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 Genius Became a Middle School Student RAW novel - Chapter 144
제143악장, 현우의 일기(完)
제143악장, 현우의 일기(完)
비상(飛上).
슬픔과 눈물을 딛고 일어선 한 사내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클래식의 볼모지로 여겨지는 반도에 세계적인 관심과 함께 드높은 영광을 가져올 줄을.
그것도 겨우 18살에 불과한 소년이.
“어마, 현우 엄마! 이게 무슨 일이래!”
그게 꽤나 자랑이 되었나보다.
어머니는 물론 같은 마을의 사람들에게도.
“빨리 나와 봐, 현우 엄마!”
잠시 입이 떡 벌어지도록 열렸던 아주머니가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들끓는 열기와 함께 흥분되어있는 온 국민.
입국하며 본 신문에서 이미 확인한 분위기였지만 새삼 피부로 와닿는 건 또 달랐다.
벌써 시장가 상인들의 모든 눈들이 나를 따라붙고 있지 않나.
“무슨 일이길래 그러···.”
한편 막 가게를 나선 손님의 재촉에 어머니께서 바깥으로 나오셨다.
아니, 나오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정갈한 턱시도를 입은 아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서있는 어머니께 꽃다발 대신 트로피와 상장을 품에 안겨드렸다.
“엄마.”
“현, 우야?”
따로 입국 날짜를 말씀드리지 않고 찾아뵀다. 일부러 그 날 입었던 턱시도도 챙겨입었다.
“우리 현우···.”
먼저 나와 나를 기다리시기보단 내가 이렇게 찾아 뵙고 싶었기에.
“고생 많았어.”
와락.
곧 눈시울이 붉어진 어머니께서 나를 있는 힘껏 끌어안으셨다.
그동안 걱정되었던 만큼.
보고 싶었던 만큼.
그리고 고맙고 자랑스러운 만큼.
“오래 기다리셨죠.”
왠지 먹먹해지는 목구멍 바깥으로 어렵사리 음성을 밀어냈다.
얼마나 오랜 기다림이셨을까.
폐인이 되어버린 자식마저도 생을 다 하는 그 순간까지 기다려주시던···.
그 감사한 어머니를.
나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마지막 남아있는 죄책감마저 모두 부서지도록.
“오래 기다리긴.”
귓가로 어머니의 떨리는 음성이 전해졌다.
“고마워 아들. 정말···.”
늘 내게 미안하다고만 하시던 어머니는.
그런 말밖에 할 수 없도록 만든 못난 자식을 두었던 어머니는.
“정말 고마워···.”
그렇게 새로운 말을 배우셨다.
고맙다라는 말을.
“어머머···.”
“햐···.”
주변 이들의 시선도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함을 더해가는 그 사이로 실감했다.
올 해 차이콥스키의 우승자이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었던 내가.
다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바로 나의 보금자리로.
* * *
러시아에서 모든 일정을 끝마치자마자 가장 먼저 한국.
국내외로 연일 화제몰이를 하고 있는 그 중심에는 오직 동양의 한 소년이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차이콥스키의 우승 관을 따냈기에.
그 중 극도로 반해버린 이들은 이미 어린 거장이라며 유례없는 수식어까지 만들고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의 클래식계가 격동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미 부조니에서 준우승을 따낸 동시에 반 클라이번에서의 우승.
그에 이어 이젠 차이콥스키까지.
17살부터 시작해 네임드 국제 대회를 모두 휩쓸어버린 소년.
어린 거장이라는 표현까지는 아직 과할 수 있었으나 그 빛나는 성과와 빈 오케스트라의 거장으로 꼽히는 쇤베르트의 이름이 그를 도와주었다.
어린 거장과 살아있는 거장.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는 두 단어의 나열이었으니까.
물론 국내의 반응은 더더욱 뜨거웠다.
그 어린 거장의 출신지가 다름 아닌 바로 이곳 대한민국이었으니까.
“아니, 이게 누구야! 어린 거장 이현우 피아니스트 아니십니까?”
“······.”
오랜만에 찾아온 종우의 사무실이 유난히 반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상길의 말은 자연스레 한 귀로 흘려낸 현우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어린 거장을 이렇게 뵈니 감개가······.”
“아 좀, 그만하세요.”
이 사람이 진짜.
그런 눈길로 현우가 노려보자 그제야 이상길이 미소를 더 깊게 패며 소파에 따라 기댔다.
“크큭, 거창하고 좋은데 뭘 그래.”
“여전하시네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고 하잖아.”
말이라도 못하면···.
장난스러운 얼굴에서 시선을 돌린 현우는 사무실의 주인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담을 찍는 것도 좋겠지만 정작 주인이 안 보이질 않나.
“선생님은요?”
“너 전화 받곤 잠깐 어디 좀 다녀온다던데.”
“네? 그게 무슨···.”
일부러 온다고 전화했더니 갑자기?
의아할 새라 곧장 사무실의 주인이 나타났다.
“현우군.”
“···허?”
무언가 종이 서류를 잔뜩 가져온 그의 손에는 수많은 초청과 요청들이 있었다.
위치는 또 얼마나 다양한지 세계 일주를 경험해도 좋을 정도였다.
“현우군 앞으로 온 팩스랑 메일들을 추리고 추려보았습니다. 주로 이탈리아랑 독일에서 많이 왔구요.”
심지어 이게 추린다고 추린 거라니.
차이콥스키를 우승했던 그 날,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던 러시아의 열기가 다시금 느껴지는 듯 했다.
그래, 우승.
차이콥스키를 석권했다는 게 갈수록 실감이 날 수밖에 없었다.
“믿고 있었습니다.”
한편 진지한 얼굴색을 한 정종우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현우의 말에 곧 두 사람이 움찔거렸다.
애초 선향예술재단의 영재로 시작했던 현우이지만 이제 어언 3년 전의 이야기.
그리고 아무리 일부 여론에서 과하게 치켜세워주며 쓰는 어린 거장이라지만 지금의 현우가 가지는 위상은 거대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달라져있었다.
“······.”
“······.”
해서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했던 정종우와 이상길이었으나.
“앞으로도.”
“어?”
이상길의 얼빠진 대답이 풀린 긴장을 타고 스륵 흘렀다.
“앞으로도 감사드려도 될까요?”
장난기가 담긴 현우의 미소에 이상길은 곧 굳었던 얼굴마저 풀 수 있었다.
“이 자식이···.”
“안 되나요?”
“안 되긴, 당연히 되지! 아니, 고맙다 이 녀석아!”
와락 끌어안는 이상길을 보며 정종우도 긴장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우군.’
여러 마음이 교차하는 그와 달리 현우의 마음은 또렷했다.
전생엔 맺지 못했던 소중한 인연.
그 인연을 아직 끊어버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 * *
서용민과 함께 하게 된 만찬에는 몰래 온 손님도 있었다.
명인일보의 박주현.
그저 이름 좀 난 기자였던 그도 이젠 내가 기억하는 미래의 그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실상 대한민국 내에서 세 손가락에 잡히는 신문사의 총편집장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먼저 드시죠 현우군.”
