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atural Order RAW novel - Chapter 38
10. 재회 그리고 탈피
장인걸은 강진경과 집에서 주로 만났다. 사실 외부에서 만나려면 각종 비용이 만만치 않아 결국은 집에서 보는 것이 가장 경제적이었다. 만나서 식사도 같이 하고 공부도 같이 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을 동아리 사람들이 알더라.”
장인걸은 소문을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알려지고 말았다. 서로 구속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남자 친구이고 여자 친구였다.
“그런 것 같아. 그런다고 해서 크게 문제는 없잖아?”
“그렇기야 하지. 소문이 나면 둘 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 조금 힘들겠지만···.”
장인걸은 말을 하다가 여전히 자신이 강진경을 떠보고 있다는 생각에 말끝을 흐렸다.
“그건 그렇지. 너 표정이 조금 아쉬운 것 같아. 미향이 선배나 세라 선배를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는데 소문이 나서 틀어진 것 같아서.”
장인걸은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할 의도를 가진 적이 없는데 친하게 지낸 덕분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생각 자체가 없어. 난 복잡해지는 것은 싫어.”
“그렇기는 한데 여자와 남자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아. 너랑 관계가 소문났는데도 오히려 찝쩍거리는 경우가 더 많더라. 박상우 완전 밥맛이야.”
“왜? 계속 치근대? 걔가 조금 밝히긴 하지.”
“양아치 같은 놈이야. 오늘도 ‘자기도’라는 뉘앙스를 풍기는데 죽이고 싶더라고. 내가 빵이야, 떡이야? 애가 ‘한 입만’ 하는 것 같잖아. 생각만 해도 불결하고 끔찍해.”
남자의 저속한 심리라고 할 수 있는 심리인데 여자를 일종의 정복의 대상이나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생각할 때 갖는 마인드였다. 장인걸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었으니 자신도 강진경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대놓고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의 낌새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상이 되면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 매너가 없는 사람을 상대하면 그 자체로 피곤해져.”
장인걸은 자신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저 가볍게 위로하는 것이 전부였다.
“자기랑 드럼 반주에 노래를 같이 하자는데 어이가 없어서. 못할 것은 아니지만 조금 그렇잖아.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 안 한다니까 지랄을 해요, 지랄을. 그럴 거면 기타를 배우지.”
그러면서 동아리 방에서 장인걸이 없을 때 김민재와 최동수와 노래를 불렀던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기타를 치는데 드럼이 끼어들면 이상해져 문제가 되었던 것부터 이야기했다.
그들이 기타 학원에서 배운 것을 다 치고 나서 그만 두니 자기가 드럼 칠 때 노래하라고 했고 강진경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으니 화를 냈다는 이야기였다. 왜 자기만 안 되냐고?“기타를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아 드럼과 연주할 상황이 아니잖아. 그런데 막무가내로 끼어들려고 하고.”
기타 초보의 경우에는 드럼의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으면 드럼 소리에 묻힐 수밖에 없어 합주를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박상우는 자기 잘난 맛에 드럼을 치기에 장인걸도 같이 합주를 하고 싶지 않았다.
“걔가 개진상을 부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그 덕에 우리가 안주 삼이 씹는 것도 가능한 것이고.”
“하긴 그렇지. 세라 선배나 미향이 선배도 걔는 엄청 싫어하더라고. 그걸 알기나 하는지, 원.”
전에는 박상우가 그렇게 밉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장인걸이 강진경을 가까이 한 덕분에 박상우가 그런 성향을 빨리 드러냈다.
아마도 군기반장 노릇을 하던 전상운이 강진경과 가깝게 지내지 않아 나타나지 않는 면도 큰 것 같았다. 전에는 전상운이 동아리방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어쩌다 나오는 실정이었다. 그 때문에 박상우가 날뛰어도 바로 제어할 사람이 없었다.
‘회귀 전에는 진경이가 전상운 선배와 방학이 될 무렵에나 뭔가 낌새를 보였는데 이번에는 나와 처음부터 가까워지면서 여왕벌 노릇을 별로 하지 않게 되어 그것이 문제인가?’회귀 전에 강진경은 1학기 내내 동아리의 남자들이 선망하는 꽃이었고 모두가 다 환심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암묵적으로 장인걸과 사귀는 여자가 되었기에 속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그저 같은 동아리 회원으로 대하고 있었다.
“주말에 뭐할 생각이야?”
“친구 하나가 언혼식을 한다고 오라고 해서 가봐야 하는데. 일요일은 특별한 일이 없고.”
그러면서 황명환과 박상희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을 했다.
“너는?”
“토요일은 특별한 약속이 없고 밀린 숙제나 해야지. 일요일에는 아는 오빠가 보자고 해서 만나려고 하는데. 꽤나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는데 모처럼 시간이 난다고 보자고 해서.”
강진경은 약간 주저하는 기색이더니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을 말했다. 장인걸은 그런 사실을 듣자 괜히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렇다고 바로 표출하지는 않았다. 서로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하고 만나는 사이였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오후에 장인걸은 황명환이 다니는 대학 앞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다. 혼인 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하지 못하니 친구들을 모아서 앞날을 다짐하는 자리를 갖는다고 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을 모아서 언혼식을 하니 철이 없어 보였지만 그것도 불안해하는 여자 친구를 위한 이벤트로 생각하고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식도 올리지 않고 애를 낳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그래도 간단히 친구들을 모은 자리에서 반지라도 교환한 사실이 태어날 아이에게도 좋을 수 있었다.
싸릿골이라는 한식집에 들어갔다. 제법 인테리어가 잘 된 식당으로 분위기는 꽤나 괜찮았다.
