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st Powerful God in the World RAW novel - Chapter 96
96화
무아지경(無我之境)은 극한의 집중 상태에서 자신조차 잊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지금 무당산에서 가장 높은 천주봉의 중심에서 한 사내가 무아지경에 완전히 빠져든 채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마치 다음에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아서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 사내가 바로 태극, 청운 진인의 유일무이한 직전 제자 일원 진인이었다.
일원 진인 역시 청운 진인이 뒤늦게 맞이한 제자였는데 화산의 진현 진인과는 경우가 매우 달랐다.
진현 진인은 주화입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해서 자하신공의 계승을 포기한 채 제자를 극구 거부하다가 몇 년 전에야 제자를 들였다.
그러나 청운 진인은 따로 사연이 있는 게 아니고 정말로 괜찮은 인재를 찾지 못하다가 일원을 제자로 맞이했다.
그게 어느덧 이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무당파의 제자가 된 이후로 언제나 성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지만, 근래에는 최소한의 휴식을 제외하면 언제나 검을 잡고 있었다.
‘꿈자리가 뒤숭숭해.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아.’
고작 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단순하게 악몽을 계속 꾸는 정도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무당파의 제자로 들어와 도호를 받아 일원 진인이지만, 속세에 두고 온 이름과 신분이 있었다.
속세에서의 이름은 노다무.
전통 있는 무당(巫堂) 집안의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이십여 년 전 속세에서의 이름을 버리고 일원 진인이 되었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무당으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관상에 사주에 풍수에 점까지.
어쩌면 이런 영적인 혈통이 일원에게도 이어진 걸지도 모른다.
그가 똑같은 꿈을 수차례에 걸쳐서 꾸게 되면 가까운 시일에 현실로 이루어지곤 했다.
금덩어리가 제 발로 도망가는 악몽을 꾸니 무당파에 도둑이 들었다.
무당파의 전각이 붉게 물드는 악몽을 꾸니 산불이 나기도 했다.
장문인이 돼지를 품에 안는 꿈을 꾸니 거처 뒤편에서 뜬금없이 삼백 년 된 산삼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 일원 진인의 꿈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스승인 청운 진인이 나오고 있었다.
제자에게는 친구 같은 스승이었기에 꿈에서 역시 말이 참 많았다.
-제자야, 오랜만이구나. 얼굴은 좋아 보이는데 잘 지내고 있겠지?
-네 걱정은 안 한다. 너는 오히려 너무 열심히 해서 걱정이지.
-좀 쉬엄쉬엄하거라. 그러다가 너무 이른 나이에 청출어람(靑出於藍) 한다면 이 스승을 조금 부끄럽지 않겠느냐?
-응? 네 또래 녀석들처럼 맛있는 안주에 곡차를 진탕 마시다가 취해, 길거리에 나앉아서 잠들기도 하고, 연초도 좀 태우고.
-허허……. 술, 아니 곡차를 무슨 맛으로 마시냐고? 이 스승은 힘든 일을 많이 겪고 나니 그저 달착지근한 미숫가루 같구나.
-오랜만에 이 하늘 같은 스승이 태극혜검이 무엇인지 시원하게 보여주마. 자, 거기서 잘 보거라.
스승은 제자에게 무엇을 말하려 함일까.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물어보아도 스승은 그저 가볍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제자에게는 스승의 웃음이 슬픔을 가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오늘.
꿈에 나타난 스승의 모습이 조금 달랐다.
-제자야. 네게 맡긴 짐이 너무 무거우니 미안하구나.
-그래도 이 스승은 든든한 제자가 있어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구나.
-귀한 말씀이니 잘 새겨듣거라.
스승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가와서 자신을 한 번 안아준 뒤 멀리 떠나버렸다.
달려가서 붙잡고 싶었지만,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봐도 스승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전신이 땀으로 젖은 가운데 새벽녘 잠에서 깨어난 일원 진인은 곧바로 검을 잡고 몇 시진 동안 무아지경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천재라 하여도 사람인 이상 체력도 집중력도 무한하지는 않으니.
