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ural Order RAW novel - Chapter 21
이미향이 버스정류장에서 먼저 떠나고 나자 권세라가 식사를 하자고 했고 그러자고 했는데 큰 실수를 한 것을 깨달았다. 권세라는 지독한 결정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정했지만 메뉴도 식당도 정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갈팡질팡했다.
“뭘 먹자는 거예요? 그럴 거면 누나가 직접 해먹는 수밖에 없겠네요. 하긴 그런 조건들을 맞추는 음식이 있기나 할지.”
입에서 나오는 조건이 워낙 다양하고 짜고 맵고 단 것이 먹고 싶다고 하다가 그러면서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나는 음식을 찾으니 조건에 부합하는 음식이 없었다.
“너, 자취하지? 아침은 먹고 다닌다고 했지? 네 음식 솜씨가 어떤지 궁금한데.”
직접 본인이 만들어서 먹으라고 하니 결국 장인걸이 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다.
“이제 갓 자취 시작했는데 그저 밥을 해서 집에서 가져온 김치에 마른 반찬으로 먹는 정도인데.”
전에 10년 이상 자취를 했지만 그것은 이미 없던 일이니 이제 갓 시작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도 기숙사에만 있어서 반찬을 할 줄 모르는데. 그러면 내 비장의 레시피를 꺼내야 하나. 내가 김치찌개 하나는 잘 하는데. 솜씨를 보여 봐?”
그냥 음식점으로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자취방으로 쫓아올 기세이니 난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거절하는 것이 정답인 것 같은데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설마 강진경과 어떻게 하려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 전에 뭔가를 하겠다는 건가? 이건 마치 남자가 여자의 자취방에 쳐들어가는 형상인데.’권세라를 보았다. 편한 캐주얼 복장에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뒤로 그냥 묶은 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골격이 굵직해 마치 남자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도 가꾸면 못생긴 얼굴은 아닌데.’장인걸도 남자이기에 여자의 외모를 따지는 것은 본능이었다. 거기다 서른 살까지 살았던 경험이 있기에 여자가 꾸밀 경우에 어떻게 변할지 가늠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복학한 이후에도 몇 번 봤기 때문에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었다.
‘선머슴 같은 모습이어서 그렇지 꾸미면 괜찮은 외모야.’권세라의 외모는 맘에 들지만 한 여자의 애인이 되어 발목이 잡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물론 그런 생활이 불행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할 경우에 따라오는 제약이 너무나 컸다.
애인이 있다고 해서 꼭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만 권세라의 모습을 보면 남자 친구에 대한 집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보통의 여자가 가진 정서였다.
물론 이기적이고 양다리를 걸치고 바람둥이 기질을 가진 여자도 많지만 그것도 상대적이었고 권세라의 성격을 본다면 그렇지가 않았다.
‘나 하기 나름이지. 굳이 피할 이유도 없다. 밥 같이 먹는 선후배 정도의 사이면 되는 거야.’“알았어요. 자취방이 궁금한 것 같은데 같이 가요. 뭐 볼 것도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이 사는 빌라를 향해 갔고 가기 전에 정육점에 들러 찌개용 돼지앞다리 살을 적당히 샀다.
“이야, 깨끗한데. 고3인 내 동생의 방을 보면 두엄자리가 따로 없던데.”
권세라는 장인걸의 자취방을 살펴보더니 그렇게 감탄을 했다. 예고 없이 쳐들어온 상황인데 말끔했기 때문이었다.
“된장을 조금 넣어 주어야 맛이 깔끔해요.”
권세라가 김치찌개를 잘 한다고 했지만 칼질도 제대로 할 줄을 몰라서 장인걸이 사실상 모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 모습이 10년 자취경력의 장인걸이 보기에 너무나 답답해 보였다.
“후추를 조금 치고 참깨와 마늘과 파를 조금 넣으면 더 맛이 좋아요.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조금만 먹기 직전에 넣어서 저어주면 고소한 맛이 나고요.”
장인걸은 어설프게 하는 권세라를 밀어내고 결국 모든 것을 다 하고 다른 반찬까지 준비를 다 했다. 평상시에는 몇 가지 반찬만 통째로 꺼내서 먹었는데 접시에 갈라놓기까지 했다.
