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ural Order RAW novel - Chapter 112
23. 날개 짓을 하다.
경기마저 좋지 않아 춥게만 느껴지는 때이지만 설날이 다가오자 명절 분위기가 나면서 조금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경기는 여전히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장태현은 갑자기 찾아온 손님의 요구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전부터 알고 지낸 백제철강 한충현 상무에게 백제화학에 관한 내용을 몇 번 물었는데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박시운 박사가 찾아와서 밀린 임금을 해결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박시운 박사는 나이가 고작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연구소장이라면 최소 이사급인데 빨리 승진을 한 것 같았다.
“제가 채권단에 이름을 걸고 있지만 모든 것은 채권단 회의에서 결정한 후에 중요한 건은 채권자 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하고 다시 은행의 내부 결재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백제화학에 대출을 해주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설날인데 월급마저 나오지 않아 명절을 지낼 돈이 없습니다. 보너스는 바라지도 않지만 밀린 임금 한두 달치라도 어떻게 변통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직원들은 벌써 반년 가까이 월급을 받지 못한 실정입니다.”
너무나 딱한 사정이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백제철강의 거취가 결정되어야 그나마 정리가 될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선뜻 인수할 업체가 없었다. 그러니 그 자회사인 백제화학은 손을 쓸 수도 없었다.
‘이거 참, 괜히 백제화학의 상황을 물었다가 덤터기를 쓴 것 같은데.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장태현은 고개만 흔들었다. 얽히고설킨 것이 워낙 많아 해결해줄 방도가 없었다. 더구나 담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겠지만 자산 대부분은 부채로 인해 압류가 되어 있어 추가적인 대출은 은행장이라도 해줄 수는 없었다.
“정말 길이 없습니까?”
“방도가 없습니다. 그나마 있다면 딱 하나 근로자 생활안정자금 대출이 전부입니다. 그것도 500만 원 한도로 해줄 수 있습니다. 이것도 30여 명 정도가 전부입니다. 다행히 며칠 전에 연간 한도가 배정되어 가능한 것입니다.”
장태현은 자신이 쓸 수 있는 권한을 총동원해도 그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장인걸이 있기에 가능했다. 백제화학을 인수하려는 의사가 있는 것을 확인한 상황이고 꽤나 잘 나가는 프리웨이를 운영하는 상황이니 대출상환에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 취직을 시켜서라도 상환 받으면 되었다.
박시운 소장도 당장 어려운 직원에게 그것이라도 대출해줄 수 있다고 하니 반색을 했지만 이런 것도 언 발에 오줌 눕는 미봉책에 불과하기에 한숨이 나왔다.
“한 상무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점장님이 우리 백제화학에 관심을 보였다고 하던데 인수를 원하는 업체라도 있습니까?”
박시운 소장의 질문에 장태현은 뭐라고 답을 하기가 곤란해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인걸이 관심을 보였지만 인수할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현재 한동그룹만이 백제철강에 관심을 보이고 있고 그들은 어떻게든 인수대금을 줄이려고 기를 쓴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백제화학을 인수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한충현 상무가 백제화학의 대표를 겸하고 있지만 고작 상무에 불과해 백제철강의 고위급 회의에 참석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래도 독립된 법인의 대표이기에 꼭 필요한 경우에 호출을 하여 통보를 하거나 의견을 듣고 있었다.
“맞습니다. 사실 채권단은 백제철강을 빨리 처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아 고민입니다. 특히 백제화학은 인수를 타진하는 한동그룹에서 인수를 원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거기는 경인특수금속이라는 비슷한 업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백제화학은 자본잠식 상태입니다. 즉, 회사를 넘겨주려면 돈을 주고 넘겨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돈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니 결국 부채를 탕감해주면서 약간의 돈을 받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그것도 불가능하면 청산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제화학은 자산을 보유한 회사가 아니라 영업망과 연구능력 중심의 회사였다. 그렇기에 무형자산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그저 빚 덩어리에 불과했다.
