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ural Order RAW novel - Chapter 31
어설프게 맞상대를 하면 피곤한 사람이었다. 일부러 그런 인상을 주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장인걸이 외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다음에는 발길을 못하게 만들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귀찮아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외삼촌이 자주 말하는 식으로 판단하면 손씨 일에 장씨가 나서지 않도록 만들려는 것 같았다. 그거야 아버지 장재현에게 통할 이야기지 피가 섞인 장인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을 이야기였다. 생판 남인 장재현이야 그 말에 ‘더럽고 치사하다’면서 물러섰지만 장인걸은 언제라도 말할 자격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귀찮게 하여 유산 상속을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유산을 포기해도 고마워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권리를 되찾은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외삼촌은 외할머니가 음식점을 할 때 제대로 도움 한 번 주지 않았다. 반면 농사를 짓는 부모는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무한정 가져다가 도움을 주었다.
어릴 적부터 그것을 보아온 장인걸이었다. 적반하장도 따로 없었다. 날려먹고 난 다음에 결국은 다시 손을 벌리기까지 했다. 그나마 염치는 조금 있는지 사업에 실패하고 자주 찾아왔지만 대놓고 돈을 요구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물론 아버지도 당시에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대출을 많이 받은 상황에 엄청난 이자를 내느라 부담이 커서 크게 도와줄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올 때마다 용돈을 받아갔었다.
장인걸은 토요일 저녁에 양진에 나왔다. 모처럼 집으로 동창인 황명환이 전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온 것을 마침 집에 온 그가 안 것 같았다.
회귀 전의 찝찝한 기분 때문에 황명환을 멀리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피해망상일 수가 있기에 마침내 만나기로 했다. 더구나 외삼촌을 보면서 반면교사의 마음으로 자신의 태도를 반성했었기에 나왔다.
“여기다.”
양진에 몇 개 없는 호프집 중에 하나에 들어갔다. 시골에는 생맥주집도 그리 많지가 않았다. 생맥주는 설비가 필요했기에 대부분 병맥주를 파는 것이 보통이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황명환이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자리에 앉자 바로 치킨과 맥주를 주문했다.
“어떻게 지내냐? 연락도 없고. 연락처는 어떻게 돼?”
장인걸은 전화번호를 불러주고 역시 황명환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기숙사에 있지만 전화가 필요하고 통신을 하고 인터넷을 하기 위해 전화를 신청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는 다음 주에 축제이지? 우리는 그 다음 주로 잡혔다.”
황명환은 그렇게 말하고 맥주잔을 들어서 건배를 제의했다. 여전히 쓸데없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축제 때 너는 뭐하냐? 과에서 장터라도 여는 거야?”
“동아리 행사에 참여해.”
공연을 한다고 하지 않고 그냥 행사라고 했다. 공연이라고 하면 찾아올 것이고 그러면 귀찮을 것 같았다. 강진경을 보면 소개시켜 달라고 귀찮게 하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석진이는 다음 주에 내려온다고 하더라. 내려왔으면 같이 만났을 텐데. 과에서 MT를 간다고 하더라.”
둘은 자주 연락을 하는 것 같았다.
“원경희랑 석진이네 학교가 붙어 있잖아. 석진이가 연락해서 두 번 만났다고 하더라.”
사실 석진이네 학교나 원경희네 학교는 그리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시내버스를 타도 30분이면 당도할 곳에 있었다.
“걔네가 만나건 말건 그거야 관심 없어. 학과 공부에, 영어공부에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장인걸은 의식적으로 원경희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려고 했다. 굳이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았다. 알면 신경 쓰게 되고 관계가 맺어질 수가 있었다.
“하긴 네가 좀 냉정한 편이지. 같이 놀다가도 시간 되면 칼같이 공부한다고 빠졌으니. 대학에 가니 더 그런 것 같다.”
황명환은 장인걸이 더 냉정하게 변했다고 푸념을 했다.
“대학에 들어가니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이 구역의 미친 사람은 내가 되어야 편한 것 같아.”
