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ural Order RAW novel - Chapter 17
장인걸은 적당히 수업에 나가면서 과 학생들과 친분을 만들어나갔다. ‘화공학총론’이라는 전공필수를 제외하고 모두 교양과목이기에 공부가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총 19학점이지만 영어와 화학, 물리학이 실습이 있어 실질적으로는 24시간이 되었다.
여러 동아리에서 공동으로 구매하는 프로그램에 기타를 신청했다. 가격은 대략 15만 원 정도였다. 품질도 그런대로 괜찮은 것을 알기에 연습용으로 적당했다.
“드럼도 제법 치는데. 비트나 퍼포먼스가 괜찮은 것 같아.”
드럼의 경우에는 같은 노래를 연주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 연주하는 방식이 천차만별이었다. 기타나 피아노는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는데 드럼은 완전히 달랐다.
타격하는 각종 파트도 다르고 부위도 달랐고 강도나 템포도 달랐다. 그렇기에 드럼을 누가 치느냐에 따라 밴드의 연주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었다.
장인걸이 드럼에 앉아서 신나게 두드리고 나자 그렇게 말했다. 그러다가 장인걸이 이어폰을 꽂고 있는 것을 알고 무엇인지 물었다.
“어디선가 익숙한 템포인 것 같더니 ‘Top of the world’였어? 카펜터의 명곡.”
권세라의 질문은 장인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하긴 노래에 맞춰서 연주를 하는 것이 나름대로 연주력이나 퍼포먼스를 향상시키는 방법이지. 이 방법을 누가 말해주지 않았는데 알고 있는 거야?”
노래가 들리지 않았지만 노래를 들으면서 연주한 것으로 노래 제목까지 유추할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멜로디에 맞도록 의식적으로 연주한 면이 있지만 그 정도라면 상당한 박자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게 티나 나요?”
“네 실력이 좋으니 가능한 거지. 그 노래 특유의 박자를 드러낸 것이니 파악이 가능하지. 생판 초보가 친다고 하면 몇 박자인지 아는 것이 고작이지.”
권세라의 말에 자신의 실력이 전보다 나아졌다는 것을 알았다. 전에도 드럼을 칠 때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연주해도 권세라가 노래를 맞추지 못했다. 그저 몇 박자인지 맞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특유의 연주법이 두드러진 경우라면 알아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곡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노래도 잘해, 기타도 잘 쳐, 거기다 드럼까지 잘 치면 못하는 게 뭐냐? 색소폰도 불 줄 아는 거냐?”
장인걸은 기타나 노래실력은 보였지만 색소폰을 부는 것은 보여주지 않았다. 입에 대는 악기이기에 빌려서 연주하는 것도 실례였다. 최소한 마우스피스라도 가지고 있어야 어렵게 레슨이라도 받을 수가 있었다.
“그저 조금 아는 정도죠. 그래서 더 배우려고 왔죠. 윤혜 누나, 정훈이 형, 상운이 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죠.”
“얘가 지금 우리 3대 마스터를 논하는 거야. 그 정도가 되려면 프로가 되어야지.”
윤리교육과 3학년인 차윤혜는 2년 전 대학가요제에서도 은상을 받은 뛰어난 보컬이었다. 특히 감성 넘치는 발라드와 포크송은 카페에서도 고정적으로 연주를 할 정도로 뛰어났다. 단지 집안에서 음악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취미로 하는 정도였다.
유정훈은 4학년 선배인데 화공과 선배이기도 했다. 전에 그 동아리에 들어갈 때 유정훈이 있어 가입한 면도 있었다. 처음에 장인걸이 기타를 배운 것도 유정훈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전상운은 철학과 3학년인데 색소폰에 대가였고 트럼펫도 기가 막히게 불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기타도 제법 치고 노래도 했다.