“얼른 드세요.”
국내외로 떠들썩한 여론에 힘을 실어주려 온 힘을 다하는 박주현에게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귀빈처럼 이리 대해주는 서용민도.
고마울 따름이었다.
턱.
맛있게 익은 갈비 한 점을 집고 먹길 서용민이 말문을 먼저 뗐다.
“그간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그 시선은 나에게서 시작해 자신의 오른쪽으로도 향했다.
“현우군도, 박주현씨도요.”
“하하, 저는 할 일 한 것뿐인데요 뭘.”
멋쩍게 머리를 긁은 박주현이 편안히 있는 걸 보면 두 사람 간의 사이가 제법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가장 먼저 소개해주었던 게 서진의 만찬회 때였었나.
“다 현우군 공이죠. 이번 차이콥스키도 정말 굉장했습니다 현우군.”
마지막 결선 날 러시아를 찾았던 박주현은 아직도 귓가에 그 선율이 생생히 맴도는 듯 했다.
어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그 칼빈조차도 인터뷰에서 자신의 패배에 완벽하게 승복한다며 좋은 배움을 얻어간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물론 훗날을 기약하기야 했지만.
“이제 시작이죠.”
그 말에 서용민과 박주현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들렸다.
반면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밥알을 씹어보였다.
아주 당연한 말을 꺼낸 것처럼.
“···하하, 맞네요.”
“앞으로도 현우군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비상(飛上).
소년이 보여준 비상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막 날갯짓을 시작한 봉황은 곧 창공을 비상(飛翔)할 것이니까.
그 무대가 세계 어디가 되든.
* * *
“뭐야 진짜.”
잔뜩 뾰로통해진 볼살이 예전과 달리 귀엽기보다는 예쁘다는 감상을 내면에서 일으킨다.
아니, 어쩌면 크리스마스의 여파일 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있었다고 또 나가?”
“···이보세요,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반면 한여름의 반응에 조금 어이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같이 논 게 대체 몇 번인데. 사실상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내내 놀아줬건만.
홍대 거리부터 시작해서 밑에 있는 부산까지. 안 가본 곳이 없다.
마침 시기도 방학이겠다.
가보고 싶은 곳은 이번 기회에 죄다 데려간 한여름이었으니까.
비록 이제는 이렇게 개학한 후 학교에서 급식을 먹는 처지가 됐지만.
“아직 모자라단 말이야.”
새침하게 말하면서도 생글거리게 웃는 모습이 이제야 썩 귀여웠다.
“어떡한대, 이제 더 바빠질 건데.”
대략 한 달간.
한국에서 보낸 휴식은 꿀처럼 달콤했지만 짧았다.
임시영의 오케스트라와 노장께 찾아뵈어 인사드린 것.
그 외 이 녀석하고 보낸 시간과 어머니와의 시간까지.
짧지만 알찼다.
가장 바빠야 할 시기에 휴식을 보냈다는 게 조금 걸릴 순 있긴 하겠지만······.
그걸 감당해낼 자신이 있으니까.
“세계 여기저기서 나를 너무 많이 찾더라.”
“푸흐, 재수 없어···.”
그렇게 농담을 주고 받을 새라 누군가 등 뒤를 쿡 찌르고 나타났다.
“좋아 보인다 아주?”
그 자리에 서있는 건 안색이 아주 창백해진 안효주였다.
뭐야, 얘 상태가 왜 이래.
“누구는 밤샘 촬영하고 아주 죽을 맛인데.”
자연스레 한여름의 곁에 앉은 안효주가 식판을 내려놓고 어깨에 기대 투정을 부렸다.
얘넨 나 없던 사이 언제 또 친해진 거래.
“다음 작품 들어갔다며?”
“응, 이번엔 주연으로.”
반짝 스타?
아니, 유성 스타라고 해야 되나.
반짝 그 이상을 찍어버린 안효주를 향한 국내의 인기가 아주 엄청났다.
내가 무슨 짓을 해버린 건진 몰라도 소개해준 드라마에서 조연 이상의 인기를 갱신해버린 안효주는 바로 다음 드라마에 캐스팅되어 주연까지 맡아버리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탑배우 안효주가 조금 더 빨리 탄생해버릴 지도 모르겠는데.
“근데 또 나가는 거야?”
“그래야지.”
방금 전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듯 고개를 주억거린 안효주가 시선을 한여름에게로 돌렸다.
애가 어려서부터 연예계 맛을 보게 되어서 그런가. 아니면 상대가 한여름이라 그런가.
어째 어른 흉내를 좀 내게 된 거 같은데.
“그렇게 기다렸는데 또 기다리게 생겼네 우리 여름이.”
“뭐, 뭐래.”
움찔거린 한여름의 어깨가 곧 안효주의 얼굴을 밀어냈다.
“심할 땐 하루에 다섯 번도 넘게 이야기하더니 왜 오리발을···악!”
“풋.”
웃음을 흘린 나는 똑같이 비명을 지르고 싶지 않기에 조용히 식판에 담긴 반찬을 집어먹었다.
이 또한 그리워질 것 같았다.
* * *
오스트리아 빈.
빈의 시민들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나를 환영해주었다.
어쩌면 소년으로 인해 이 음악의 성지가 다시 한 번 더 드높은 클래식의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환대 속에 찾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집무실은 어느 때보다도 깔끔했다.
“왔군.”
“잘 계셨습니까 선생님.”
서운하거나 그런 감정보다도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음악적 유대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 여기 있네.”
쇤베르트가 건넨 팜플렛에는 어린 거장의 탄생을 축하하는 동시에 그와 함께 할 오케스트라를 예견하고 있었다.
미리 듣고 온 이야기이기에 놀라거나 할 일은 없었다.
다만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진심어린 감사로.
“덕분에 좋은 결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말 말게.”
그리 말하면서도 두 사람의 머릿속엔 같은 그림이 스쳐갔다.
슬펐던 전생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비창(悲愴)을 손가락에 담아낼 때도.
오래 전 실패해버렸던 라흐마니노프를 다시금 완성시켜나갈 때도.
모두 로저스와 함께 그의 도움이 깊이 스며들어있었다.
“나에게도 아주 좋은 경험이었으니.”
소년을 바라보는 쇤베르트의 시선은 더 이상 가까이 머물러 있지 않았다.
어린 거장.
반대로 말하면 훗날 누구보다 커다란 거목이 될 거장(巨匠)에게.
자신의 손때를 묻힐 수 있었던 기회를 영광이 아니면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질투가 날 정도였네.”
“···네?”
순간 멈칫한 현우의 시선이 거장을 바라봤다.
“나도 자네처럼 찬란한 시기가 있었고 빛나는 순간이 있었지.”
세상 모든 존재는 파릇파릇한 새싹으로서 세상에 발돋움한다.
그 새싹은 점점 자라 풀이 되기도, 꽃이 되기도. 이내 커다란 거목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내 한 호흡을 뛴 쇤베르트가 말했다.
“음악을 완성시킬 뿐, 음악을 들려주기는 어렵게 됐지.”
