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배, 배신을 하라고?”
네 명의 플레이어가 만나기 며칠 전.
룬다는 성운과 단 둘이서 만났다.
성운은 룬다의 반문에 답했다.
“뭘 놀라고 그래? 여기선 당연한 수순 아니야?”
“…으음.”
“고민하는 척하지 말고.”
룬다는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덜컥 배신하라고 하면 당황스럽지 않아? 일단은 다른 사람들이랑 동맹 관계고.”
“나랑은 아니야?”
룬다는 ‘당연히 아니지’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내뱉으려고 보니 성운의 말투에 미묘한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
룬다가 듣기에 성운의 말은
‘나는 지금까지 너를 이용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너를 동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살갑게 대해 줬던 것인데 너는 내가 너를 이용하고만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니?’
에 가깝게 들렸다.
룬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물론… 너랑도 동맹 비슷한… 그런 관계지.”
“다른 네 명의 플레이어와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그건 나도 알아.”
“선택한다면, 이기고 싶은 쪽에 붙고 싶었던 것 아냐?”
룬다는 잠시 입을 닫은 채 있었다.
룬다는 자신이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모두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평화 비슷한 나날을 이어가진 못할 거란 걸 알았다.
언젠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순간이 오면 이기는 편에 서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나름대로 계산도 하고 계획도 있었다.
“아니, 근데 뭐랄까…”
“할 말 있으면 해.”
룬다가 말했다.
“내 상황도 이해할 만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 배신자로 찍힐 거야. 별로 좋지 못한 관계가 될 텐데. 지금까지 속였다는 걸 알면 끔찍하게 여기겠지?”
성운은 룬다의 머리 위 허공을 노려봤다.
‘무슨 이유로 주저하나 했더니 결국 고민은 그쪽이었군.’
성운이 말했다.
“의외인걸.”
“그래?”
“게임 초반만 해도 매몰차게 크람푸스를 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초반이었잖아. 동맹이라지만 몇 번 보지도 않았었다고.”
“그럼 지금은?”
“그냥 뭐… 시시한 정은 들었지.”
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 시시한 정 때문에 패배하고 싶지는 않겠지.”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는 거야? 5대 2잖아. 사실상 엘다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엘프가 만들어 낸 자원을 흑린이 공유하고 있으니 5대 1이나 다름없지. 날 설득하려면 어떻게 이길 생각인지 정도는 말해야 되는 거 아냐?”
성운은 자못 귀찮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룬다에게 향했다.
“큰 계획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계획?”
“우선 룬다가 지금까지의 정보를 꾸준하게 나한테 공유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 줘야지.”
“난 협박받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건데?”
“그건 상관없어. 협박이라고 변명한다면 다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널 내팽개치진 않겠지.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은 어디서부터가 계책이고 어디서부터가 진짜인지 알 수 없지. 넌 고립될 거야.”
“…응?”
“그 사이에 내가 널 쳐부수는 거지.”
룬다는 그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다가도, 자신이 받아들인 것이 맞는지 확신이 없는 듯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그래. 다섯 사람 모두를 확실히 이길지 어떨지는 모르지. 하지만 넌 확실히 이길 수 있어. 그러니까, 이건 설득이 아니라 협박이란 말이야.”
룬다가 소리를 질렀다.
“야! 그렇게까지 말해 버리면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겠어?”
성운이 즉답했다.
“‘쓰레기 같은 새끼’?”
룬다는 멍한 얼굴로 입을 벌리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내뱉는 말도 의도하지 않은 감탄이었다.
“와… 정말. 대단하다, 너.”
“마음대로 생각해.”
“넌 아무 감정이 없어?”
성운은 룬다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조곤조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했다.