일원 진인 역시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이 되자 무아지경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 앞에 난데없이 낯선 사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대는 누구시오? 여기는 또 어떻게 오셨소?”
낯선 사내의 얼굴은 분명 기억에 없었으며 복장 역시 무당파의 도복이 아니었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 닥쳐오니 경계심이 강해지는 가운데.
“멀리 비켜서라.”
낯선 사내는 자신에게 그리 말하고 조금 전까지 일원 진인이 서 있었던 자리로 가서 아무렇지 않게 검을 빼 들었다.
“잠시만 멈추시오. 설마 그 검은……!”
눈에 더없이 익숙한 송문고검임을 알아챈 일원 진인이 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낯선 사내는 그의 외침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일원 진인은 금방 사내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으며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 정체는 태극혜검.
사내의 모든 동작과 검이 그리는 모양새.
그건 분명히 스승인 청운 진인과 제자인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태극혜검이었다.
극도로 놀란 일원 진인의 동공이 전율과 함께 크게 확장되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당장에 검을 빼앗은 뒤 낯선 사내의 멱살을 붙잡고 따져야 함이 당연할 진데.
어느새 그의 시선과 생각은 모두 사내가 보여주는 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원 진인은 떨리는 손을 간신히 부여잡고 사내가 펼치는 태극혜검을 눈에 담았다.
사내는 멈출 생각이 없었고 일원 진인 역시 멈출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저물어가는 노을 아래.
사내가 그려낸 태극이 완성되었다.
태극 아래에 선 사내는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일원 진인 역시 태극이 점차 희미해져 바람을 타고 사라질 때까지 미동조차 없었다.
태극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
입을 열어서 수많은 호기심과 의심을 뱉어내려는 일원 진인에 앞서서 낯선 사내가 그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청운 진인의 유품을 전하러 왔다. 태극혜검과 함께.”
사내가 받으라는 듯 검을 검집째 일원 진인에게 내밀며 말했다.
일원 진인이 전해 받은 검집에서 검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이건 스승님의…….”
어찌 그 특유의 무늬를 잊을 수 있을까.
틀림없이 스승 청운 진인의 송문고검이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그대가 어떻게 태극혜검을 알고 있는 거요. 그리고 그 태극혜검은 대체 뭐요.”
일원 진인이 숨도 쉬지 않고 연달아서 질문을 퍼부어댔다.
송윤천은 가만히 서서 듣고만 있다가 일원 진인이 숨이 차서 벌게진 얼굴과 함께 입을 다문 후에야 답을 주었다.
“나는 송윤천. 장삼봉과 연이 닿아 이곳에 이르렀다.”
“…….”
일원 진인이 이마를 잔뜩 찡그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치광이요……? 아니면 머리를 심하게 다쳤소? 아니면 젊은 나이에 치매? 그것도 아니면 주화입마?”
한참 전에 이곳 천주봉에서 우화등선하신 장삼봉 조사님과 연이 닿았다니.
본인이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건가?
아무튼, 송윤천이라는 사내는 제정신은 아닌듯했다.
‘아니지, 아니야.’
기록된 바에 따르면 장삼봉 조사께서는 이곳 무당산 천주봉을 거처로 삼으셨으나 방랑벽이 있어 천하 각지를 주유하셨다고 한다.
혹시 그때 누군가에게 혹은 어딘가에 태극혜검의 흔적을 남겨 두신 건 아닐까.
그리고 이 송윤천이라는 사내는 천운이 닿아서 그 흔적을 발견했을 테고.
일원 진인은 수많은 가정을 하느라 두통이 이는 듯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장삼봉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혹시 네 성이 장씨 더냐? 아니지. 아니야. 녀석이 자손을 보지 않았는데…….”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떠올리니 정말 둘이 똑 닮은 듯했다.
“어허, 다른 건 다 괜찮으나 장삼봉 조사님의 존함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 건 자제해 주시오. 무당파의 제자 앞에서 그런 언행은 예의에 어긋나오.”