예술가라면.
정말 그것을 사랑하는 존재라면.
응당 자신의 손으로 그걸 꽃피우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까.
“해서 자네가 부럽네.”
현우의 시선에 연민과 같은 무언가가 스치는 그 순간이었다.
그가 말의 흐름을 바꾼 건.
“허나 그 뿐이야.”
떨어지는 낙엽은 가을 바람을 원망치 않는다.
그건 세월을 감내하는 어느 중년의 예술가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지는 낙엽에게도 낙엽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는 법이니까.”
결국 잎은 지게 되지만 바닥에 자신의 마지막 자취를 남기게 된다.
세상에 자신의 마지막을 남기고 떠난다.
쇤베르트라는 거장의 마지막은 눈앞의 어린 거장이었다.
“고맙네, 새로운 거장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게 해주어서.”
이 또한 진심어린 감사였다.
또 다른 거장의 탄생을 위한 한 줌의 낙엽이 되게 해준 데에 대한 감사.
소년도 그에 화답했다.
“꼭, 모두에게 사랑받는 거장이 되겠습니다.”
그래.
겨울을 딛고 일어선 새싹은 서서히 거목으로 자랄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Epilogue1, 상길의 일기
Epilogue1, 상길의 일기
음악?
잘 될 거라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 같은 건 없었다.
누가 듣는다면 자신의 인생을 둔 선택을 어찌 그리 쉽게 정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데 뭐.’
그냥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음악이라는 이 길을.
그게 괴짜, 이상길의 삶이었다.
“야, 너 나랑 일 하나 할래?”
“뭐?”
오랜만에 불러내 갑자기 술잔을 기울이자하더니 스카웃 제의라니.
종우의 겸연쩍은 시선을 느끼며 상길이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아니, 이번에 무슨 음악 영재 발굴을 하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선향예술재단 소속으로 일하게 된 친구에 대한 사정은 익히 알고 있다.
애초 같은 예고에서 출발해 비슷한 시기에 은퇴를 했던 두 사람 아닌가.
특유의 붙임성과 사교성으로 한 자리 따낸 상길과 달리 아직 재야에 묻혀있는 종우는 평범한 은퇴 피아니스트였다.
그게 상길의 마음엔 영 들지 않았다.
자신보다도 재능 있는 녀석이 쓸데없이 빳빳해가지고.
그 재능을 놀리고 있는 꼴을 어찌 보겠나?
사실 그 재능을 좀 이용해먹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했지만···.
여튼 취업까지 시켜주는 이런 고마운 친구가 또 어디 있을까.
“같이 하자.”
“···얘기는 고맙다.”
그럼에도 이 배은망덕한 녀석은 고마움은 커녕 잠깐의 고민 끝에 거절을 표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예술재단.
누구라도 마다하지 않을 만한 자리일 텐데. 물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온 상길이었다.
“아직도 꿍해있는 거냐?”
움찔.
자신도 모르게 눈가를 꿈틀거린 종우가 소주잔을 비웠다.
“꿍해있긴, 누굴 애로 보나.”
두 사람이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멀지 않았다.
출신이라는 그늘.
오직 음악이라는 것만을 좇아 달리던 그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발밑을 볼 수 있었다.
발밑에 가득 드리운 그늘을.
서양이 아닌 아시안, 그것도 클래식의 볼모지에서 태어난.
어쩌면 그렇기에 자신들의 영역은 정말 거기까지였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상길 자신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눈앞의 친구 녀석은 아닐지 몰라도.
“이미 두 녀석 봐놨다.”
해서 상길은 먼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기로 했다.
그 꿍한 마음을 허물 수 있도록.
“안 한다니까.”
“한 명은 아주 도련님이 따로 없고, 다른 한 명은 여자앤데 재능이 끝내주더라.”
저 혼자 좋을 대로 재잘거리는 상길.
이윽고 종우도 모른 척하면서도 묵묵히 그의 말을 귀에 담았다.
“쪼끄만한 것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너랑 나는 비교도 안 되더라. 원래 그렇잖냐. 세대를 거듭할수록 잘해진다고. 뭐 아직 한 명 정도는 더 찾아볼 생각인데······.”
이내, 긴 독백이 끝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솔직한 심경처럼 한 마디를 툭 내던졌을 뿐.
“나도 무섭다.”
“뭐?”
“또 실패할까봐, 영재랍시고 데려와놓곤 너랑 내가 맛봤던 벽을 또 맛보게 할까봐.”
정말 자신의 한계를 두 눈으로 보게 될까봐.
진지한 두려움이 묻어나는 어투의 종결은···.
그저 푸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냐.”
어쩐지 맥이 빠질 정도로 허탈한 푸념.
“그렇다고 안 할 거야, 음악?”
“···.”
예고 시절부터 함께 했던 두 사람이기에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음악에 가지는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실망했을지.
얼마나 억울했을지.
그리고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싶다는 것도.
“기왕 할 거면 똑바로, 기가 막히게 해보자.”
평소 한량 같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표정을 잔뜩 구긴 이상길은 쓸개를 씹어뱉듯 내뱉었다.
“한 번 실패했다고 두 번째도 실패하란 법 있어?”
그렇게 두 사람은 선향예술재단에서 다시 한 번 뜻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
– 뭐?
“찾았다고 인마! 여름이랑 성우보다 더한 애로!”
만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실패를 딛고 일어설 어린 거장을.
* * *
1년.
현우의 앞으로 온 여러 편지지들을 살피던 이상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벌어지는 턱이 하마터면 바닥에 닿을 뻔했다.
“야···. 이거 뭐냐?”
“······영국?”
눈길을 슬쩍 돌렸던 정종우도 곧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편지를 재차 살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살펴봤자 발신인이 바뀔 리는 없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뜻임을 알리는 영국 왕실의 표식이.
고풍스럽게 편지의 겉면을 덮고 있었다.
『친애하는 이현우 피아니스트에게』
런던의 버킹엄 궁전을 부디 꼭 빛내주길 바란다는 서신.
여태껏 온갖 서신을 다 받아보았던 상길과 종우도 이번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차이콥스키 이후로 어언 1년. 그 동안 미친 듯이 유명세를 더해왔고 지금도 더해가는 중인 현우이니까.
『거장 쇤베르트가 이끄는 디오니디테와의 환상적인 오케스트라를 보여준 이현우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의 우승자, 미국을 다시 한 번 강타하다!』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러시아의 두 거장의 혼을 되살려낸 어린 거장은 과연 누구인가?』
빈은 물론 러시아와 미국까지. 전 세계를 무대로 바쁘게 쏘다니는 현우는 점점 어린 거장이라는 칭호에 걸맞는 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연주회에서 눈부신 선율을 마주한 대중들은 물론 여러 평론가들마저.
반해버릴 수밖에 없는 선율에 전 세계가 녹아들고 있었다.
거목이 되어가는 어린 거장에게.
“이제 하다하다 영국 왕실까지 가는 거야?”
“모르지, 언제나 그랬듯 선택은 현우군의 몫이니까.”
그리 말하는 종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선하게 그려져 있었다.