“회사를 백제철강과 분리하여 매각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분할하여 매각하려고 하지만 인수하려는 업체가 없는 실정입니다. 일단 설이 지난 연후에 채권단과 한동그룹의 협의를 거쳐 최종적인 결정을 할 것입니다. 한동그룹에서 명확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분할매각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분할매각을 결정하여 정리를 했다가 백제철강의 가치가 훼손되면 채권단의 손실로 이어지기에 일단 한동그룹에서 결정을 지어야 그걸 근거로 채권단이 결정할 수 있었다.
“그저 출근을 하지만 연구비도 없어 시간만 때우고 그렇다고 제대로 월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말 다들 미치기 직전입니다.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제가 은행의 지점장이지만 채권단에서는 그저 실무담당자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후에 박시운 소장을 정책금융담당 대리를 불러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 정도가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장인걸은 은마기획에 들러 음원판매의 준비상황을 점검했다. 결제시스템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가고 있었다. 카드회사에서도 차츰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 온라인 카드결제시스템을 도입하려고 했다.
카드회사에서도 온라인판매의 가능성을 알기에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지만 마땅한 방법, 보안시스템이나 결제시스템이 없어 아직 진입을 못하고 있었다.
“음악파일의 변환의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 빨리 진척이 되지를 않아. 그나마 네가 소개해준 이미향이나 몇이 온 덕분에 뭔가 길이 보이는 것 같다. 그래도 전문가가 붙으니 다르긴 하더라.”
이미향은 은마기획에서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아르바이트 학생이라기보다 전문적인 일을 하는 프리랜서로 일을 하게 되었다.
기존에 대략 15명가량의 아르바이트 학생이 음반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고 다시 MP3 파일로 변환을 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작업을 하니 결과는 엉망이었다.
변환한 파일은 완벽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가공이 필요했는데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인걸도 그런 사정을 알지만 직접 나설 수가 없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하려는 시점에 양진에 갔으니 장시현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행이도 이미향이 와서 문제를 파악하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친구 여섯 명을 추가로 불러 아르바이트를 하게 하였고 파일변환을 한 후에 재가공하는 일을 나누어서 맡았다.
“기존의 아르바이트 학생들도 지금은 잘 한다면서요?”
“그러게 말이야. 내가 음악을 듣는 것만 잘 하지 사실 편곡 같은 부분은 몰라서 제대로 시키지를 못한 거지. 몇 번 프로그램을 가르쳐 주니까 절반 정도는 뚝딱 배우던데.”
“실력 있는 사람을 선별하여 직원으로 받아들여요. 재택근무를 해도 되니 학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결제 관련 문제가 해결이 되면 바로 음원사이트를 개설할 것이고 거기에 기획사 아이디를 부여해 줄 것입니다. 그 때는 기획사 아이디를 이용하여 직접 업로드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걸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아마 3월 중에 결제 시스템이 구축될 것이고 그러면 바로 유료 관련 사이트를 구축할 것입니다. 그 전에 최대한 많이 작업하여 파일을 비축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단 유명한 노래부터 준비하는 것입니다. 일반인이 듣고 싶은 노래부터 올려야 합니다.”
“그건 어느 정도 고려하여 작업을 하고 있다. 각 음반사별로 어느 정도 히트를 친 노래부터 작업을 하고 있으니. 음악을 하던 친구들이라 그런 노래는 잘 찾아내던데.”
일단 은마기획에서 노래를 업로드하면 구색은 갖출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하여 저작권자별, 가수별로 카테고리가 형성되면 제법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그리고 MP3플레이어 개발이 진행 중입니다. 은마기획도 거기에 한 발 걸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음원판매를 주로 할 은마기획이지만 MP3기술에 대한 투자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음, 유현이형에게 이야기를 해봐야겠네. 명진전자와 폴라텍스트라는 회사에서 개발 중이라는 말이지?”
“물론 우리 히어로기획도 투자를 하고 프리웨이도 참여를 합니다. 현재 프리웨이에서 3명의 인원을 채용할 계획이고 채용이 되는대로 연구팀에 합류할 것입니다.”