“룬다. 내가 이런 말까지 하는 건 난 널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불필요한 감상이나 기분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지. 이를테면, 크람푸스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에게 배신자라고 낙인 찍혀도, 눈앞의 쓰레기가 협박을 하고 있어도, 너 자신의 이익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룬다는 양 주먹을 쥐고 반박할 말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고,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성운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성운이 뭐라고 하던 간에 성운은 자신을 옳게 보았다.
‘굳이 사람 속을 긁어 대며 말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만… 그냥 타고난 성격이 못 돼먹은 건가?’
이내 열을 식힌 룬다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
룬다는 며칠 전 성운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중요한 대화 내용은 그 대화가 아니라 이후의 계획이었다.
성운은 자신에게 몇 가지 계획이 있는데, 그중 어떤 계획이 제대로 작동할지는 알 수 없다고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단지 그때가 오면 룬다가 알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룬다는 알 수 없으면 그냥 넘어가 버리고 성운에게 제대로 알려 줬어야지 하고 화를 낼 심산이었지만, 장완이 AR1026을 배신자로 몰아 버리는 사건이라면 넘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이 그때구나.’
룬다는 계획대로 했다.
“저, 장완.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지?”
장완은 AR1026을 가리킨 손을 거두고서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리곤 말했다.
“확실한 증거, 라고 하면 아니야. 그래서 아까 말했잖아. 심증이라고.”
AR1026이 말했다.
“심증이라도 좋아요.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는 있다는 말이니까요. 그렇지도 않은 건 아니겠지요?”
그 말에 장완이 말했다.
“근거라면 있어.”
장완은 시스템 창을 조작하더니 몇 가지 정보를 공유했다.
룬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창에는 닉스 남자가 금안의 수도로 몰래 잠입하는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크람푸스가 말했다.
“이게 뭐 어떻다는 말이지?”
“닉스 얼굴 확인했어? 그 다음 화면은 그보다 좀 더 오래된 자료야.”
모두가 정보를 확인했다.
아까 보았던 닉스 사내가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위치는 오라즌이라고 되어 있었다.
AR1026이 말했다.
“아니, 겨우 이 정도 정보 가지고…”
“이것 말고도 더 있어. 이 닉스는 금안과 흑린을 몇 번이나 오갔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게 몇 번 더 있어. 대강 확인했는데 특정한 신분이 있는 건 아니야. 원래는 상인이었는데, 오라즌의 유력 가문들과 만난 히스토리가 있었지. 그 이후는 불분명.”
크람푸스가 질문했다.
“그럼 특별한 개체야? 그게 아니라면 접촉은 해 봤어?”
“죽었어.”
“죽었다고?”
“내 코볼트 사제들을 보내서 잡으려고 했지. 하지만 네뷸라도 주목하고 있었는지 흑린의 리자드맨들이 이 닉스를 먼저 불러들이더니 죽여 버렸어. 에이알, 설명할 수 있겠어?”
AR1026이 장완의 말에 황당해하며 말했다.
“설명? 설명 같은 거 할 것도 없어요. 전 저게 누군지도 몰라요.”
“그럼 도대체 리자드맨들이 저 닉스와 왜 만났던 거야? 왜 내가 접촉하려고 하자 죽여 버린 거고?”
“저야 모르죠.”
크람푸스가 말했다.
“수상하긴 해. 저 닉스에게 장완이 접촉하려고 하자 곧장 죽여 버렸다는 말은 네뷸라가 유난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는 말이니까.”
AR1026이 크람푸스를 노려보자 크람푸스는 가로저었다.
“아니, 꼭 배신이 어쩌고 하는 이유로 수상하다는 건 아니고.”
장완이 말했다.
“네뷸라가 어느 정도 신앙 자원을 소모했다는 말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었기 때문일 거야. 좀 더 확인은 해 봐야 해. 이건 신뢰를 위한 문제기도 해. 다들 동의하지?”
룬다가 끼어들었다.
“난 솔직히,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룬다…”
“그렇지 않아? 저것 자체가 네뷸라의 이간질 용도였을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뭔가 더 큰 계획을 짜려다가 중간에 들통 나서 포기해 버린 걸지도 모르고.”