“어쭈, 그 빳빳하던 놈이 이제 싱글벙글 웃는 거봐라.”
“······그 정도론 안 웃었어 이 자식아.”
사실 스스로도 변화를 느끼고 있는 종우였다.
원래···.
사람을 만나면 변한다고도 하지 않나.
“사실 나도 줄 게 하나 있는데.”
“갑자기?”
책상 쪽으로 다가간 종우가 무언가를 꺼냈다. 방금의 서신을 닮은 편지지였다.
“······이게 뭐.”
나오던 말이 뚝 끊긴 건 상길이 편지지를 받아든 바로 다음이었다.
일단 내용은 차치하고 큼지막하게 적힌 글씨에 두 눈을 비볐다.
마찬가지로 한 번.
두 번.
세 번 비벼본대도 편지지의 가운데 박힌 웨딩 홀이라는 글자가 사라질 리는 만무했다.
“신랑 정종우, 신부 임시······.”
대체 언제?
언제 거기까지?
그런 눈초리를 외면하며 종우가 중얼거렸다.
“뭐, 그렇게 됐다···.”
“이 개자식이!”
어째 반 년 전부터 점점 두 사람이서 낌새가 수상하더라니!
자신보다도 일찍 이렇게 가버리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상길의 얼굴에 덧씌워졌으나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음에 더더욱 슬픔이 몰려오는 상길이었다.
* * *
별안간 못 들은 소식을 들은 양 귀를 후빈 백진수는 들고 있던 바이올린을 내려놓았다.
“결혼이요?”
“뭐···. 그렇게 됐어요.”
태연한 척 고개를 돌린 임시영의 볼이 약간 상기되어있었으나 다행히 보지 못한 모양.
다만 곧 담담하게 태도를 고친 백진수가 청첩장을 고이 접었다.
“축하합니다, 이사장님.”
“······생각보다 안 놀라네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서요.”
근래 두 사람이서 하는 데이트 횟수만 생각해보아도 그렇지 않나.
갈수록 가까워지는 게 멀리서도 보이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도 당연지사.
조금 시기가 이른 것 같긴 해도 미래에 대한 걱정을 가지기엔 친구나 이 이사장이나 이미 보통 레벨이 아니니까.
아니, 어쩌면 그 어리숙해보이던 친구 녀석이 계를 탄 지도 모르겠다.
미모는 물론.
‘국내를 넘어서 세계까지 향해가는 오케스트라의 이사장이니.’
심지어 그 후원사는 무려 대한민국 일등기업을 다투고 있는 서진 아닌가?
비록 1등의 자리를 공고히 하지는 못하더라도 그 누가 서진을 무시할 수 있을까.
아마 몇 해가 더 지나고 지금의 젊은 부회장이 회장직마저 물려받는다면······.
그가 연로한 백발이 되는 어느 날.
대한민국 기업가에 명백한 단 하나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백진수의 관심사는 서진보다는 서진을 대표하는 예술가에게 깊겠지만 말이다.
“현우군도 오는 겁니까?”
“아직 연락 못해봤어요. 바쁘지 않을까 해서.”
베네치아부터 잘츠부르크, 파리 등 세계 각지를 휩쓸고 다니는 소년이기에.
싱긋 웃은 임시영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오케스트라 특별 협연 와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죠.”
얼마 전에 한국에 들러 특별한 자리를 만들어준 소년에 대한 고마움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바쁜 와중에도 짧은 인연을 소중히 여겨주니.
“더 분발해야죠.”
“부단장 역할은 이제 좀 익숙해요?”
그녀의 말에 가볍게 웃은 백진수가 결코 쉽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입가에 담긴 미소는 말해주고 있었다.
제법 만족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있노라고.
* * *
대한민국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노장이 벌이는 연회는 꽤 성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사실상 연회라고 하나 다시금 은퇴를 선언한 뒤였기에 분위기는 한껏 더 고즈넉한 감각을 자아냈다.
한때 음악계에서 발자취를 감추었던 박철옹.
재야에서 다시 돌아온 그는 한국 음악계에 짧은 생명을 조금 더 태워주었다.
이미 백발이 되어버린 머리이나 그 마지막 힘을 다하는 듯 했다.
몇 년 사이.
비록 그 제자만큼은 아니나 과거 한국 클래식의 거장으로 친우와 함께 거론되던 인물이라는 걸 증명해낼 만큼.
그랬던 그가 돌연 은퇴한다는 소식에 놀라는 이들도 있었으나 가까운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어쩌면 버틸 대로 버틴 그가 태운 마지막 불꽃이 아니었을까 예상하며.
그 불길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게 해줌에 감사하며,
그런 이들을 비롯해 스쳤던 여러 인연들을 불러 모았으니 노장의 자택 앞이 당연히 문전성시를 이룰 법도.
반면.
한 쪽을 향해 모두의 시야가 쏠린 건 그 때였다. 며칠 전 어떤 젊은 연인의 결혼식 때처럼.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움찔거리는 노장의 눈가.
변함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해주는 고마운 제자도 이곳을 찾았다.
“···이리 와주어서 고맙구나.”
한창 바쁠 텐데도.
“현우야.”
재야에 몸을 의탁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훤해진 신수로 박철옹은 제자를 반겼다.
아니, 와락 껴안았다.
함께 자리한 또 다른 옛 제자가 그를 질투할 정도로.
“나 참, 이 쪽 제자는 제자도 아닙니까 선생님?”
“끌끌, 다 큰 녀석이 투정은.”
피식 미소지은 이상길이 무어라 더 중얼거림에 따라.
“······현우 너 이 녀석, 요즘 바빠졌다고 아주···.”
“···못난 녀석, 제 제자가 잘나가면 기뻐해야지······.”
세 사람이 회포를 풀 듯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쏠려있던 시선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산개되어갔다.
마치 세 사람만의 온전한 시간을 마련해주듯.
물론 이야기가 얼추 깊어진 뒤에는 여러 객들이 붙기 마련이었지만.
“···안녕하세요 현우군······.”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상기된 객들에게 둘러싸인 제자를 보는 박철옹의 시선이 점차 나른해지고 있었다.
“선생님.”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자 어느새 시간이 무르익어 있었다.
어느새 객들을 물리치고 온 제자가 다시 그의 앞에 서있을 만큼.
“오랜만에 레슨 한 번 부탁드려도 되나요?”
피식.
나른한 미소를 지은 노장의 입가가 마지막으로 꿈틀거렸다.
* * *
마찬가지로 나른한 아침.
전 날 많은 객들이 돌아간 뒤 정적으로 가득 찬 자택을 한 노년이 찾았다.
도윤식.
아주 긴 시간 동안 곁에 남아준 유일한 친우였다.
“흐흐, 말년에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
“······오랜만에 보니 좋더군.”
“잘난 제자 녀석 말이지?”
편하게 읊조린 도윤식은 근래 몇 번이고 들려오고 또 보았던 소식을 상기하며 중얼거렸다.
“···아주 거목이 되겠어.”
“그래, 다행이네.”
찌르르.
