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ural Order RAW novel - Chapter 18
‘차라리 나중에 들어올 동아리의 강진경을 사귀고 말지.’강진경은 아직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며칠 후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정외과 여학생이었다. 악기는 잘 다루지 못하지만 노래는 아주 잘 했다. 특히 미모가 뛰어나 동아리의 남자들과 염문이 끊이지 않았다.
‘변덕이 심하고 남녀 관계에 쿨한 성격이라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졌지. 더구나 자유연애론자이라 남녀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는 편이었지. 만일 원경희와 사귀지 않았다면 한 번 정도 사귈 기회가 있었을지도.’차라리 천성이 바람둥이인 강진경 같은 여자가 더 나을 수 있었다. 현재 여자를 만난다면 차라리 가볍게 만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보통의 여자는 남녀 관계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양다리를 걸치거나 가벼운 만남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애인이나 이성의 친구에 대해 충실할 것을 강요했다.
조용히 방안에서 독경을 듣고 있었다. 불경을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독해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독경을 하는 것도 필수적이었다.
특유의 리듬감 있는 독경은 그 자체로 일정한 법칙을 담고 있었다. 불경에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존재했다. 그것을 체득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해독을 해도 피상적으로 겉핥기만 하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장인걸은 중요한 불경을 독경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테이프를 구해서 듣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선교활동을 위해 스님들이 독경 음반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야 용어도 생소하여 어려웠지만 읽다보니 결국 익숙해진다. 영어도 80%가 3000단어 이내라고 하는데 불경도 마찬가지이다. 기본 용어에 익숙해지면 읽는데 어려움이 없다. 금강나한공도 대략적인 뜻은 해석을 했다.’처음에는 금강나한공을 해석하는 하는 것이 암담했지만 반야심경부터 금강경, 천수경, 묘법연화경, 화엄경, 유마경까지 읽다보니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구결을 풀이해놓은 주해까지 읽다보니 80%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단지 그 의미를 체득하지 못해 아직까지 요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구 하나하나에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이면에 담긴 의미를 전부 파악하지 않고는 그 의미를 파악했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라마교에서 사용하는 특이한 의미도 담고 있어 그쪽의 불경을 더 읽을 필요도 있어.’금강나한공에 매달리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이 숙명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여기 있는 책의 절반 정도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불경이다. 물론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도서관에서 읽은 도서에는 제목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또한 몇 권은 도경으로 보이기도 했다. 불경이 아니라 도가의 서적으로 보였다. 물론 시간이 없어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첫 부분만 간단히 살펴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장인걸은 개강을 한지 3주 만에 시골집에 갔다. 대학생은 돈이 떨어져야 집에 찾아온다는 말도 있지만 장인걸은 순수하게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집에 갔다.
“아주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네. 오빠는 혼자 사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
금요일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여동생인 장인숙이 괜히 시비부터 걸었다. 보기만 하면 뭔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말을 내뱉는 시기이기도 했다. 만나면 티격태격 하는 것이 현실 남매였다.
“너는 고등학교에 가서 땅이 넓은 줄을 아주 잘 깨달은 것 같구나. 이왕에 하늘 높은 줄도 깨달았으면 좋을 텐데.”
“이씨, 가뜩이나 체중이 불어서 걱정인데.”
본전도 찾지 못한 장인숙이 씩씩거렸지만 장인걸은 일단 동생의 기를 꺾은 것에 만족했다. 부모님이나 할머니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달리 말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렇게 아옹다옹 싸우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그러려니 했다.
“나도 오빠처럼 학교 앞에서 자취할래.”
“그냥 집에서 다녀. 가뜩이나 살찌는데 나가서 살면 라면만 먹다가 통통 불지.”
엄마마저 장인숙에게 면박을 주었고 그러자 입을 삐죽이면서 혼자 화를 냈다. 그런 행사를 치르고 늦은 저녁을 따로 한 후에 아버지와 같이 자리를 했다.
“논은 포기했어요?”
“경기가 좋지 않아서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가격도 평당 2만 원 이상은 부르는 것 같고.”
