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쇠는 녹슨다. 하지만 금은 그렇지 않다.
딥원의 머리 가운데 달린 촉수 끝은 심해에서도 빛이 나는데, 어둠 속에서도 금은 빛난다.
그래서 문명을 이룬 딥원들은 금 공예품을 귀하게 여겼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힘으로 그것을 빼앗는 해적들은 그 힘이 강할수록 많은 금 공예품으로 자신을 장식했다.
야분 해적단의 대장 야분 또한 그랬다.
서로 다른 굵기의 목걸이와 손가락마다 끼여진 반지, 거기다 팔찌와 발찌 입술을 꿰는 수많은 링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너는?”
야분의 몸에 걸쳐진 공예품들이 들썩거렸다.
그 말에 딥원 부하가 몸을 움추렸다.
“놈들이 크라켄의 영해를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빠져나오고 있다고?”
야분은 부하의 어휘 선택을 예리하게 잡아냈다.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 맞습니다.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놈들은 크라켄에게 큰 타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놈들에겐 신의 은총도 없거늘!”
부하가 주저하며 말했다.
“기이한 힘을 쓰는 이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부하가 설명했다.
“크라켄은 제때 놈들을 습격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배가 박살 나기 직전, 그 주변의 바다가 일순간 얼어붙었습니다.”
“얼어붙었다?”
“예. 바다만이 아니라 촉수들도 얼어붙었고, 습격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저희 애들도 휩쓸렸습니다. 꽁꽁 얼어붙어서는, 충격을 받으니 깨져 버리더군요. 마치… 만다 님 같은 힘이었습니다.”
“만다?”
야분은 탁자를 쾅 하고 때렸다.
“신의 힘이라고 보긴 힘들다. 신들은 그만한 힘으로 간섭하기가 힘들다. 그만한 힘을 쓸 수 있더라도 겨우 크라켄에서 선단을 빼내기 위해서 쓰진 않겠지. …만다와 같은 마법사로군.”
부하가 알고 있기에, 만다는 야분의 라이벌이었다.
둘 다 최고 공의회 참석 권한을 가진 대사제였지만, 각각의 점령 지역이 겹치는 바람에 사사건건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야분의 패배였다.
집단의 규모라면 야분의 혈족이 훨씬 더 컸지만, 만다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족속이었고, 마법사와 척을 지고 싶어 하는 사제들은 없었다.
그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야분은 사략 해적의 권한을 얻어 냈다.
그리고 그 권한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다른 대륙으로의 진출을 노릴 수 있었다.
야분은 이 진출로 대륙의 일부를 점령해 새로운 세력을 키워 내 본 대륙으로 돌아가 만다를 공격할 계획이었지만…
부하가 보기에 그 뜻을 이루긴 힘들어 보였다.
‘줄을 한참 잘못 탔지만, 손절을 하기엔 늦은 것 같군. 이를 어떻게 한다.’
부하는 야분이 이쯤에서 겁을 먹고 본토로 돌아가길 바라며 말했다.
“대장,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라면 놈들을 여기 돌탄 섬 앞바다에서 상대해야만 합니다. 놈들에겐 기이한 무기도 있고, 만다 님 같은 마법사도 있습니다.”
“흥, 겁쟁이 같기는.”
야분이 말했다.
“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두렵지? 놈들은 물 아래에선 숨도 쉬지 못하는 땅벌레들이다.”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만다를 상대해야 한다. 땅벌레 마법사 정도는 연습 상대로 삼을 수 있겠지.”
“어떻게 상대합니까?”
야분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비밀리에 불렀던 교왕님의 기사들이 도착했다.”
“교왕님의 기사라면…?”
“그래. 그분들이 맞다. 교왕님이 기사를 빌려주신다는 건 심광(深光)께서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지. 나는 그들과 함께 내 배를 이끌고 승리를 할 것이다.”
부하는 어쩌면 아직 야분을 손절하긴 이를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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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을 끝냈습니다.”
이얀 타타 장군이 갑판으로 걸어 올라와 말했다.
이 덩치 큰 리자드맨의 두 손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바센 라크 오라즌은 이 리자드맨이 우군이라 참 다행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별다른 정보는 없는 건가?”
“예. 이미 저희가 알고 있는 정보와 대동소이합니다.”