참새의 울음소리로 시작될 생기로운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지그시 눈을 감은 노장은 친우를 바라보지 않았다.
“다행이야.”
그저 했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찌르르르.
한 번 더 지저귀는 참새가 날갯짓을 펼친 순간.
“하나는 남기고 가는군.”
“···.”
노장이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
도윤식은 말이 없었다.
딱히 친우의 말에 동의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아는 자신의 친우는 가히 라이벌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던 인물이었다고 생각하기에.
다만 바라봤다.
“···부끄럽지, 않겠어···.”
테이블에 놓인 오르골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겨주셨던 그 오르골이.
소년에 불과했던 박철옹을 노장이 되도록까지 이끌어준 그 오르골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아버지의 오르골이.
자연스레 어젯밤 들었던 소년의 선율과 겹쳐 그에게 들리던 그 순간.
♬···
움직임을 다했다.
생을 다했다.
오르골도.
마지막 숨결을 내쉰 노장도.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무나 자랑스러운 제자를 머릿속에 그리며.
Epilogue2, 로저스의 일기
Epilogue2, 로저스의 일기
빈 국립 음악 대학의 거리는 오늘도 명성을 더해간다.
“우와···.”
“나 이렇게 가까이서는 처음 봐···.”
거리에서부터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감탄을 금치 못하던 한 여대생은 호흡이 망가지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
현 시대 가장 매력적인 멜로디로 손꼽히는 천재의 선율.
“······와.”
“···미쳤다 완전.”
세계 각지를 다니며 모두의 귀를 현혹하던 선율은 불과 몇 해 전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져 있었다.
듣고 있노라면 오소소 돋는 소름이 그 아름다움을 표현해내기 일쑤였다.
아니, 그조차 모자랐다.
소름에 또 다시 돋는 소름이 오한마저 들도록 만들었기에.
“고생했다.”
로저스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인 현우가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만에 대학인지는 모르겠으나 시험 날이면 어김없이 찾은 현우였으니까.
그런 현우를 바라보는 로저스의 시선이 아주 고왔다.
‘음, 그 사이 자세가 더 무거워졌군.’
정확히는 분위기가 피아니스트의 기품을 더욱 담아낸다고 해야 하나.
큰 무대와 더 큰 무대를 누비기 일쑤이니 자연히 실력이 오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불과 얼마 전엔 영국 왕실 초청에 다녀오질 않았나?
더 놀라운 건 그 일정을 소년이 독자적으로 미뤘다는 것이었다.
고향에 있는 스승의 장례식을 찾기 위해 왕실의 초청을 급하게 거절하였노라고.
그에 감복한 왕실 쪽에서 오히려 일정을 조정해 소년을 기다리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천재 피아니스트가 그의 장례식에서 한 방울 떨어트린 장송곡은 또 한 번 전설을 만들며 수많은 눈가에 물결을 만들어냈고.
말 그대로 세계 음악계의 중심이, 거목이 되어가고 있는 소년이었다.
이제 소년이 아닌 청년이지만.
‘그래, 이제 그 때의 어렸던 아이로 생각하면 안 되겠지.’
어린 거장이라는 이름에 점점 힘을 더해가는 현우이니까.
시험이 끝난 뒤 로저스의 사무실에 함께 앉은 두 사람은 간만에 담소를 나누었다.
정확히는 누군가의 소식에 대해 언급했다.
“······그 두 사람이 협연이라구요?”
콜먼과 세리나.
현우와 함께 유명세를 이어가는 피아니스트와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여신이 함께 한다는 소식에 귀를 의심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부러워하고 아쉬워하더니 결국 따낸 거야?
분명 그 때 협연 이후로도 세리나에게 몇 번이고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했을 텐데.
그 숱한 거절을 딛고 결국 성사시켰다는 데에서 기뻐할 그 얼굴이 떠오르자 현우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피식 퍼지려던 그 때였다.
똑똑.
“교수님, 리포트 전부 정리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 말고 멈칫거렸다.
“···!”
여자. 그것도 요동치는 동공이 어째 기억하는 얼굴인데.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분명···.
“···그 분 맞죠?”
“그래, 맞다.”
“새로 조교 구하신 거예요?”
“그렇···.”
그 물음에 로저스가 답하기도 전에 에밀리아가 감격에 찬 눈길로 현우의 손을 낚아챘다.
과거 대학 시절, 콜먼도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손목 부상을 알아채주었던 소년이 그 일을 기억하고 있기까지 하다니.
“혀, 현우군! 정말 팬이에요!”
“어, 네.”
그 때도 감사를 표현하긴 했으나 분명 이런 분위기까진 아니었는데.
연신 칭찬과 감탄을 늘어놓는 새 조교에게 멋쩍게 웃는 사이 로저스의 시선이 흐뭇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한 아이지 참.’
비록 쇤베르트만큼 외적으로 잘 알려진 건 아니었으나 그도 엄연한 현우의 스승.
심지어 대학으로 오게 된 뒤에는 외적으로도 꽤나 알려진 덕에 심심찮게 유명세를 건네들을 수 있었다.
당장 내게는 한없이 까탈스럽고 억지로 비위만 맞출 뿐인 저 조교 녀석만 봐도 저리 좋아죽으려 하니.
‘나 참, 이리 생각하니 세월이 야속하구먼.’
소싯적엔 잘생긴 유럽 피아니스트로 잘 나갔던 자신의 인기도 저 정도는 되었었는데.
“······.”
한편 불순한 시선을 느낀 제자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신나게 팬 미팅을 하던 에밀리아도 얼마 안 가 자리를 비켰다.
“제자를 부러워하시면 어떡해요.”
“무, 무슨 소리냐 그게.”
속을 그대로 찔린 로저스가 입술을 움찔거리며 시치미를 뗐지만 이미 눈치 챈 현우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식사라도 같이 하실까요? 오랜만에 학교도 나왔는데.”
유명세가 있다곤 하나 내부적으로 로저스 그가 편의를 봐준 덕에 전 세계 연주회를 누비며 쉽게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사실상 이대로 대학원까지는 프리패스라고 보아도 무방할 터.
“네가 사는 게지?”
“······.”
그에 대한 감사함이 조금 사그라들 뻔 했지만 다행히 지켜낸 현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요즘 좀 궁하세요?”
“네가 나보다 더 벌지 않느냐?”
우스갯소리를 몇 번 주고받으며 일어선 둘이 걸음을 옮겼다.
오가는 농담 속에 로저스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군.’
애써 밝은 모습을 보며 조금은 걱정을 덜어놓아도 되겠다고.
* * *
미국 보스턴의 예술홀의 관객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그 열기를 한 몸에 받는 사내가 무대에 올랐다.
막스 칼빈.
반 클라이번의 제자이자 어린 거장의 라이벌로 꼽혔던 그의 손짓에.
고요.
그의 선율에 모두가 귀 기울이며 만들어진 고요에 관객들의 눈이 저절로 감겼다.
“아아···.”
감미로운 멜로디에 누군가의 탄성도 터져 나오길.
순식간에 끝나버린 무대에 누군가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관계자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요.”