“아니, 그래. 시시한 의심이라고는 생각해. 하지만 사소한 의심도 해결할 필요가 있지 않아?”
크람푸스가 말했다.
“평시라면 그렇겠지만 전투를 앞두고 있어.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하진 않아. 오히려 사소한 의심이라면 굳이 지금 같은 순간에 들출 이유는 없지 않아? 그리고 이미 해당 개체가 사망했는데 어떤 방법으로 답을 알아낼 거야?”
“…음.”
AR1026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시시한 협잡이라고 생각해요. 네뷸라가 공을 들여서 저희를 의심하게 만든 거죠. 해결이라고 말했지만, 뭐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거죠?”
“간단해. 정보를 공유하면 되지.”
장완의 말에 AR1026이 면사포 뒤로도 느껴질 만큼 인상을 썼다.
“무례해요. 솔직히 말해 배신자가 당신이라면, 너무 게임을 유리하게 풀어 가는 거 아닌가요?”
“뭐?”
장완이 황당하다는 듯 되받아쳤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자 룬다는 입을 가리며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야.’
성운이 말한 룬다의 임무는 ‘배신자 두둔해 주기’였다.
─┼
“뭐야? 같이 배신자를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배신자로 의심받는 사람을 두둔해 주라고?”
“응.”
“왜?”
성운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로스트 월드에선 비슷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단일 세력보다 느슨한 동맹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지?”
“그래. 동맹은 해체될 수 있으니까?”
“동맹을 해체하기 위해서 단일 세력이 하는 공격을 ‘흔들기’라고 불러 보자고. 나는 지금까지 흔들기를 많이 했어. 그렇지?”
룬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동맹은 흔들기에 대해서 걱정을 하겠지?”
“그래.”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어. 내가 흔들기를 시도할 때마다 흔들기에 대응하기 위해 결속이 더 단단해지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이미 그런 것 같아. 지금은 모여서 회의를 하지 않지만 원래는 자주 직접 만나기도 했으니까. 특별히 살가운 감정이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동업자, 동료라는 인식은 공유하는 거 같은데.”
이번에는 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조금 발상을 바꾸는 거지.”
“발상을 바꾼다고?”
성운이 말했다.
“예를 들어 함께 배신자라고 지적을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글쎄? 배신자라고 낙인찍힌 사람에 대해서 철저히 알아보겠지?”
“맞아. 하지만 나머지 동맹 중에 진짜 배신자는 너 밖에 없어.”
난데없는 날카로운 지적에 룬다는 당황했다.
“…으응, 그래.”
“아니, 널 비난하는 건 아니고. 어찌되었든 배신자가 없다는 결과가 나올 거란 말이야. 배신자라고 적당히 의심받게 할 수 있어도 진짜 배신자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럼 배신자라고 낙인찍힌 사람을 두둔하면 어떻게 되는데?”
성운이 말했다.
“우선, 그 사람이 진짜 배신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려워져. 그 확인 과정을 생략하는 게 중요해. 동료를 신뢰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그렇게 되면 고발자는 배신자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나머지 동료들은 고발자의 태도가 과하다고 생각할거야. 여기서 배신자라고 낙인찍힌 사람은 고발자를 동맹을 어지럽히는 의심병 환자라고 몰겠지.”
“아.”
“그러니까 이 계획에서 정말로 공격받는 건, 배신자라고 낙인찍힌 사람이 아니라…”
“배신자라고 지적한 고발자구나?”
성운이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이어했다.
“그 자체로 동맹이 흔들리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적당한 설명을 붙여 가며 마음대로 해도 될 거야.”
“이를테면?”
“그 고발자 대신 정말로 배신자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겠다는 이유로, 배신자라고 지적당한 사람과 너의 군대를 바짝 붙여놓을 수 있겠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