크라켄의 바다를 빠져나오는 과정이 쉬웠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딥원들은 앞서 나간 단염과 만굴의 군선들이 크라켄에 의해 전멸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공격 대부분이 후위에 있던 흑린의 군선들을 향했다.
흑린의 배들은 빠르게 정렬해 2열로 사격을 했지만 일흔 척이나 되는 선단의 일부에게만 타격을 주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해적선들과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크라켄의 해역에 있던 단염과 만굴의 군선들이 돌아 나와 지원을 했기에 해적선들은 그대로 줄행랑을 쳐 버렸다.
‘만약 그 가루다가 마법이란 걸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힘겨운 전투를 해야 했겠지.’
흑린과 동맹 해군은 해역 넓은 지역에 정찰선들을 보내 둔 뒤 서로의 대장선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선 전투 중에 붙잡은 딥원들을 심문해서 얻은 돌탄 섬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목적이 컸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석면에서 숨기고 있었던 마법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이 건의 경우 외교적 문제도 있었다.
가루다의 마법이 피아를 가리지 않은 만큼, 바다에 떨어졌던 만굴의 뱃사람 몇몇이 마법에 휘말린 것이다.
이 또한 올도르가 마즈다리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못한 정보였다.
하지만 만굴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항의를 하지 못했다.
마법사의 힘이 강대하다는 것은 이미 드러난 후였다.
그런 힘이 있는 이상, 그 마법사는 트롤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다면 여기 있는 모든 배들을 상대할 수도 있을 테니까.
그리고 석면의 장군 올도르는 그러한 사실을 애써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숨기려고 했던 힘을 드러낸 이상 그것으로 권력으로라도 삼으려는 듯 굴었다.
“앞으로 동맹 해군의 전체 지휘는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흑린은 예외였다.
정확히 하자면 마즈다리의 힘이 드러난 이상 두 집단 사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바센은 배로 돌아온 뒤 티오네 이티모와 이얀 타타에게 말했다.
“해적들과의 싸움이 끝나고 나면 사소한 시비나 트집을 잡아 싸우려고 들지도 모른다. 선원과 병사들을 단단히 단속해라.”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야분 해적단은 마냥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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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탄 섬입니다!”
망루꾼의 외침에 바센이 배 전면을 바라보았다.
이미 바센의 눈으로도 선명하게 섬의 모양이 보였다.
이얀 장군이 바센에게 말했다.
“병사들과 포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겠습니다.”
“그러지. 전투 중 차질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예.”
“아니, 잠깐.”
이얀은 눈가를 찡그린 바센의 시선을 따라갔다.
망루꾼이 외쳤다.
“뭔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물에 반쯤 잠겼습니다!”
바센은 저것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물에 반쯤 잠겼다면 배는 분명 아니고 잠영해서 다가오는 딥원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예측할 수 없는 적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는 것이다.
“티오네! 배를 멈춰라! 이얀, 적으로 상정하고 포로 놈을 노려라!”
해적의 수치를 시작으로 흑린의 선단이 가장 먼저 정지하자, 앞서 가고 있던 동맹 해군의 선단도 눈치를 보며 하나둘 정지했다.
앞서가고 있던 고래수염에 타고 있던 올도르 마옌 장군도 배를 돌리며 속도를 줄였다.
“…저게 뭐지?”
위에서 성운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한숨을 쉬었다.
성운은 이미 달려오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걸 경고하는 것은 너무 까다로웠다.
‘어차피 흑린은 뒷줄에 있으니까, 보고 방법을 대처하길 바라야지.’
수면에 잠겼다 떠오르길 반복하며 다가오는 것들은 지척에 이르러서도 거품 때문에 그 정체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올도르는 방패와 검을 들고 경계했다.
거품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물고기?’
몸길이가 3미터에 이를 거대한 물고기였다.
물고기의 비늘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였고 트롤 기사들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물고기의 몸 양쪽으로 한껏 펼쳐진 한 쌍의 날개 지느러미, 그리고 그 날개 지느러미에 가려져 한껏 움츠리고서 올라탄 딥원을 발견한 이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딥원의 손에 삼지창이 들려 있단 것도 말이다.
“아악!”