갖가지 연주회와 여타 콩쿠르마저 석권하며 다니는 칼빈이지만 여전히 그의 눈앞에는 벽이 놓여있었다.
이현우.
바로 그 세 글자가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영국 왕실 초청을 미뤘다고···.’
아까 전 읽었던 신문 기사를 다시금 되뇌는 칼빈.
범인이라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행보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을 가로막은 벽을 향하는 시선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온한 분위기로.
“오늘은 어땠느냐.”
등 뒤에서 나타난 스승의 말에 칼빈이 고개를 홱 돌렸다.
콩쿠르에서 패배했던 그 날부터 줄곧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
자칫 지겨울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하루하루를 곱씹고 있다는 의미.
와신상담(臥薪嘗膽).
음악적으로는 소년을 응원하나 그렇기에 오히려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지금 매일 씹고 있는 이 쓸개의 맛을.
그 쓸개가 이번엔 소년을 더욱 성장시켜줄 테니까.
아니, 설령 소년에게 쓸개의 맛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기쁩니다.”
기쁘다.
길을 잃어가는 듯 했던 자신의 음악의 길에.
새로운 이정표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는 데에 있어서.
그의 입가의 미소를 자욱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음은 어디가 될까.’
쇼팽?
퀸 엘리자베스?
어디가 되든 다시 부딪혀보고 싶다.
영혼을 담은 선율을 나누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칼빈은 오늘도 음악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 * *
빈의 거장의 진중한 한 마디는 돌연 세계를 뒤흔들었다.
“이제 그만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당대 최고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한 마디.
더불어 세계 각지의 음악계를 뒤집고 있는 한 제자의 스승으로 유명한 그였기에 여파는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당황한 로저스가 급히 그를 찾아온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눈길은 이 미친 작자가 뭘 잘못 먹었나 싶은 눈길이었지만.
“멀쩡한 오케스트라를 왜 그만둬?”
상임 지휘자는 막대한 위명을 가진다.
최소한 세계 각지의 신예들과 베테랑, 태양처럼 떠오르는 어린 거장과 두 번의 협연을 마쳤던 디오니디테(Diony Dite)의 지휘자만큼은.
그렇기에 자연스레 나올 수 없는 반응에. 오히려 과거부터 라이벌로 대치해온 로저스이기에 한 말에 쇤베르트는 무감각하게 대답해보였다.
“내 은퇴를 자네에게 상의라도 해야 하는가?”
“허.”
내 참.
근래 현우 녀석 덕에 부쩍 친해졌다고 착각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이 작자가 이 따위로 날 대하는 걸 보면.
치미는 울분을 가라앉히며. 아니, 사실 조금은 표출하며 로저스가 물었다.
“그렇게 사명 좋아하던 작자가 대체 왜? 그 지휘자가 자네 사명이라며?”
음악계의 신성으로 군림하던 그가 돌연 지휘자로 핸들을 틀지 않았나.
물론 조금 더 젊은 나이에 틀었다 뿐이지.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이는 또 없었기에 빈의 시민 모두가 반겼다.
젊은 신성을 시기하고 엄격한 성정을 가진 몇몇 평론가들과 그 추종자들이 흠집을 조금이나마 남겼을 뿐이지.
그 때야말로 그리 반박하지 않았나?
이 자리가 자신의 사명이노라고.
그 모든 걸 생생히 기억하고 또 지금도 되뇔 수 있는 로저스에게 쇤베르트는 퉁명스레 덧붙였다.
“사명을 다했네.”
“···이 작자가 진짜.”
다만 평안하게 내뱉는 그 말에 또 다시 울분이 치밀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려니 이 무슨!
얼토당토 않는 단언에 이어 이번엔 로저스의 한숨에 대고 확언하는 쇤베르트였다.
“내 후임은 이미 봐두었네. 이미 이야기도 끝내두었고.”
“그럼 자넨 이제부터 뭘 하려고? 어디 고향 땅이라도 돌아갈 생각인가?”
결국 기가 질린 듯한 로저스가 되물었다.
세계 모든 음악가가 거론하는 음악계 거장이 아닌가?
음악적으론 물론 지휘자로서도 훌륭한 이 작자가 고작 중년의 나이에 벌써 은퇴라니.
눈앞의 작자가 그렇게 찾는 사명이야 자신은 알 바 아니었지만 이 재능을 썩히는 꼴을 어찌 볼 수 있겠나.
말년의 말년까지 굴러도 굴러야 될 텐데.
걱정하는 그를 보던 쇤베르트가 일순간.
입가에 아주 옅디 옅은 미소를 만들었다.
“내가 언제 은퇴한다고 했나.”
오소소.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힌 로저스의 등가로 다음 말이 전해졌다.
“찾아볼 거라네. 현우군과 같은 아이를. 또 다른 모차르트를. 쇼팽을. 어린 거장을.”
그의 눈가에 번뜩이는 음악적 광기는 겨울 서리보다도 시렸다.
오한마저 들 정도로.
“······그게 자네의···.”
머뭇거리는 로저스의 말에 쇤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다음 사명이라네.”
이제 곧 소년으로 인해 불어 닥칠 음악적 부흥.
두 번째 모차르트가 탄생했다면 살리에르는 물론 그에 상응하는 베토벤과 쇼팽 같은 음악적 대가들이 나와야 하지 않겠나.
이 음악적 부흥이 절대 소년의 대(代)에서 끝나지 않도록.
현대 시대에 불어닥친 또 다른 르네상스가 되도록.
“······세계를 돌 거라네.”
그건 본래 시즌이 마무리 될 때마다 여행을 다녔던 그의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욕망이었다.
수많은 신동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되돌려 보냈던 그로서도 버리지 못했던 미련.
어린 거장.
되살아난 모차르트가 이 세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두 눈으로 보았기에.
“단 한 명의 재능도 놓치지 않도록. 천재도 놓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떨어진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거면 되는 걸까.
아니, 낙엽은 다음 세대를 위한 거름이 되어야만 한다.
더 찬란한.
더 화려한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어린 거장을 찾겠네.”
현우군에 어울리는 어린 거장을······.
이미 핀 그 꽃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Epilogue3, 한여름의 일기
Epilogue3, 한여름의 일기
첫 눈이 내려왔다.
톡.
뺨에 닿은 눈이 스르륵 녹아내리길, 한여름은 각오를 다잡았다.
“후아.”
잘할 수 있겠지?
자신의 내면에 묻는 한여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고였다.
그건 명백한 자신감이었다.
『한국 클래식의 또 다른 자랑, 이탈리아에 도전하다!』
『한여름 피아니스트는 과연 부조니를 제패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예전에 소년이 딛었던 자리에 소녀가 서있었다.
아니, 그녀가 서있었다.
터벅.
“긴장한 거 아니지, 여름아?”
마냥 한량처럼 다니던 국내와 달리 정갈히 차려입은 상길이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유럽행에 따라와 톡톡히 도움을 준 그.
그를 바라보는 한여름의 시선은 지극히도 침착했다.
“당연하죠···. 어떻게 온 결승인데.”