“벌써 큰 틀이 갖춰진 것 같은데 우리도 한 발 걸쳐야지. 가능성이 크니 나선 것 같고.”
장시현도 은마기획의 대표가 되자 열심히 IT산업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음원산업에서 MP3와 그 주변기기 산업의 전망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설날이 되자 장인걸은 방송출연이나 행사를 고사하고 연휴시작 전날 오후에 양진으로 내려갔다. 몇 개의 특집 방송 촬영은 사전에 끝냈기에 연휴까지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외갓집 재산정리는 끝났어요?”
어머니에게 외갓집 상황을 물었다. 유산상속 부분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유언장대로 진행을 하기로 했다. 상속권자가 전부 동의를 하지 않아도 유언장이 있기에 재산분할이 가능하다고 하더라. 그에 따라 나나 네 이모는 정리를 했다. 물론 경원이도 마찬가지이고. 성표란 놈은 자기 몫이 적다고 소송을 한다고 날뛰더니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지 제일 먼저 진행을 하더라. 등기가 끝나자마자 부동산에 판다고 내놓았다.”
재산이 꽤 된다고 했지만 총액이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네 사람 몫으로 나누니 상속세는 내지 않아도 되었다. 오직 취득세와 등록세만 내면 되었다.
“집도요?”
“그렇다고 하더라. 하지만 지금 같은 때 팔릴지 모르겠다.”
외환위기로 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시골 읍에 있는 낡은 집과 산동네의 논밭을 살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어지간히 가격을 낮춰서는 메리트가 없어 보였다. 팔려면 전의 절반 가격으로 내놔야 문의라도 하는 상황이었다.
“알아서 하겠죠. 달리 연락 온 것은 없죠?”
장인걸은 취득세와 등록세, 국공채 할인 수수료도 꽤나 되는 금액이기에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의문이 들어 돈을 대줬는지 물었다.
“모르겠다. 전화 와도 그냥 끊어 버렸으니. 엄마도 돌아가셨는데 이제 더 이상 그놈하고 엮일 이유가 없지. 살아생전에야 엄마 생각하여 참고 봤지만 이제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
손설향은 아예 남이라 생각하기로 했다는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을 했다.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잘 하셨어요. 제가 볼 때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때 전화가 울렸다. 그래서 엄마 대신 장인걸이 전화를 받았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보세요?”
“나, 나, 쿨럭, 야”
장인걸은 상대가 기침을 하였지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외삼촌 손성표였다.
“무슨 일이에요?”
“엄마, 에취, 좀 바꿔줘.”
장인걸은 감기를 걸린 것 같아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말을 하지 않고 손설향을 보았다. 손을 내밀어서 달라기에 그냥 수화기를 주었다.
“네가 나한테 뭔 일이야?”
손설향이 전화를 받고 툭 쏘는 어투로 말을 했다.
“나 좀 병원에 데려가 줘.”
“병원에 가고 싶으면 혼자 가.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겠으면 119에 전화 걸어 구급차 불러서 가고.”
손설향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아프다고 하는데도 매몰차게 대하고 있었다.
“괜찮을까요?”
“얼마 전에도 전화해서 죽겠다면서 병원 데려다 달라고 해서 네 아버지랑 같이 가봤더니 감기 조금 걸린 것 외에 멀쩡해. 개자식이 꾀병부리면서 동정을 유발하여 한 푼이라도 뜯어내려고 하는 거야. 하여간 내가 저 놈 때문에 네 아버지한테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내가 죽으면 창피해서 죽은 줄 알아라.”
손설향이 꾀병이라고 했지만 장인걸의 귀에는 진짜로 감기에 걸린 사람의 소리로 들렸다. 전에 거짓말을 한 탓에 이번에는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말았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해 보였다.
“가보죠. 거기 보일러 등유를 쓰죠? 돈 떨어져서 보일러도 돌리지 못할 소지가 커요. 전에 전기장판도 고장이 나서 새로 사야한다고 했잖아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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