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털이 하얗게 흰 놀이 오라즌의 궁으로 들어섰다.
놀은 늙었지만 과거에 전사였음을 증명하는 흔적이 몸에 남아 있었다.
왼눈 위의 짙은 상처라던가, 제 몸처럼 익숙하게 걸치고 있는 칼집, 그리고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건장한 체격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늙은 놀 뒤로는 놀을 수행하는, 보다 젊은 놀들이 뒤따랐다.
놀 앞으로 좌수관 하나가 달려와선 말했다.
“파시안 공작님, 죄송하지만 무기를 들고 들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나는 수 십일 걸려서 한줌도 되지 않는 내 호위와 왔을 뿐인데도?”
“예.”
“그럼 어쩔 수 없이 무기를 풀어야겠군. 하지만 황제를 자칭하는 이가 이런 늙은 놀을 두려워해서 되겠는가 싶은데.”
그 말에 좌수관이 뭐라 답해야할지 모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파시안은 자신의 허리에 메인 칼집을 풀어서 좌수관에게 넘기며 피식 웃었다.
“두려워할만 하지.”
멀리서 들려온 목소리에 파시안이 돌아보았다.
그보다 먼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린 궁의 사람들이 머리를 숙였다.
카일 라크 오라즌, 흑린 제국의 황제였다.
파시안은 카일을 바라보았다.
‘어리다.’
파시안은 살아온 세월의 경험 덕에 다른 종족들의 나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아직도 윤택이 도는 눈가 위의 비늘, 꼬리의 돌기들도 아직 경화되지 않았구나. 열 다섯은 넘었고 스물은 되지 못했군. 이 어린 리자드맨이 대륙 전체를 통일한 지배자란 말인가.’
흑린과는 머나먼 단리에서도 흑린이 강국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대륙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승자는 흑린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을 성사시킨 것이 이토록 젊은 리자드맨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카일이 말했다.
“내가 듣기론 파시안 공작은 저 바다 너머 오랜 전쟁에서 불패를 해온 대장군이라던데… 전쟁을 한답시고 백성에게 목숨을 내걸게 하고, 피비린내 나는 지휘는 제 형에게 맡긴 겁쟁이와 비교를 하겠나.”
파시안은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제 막 이루어졌고, 제국 내에 마법사들과 같은 혼란함이 있으니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른다지만, 동쪽 대륙에 자리 잡은 자신의 영지와 제국을 맞대어볼 수준은 아니었다.
‘단리와 흑린이 전쟁을 한다면? 그건 또 붙어볼만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본국은 너무 멀고, 흑린은 가낍다.’
파시안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야천께서 살피시는 가운데 하늘에 닿은 지혜를 쓰시니, 구태여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실 필요도 없으시겠지요. 평생 칼만 휘둘러온 놀의 아둔함을 염려하신 것을 제가 허투로 말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파시안은 천한 핏줄로 전쟁에서의 용맹함을 인정 받아 공작까지 올라온 이였으나,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 단순히 칼밥만 먹어온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노련한 말솜씨였다.
카일이 말했다.
“용서까지야. 이후 연회에서 보지, 파시안 공작.”
카일이 지나가자 파시안은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진 않군.’
파시안이 먼 길을 떠나 오라즌까지 온 것은, 본래는 카일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워낙 먼 길이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기후나 사고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발생했기에 대관식은 놓치게 되었지만, 카일은 파시안을 배려해서 연회 기간을 늘렸다.
덕분에 현재 오라즌의 궁에는 수 많은 왕족과 귀족, 명사들이 체류 중이었다.
‘흑린의 눈치를 보기 위해 연회에 참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다른 일이 있다.’
파시안은 좌수관을 따라 연회 기간 동안 기거할 방으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남부대륙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야 한다.’
단리는 처음엔 흑린이 있는 대륙에서 시작했지만 ‘대횡단’이라고 불리는 긴 세월에 거친 이동 끝에 현재 서부대륙에 자리 잡았다.
파시안 또한 이 대륙이 고향이지만, 그 능력을 인정 받아 서부대륙에서 거의 평생을 지냈었다.
때문에 파시안은 이 땅에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왕이 자신을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 대륙이 조막만하게 남은 단리의 땅만 해도 다른 나라와 비견할 수 있지만, 단리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저 대횡단의 흔적으로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본국에서 오게 된다면 일종의 좌천이나 유배에 가깝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보니 그렇지 않았다.
흑린 아래에 이른바 ‘남부 대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대륙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심지어 그 남부 대륙에는 대륙을 지배하는 강력한 나라들이 거의 없다고도 알려졌다.
‘땅의 크기가 곧 국력을 결정 짓는다.’
이전까지의 흑린은 강국이라고해도 단리 입장에선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다.
먼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과 별개로, 흑린은 단리 입장에선 그리 관심을 가질 정도의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흑린은 숨겨왔던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순식간에 대륙을 통일했다.
분명 마음이 내킨다면 대륙에 여남은 단리의 땅도 삼킬 수 있을 것이지만, 확전을 꺼리는 것인지 아직 전쟁을 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하지만 싸움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겠지.’
파시안이 생각하는 싸움이 일어날 장소는 바로 남부 대륙이었다.
그리고 큰 규모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대신 누가 더 많은 땅을 가지냐의 싸움이 되겠지.’
단리는 멀다.
파시안은 단리에서 알아갈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알아내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일 생각이었다.
─┼
“제4 대륙이 빈 땅이라고?”
룬다의 말에 성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빈 땅.