한국 클래식의 영광이라며 세계 이곳저곳을 누비는 그 녀석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가늠할 수도 없을 지경에 와있었다.
물론 그녀를 이끈 게 단순히 승부욕 뿐만은 아니었다.
옛날, 소년이 연주해주었던 그 곡.
Badarzewska, Modlitwa dziewicy.
바다르체프스카, 소녀의 기도.
『어때 여름아, 재밌지?』
『아니, 어려워 이거···!』
어린 시절 즐거이 웃으며 자신과 추억을 만들던 어머니의 말을 가볍게 떠올렸다.
『괜찮아! 못 치면 어때』
즐거움을 되새겼다.
고되기도 한 연습이었지만 선율이 주는 즐거움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기에.
‘엄마.’
피아니스트로서 살았다면 어머니가 만끽했을 그 즐거움까지도.
자신이 이루고 싶었다.
작지만 단단한 이 손으로.
♬
어느새 결승 무대에 오른 소녀가 노래를 시작했다.
객석의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지만 어쩐지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 곡.
한 곡, 천천히.
오케스트라와 어우러지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가 노래를 이어나갔다.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한 소년이 그 당시 속으로 되뇌었던 것처럼.
『상처가 아물고 나면 스스로 극복해나갈 뿐.』
극복해낸 소녀는 이 자리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표현해냈다.
아문 상처를 부끄럼 없이 드러냈다.
보기 흉한 흉터가 아닌 자랑스러운 증표로서.
하늘에 계신 그녀의 어머니도 알 수 있도록. 행여 딸에게 미안해하지 않도록.
당신이 남기고 떠난 건 상처가 아닌 추억이라는 걸······.
어머니가 꼭 알아차릴 수 있기를.
스르륵.
간절한 기도 한 방울이 한여름의 뺨에 스쳤다. 녹아내린 눈처럼 흘러내렸다.
톡.
건반을 적셨다.
* * *
수북.
청년의 머리에 닿은 눈이 녹아내리지 못한 채 맺혔다.
베네치아 연주회를 끝내자마자 온 청년이었지만 시간은 너무 무르익어 시상식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히려 발표까지 시간이 잡아먹힌 게 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선생님?”
“헙···. 진짜 온 거야 현우 너?”
“언제는 친절하게 일정까지 다 알려주셔 놓고요.”
그야 설마 진짜 올 줄은 몰랐으니까.
아무리 같은 이탈리아더라도 시간이 장난 아니게 빠듯했을 텐데.
한편 상길의 속마음을 꿰뚫듯 피식 웃은 현우가 무대 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와야죠.”
저렇게 기쁘게 웃고 있는데.
손아귀에 트로피와 표창장을 쥐는 한여름의 뺨이 약간 붉게 물들어있었다.
이내.
그 시선이 무대 아래 자신과 마주치자.
“···!”
당황한 듯 주춤거린 동공에 놀라움이 번지길 잠시, 화창한 햇살처럼 한여름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
곰곰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쩐지 붉게 물든 뺨이 더 짙게 물드는 것도 같았다.
그 뒤 시상에 이어 수상 소감을 요구하며 그녀의 손에 마이크가 쥐어졌다.
이 자리를 마련해준 이들에 대한 감사와 심사위원들을 향한 감사.
주변에 도움을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내던 순간이었다.
“어?”
어쩐지 시선이 잠시 현우 자신을 훑고 가는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하늘에서 지켜봐주고 있을 엄마와 한국에서 전화만 기다리고 있을 아빠에게도 정말 고맙구요···. 마지막으로······.”
서투른 불어로 중얼거리던 한여름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기분 탓이나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고 말해주듯이.
마이크를 쥔 손에 부끄러운 기색이 그대로 묻어나왔으나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가 정말 많이 좋아하는 이현우 피아니스트에게도!”
“푸흡!”
알아채지 못했던 모두의 시선이 한데 모아졌다.
“컥, 크흠. 흠.”
턱시도만 안 입었다 뿐이지. 누가 보더라도 근래 음악계에서 가장 뜨겁게 활동 중인 한 사람일 테니까.
저 사람······.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맙소사!
무언가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들에 이어 무대 밑으로 지긋이 향하는 한여름의 시선도 확인사살을 해주고 있었다.
하아.
일부러 조용히 들어왔더니만.
“···너무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소감을 털어놓으며 해맑게 웃는 한여름의 입꼬리가 간지럽게 벌어졌다.
‘저게···.’
퍽이나 귀여운 모습 때문에 더욱 거슬렸지만 그런 데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우와아!
오오!
곧 시상대에서 내려온 한여름이 트로피를 든 채 와락 안기기까지 했으니.
시상식은 별안간 드라마 세트 체험장이 되어버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반짝이게끔 만드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 * *
폴란드 바르샤바.
명품으로 된 깔끔한 턱시도를 입은 유성우가 이윽고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화이팅입니다!”
뒤따라온 수행원을 제하면 혼자였다. 다른 이들처럼 스승 같은 동행 따위 없이.
“···.”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드는 유성우였다.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에.
사실 자신을 잡아줄 무언가는 이미 마음속에 내재되어있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
쇼팽 콩쿠르 1차 본선을 앞둔 유성우가 세 글자를 되뇌었다.
이현우.
자신에게 처음으로 열등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소년.
『왜 여전히 네가 내 앞에 있는 거냐···』
처음 맛본 열등은 독약처럼 지독하리만치 쓰게 다가왔다.
투표란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 독기가 가득 머금어졌을 찰나.
『지는 줄 알았네』
비웃듯이 다가온 소년은 두 장의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나랑 여름이는 둘 다 첫 번째 연주자로 찍었거든』
혹여나 거짓말이 아닐까, 그 뒤 확인해보았으나 고개를 끄덕이는 한여름이었다.
정말 잘하더라고 놀랐다며.
『내 건 없어? 스티커 말야』
그 때 자신은 붙였더랬다. 그 소년의 선율에.
어쩌면 그건 열등 뒤에 숨어있던 진심이었다.
“방심하지 마라···.”
당시 똑같이 해주었던 말을 지금에 와서도 한 번 더 해주기로 했다.
세계를 누비고 연주회를 진행하며 제대로 방심하고 있을 소년. 아니, 청년에게 경고를 건넸다.
내면으로나마.
‘세상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는 너를.’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일념을 되뇌는 순간.
♬
고개 드는 오케스트라가 발걸음을 먼저 내딛었다.
진즉부터 뿌리 뽑았던 열등을 다시 한 번 걷어 차냈다.
저 먼 바깥으로.
뿌득.
갈린 이가 쇳소리를 냈으나 유성우의 그 입가만큼은 웃고 있었다.
그의 선율을 듣고 있는 관객들만큼이나 환히.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콩쿠르에서 또 다른 한국의 영광이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눈부시도록 환히.
* * *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꼭 어느 순간이라도 깨버릴 듯해 겁이 날 정도로 행복한 꿈을.
오직 슬픈 게 한 가지 있다면 이 꿈을 나누지 못함에 있을 뿐.
“여보.”