거대 날치가 튕겨져 올라 군선 위를 활공하면서, 딥원이 삼지창으로 트롤 기사 하나의 어깨를 꿰고는 반대편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올도르는 그제서야 저 거품 속에 있는 것들 정체가 자신들과 같은 기사라는 걸 알았다.
올도르가 외쳤다.
“거대 날치 위에 딥원이 올라타고 있다! 난간에서 물러나라! 몸을 숙여!”
하지만 올도르의 외침은 물살을 헤치고 튕겨져 오르는 거대 날치가 수면을 때리고 솟아오르는 소리에 묻혔다.
현란한 빛에 시선을 빼앗긴 트롤 기사 몇몇이 거대 날치와 함께 그대로 바다 속으로 처박혔다.
‘젠장! …아니지. 갑옷만 벗으면 수영으로 배에 올라탈 수 있을 터.’
올도르는 몸을 한껏 숙이고서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수면 위에는 올도르의 기대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다에 떨어진 기사들을 몇 개의 조로 나뉜 딥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창으로 꿰어 죽이고 있었다.
올도르가 급하게 화살을 들었지만, 수면 아래의 딥원을 맞추기엔 힘이 부족했다.
‘이런!’
올도르는 거의 기다시피하며 배 안쪽의 마즈다리를 찾아 달렸다.
한편, 바센은 앞선 배들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했다.
어처구니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협적인 공격이었고 그 공격은 제대로 채비를 하지 못한 다음 배로 이어지고 있었다.
“거대 날치를 탄 기사들이 갑판 위의 있는 이들을 재빨리 바다로 떨구고, 바다에 빠지면 보병들이 죽이는 건가. 자신들 종족을 잘 살린 유별난 전술이군.”
이얀 장군이 말했다.
“그렇담 모든 병력이 갑판 아래에 숨으면 어떻습니까?”
“그것도 방법이지만… 저걸 봐.”
바센은 이얀 장군과 같은 생각을 가진 앞선 배를 가리켰다.
병사들이 모두 갑판 아래로 도망치자, 배 측면으로 딥원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대포라는 신무기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졸지에 백병전을 하게 된 것이다.
“백병전에서 승리할 수도 있겠지만 적의 숫자가 많아지면 전투가 길어진다. 그럼 적의 본대가 나타났을 때 배를 움직일 수도 없을 거다.”
“…그럼?”
“이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여긴 지상도 아니고 저것들이 코카투나 말을 탄 건 아니지만, 엄연히 기병이야. 임기응변이랄 것도 없지. 하던 대로 상대하면 된다.”
그 말에 이얀의 표정이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모든 병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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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날치 기사는 딥원의 주력이었다.
특히나 배를 상대할 때 최고의 전력으로, 길들여진 거대 날치는 딥원을 등에 태우고도 종으로는 10미터, 횡으로는 40미터까지도 뛰어서 활공할 수 있었다.
수백 킬로그램의 거대한 체구를 버틸 수 있는 종족은 많지 않으므로 적을 삼지창으로 꿰어 바다로 찍어 누르는 것만으로 단련되지 않은 병사라면 기절해서 그대로 익사하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본래라면 교왕의 사병으로만 활동하지만, 신의 뜻이 있다면 다른 최고 사제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다음은 저 배다.”
이미 몇이나 되는 배를 거쳐 오며 적들이 아무런 방비도 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자, 거대 날치 기사들은 한껏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다음 배의 경우 갑판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 날치 기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다들 갑판 아래로 숨은 모양이지. 하지만 가끔은 겁을 상실한 바보들이 남아 있기 마련이지. 그다음 보병들에게 배를 제압하라고 신호를 보내면 된다.’
거대 날치 기사가 솟아올랐다.
“공격!”
하지만 딥원 기사는 자신의 판단에 착오가 있었음을 알았다.
거대 날치가 선상을 가로지를 때,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병사들이 창을 45도 각도로 들어 올렸다.
‘…이런!’
기사는 거대 날치의 고삐를 당기며 방향을 틀었다.
‘아슬아슬하지만, 피했다!’
착각이었다.
둥근 그림자가 기사의 시야를 가렸다.
“1등 황훼사!”
몸을 일으킨 오우거 훼사가 팔을 들어 기사를 향해 크로스라인을 날렸다.
“바다에게 지지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