장인걸은 그렇게 말하고 낄낄거렸다. 그런 모습에 황명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또라이, 너답긴 하다. 누가 또라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한 또라이가 사라지면 다른 또라이가 또 등장하고. 또라이가 없으면 내가 또라이가 아닌지 의심할 필요도 있다고도 하고.”
황명환은 회귀 전에도 장인걸과 그렇게 자주 만난 것은 아니었다. 원경희와 연애를 하느라 황명환이나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은 항상 후순위로 밀렸다. 그가 먼저 연락을 하지 않으면 일찌감치 연락이 끊어졌을지도 몰랐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말 해.”
장인걸은 황명환을 잘 알기에 뭔가 말을 하려고 하면 입술에 침을 바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버릇 때문에 거짓말을 하려고 하면 침을 바른다고 놀리기도 했었다.
장인걸은 자기가 기억하지 못한 뭔가가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지만 달리 특별한 것이 없었다. 집안도 IMF 외환위기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건재했다.
“나, 박상희랑 사귄다.”
순간 장인걸은 어이가 없어 뭐라고 말을 할지 몰랐다. 상희는 고등학교 동기로 원경희의 가장 친한 친구 중에 하나였다. 졸업 전에 만난 세 명의 여자 중에 하나였다.
상희는 황명환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황명환이 못생겼다고 거들떠도 보지 않아 1년 정도 쫓아다니다가 말았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석진이 원경희를 쫓아다니고 황명환이 상희와 만난다니 상황이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그래? 그런데?”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런 것을 말하기 위해 망설이는 것은 황명환답지 않았다. 뭔가 큰일이 남아있었다.
“설마 너 일 저지른 거냐?”
장인걸은 남녀 간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밖에 없기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이 잠자리에 든 것은 일도 아니지만 속도위반은 그들로서는 감당이 불가능했다.
“그런 것 같아.”
“만난지 얼마나 되었다고 애야?”
“서울에 올라와서 바로 생긴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하냐? 나도 그렇고 애도 그렇고 하루에도 맘이 바뀌는데. 집에 알려야 하는데 너무나 큰일이라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회귀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난 것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원경희를 사귀지 않으니 다른 커플이 생긴 것 같았다.
전에는 원경희가 쏙 빠져서 장인걸과 만나니 다른 사람들이 만날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원경희가 여자들의 중심에 있고 안석진이 원경희를 만나려고 하다 보니 황명환과 상희도 자주 만났고 사귀게 된 것 같았다.
“어떻게 할지 정했어?”
“상희가 1학기만 다니고 휴학을 하겠다고 하네. 나도 차마 다른 선택은 하고 싶지 않고.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자립할 동안 우리 집에 와서 애 낳고 시집살이를 하겠다고 하고.”
“마음을 정했다면 부모님한테 알리고 빨리 수습해야지. 나중에 애 낳고 유아원에 맡길 때가 되면 애 엄마는 학교에 복학하는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고.”
장인걸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당사자가 아니기에 얼마나 힘이 들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회귀 전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것에 두려운 기분마저 들었다.
‘나도 언제 이런 일을 겪을지 모르는 일이다. 주의를 하고 있지만 언제 실수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장인걸은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여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장인걸은 할머니의 선물을 준비하지 않은 탓에 조용히 시계세트를 전달했다. 가격은 말하지 않고 그저 장유현의 딸 돌잔치에 가서 노래자랑을 하고 선물로 받았다고 말을 했다.
“이걸로 어버이날 세 분께 카네이션을 사다가 달아드려.”
장인걸은 5만 원이나 장인숙에게 주면서 카네이션 심부름을 시켰다. 물론 꽃 가격은 만 원 정도면 충분할 것이지만 동생도 남는 것이 있어야 기분이 좋을 것이기에 인심을 썼다.
“웬일로 인심까지 쓰는 거야. 대학에 가서 여기저기 돈 쓸 곳도 많을 텐데. 여자 친구랑 데이트라든지.”
“여기저기서 용돈 받은 것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더구나 어린이날도 있잖아.”
“하여간 나를 어떻게든 건들어야 기분이 좋지? 나는 그냥 두고 여자 친구를 만들어서 장난을 걸어.”