기일을 앞두고 미리 찾은 남편의 비석 앞에서 그녀는 슬프게 웃어보였다.
늘상 그 비석 앞에 설 때면 눈물을 흘리던 그녀였다.
비석 앞에 선 채 그에게 말하던 그녀였다.
“내가 그랬잖아요. 우리 현우 꼭 잘 키워내겠다고. 당신 몫까지 키워보겠다고.”
핏덩이를 껴안은 채 세상에 내던져진 과부는 단단했다.
단단해야 했다.
그 고우디 고운 핏덩이를 지켜내기 위해선.
“그러니 걱정 말고 잘 있으라고. 잘 지켜봐달라고.”
모진 박대와 말들을 견뎌야했다.
삼켜야했다.
아빠 없이 큰 애라 어쩔 수 없나보다며. 과부가 이런 것마저 똑바로 못하면 애는 혼자 어떻게 키울 거냐며.
그럼에도 늘 단단하게 버텨내던 그녀였다.
투정 한 번 없이. 원망 한 번 없이.
쪼르륵.
담기는 술잔에 여태까지 게워내지 못했던 원망이 담겼다.
“근데, 나 사실···.”
남편의 비석 위로 술잔을 내던졌다.
미처 보이지 못했던 설움을 내던졌다.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너무, 너무 많이···.”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을까.
왜 그렇게 떠나갔는지.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앞으로 더욱 모지게 불어닥칠 풍파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어떻게 견뎌야할지.
매일이 두렵고 매일이 겁이 났다.
젊은 과부에겐 그 어떤 방법도 없었으니까.
꽈득.
그럼에도 그녀는 이를 악 물었다. 악 물어야만 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그 핏덩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그게 엄마일 테니까.
설령 아이가 모난 돌처럼 자라나더라도 품어야겠다는 일념 하나뿐인 그녀였다.
“흐흐흑···.”
그 모든 걱정이 씻은 듯 사라지고 나서야 그녀는 마침내 게워낼 수 있었다.
마음속에 깊은 시간 동안 쌓여가던 설움을.
원망을.
그리움을.
오직 한 단어에 응축해 내뱉어보였다.
“여보···.”
비석을 붙잡은 그녀의 손이 따스한 열기로 뒤덮였다.
자식 앞에선 결코 보일 수 없을 뜨거운 열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해냈다.
세상 무엇보다도 무겁지만 귀중한 선물을 남겨주고 떠난 자신의 남편에게.
* * *
20XX년, X월 X일.
오랜만에 그이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왔다.
세월 덕인지 어머니께선 전혀 슬픈 기색 없이 웃으시며 우릴 반겨주었다.
아마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어머님만이 아시겠지만.
신혼부부가 한창 바쁠 텐데 와주어서 고맙다며 어머니께선 미리 손수 해논 반찬으로 진수성찬을 차려주셨다.
특별히 힘쓰셨다며 산해진미를 모아놓으니 아주 30년 전통의 한식당도 저리가라······.
“뭐야 이건.”
“어, 어어?”
“잠깐만, 여기···.”
철퍼덕.
당황한 한여름이 엎드려있던 그대로 황급히 공책을 가렸다.
“야아, 내가 일기 쓸 때 보지 말랬잖아!”
“야?”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몸을 뒤집자 하얀 이마가 그대로 눈앞의 사내에게로 드러났다.
쿡쿡.
“남편한테 야라니.”
그 이마를 찌르자 눈치를 보던 새색시는 천천히 정정해보였다.
“보지 말랬잖아, 여보···.”
“풋.”
반응이 귀여워 놀리고 싶은 걸 어쩌나.
그리고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닌데 뭐 어떻고.
그것보다.
“근데 방금 이상한 걸 본 거 같은데.”
“아, 아닐 걸?”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분명 뒷담 비스무레한 걸 본 거 같은데.
“으응, 빨리 자자!”
대충 얼버무리는 모습이 어쩐지 더 수상했으나 일단 그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내일 올 손님들도 있으니.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어머, 채원이네 삼촌은 여전히 기운이 넘치시네.”
특유의 붙임성으로 얼추 식구마냥 친해진 이상길을 어머니께서 있는 그대로 환영하셨다.
객은 더 있었다.
“어머머, 시영씨!”
“······어머님 잘 지내셨죠?”
놀라는 이유는 다름 아닌 팔짱을 낀 사내 덕이었다.
살짝 붉어진 멋쩍은 얼굴로 정종우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흐흥, 자기는 인사 안 드려?”
그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리나케 인사하는 정종우가 새삼 낯설었다.
아니, 얼마나 잡혀 사는 걸까 대체.
다만 예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인상이 꽤나 금슬이 잘 맞는 듯싶다.
잡혀살거나 말거나.
“선생님, 임시영씨.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반가운 낯들에 인사를 건네니 바로 한량이 다가왔다.
“현우야 나는?”
“네, 뭐 조금···.”
“뭐 인마?”
실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웃는 이상길의 모습에 곧 모두가 웃음 지어보였다.
어째 예술재단 내에서 지위가 한 참 올라갔는데도 사람이 여전한 게······.
“풋, 되게 반갑네요.”
퍽이나 반가웠다.
그리울 정도로.
······
···
곧 야무진 한 상 차림 위에서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술잔과 함께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의 주제는 선향예술재단, 더 포레스트 오케스트라, 대한민국 클래식을 이끄는 두 신예 피아니스트로 다양하게 오갔으나.
결국 마지막엔 추억으로 되돌아갈 뿐이었다.
“그 때 현우를 딱 보자마자 내가···.”
“서진그룹 만찬회였죠? 조명이 탁하고 켜지는데.”
첫 만남.
“흐흥, 그래서 그 때 이이가 저를 확 붙잡으면서···.”
“자, 잠깐만!”
“야, 왜 말려! 계속 얘기해보세요 재수씨.”
알지 못했던 에피소드.
“지나고 얘기지만 정말 감사해요 다들···.”
“아뇨, 어머니. 저희가 감사하죠.”
“그럼요.”
각자의 마음속에 맺힌 고마움까지.
도란도란 모여 옛날이야기를 나누니 슬픈 아버지의 기일임에도 마치 꼭 기념일 같았다.
아니, 꼭 한 편의 일기장 같았다.
긴 추억이 담겨있는 일기장.
마치 어제 한여름이 썼던 일기처럼.
“어디 가?”
한편 일어나려는 현우를 붙잡은 한여름이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딱히 쳐다보는 시선은 없었다.
그 사이에.
···.
한여름의 이마에 손가락 대신 다른 무언가를 스친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이 빨갛게 물든 한여름의 손도 자연스레 소매를 놓쳤다.
“어디 안 가.”
중얼거린 현우가 뒷말을 무어라 덧붙였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
어쩐지 그리운 생각이 들어서.
아니, 그리운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쭉.
맞닿은 인연들과 함께 현우 자신은 나아갈 것이지만.
다 쓰여지지 못한 일기장이 덮였다.
덮여진 일기장에는 여전히 내일이 찾아올 것이었다.
지나가는 오늘이 언제나 그리워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