장재현도 전이라면 혼자 결정하였을 것인데 장인걸이 먼저 문제 제기를 하고 형인 장태현마저 만류를 하니 결국 포기한 것 같았다.
“지금 돈이 좀 있죠? 전세를 얻으려고 했던 돈도 있고 그간 모은 돈도 있고요?”
최소 3천만 원 정도 여윳돈이 있어 보였다. 전세금을 하고도 1,500만 원이 있었고 3천만 원을 은행에서 융자하여 논을 샀다. 그 후에 다른 밭까지 싼값에 구입한다고 2천만 원을 추가로 융자했었다.
IMF 외환 위기가 터지자 6,500만 원을 주고 구입한 토지의 가격이 반 토막이 나서 3,500만 원도 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로 인해 이자를 부담해야 하고 지가 하락에 의한 원금의 조기상환 압력까지 받게 되면서 한동안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남는 것이 없는 상황에 처하였다.
“땅을 조금 넓히려고 했던 돈이 조금 있기는 하다만, 왜?”
“그 돈을 은행에 두는 것은 좋은데 방법을 바꿨으면 해서요?”
“방법을 바꾸자고? 이자율이 높은 은행으로 옮기자는 것이냐? 은행 이자야 거기서 거기지.”
“그게 아니라 달러나 엔화를 보유했으면 해서요. 얼마 전에 보니까 일반 개인도 1인당 1만 달러까지 특별한 신고 없이 보유가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를 제외하고도 저까지 하면 3만 달러를 보유할 수가 있죠. 아니면 금으로 보유를 해도 좋고요. 금값이 아주 높게 오를 것이라고 하더군요. 시중 자금이 마르지만 외화는 더 빨리 마를 것이라고 하더군요.”
“한 번 은행에 알아보마. 내 듣기에 외화는 읍내 농협에서 취급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래서 은성에 있는 외환은행으로 가야할 걸.”
“그러면 저한테 보내시던가요. 그러면 제가 학교 앞의 외환은행에서 바꿀 테니까요.”
“알았다. 내가 알아보마. 형님이야 돈 있으면 자기 은행으로 옮기라고 하니 말하기도 그렇고.”
큰아버지에게는 돈이 있어도 절대로 있다고 하지 않았다. 만나기만 하면 은행에 예금을 유치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은행 대출금은 다 갚았어요?”
“조금 있지만 언제라도 갚으면 된다. 논을 사면 융자를 새로 내지 않고 기간을 연장할까 했었지.”
대출을 새로 받는 것보다 대출기간을 연장하는 것이 준비하는 서류도 적고 용이한 면이 있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이자가 오르면 변동금리를 적용하도록 되어 있어요. 지금처럼 약간 움직이면 금리를 인상하지 않지만 한 번에 2~3% 정도 오르면 그만큼 반영해요.”
대출의 금리가 최대 22%까지 올랐었다. 많아야 고작 20만 원 정도이던 이자가 60만 원으로 치솟았다. 가지고 있는 땅값은 한순간에 반 토막이 되지, 그 땅을 사기 위해 받은 대출의 금리는 터무니없이 높아지자 집안 분위기가 항상 좋지를 못했다.
토요일도 집에서 보내고 일요일 오후에 장인걸이 서울로 간다고 집을 나서자 장인숙이 따라 나섰다.
“아빠가 버스터미널까지 태워준다는데 왜 그런 거야?”
장인걸은 특별히 가져갈 물건도 없다면서 버스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너랑 이렇게 데이트 하려고 그랬다.”
장인숙은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런 대답을 기대한 것이 아닌데 그런 말을 하니 실소를 지었다.
“그냥, 버스 타면 되는데 차를 몰고 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것이 귀찮지. 그리고 이제 나 혼자 알아서 할 나이이기도 하고. 평소 아침에 너 태워다 주는 것도 귀찮을 텐데.”
버스를 놓치면 결국 아버지가 학교에 등교를 시켜야 했다. 장인걸은 한 달에 한두 번이 고작이지만 여동생은 일주일에 한 번 꼴이라는 말을 했다.
“으이씨.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을.”
