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1
011화
성운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문자 발견 자체야 대수로운 건 아니야. 고대 유적은 여기저기 널렸으니까.’
문자를 ‘발견’하는 것과 문자를 ‘발명’하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문자는 거대 문화권에서 한 번 발생했을 때, 그게 빠르게 전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할 때도 내 부족이나 문명이 독자적인 문자를 만든 경우는 많지는 않아.’
게다가 지금과 같은 초반부에는 더 그랬다.
이번에 라크락이 발견한 ‘황금 서판’도 흔해 빠진 유물이었다.
운 좋게 고대 유적이라도 찾는다면 그 시대에 쓰인 문자가 빼곡히 쌓인 서판 도서관을 발견할 수도 있다. 대체로 이 시기 문명에선 집 짓는다고 쓰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그래도 내용은 괜찮은데.’
라크락과 그 무리야 황금 서판에 쓰인 문자를 알지 못하니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플레이어에게는 모두 공개되는 정보였다.
『황금 서판:위대한 칼론바 제국으로 가는 길(2)
황금 판 위의 새겨진 글은 과거 ‘칼론바 제국’이라고 불렸던 고대 문명에 대한 소개입니다. 대체로 칼론바 제국의 위대함과 칼론바 황제에 대한 치적만 쓰여 있어 그리 읽을 만한 내용은 없지만, 단순히 고대 문명의 사료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칼론바 제국의 다른 고대 유적에 대한 힌트가 쓰여 있습니다. (자세히 보기)』
‘하지만 번역을 하려면 문명 수준이 한참 올라가야 해.’
게임 로스트 월드에는 고대 문명이 산적했기 때문에, 그 유명한 이집트 상형 문자 해석의 틀을 만들었던 ‘로제타석’만큼 근대 문명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고고학자와 언어학자, 대학, 그리고 여러 문명에 대한 기반 지식, 등 다채로운 문명 발달 수준이 필요했다.
‘그러니 당장은… 쓰레기나 다름없지.’
물론 황금 서판 자체는 번쩍거리는 금속 물질이므로 이 리자드맨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긴 했다.
그렇지만 금은 무른 금속이고, 당장은 철기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귀금속으로서 장식의 가치가 있겠지만 그런 종류의 공예는 다른 종족에 비해 리자드맨들에겐 낯선 것이었다.
‘버리고 가려나?’
하지만 라크락은 그러지 않았다.
라크락은 황금 서판이 마음에 들었는지 킁킁거리기도 하고 맛도 보고 이미 손상된 귀퉁이를 이빨로 씹어 보기도 했다. 당연히 이빨 자국이 깊게 남았다.
“무르군.”
“아마도 ‘금’인 것 같습니다.”
“금?”
“쇠붙이 장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머니에서 여러 쇠붙이를 보여 준 적 있습니다. 금은 무겁고 물러서 별 쓸모가 없지만, 대신 반들반들 잘 닦으면 빛을 반사해서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쓸모가 없잖나?”
“아, 그리고 색이 변하거나 썩지 않는다더군요. 그래서 민둥이들은 좀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흠. 썩지 않는다.”
그런 다음 황금 서판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자를 손끝으로 훑었다.
“아무튼 자올, 이건 고대인들의 물건인 것 같구나.”
“예. 틀림없이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이 괴물이 저 스스로 등짝에서 주조되어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군요.”
“그럼 고대인들이 제단을 만들고 이 물건을 숨겨 놓았다는 말이지.”
자올은 라크락의 말을 잠깐 생각해 보고 의도를 파악했다.
“고대인들에겐 가치가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래. 아마도 고대인들은 ‘썩지 않기 때문에’ 금이란 걸 사용한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건 이게 뭘로 만들어졌는지가 아니라, 여기에 왜 흠집을 냈느냐는 것이지.”
그 말에 자올 또한 골똘하게 황금 서판을 들여다보았다.
“규칙이 있습니다. 여기와 여기, 여기에도 같은 모양이 있고, 이것과 이것도 같군요.”
“그렇지?”
“우리 전사들의 ‘사냥 표식’ 같은 걸까요?”
라크락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원시적인 무리라고 하더라도 문자가 아닌 ‘기호’ 정도는 쉽게 사용했다.
나무줄기를 엮어 길의 방향을 표시하거나, 돌을 쌓아 영역을 표시하거나.
특히나 수렵 채집 문화에서 동물의 이동 방향이나 먹거나 먹지 말아야 할 식물에 대한 지식은 세대를 이어가며 발전했다.
‘물론 기록되지 못하니 그리 복잡해질 수는 없다. 하지만…’
성운은 어렴풋한 가능성을 엿보았다.
‘서포트한다면 라크락이 원시적인 문자를 발명해 낼 수 있을지도.’