성격이 상당히 쾌활했고 로맨티스트이기도 했다. 특이하게 루이 암스트롱을 좋아하고 재즈를 좋아했다. 악기를 배운 목적이 여자들을 사귀기 위해 배웠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쩌면 ‘기타하나 둘러메고’ 음악 여행을 떠날 것 같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또한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 대화를 하다보면 끝내는 여자를 유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특히 곧 동아리에 들어올 것으로 예상이 되는 강진경과 가장 먼저 염문을 뿌린 사람이기도 했고 그 후에도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과 스캔들을 냈다. 그러면서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도 재주였다.
장인걸은 기타와 키보드를 배우고 군대에 다녀온 후에야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기에 그리 실력이 좋지 않았다. 다행이도 당시에 전상운은 취직을 하지 않고 카페에서 연주자로 살면서 오후에 학교에 나와서 놀던 때라 틈이 날 때 조금 배웠다.
드럼은 대부분 동아리 회원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조금씩 익혔는데 제대한 후에 적당한 드러머가 없어 장인걸이 맡게 되어 본격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권세라에 비해 그 실력이 그리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안정감이 중요했는데 이는 다양한 경험이나 관록이 중요하기도 했다. 아직 어린 권세라에 비하여 장인걸이 훨씬 인생의 경험이 풍부했다.
“하긴 네 실력이라면 가능할지도. 지금 1학년인데 연습하면 실력이 더 나아질 것이니.”
권세라는 그렇게 말하고 장인걸이 일어난 자리에 앉아서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뭔가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았다.
장인걸은 학교 구경하러 오겠다는 최유림 때문에 곤혹스러웠지만 결국 학교로 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교문에서 만나서 같이 점심을 먹었다. 그날은 오전 수업만 있기에 오후에는 달리 일정이 없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어요?”
학교를 대충 한 바퀴 돌고 난 다음에 장인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용건이 무엇인지 물었다. 조직에 몸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고향 후배를 조직으로 끌어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돈이 조금 있는데 사실 직장에 다니다보니 큰돈을 은행에 맡기기 조금 곤란해. 회사에서 알면 그렇잖아. 그래서 말인데 네가 한동안 보관을 좀 해주었으면 하는데. 가족들도 추적을 하면 바로 드러나서 말이야. 가족들에게도 비밀로 했으면 해.”
장인걸은 그런 말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조직의 자금을 빼돌리거나 조직의 자금을 횡령하는 것 같았다. 사장 비서라면 상사 몰래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하는 것보다 사장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컸다.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더라. 직장 동료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능하고.”
장인걸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들어주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상황이 이상해지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3년 후에는 두목과 같이 변을 당할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비자금을 보관했다가 그 조직의 다툼과 연루될 소지도 컸다.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거금을 예금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에 아버지가 1억 가까운 돈을 그의 명의 계좌에 한동안 넣어 놓았어도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궁금하여 알아보니 탈세에 연루되거나 부동산 거래만 하지 않으면 특별히 추적조사를 하지 않으며 개인의 자본거래는 보통 비과세가 원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3년 후에 죽는데, 이것과도 연관이 있는 일일까?’사회생활을 모른다면 무조건 안 된다고 했을 것이지만 사회생활을 해본 장인걸이기에 딱 잘라서 거절하지 않았다. 위험해 보이지만 그런 일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부부나 가족들 사이에서도 비상금이라는 명목으로 서로 재산을 숨겼다.
“얼마나 되어요? 너무 큰돈을 넣어 놓는 것은 각종 기관에서 조사가 들어오니 불가능하지만요.”
알면서도 모르는 척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그런 돈을 관리하면 일종의 대가가 주어질 것이니 그것이 탐이 났다. 분명 독이 있을 것이지만 사회생활을 했기에 구미가 당겼다.
자신의 은행 계좌에 돈을 보관하는 것은 신용평가나 나중에 부동산 거래를 하는데 유리한 면이 있었다. 자금추적조사를 하는데 큰 자금 거래가 있다면 그것으로 증빙이 될 수도 있어 증여나 상속을 받아도 문제가 없을 수 있었다.
“그리 큰 금액은 아니야. 한 달에 많아야 천만 원 정도 될 거고 1년에 총액으로 1억은 넘지 않을 거야. 그 정도 금액이라면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문제가 되면 나한테 집안일로 잠시 빌렸다고 하면 되고.”