“오호, 능숙한 살림꾼인데. 이런 진수성찬을 차리다니.”
권세라가 감동한 기색으로 밥상에 앞에 앉았다. 평소에 꽤나 큰 교자상을 펼쳐서 식탁 겸 좌식 책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장인걸은 나이든 사람처럼 약간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고 권세라는 픽 웃으면서 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들었다.
권세라는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에 기숙사 앞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서 전화를 했다. 지금까지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이후의 일에 대하여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되었어? 오늘 뭔가 결판을 낸다면서?”
같은 동아리에 있는 이미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전날 있었던 일을 말하고 여우같은 강진경이 선수 치기 전에 고백을 하기로 했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날 강진경이 늦게까지 수업이 있어 동아리 방에 오지 않는 것까지 사전에 확인하기도 했었다.
“그저 밥만 먹고 헤어졌어.”
그러면서 집에 쳐들어가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밥만 먹고 데려다 주어서 기숙사에 온 것을 말했다. 연애 초보인 권세라로서는 역사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손이라도 잡았어야 하는데 기회를 주지 않아 실패했다.
“이 바보야, 용기를 내야지.”
“무조건 들이댈 분위기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럴 분위기를 만들지 않고 분위기를 잡으려고 하면 상황을 이상하게 만들었어. 뭔가를 아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틈을 주지 않아.”
“일단 손이라도 잡았어야지. 조금이라도 진도를 나가야지. 하여간 그러다가 놓친다. 뭐라고 이야기를 했을 것 아냐?”
“물라. 연애를 할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만날 생각이 없는 건지 몰라도 다양한 것을 하고 싶어 여자와 만날 시간이 아깝다고 하더라. 학과 공부, 음악, 영어공부 등을 해야 해서 여자 친구 만드는 것은 한참 후순위래.”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밥이라도 계속 얻어먹으러 다녀야지. 그러다 보면 뭔가 길이 보일 것도 같고. 진도는 나가지 못해도 어떻게든 옆에 붙어 있어 딴 여자는 만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야.”
“내 동창 성희 알지? 재수한 애. 걔 말로 강남서베이 학원에서 진경이 별명이 모범생 킬러였다고 하더라. 성격 좋고 외모 좋은 남자들만 골라 조용히 어장관리 했다고 하더라.”
“정말? 그러면 인걸이도 대상이라는 말이네. 걔가 딱 그런데.”
“맞아. 첫 타깃일 것 같아. 더 골 때리는 것은 남자들 사이에 평판이 좋대. 쿨한 애라고. 학원에서 학생들끼리 사귀는 경우도 있는데 애인이 있으면 먼저 접근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그러니 빨리 침 발라서 네꺼로 만들어.”
권세라는 이미향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처음으로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났는데 갑자기 경쟁자가 나타나니 위기감이 들었고 처음으로 적극적으로 대쉬까지 하게 되었지만 맘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찾아 갈까? 할 말 있다고.”
“그건 오히려 역효과만 나지. 대신 내일 아침에 내가 기숙사로 찾아갈게.”
“왜?”
“옷과 스타일을 조금 바꿔보자. 남자 같은 여자에 매력을 느끼는 남자는 드물어. 갑자기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은 이상할 것이고 적당히 깔끔하면서도 여자 느낌이 나는 옷으로 입자. 약간 화장도 하고.”
입술에 립스틱도 거의 하지 않는 권세라이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변화를 줄 필요는 있었다. 전이라면 쓸데없는 일이라고 펄쩍 뛰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런 말이 솔깃하게 들렸다.
장인걸은 적당히 권세라를 밥 먹여 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음날 동아리방에 가서 강진경을 만나자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외투를 벗고 볼륨이 그대로 드러나는 하얀색 목 티셔츠에 몸에 쫙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은 강진경이 가까이 앉아서 기타를 쳐달라고 했다. 더구나 긴 생머리를 적당히 넘기고 자연스러운 화장에 주홍색 립스틱만 짙게 바른 모습은 고혹적인 느낌마저 주었다.
그런 강진경이 옆에 다가오니 정신이 없었다. 제법 가창력도 있는 강진경이 사랑을 주제로 한 발라드를 부르자 제 정신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다.