“공부는 할 만해?”
“그렇지. 방학 때 놀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따라가는데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
“열심히 해. 그래야 나중에 같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지. 정희원 선생님이 담임이라는데 지금도 남편 직장, 아내 미모 이야기를 하지?”
“오빠 때 급훈을 그렇게 바꾸려다가 난리 났다면서?”
“2년 전 우리 2학년 때 처음 부임했는데 그렇게 급훈을 달았다가 교장선생님에게 불려가서 엄청 혼을 났다고 하더라. 재밌는 선생님이지?”
“응, 한데 너무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서 뒤의 애들은 싫어해. 1학년은 특별반이 없어서 그런지 다 놀자는 분위기라 나는 걱정이 되기도 하고.”
“2학년이 되면 문·이과로 나뉘고 반 편성도 되면 오히려 좋을 거야. 1학년 때에 너무 조이면 2,3 학년 때 지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따라만 가.”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하지만. 다이어트도 해야 하는데 달리기가 도움이 될까?”
장인숙은 부쩍 건강해진(?) 몸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적당히 살이 찌는 것은 마지막 성장을 위해서 좋아. 빼빼 마르면 영양부족으로 키가 크지 않는다고 하더라. 이 상태만 유지하고 내년에 살을 빼. 겨울방학 때 열심히 달리고.”
장인걸은 동생과 이렇게 같이 걸어본 경험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저 만나기만 하면 아옹다옹 싸우기만 했었다. 지금부터라도 자주 대화를 해 조금 더 가깝게 지내겠다고 다짐했다.
장인걸은 오누이가 쌍으로 밤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 귀찮게 한다고 툴툴대며 밖으로 나왔다.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최유림이 당장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왔어요?”
“조용히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몰래 돌아서 여기로 왔다. 사람들은 지금 내가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너를 만나는 것이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것 없어 이렇게 몰래 왔다.”
11시가 다 되어서 전화를 걸었고 곧 택시를 타고 근처로 온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부분에서 기다렸다.
“저기 다방에라도 들어갈까요?”
“다방은 그렇다. 그런 곳에는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차라리 네 집에 잠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자.”
장인걸은 거절하려다가 최유림이 집을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생각에 방으로 안내했다. 차라리 집안이 한적하고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다. 비밀 유지는 최유림의 주변에 해당되지 장인걸의 주변은 크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번에 알려준 계좌로 돈을 보냈는데 확인했지?”
장인걸은 별도로 계좌를 하나 만들어 통보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계좌번호를 외우고 적어놓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네. 그렇게 했어요. 1000만 원이나 되던데요.”
“일단 여유자금을 보냈다. 네 말대로 입금증은 바로 폐기를 했다. 앞으로는 현금으로 너한테 가져올 생각이다. 그래야 흔적이 남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런 이야기야 간단히 공중전화로 해도 되는데 이렇게 올 필요가 있어요?”
장인걸이나 최유림은 무조건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기로 했다. 공중전화는 번호가 특정되지 않기에 추적이 쉽지 않았다. 귀찮더라도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었다.
“돈을 그냥 은행에 묻어두는 것은 그렇고 뭔가 굴려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최유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채 외에는 방도가 없어 보였다. 사업을 하는 것도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안했다. 그러니 장인걸에게 좋은 방도가 없는지 물은 것이다.
“다 위험이 있으니 문제죠. 믿을만한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그나마 안전한 방법이지만 일이 틀어져 돈을 떼일 염려가 있죠. 사람이 속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속인다고 갚을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갚고 싶어도 갚지 못하니.”
장인걸은 일찌감치 자는 것을 포기했기에 믹스커피를 타서 내놓았다.
“그래도 뭔가 방법이 있을 것 아니야? 은행 이자만 바라보고 있기에는 그렇잖아.”
“그러면 형님이 직접 음식점이라도 차려서 운영하든지요. 그런 방법 외에 방도가 뭐 있겠어요? 주식을 할까요? 주식 투자를 해서 돈 번 사람은 없다는데.”
장인걸은 방도가 있지만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계좌를 빌려주는 것도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마저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