최유림은 조직의 일이 아니라 개인의 일로 말을 하려고 했다. 조직과 연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동생의 계좌에 입금을 했는데 통장과 인감을 자신이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가 분실신고를 하고 몰래 인출하여 도주한 사실을 언급했다.
“그런 위험이 항상 존재하기에 함부로 맡기기가 곤란해. 통장과 인감을 내가 가지고 있어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그래도 언제라도 필요하면 찾을 수 있어야 하니 필요하고.”
“통장과 인감을 형이 가지고 있으면 외부에 비밀을 들킬 위험이 커지지 않아요? 계좌주가 그 돈을 욕심내서 비밀번호를 변경하면 찾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고요. 자금의 존재를 회사나 주변에서 알지 못하도록 숨기려는 것이라면 그냥 그것도 제가 보관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알았다. 그게 좋을 것도 같구나.”
분실신고를 하면 되는 문제이기에 돈을 찾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적절한 시점에 와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비밀유지와 편리함 사이에서 비밀유지를 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자.”
장인걸은 통장이나 인감을 주는 것은 조직에 자신의 존재가 알려질 위험이 있기에 내키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현금으로 직접 가져오는 것이 좋습니다. 부득이 무통장입금을 한다면 입금증도 바로 없애 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흔적을 남겨서 좋을 것이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만일에 메모를 해놓더라도 이름이나 계좌번호를 남기지 말고 A나 B 이런 식으로 남겨야 합니다.”
장인걸은 최유림과의 연결고리가 남아 있는 것이 불안하여 그렇게 조언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장인걸의 명의를 이용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알았다. 그렇게 하마.”
장인걸의 지적에 최유림은 흔적을 많이 남긴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라면 돈을 자신의 통장에 넣어두는 것과 차이가 없었다.
장인걸은 원경희와 사귀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쉽기도 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 허전한 마음이 들고 그럴 때면 원경희가 생각났다. 사귀지 않은 것이 아쉽기도 했다.
‘아니야. 그건 그저 욕구불만에 불과해.’장인걸은 자신의 약한 마음을 다잡으면서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했다. 가끔 허전한 생각이 들 때가 문제였다.
따르릉, 따르릉…
11시 경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11시30분 정도 되었는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나야.”
최향림이었다. 하긴 이 시간에 전화를 한다면 집이나 최향림 정도였다.
“기숙사 11시면 문 닫지 않아?”
“안에, 휴게실에 공중전화 있어. 막 화장실 다녀오다가 공중전화가 보이잖아. 마치 전화를 해달라고. 그래서 주머니를 뒤졌는데 백 원짜리가 있잖아.”
횡설수설하는 것도 같고 말이 약간 꼬이는 것 같았다.
“너 술 취한 것 같다.”
“응, 저녁에 과모임이 있었어. 과대 선출을 했는데 뒷풀이 한다고 모였어. 기회만 되면 다들 한 잔 하는 분위기라. 일어날 때는 취하지 않았는데 기숙사에 돌아오니 술이 올라오는 것 같아.”
“취했으면 일찌감치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
술 취해서 전화를 하면 실수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나중에 그것을 확인하고 이불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몰라.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오지 않아.”
최향림이 밤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자 기분이 묘했다. 단순히 그냥 잠이 오지 않아 전화를 했는지 자신처럼 마음이 허전해서 전화를 했는지 신경 쓰였다.
‘당분간 여자를 사귈 생각은 없는데.’장인걸은 뭐라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여기서 섣불리 이상한 말을 하면 자신이 최향림과 사귀려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난 피곤해서 자야해. 특별한 용건이 없다면 밝은 날에 맑은 정신으로 통화하자.”
매정하다고 하겠지만 냉정한 어조로 다른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여자로서 매력을 느끼거나 설렘이 없는 상황에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나는 것은 좋지 못했다.
“알았어.”
떨떠름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원경희와 사귀다가 헤어졌어도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데 같은 동네 이웃집 최향림과 사귀는 것은 좋지 못했다.
더구나 조직에 속한 최유림의 동생과 엮이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