세 곡 가량 노래를 부르고 나자 이미향과 권세라마저 동아리 방에 들어왔는데 전에는 캐주얼한 옷차림을 하던 권세라가 깔끔한 블라우스에 검은색 정장바지를 입고 있고 헤어스타일도 대충 묶은 꽁지머리가 아니라 대형 핀으로 접어서 올렸다.
또한 자연스럽게 연한 화장을 했고 연한 립스틱마저 발라 여성스러우면서 스마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강진경이 섹시한 느낌이라면 권세라는 청순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역변이라고 할 정도로 변한 모습이라 저절로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뭐야? 전에 복학한 이후에 홈커밍데이 때나 봤던 모습인데. 직장에 취직한 후에 저런 모습이었는데? 설마?’여자의 변신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바로 요 며칠 사이에 자신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미묘한 신경전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어제 집에 찾아온 것도 의도적이라는 말인데. 결국 성과가 없자 외모마저 바꿨다는 말인데.’장인걸은 세 여자 사이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그냥 지켜보았다. 차라리 일이 있다고 밖으로 나갈까 하다가 피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에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고 기쁘기까지 했다.
“무슨 노래야? 키보드에 드럼까지 해서 연주해 볼까?”
이미향이 그렇게 말했고 결국 두 여자가 연주에 가세했다. 곡 선정은 사무실에 있는 악보의 내에서 이루어지기에 연주하는데 크게 문제는 없었다.
강진경이 주로 골랐고 장인걸이 연주 가능여부를 결정했다. 이미향이나 권세라는 연주하는데 문제가 없어 따라왔다. 대충 다섯 곡을 연주하자 30분 이상이 소요되었고 잠시 쉬기로 했다.
“내일 뭐해? 수업 있어?”
이미향이 토요일에 뭐할 것인지 물었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지만 공휴일이 아니기에 오전 수업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집안 행사가 있어요. 당숙네 돌잔치에 가야해요.”
“점심에?”
“아뇨. 저녁에요.”
“그러면 내일 오전에 시간 되겠네. 축제준비위원회가 구성이 될 거야. 동아리의 밤 행사에서 공연을 해야 해. 동아리 하나당 20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고 우리는 7시 40분에서 8시까지 시간을 받았어. 가장 좋은 시간대이고.”
아직 한 달 이상 여유가 있는 5월 초의 스케줄이지만 공연을 하려면 사전에 준비가 필요했다. 공연 레시피를 준비해야 하고 공연자를 정하고 연습을 해야 했다.
“신입은 참여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 않아요?”
“우리 동아리는 학번 안 따져. 실력만 있으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신입생이 나가지 않는 것은 나서지 않기 때문이야. 실력도 부족하고. 일단 오전 10시에 동아리 전부가 모이기로 했으니 그 때 보자.”
강진경은 모임에 대해 이미 들었는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전날 봤을 때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지금 말하는 것은 오늘 결정이 된 것 같았다.
장인걸은 혹시라도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할까 걱정이 되어 여섯시 반이 되자 약속이 있다고 동아리 방을 나왔다. 여자들이 잡기 전에 도망을 쳤다.
집에 와서 인터넷에 접속했다. 속도가 늦어 유성이 빗물처럼 내리는 넷스케이프 화면을 보면서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이런 서비스에 접하는 것이 즐거웠다.
‘이제 한국도 IT열풍이 불겠구나.’인터넷으로 인해 다가올 변화를 생각하면 기대가 되기도 했다. 인터넷 열풍으로 IT버블이 발생할 것이지만 그것도 하나의 기회였다.
‘일단 IMF 외환위기를 현명하게 넘기고 그런 다음에 IT열풍을 노려야지.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니고.’장인걸은 충분한 시드머니를 챙긴 다음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기반을 다지기로 했다.
‘다시 살게 된 것은 기회이다.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최대한 득을 보도록 한다.’장인걸은 외환위기와 마찬가지로 IT버블도 필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개인이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설사 막을 수 있더라도 그것이 옳은 방향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역사의 발전에 우연은 없다고 했다. 사건 하나하나는 우연히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도 일어날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시대적인 배경이 형성되었기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히 옳고 그르다고 재단할 수는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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