라크락에겐 ‘의지’ 스탯이 높았고, 이 말은 한 번 꽂힌 것에 지속적인 관심을 둘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라크락 옆에 있는 자올은 ‘직관’ 스탯이 높았다.
이미 보여 준 것과 같이 라크락이 놓칠 수 있는 지식을 잡아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겠어.’
신이 그 부족에게 직접적인 지식을 가르쳐 주는 건 엄청난 신앙 자원을 소비해야 하지만, 그냥 암시를 주는 것 정도는 일반적인 기적과 다름없었다.
‘그 암시를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으니 허튼 비용이 나갈지도 모르지만, 모험 없는 투자는 없지.’
성운은 어떻게 라크락에게 ‘문자’의 개념과 그 가치에 대해 알려 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라크락은 오크들의 땅을 돌려주었다.
오크 우두머리는 몇 번이나 머리를 숙이며 절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우리가 스스로 물리쳐야 할 장애물이었다. 더 지체할 수도 없었고. 그리고 여기는 본디 그대들의 땅이라고 했으니.”
“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그래.”
오크 우두머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작은 무리다. 그래서 더 깊은 곳에서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큰 짐승이 많이 살고, 더 큰 부족들이 부대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그대와 그대의 부족이라면 충분히 강성하니 괜찮을 듯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대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을 하고 싶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오래 살았으니 더 넓은 길과 험준하지 않은 산세를 안다. 내 아들이 길을 안내해도 되겠나?”
그 말에 라크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꾼을 더 보내라. 우리가 사냥을 하거나 음식을 구하면 그대의 아들과 짐꾼들에게 들려 보내겠다.”
오크 우두머리 또한 환히 웃었다.
“우리는 이제 헤어지지만,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 라크락.”
라크락과 그 무리는 서둘러 이동했다.
다행히 자올의 ‘조리’는 고대 갑충 고기 일부를 먹을 만한 것으로 바꾸었다.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몸과 내장은 도저히 먹을 수 없었지만, 큼지막한 다리들은 향신료로 덮어 숯 위에 구워 내자 독한 향이 사라져 다소 밋밋한 맛으로 먹기 괜찮았다.
“조리라는 것도 괜찮군. 나도 배워야겠다. 가르쳐 주겠나?”
“물론이지요.”
다만 숯이라는 자원은 한정적이었고 갑충이 라크락의 기대보다 빠르게 썩기 시작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고대 갑충 고기를 해체할 수는 없단 것이었다.
300명이 넘는 리자드맨의, 그리 많은 끼니를 보충할 수 없었기에 라크락은 걸음을 서둘렀다.
키 작은 관목과 듬성듬성 자란 나무들 사이로 지나는 협곡의 여정은 쉽지만은 않았지만, 오크 길잡이 덕분에 큰 사고 없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산세는 완만해졌고, 나무들은 점점 솟기 시작했다.
물소들은 전에 없이 푸른 잡초를 보며 허겁지겁 입을 우물거리느라 전사들이 곤혹스러워했다.
물소 떼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라크락은 멀리서 생전 처음 보는, 네발로 껑충껑충 뛰며 목이 길고, 머리에 뿔이 달린 털 짐승을 보았다.
이 털 짐승은 처음 보는 리자드맨들을 경계하는 듯 싶었다.
라크락은 저 털 짐승은 경계를 위해 앞으로 나왔고, 그 뒤로 작은 무리가 더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외팔의 별잡이가 말했다.
“사슴이로군.”
“맛있나?”
“단 한 번 먹어 봤지만, 아직도 그 맛을 기억하지. 살이 달큼하다.”
라크락은 무리에게 휴식을 명하고 전사들과 함께 사슴을 사냥했다.
라크락은 첫 번째 사냥한 사슴을 검은 바위 위에 올려 두고 신에게 바쳤고, 두 번째 사냥한 사슴을 길을 인도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오크들에게 주었다.
이후 나머지 사슴들로 무리의 배를 채웠다.
간만의 만족스런 식사에 라크락은 임시로 정한 바위 제단 앞에 앉아 황금 서판을 가져다두고 제물로 바친 사슴이 썩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라크락은 별안간 생각에 빠졌다.
‘이건 썩지 않고, 저건 썩는군.’
자올의 말이 맞다면 황금 서판은 앞으로도 썩지 않을 테고, 라크락이 봐 온 바에 따르면 죽은 것은 썩어서 없어진다.
‘그러고 보면 세상 많은 것들이 둘로 나뉘어져 있군. 낮과 밤. 빛과 그림자. 땅과 하늘.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먹는 자와 먹히는 것. 산 것과 죽은 것. …남자와 여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라크락은 도리질 쳤다.
‘자올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지. …대답이라.’
라크락은 죽은 사슴의 머리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이미 파리 떼가 잔뜩 나앉은 사슴의 몸통은 피가 난자했고 벌레가 들끓고 있었다.