장인숙은 장인걸이 놀리는 것이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친근함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자 친구 만날 시간이 없다. 학과 공부를 해야지, 영어공부 해야지, 거기다 취미로 요새 음악도 한다.”
그러면서 동아리에 가입한 것과 축제 때 공연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음악을 한다는 말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장유현의 딸 세원이 돌잔치에 갔다가 노래자랑에 나가서 1등을 하여 시계세트를 받은 것도 자랑을 했다.
“하여간 혼자만 재미있게 사는구나.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을 거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에 공부를 하여 장학금을 받는 것이 낫지. 당장은 돈을 벌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시간낭비지. 집이 가난하여 학비나 생활비가 없다면 모르지만. 대신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할 생각이야.”
장인숙도 이해를 했는지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나 서울에 언제 놀러 가면 안 돼?”
“방학 때 놀러 와. 며칠 같이 지내자. 잠은 내가 거실에서 자면 되고. 먼저 에어컨을 사야겠지만.”
장인걸의 말에 장인숙은 한껏 기대한다는 표정이 되었다. 나중에 서울로 학교를 오면 전과 달리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방학 때나 가야겠네. 큰집도 들리고.”
“그래야 차비라도 조금 받지.”
장인걸의 말에 장인숙은 빙긋 웃었다.
“큰집에 가기도 해?”
“연락 오면 가는데 평소에는 바쁘니 못가지. 민기도 놀러온다고 하더니 대학에 들어가고는 연락도 없어. 다 자기 살기 바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가면 용돈 하라고 돈을 주는데 그것도 왠지 부담을 주는 것 같고.”
“저번 주에 향림이 언니 봤는데 오빠에 대해서 묻더라. 거기서 연락하고 지내지 않아?”
장인걸은 장인숙의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냥 부담이 되어 내가 연락을 조금 피하고 있어. 남자하고 여자가 자주 만나면 그냥 친구로 지낼 수는 없고 이상하게 엮이기 마련이지. 남녀 간에 끝까지 잘 되기보다 갈라설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 같은 마을 이웃인데 서로 입장 곤란할 것이니 아예 그 가능성 자체를 없애는 것이 최선이지.”
장인걸은 혹시라도 장인숙이 최향림과 소식을 주고받을 수가 있기에 대략적인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동생도 그런 사정을 알아야 주의를 할 것 같았다.
“향림이 언니가 오빠한테 관심 있는 것을 아는구나.”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는 알지. 나는 연애를 해도 중고등학교 때 아는 사람과는 절대로 하지 않을 거야. 시골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소문이 다 날 것이고.”
장인걸은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동생부터 단속을 했다. 동창인 원경희로 인해 엄청난 타격을 받았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최향림이라면 더 큰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그 정도면 장인걸이 찾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딴 동네로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몰랐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동아리연합회가 주최하는 동아리의 밤 행사가 세 번째 날에 저녁 여섯 시부터 대운동장에 마련된 특별무대에서 시작이 되었다. 주로 공연동아리가 참여하는 행사였다.
대학 심포니오케스트라의 비발디 ‘사계’의 봄 공연부터 시작하여 성악, 클래식이 서두를 장식했다. 이어서 국악, 사물놀이 공연이 이어졌고 이후에 대중음악으로 넘어갔다.
장인걸이 속한 동아리, ‘기타 하나 둘러메고’는 대중음악의 첫 번째 공연순서였다. 1부가 일곱 시 반에 끝났고 10분의 휴식을 한 다음 7시40분부터 2부가 시작되었다.
BGM을 담당하는 동아리의 밴드 세션이 먼저 자리를 잡았고 장인걸도 세컨드 기타로 참여하여 댄스에 나서지 않을 수가 있었다. 유정훈, 이미향, 권세라, 유화영이 모든 공연의 밴드 세션을 책임지기로 했다. 물론 전상운도 공연중간에 색소폰 세션을 담당하기도 했다.
진영민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백댄서로 출동을 하여 흥을 돋우었다. 특히 강진경이 솔로로 나서 춤을 추면서 축제의 백미를 장식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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