윤천이나 풍전에게 피해를 줬나 싶어, 살짝 풀이 죽어 말했다.
예상대로 잘못은 저쪽에 있었다.
“잘했다. 연이 네 잘못이 아니니 기죽을 필요 없다.”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일이었다.
콧대 높은 핏덩이들이 자신이 최고인 줄로 착각하는.
실상 저들은 화산의 조약돌만도 못하지만, 이미 자신이 곧 화산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괜찮을까요?”
이미 사고를 쳐놓고 인제 와서 뒤늦게 이렇게 물어보는 게 뭔가 순서가 엇갈렸지만, 탓할 것도 없었다.
“물론. 누가 네게 뭐라 해도 늙고 든든한 사제가 알아서 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렇지?”
송윤천이 고개를 돌려 풍전과 눈을 마주쳤다.
“크흠, 장주가 잘 아시는군. 사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풍전이 제 가슴을 두드리며 한참 어린 남궁연 앞에서 잘난 척을 해댔다.
사실 장원에서나 막내라고 구박받지 밖에서는 정말 잘나기도 했고, 그럴만한 능력도 있었다.
“후- 다행이다. 그런데 장주님, 화산파라고 해서 처음에는 솔직히 긴장했는데요. 제 또래에는 그렇게 대단한 녀석은 없는 거 같아요.”
남궁연은 괜히 남이 들을까 싶어 속삭이듯 일러댔다.
“화산이야 충분히 대단하겠지. 다만 연이 네가 더 대단할 뿐이고.”
“그럼요. 사저만큼 하는 녀석들이 세상에 얼마나 더 있겠어요.”
셋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체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감히 대화산의 제자를 이렇게 만들었더냐! 내 화산의 명예를 걸고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두 눈에 퍼렇게 멍이 든 애 하나가 뒤로 제 스승인 듯한 자를 데리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스승님! 저기 저 여아입니다! 저기요!”
어린 녀석이 제 스승을 믿고서 악에 받친 표정으로 남궁연을 가리켰다.
“마침 우리 장원의 막내가 시기적절하게 나설 순간이 왔군.”
“나는 사제만 믿을게.”
송윤천은 남궁연과 함께 뒤로 슬쩍 물러나며 풍전을 앞으로 세웠다.
적어도 정파에서는 풍전을 앞세워서 안 되는 일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송윤천의 판단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호기롭게 등장한 이가 남궁연에게 다가오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풍전을 마주하더니 식겁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저기, 풍전 선배가 왜 여기에 계십니까요……?”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면서 마구 욕지거리를 내뱉던 이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가며 물어왔다.
며칠 전, 정문에서 풍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바로 그 장로였다.
“세상에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저 아이가 자네 제자였어?”
“히끅-!”
장로는 늘어진 뱃살과 턱살을 가만두지 못하고 딸꾹질을 해댔다.
“왜 그리 놀라고 그러나. 그래, 가만두지 않는다고 했나?”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어디 한 번 해보시게. 응? 쳐. 한번 쳐 보라고.”
풍전은 뒷짐을 진 채로 장로를 향해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이고, 정말. 그만 좀 하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가, 가자…….”
앞서 남궁연에게 나가떨어졌던 어린 제자들은 차마 장로가 애걸복걸 매달리는 모습을 볼 수 없어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 * *
화산에도 자줏빛 노을이 저물고 짙은 밤이 찾아왔다.
불빛이 꺼진 연화봉에는 적막함이 흘렀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장문인의 집무실만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 때문이었다.
참석 인원은 총 네 명.
대화산파의 장문인, 구성의 일인이자 화산제일인 진현, 마찬가지로 구성의 일인이자 개방의 태상방주 풍전.
그리고 화산파의 은인 취급을 받게 된 송윤천이었다.
무림에 다시 없을 만큼 귀한 이들이 모인 술자리였지만, 실상은 그저 만취한 늙은이 셋과 멀쩡한 사내 하나였다.
고수들은 아무리 독한 술을 들이켜도 취하지 않는다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막대한 내공이 주독(酒毒)을 해독하기 때문이다.
내공을 쓰지 않는다면 결국 거기서 거기였다.
아, 당연히 만독불침의 경지를 한참 전에 넘어선 송윤천은 제외였다.
‘술버릇이 하나같이 고약한 녀석들일세.’
술자리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자, 다들 잔을 들어주십시오. 오늘이 제가 태어나 가~장 기쁜 날입니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장문인.
“허허, 술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취하는구먼. 허허허.”
남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계속 웃어대는 진현.
“어? 요즘 젊은 녀석들은 말이야. 진심이 없어! 진심이. 무공이 무슨 애들 장난이야? 무공이 무슨 광대놀음이냐고-!”
꼰대처럼 툴툴거리는 풍전까지.
송윤천은 이 재밌는 장면을 한 발 떨어져서 빠짐없이 바라보았다.
다들 술기운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는데 슬슬 졸음이 찾아오는지 눈이 풀려가며 고개를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머지않아 하나둘 바닥에 들이 누워 잠들어 버렸다.
‘바람이나 좀 쐴까.’
숨을 내쉴 때마다 주향이 내부를 타고 돌아 답답함이 느껴졌다.
송윤천은 혹여 만취한 이들이 깰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다.
장문인이 한가득 내왔던 매화주의 절반가량을 송윤천 홀로 해치운 마당인데도 걸음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피곤하네.’
송윤천이 뻐근한 목덜미를 꾹꾹 문질렀다.
분명 육체적으로는 전혀 지치지 않았으나 꼬박 사흘 동안 진현 때문에 고생했으니 정신적인 피로가 몰려왔다.
‘고된 일을 마친 후에는 역시 연초만 한 게 없…….’
어느 매화나무 아래 기대서 습관처럼 연초를 입에 물고 불을 피우려던 송윤천이 멈칫했다.
화산파 전역이 금연구역이라던 후기지수의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나중에 피지 뭐.”
어차피 날이 밝으면 곧바로 화산을 떠날 테니 그리 오래 참을 것도 없었다.
송윤천은 딱히 잠이 오는 것도 아니어서 연화봉을 거닐기로 했다.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지금 그가 눈에 담고 있는 화산과 같지는 않을 터였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선 송윤천은 몇 시진 동안이나 주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저 너머에서는 어둠이 가시고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알리듯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내 눈에 담긴 모습이 생에 있어서 마지막 기억이기를.’
송윤천은 짧은 기도와 함께 화산파로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 떠날 시간이 되었다.
천하제일 괴력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