‘죽은 것 위로 생명력으로 충만하지만 이 또한 사라질 터.’
그때 라크락의 눈에 기묘한 모습이 보였다.
벌레들이 마치 일정한 규칙에 의해, 정확히는 누군가 손을 대어 움직이는 것처럼, 배열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크락이 다시 눈을 몇 번 깜짝이자 불규칙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뭐지?’
그러한 환시가 라크락의 눈앞에 몇 번인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라크락은 그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낯익다 싶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벌레들의 움직임은 황금 서판 위에 고대인들이 찍어 낸 표식이랑 닮았군.’
라크락은 사실은 모든 게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낮과 밤 사이에는 어스름과 새벽이 있고, 빛과 그림자 사이를 잘 들여다보면 불분명한 경계가 존재했다. 땅은 산으로 높이 솟았고 하늘은 정확히 어디부터라고 부르기 힘들다. 쫓는 자는 쫓기는 자가 되기도 했으며, 먹는 자는 먹히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라크락은 몇 가지 생각하며 나뭇가지로 바닥에 끄적였다.
처음에는 황금 서판의 글자를 베꼈다가, 다음으로는 문자도 기호도 아닌 낙서를 써 내려가고, 이내 손으로 바닥을 지워 가며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이 황금 서판에서 썩지 않는 건 황금이 아니야. 진정으로 썩지 않는 것은…’
라크락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그어 대며, 제단 가까이 불을 지피고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이른 새벽, 자올은 눈을 뜨자 눈앞에 라크락이 있는 것을 보았다.
“부족장, 무슨 일입니까.”
“보여 줄 것이 있다.”
“보여 줄 것이라니요?”
자올은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지만, 라크락은 다소 들뜬 모습이었기에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라크락이 말했다.
“내가 황금 서판과 제단의 썩어가는 사슴을 보면서 생각에 빠졌는데, 아무래도 신께서 내게 은총을 내리신 듯하다. 갑자기 생각이 팍 하고 들었는데, 황금 서판에서 썩지 않는 건 황금이 아닌 것이지. 진정으로 썩지 않는 게 뭐냐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라크락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뭇가지를 들었다.
“이걸 잘 봐라.”
라크락은 우선 나뭇가지로 삼각형과 작대기 두 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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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다.”
“이게 라크락입니까?”
“아, 아니…”
“부족장님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이건… 남자 리자드맨이다.”
“흠. 계속 해 보십시오.”
그다음 라크락은 역삼각형과 작대기 두 개를 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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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너다.”
“여자 리자드맨이란 말이군요.”
“어, 맞아.”
“정확히는 저라는 부분에서 여성이며 리자드맨이라는 부분이군요?”
“그래.”
그다음 라크락은 둘 사이에 선 두 개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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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크락은 선 두 개를 그리고서 입을 다물었기 때문에, 자올이 먼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뭡니까?”
“이건… 서로의 반려가 된다는 뜻이다.”
라크락이 말했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자올은 별다른 기색 없이 라크락이 그린 ‘문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라크락의 손에서 나뭇가지를 빼앗아, 그림을 그렸다.
○
자올이 말했다.
“라크락,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래.”
─┼
「라크락의 무리가 ‘문자’를 발명했습니다!」
성운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밖으로 내색을 해도 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발전을 거치려면 꽤 많은 세대가 지나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게임 초반.
라크락은 제법 강성한 무리의 지도자고, 이런 문자 활용에 의욕적일 터였다.
그리고 성운이 기대한대로, 험하지 않은 산세에 습하고 들풀이 가득한 땅으로 오자 리자드맨들은 금새 의욕을 고취하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며 활력이 생겼다.
게다가 물소 떼는 낯선 환경이긴 하지만 배를 가득 채운 이후로는 성격이 온순해져서 전사들이 다루기도 쉬워졌다.
라크락과 자올은 서로의 반려가 되기로 하였고, 이 일은 부족에서 축제로 삼았다.
일종의 사냥 대회가 원시적인 결혼 제의를 대신했고, 라크락은 가장 큰 사슴을 자신의 신부에게 바쳐 반려가 될 자격을 또 다시 증명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성운은 이 게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로스트 월드에 엄청나게 많은 랜덤 인카운터와 부정적 이벤트가 있었던 이유는, 역시 실제 세계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다음 만날 이벤트는… 이미 예견되어 있기도 했고.’
결혼식 이후, 라크락은 주변 숲 속의 위험을 확인하기 위해 전사들을 이리저리 정찰 보내고 있었다.
거대한 짐승에 대한 목격이 있었지만 당장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라크락이 더 신경 쓰는 것은 다른 부족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라크락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역시나 주변에 위협이 없지 않은지 끊임없이 정찰을 하는 또 다른 부족에 대해 알게 되었다.
라크락은 그 발자국에 대해 몰랐지만, 별잡이는 알고 있었다.
“개구리 발자국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