일원 진인이 엄중히 경고했다.
“내가 내 지인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겠다는데 무슨 예의를 갖추나?”
“그만! 마지막 경고이니 그만두시오.”
송윤천이 고개를 저었다.
‘의심이 많은 녀석은 이래서 피곤하다니까.’
무슨 도사라는 녀석이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송윤천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코끝을 찌르듯이 복숭아 향기가 솔솔 풍겨 왔으니.
“저 수풀 뒤쪽에 보면 복숭아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심어 있지 않던가?”
“……!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소? 아니, 냄새를 맡고 때려 맞춘 거요?”
그 세 그루는 무당산에 있는 유일한 복숭아나무였다.
“그래, 아직도 잘 자라고 있나 보군.”
역시 무당파라고 해도 도사들답게 자연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둔 모양.
“그, 그래서 복숭아나무가 어쩐다는 말이오.”
“가운데에 심어진 나무 바로 아래를 대충 팔꿈치가 들어갈 정도의 깊이까지 파내다 보면 손바닥 정도 되는 크기의 철판이 한 장 나올 테다. 거기에는 도원결의라고 적혀 있을 것이고.”
“……, 잠시 기다려 보시오.”
일원 진인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복숭아나무로 향했다.
“어찌 아셨소? 아니, 저건 누가 한 거요?”
잠시 후 일원 진인이 놀란 표정을 하고서 다시 돌아왔다.
“장삼봉 녀석이 어디서 도원결의(桃園結義)인지 뭔지를 주워듣고 오더니, 감명을 받았다며 복숭아나무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 철판은 기념이랍시고 묻어 두었고.”
“의심하여 죄송합니다.”
일원 진인이 송윤천 앞에 겸손한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송윤천을 대하는 말투 역시 더 예의 있게 바뀌었다.
적어도 자신이 스승을 따라 이곳 천주봉에 오른 이후 이십 년 동안 장문인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발걸음이 없었다.
스승 역시 복숭아가 무르익으면 따오기나 할 뿐, 다른 말은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송윤천의 주장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자신의 고집이며 아집이리라.
“그런데 여기까지는 어찌 오셨습니까?”
“처음에 말하지 않았더냐. 네 스승의 유품과 함께 태극혜검을 전해주러 왔다고.”
“……스승께서는 어찌 가셨습니까?”
송윤천은 조금 전 조사전에서 청송 진인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그에 따른 제자 일원 진인의 반응 역시 흡사했다.
스승의 죽음에 분노하며 절망했고 원수인 천살성과 화양연화의 죽음에는 분노와 후련함을 느꼈다.
“사실 꿈자리가 좋지 않아서 스승님께서 떠나신 걸지도 모른다고,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일원 진인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쳐서인지 청송 진인보다는 빠르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마음을 추스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남은 용건은 태극혜검.
“태극혜검은 어찌 아시는지요?”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자면 조금 길어지겠지만, 송윤천은 천천히 풀어내었다.
어차피 지금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장삼봉 조사님과 태극혜검에 그런 비화(祕話)가 있었는지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송윤천의 말을 모두 듣고 받아들인 일원 진인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외람된 말이지만, 보시기에 제 태극혜검은 어떻습니까?”
“내 태극혜검과는 다르며, 스승의 태극혜검과는 흡사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어 보였다.”
“틀렸습니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무공에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맞은 게 현재에는 틀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 다시 미래에는 맞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부족하다 싶었는데 완벽해지는 예도 있다.
마찬가지로 완벽한가 싶었는데 부족해지는 것도 있다.
송윤천이 오래 살아보니 저절로 터득한 이치였다.
“그러니 다시 한번 보여주도록 하마. 검을 다오.”
잠시 송문고검을 건네받은 송윤천이 다시금 일원 진인 앞에서 태극혜검을 펼쳤다.
그리고 마무리를 지은 뒤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기억하겠느냐?”
“예, 선명하게 담았습니다.”
일원 진인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천하제일 괴력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