“어서 와라. 안으로 들어가자.”
“어서 와.”
황명환이 나와 있었고 그 옆에서 안석진도 아는 척을 했다. 인사 후에 장인걸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서울로 대학을 온 고등학교 친구들이 상당수 보였다. 물론 친하지는 않지만 다들 얼굴은 알기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너도 왔네.”
최향림이나 이정숙, 채지원이 한 자리에 같이 모여 있었다. 거기로 가서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 옆에 진성민도 같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언혼식을 한다니 와야지.”
일종의 결혼식을 대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며칠 전에 혼인신고를 했으니 언약식이라 칭할 수도 없으니 언혼식이라 말하는 것 같았다.
“남들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우리 동창이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이야기를 듣고 엄청 놀랐어.”
채지원이 슬쩍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를 했다. 채지원의 경우는 3학년 때 박상희와 같은 반이 아니었기에 그리 친하게 지낸 것이 아니었지만 이정숙이 가자고 하니 온 것 같았다. 그 때 진성민도 아는 체를 했다.
“나 같으면 창피해서 이런 자리는 절대 만들지 않았을 것인데 뭐가 좋아서 상희 쟤는 희희낙락하고 있네. 명환이는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데.”
진성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작은 목소리로 박상희를 욕하고 있었다. 동창이라 그 자리에 참석은 했지만 둘 다 한심해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상 결혼식인데 웃어야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죄인처럼 숨는 것은 아니지. 차라리 웃으니까 보기 좋은데.”
장인걸은 박상희가 회귀 전에 황명환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에 웃는 마음을 이해했다. 일을 저질러 상황이 어렵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랑의 승리자일 수가 있었다. 어지간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싫다는 사람을 1년 가까이 쫓아다닐 사람이 드물었다. 그 정도로 황명환을 좋아했었다.
“그렇기야 하지만···.”
진성민은 달리 말을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장인걸은 오히려 박상희가 웃는 것을 보니 안도할 수가 있었다. 친구인 황명환은 지금 기분이 어떨지 몰라도 박상희는 행복해 보였다.
“나 알아?”
순간 장인걸은 얼어붙고 말았다. 그렇게 피하려고 했던 원경희가 언제 왔는지 맞은편에 앉아서 말을 걸고 있었다. 순간 수만 가지 생각이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원경희는 모르겠지만 장인걸은 누구보다도 원경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자존심이 많이 상한 표정이었다.
“원경희, 장원대학에 가지 않았어?”
“맞아. 저번에 만날까 기대를 했는데 나오지 않았더라.”
원경희는 여전히 장인걸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장인걸은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내부의 동요를 감추고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원경희를 보았다. 기억 속의 모습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직 여자 친구를 사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자리는 피하려고. 막상 부담이 되더라고. 너는 잘 지내?”
장인걸은 자신을 배신했던 원경희와 지금의 원경희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최대한 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야 학교 잘 다니고 있지. 서로 연락이라도 하고 지내자.”
원경희는 식탁에 두 손을 얹고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장인걸에게 가까이 다가오면서 이후에도 만나자는 말을 했다. 그런 말을 듣자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장인걸은 전날 밤에 집에서 만난 강진경을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떨쳤다. 원경희는 생각보다 집착이 강했고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우선 하는 일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어.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아서.”
장인걸은 단호한 어조로 거절했다. 어정쩡하게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여지를 두다 보면 미련을 가질 수가 있고 결심이 무너질 수가 있었다. 얼마나 자신이 원경희에게 무력한지 알기에 두려웠다.
“하여간 너도 유별나다. 다들 연락을 하면서 지내는데.”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이지만 마음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할 말이 달리 없기에 그저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동창이라는 생각에 하는 말인데 자신이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원경희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으로 장인걸이 착각하여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그런 것만큼 꼴불견일 수가 없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그렇게 말하고 원경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인걸의 반응이 시큰둥하니 실망한 기색이 겉으로 드러났다. 그러더니 원래 있던 자리인지 안쪽의 자리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어? 왜 저래?”
원경희가 떠나고 나자 진성민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둘 사이에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경전이 벌어진 것을 포착한 것 같았다.
“몰라.”
장인걸은 원경희가 대입수능이 끝나고 장인걸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여전히 약간의 미련을 가진 것 같지만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하긴 네가 쟤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는데 만나자고 하지 않으니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쟤도 너한테 관심 있다던데.”
진성민의 말에 장인걸은 모른 척 했다. 알아도 굳이 내색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막상 말을 해보니 속이 조금 아렸지만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의 배신감이 아직도 남아있지만 이제는 다 잊을 수 있어 보였다.
장인걸은 언혼식이 끝나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풀이를 하기 위해 나중까지 예약을 한 것 같지만 그 자리에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다들 엄청나게 술을 마시는 분위기인데 자칫 잘못하다가 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황명환과 몇몇 친구에게 먼저 가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들 좀 더 있다 가라고 했지만 왠지 그런 분위기가 맘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만날까요? 술이나 한 잔 하죠?”
장인걸은 식당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움직이다가 공중전화가 보이자 민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에 집으로 왔을 때에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서먹서먹한 분위기에서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했는데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장인걸이 이야기를 하자 뢰벤스브로이라는 곳에서 보자고 했다. 그곳은 토요일에는 그리 붐비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대학가이니 기본적으로 손님은 있지만 한적한 편이었다.
장인걸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졸업을 하고 대학입학을 하면서 여기저기서 용돈을 꽤나 받았는데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민지훈에게 받은 돈이 있지만 그것은 따로 사용할 곳이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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