로스트 월드에서 이 말은, 실제로 비어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로스트 월드에 완전히 비어있는 땅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 북극부터 남극까지 마른 땅만 있으면 빽빽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형에 따라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의 종이 더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로스트 월드에서 빈 땅이라는 것은, ‘아직 플레이어 어느 누구도 점령하지 않은 지역’을 의미했다.
“하지만 샤차가 있잖아. 넌 그놈이랑 무역도 했고. 그럼 문명 수준이 높은 거 아냐?”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지.”
“놀라운… 사실?”
“샤차가 주종족으로 삼고 있는 건 딥원이지.”
“그런데?”
“딥원은 물고기야.”
“아.”
“심지어 바다에서 살지.”
프로그맨은 물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고, 문명 단계가 오르면 수중도시를 짓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민물.
바닷물에 대한 저항 능력이 존재하긴 하지만, 염도가 높은 물속에선 약한 통증을 느끼기 때문에 프로그맨의 행동반경은 호수나 강줄기로 제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성운이 설명했다.
“딥원은 프로그맨의 반대야. 염도가 높은 물 속에서는 괜찮지만, 민물은 꺼려하지. 물론 들어간다고 바로 죽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또 피부가 마르는데에 대한 저항력이 프로그맨 보다도 약해.”
성운의 말에 대해 위즈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지 대부분은 텅 비어있을지도 모르겠군. 샤차의 규모는?”
“딥원의 나라 자체는 제법 커. 일단 내가 확인한 연안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어. 바다 속에 도시도 있는듯 하고. 하지만 종족 비율에서 딥원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종족은 노예로 부림 당하는 편이지. 야분 해적단은 대부분이 딥원이었고.”
크람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제 4대륙으로 가자는 거군.”
“그래.”
“에이알을 되살릴 기회기도 하니까.”
“맞아.”
성운은 인벤토리에서 AR1026의 봉신상을 꺼내 회의실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AR1026을 되살려야 하는 게임에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성운은 회의실을 둘러보다 장완이 사자탈의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다.
“…말하지는 않겠어. 뭐 굳이 이야기할 것도 없지. 만신전의 신은 무조건 많을수록 유리해. 이런저런 역할을 해줄 사람들이 있으면 좋으니까. 다들 알잖아?”
그 외에도 이유는 많았다.
봉신이 깨어졌을 때 여전히 AR1026이 괜찮은지도 알 필요가 있었다.
게임을 하던 도중 봉신을 당할 수 있는 건 AR1026만이 아니었다.
만약 게임의 내용이 조금 달라진 것에 대한 영향으로 봉신을 해제 할 수 없다면, 이제 봉신은 조금 더 다른 의미가 될 터였다.
‘설정상 진짜 죽는 게 아니니까, 괜찮을테지만. 지금까지 설정 잘 따라가다가 갑자기 뒤엎을리도 없고.’
엘다르가 말했다.
“저, 그럼… 에이알 님만인가요?”
성운은 가로젓고는 손에서 다른 두 개의 봉신상을 더 꺼냈다.
임춘식과, 솔롱고스의 봉신상이었다.
“워낙 게임 초반에 죽기는 했지만,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해.”
룬다가 말했다.
“너한테 악감정이 있진 않을까?”
“있으면 어때서? 너희한테는 없을테고, 그럼 동맹을 위해서 해악을 저지르진 않겠지. 적어도 자기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만약 성운 자신과 자신의 사촌동생과의 관계처럼, 플레이어들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면 최대한 많은 플레이어들을 만나서 확인해볼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되살려줬다는데 누가 싫어하겠어.’
봉신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했다.
그건 게임 시스템으로 ‘시련’이라고 불렸다.
이 시련은 플레이어가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지만, 플레이어가 직접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계시를 받은 개체들이 수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시련은 게임 내부에 측정되어 있는 값에 따라 난이도가 바뀌는데, 예를 들어 작은 언덕에 있는 약초를 따오는 것 따위는 10점 이하의 낮은 점수를 얻으며, 누군가를 죽여 제물로 바친다는 건 300점, 거대한 괴수를 죽인다 따위의 많은 사람의 협력이 필요한 일은 1000점 정도의 값이 부여되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가본적 없는 대륙으로 떠나 본적도 없는 괴물을 죽이고 보물을 발견한다 따위의 시련을 수행하면, 꽤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유적이 있을만한 장소는 확인이 됐어. 그리고 거기서 뭐라도 발견하면 아마 에이알을 되살릴 점수는 나올 것 같아. 점수가 모자라면 두 사람은 조금 미뤄도 되고.”
장완이 말했다.
“결국 에이알만을 위해서는 아닌 거잖아? 이건 그냥…”
“그냥?”
“제국주의, 식민지 개척이잖아?”
로스트 월드에서도 꽤나 흔하게 발생하는 일이었다.
대륙 간 싸움이 치열해지다보면, 각각의 대륙에서 문명의 발전 정도가 차이가 나게 된다.
그 격차가 제법 심해지게 되면, 보다 문명 단계가 높은 대륙에서 사실상의 식민지 정복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빈 땅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있게되면 그 식민지 정복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 남부 대륙은 빈 땅이었다.
적어도 확인 된 바에 의하면 말이다.
‘제2 대륙이나 제1 대륙과 신경전을 벌이기 전에 영역을 확장할 수 있으면 더 할 나위 없지.’
성운이 말했다.
“음, 아무튼 그걸 비난할 생각은 아니지?”
장완은 우물쭈물하다가 답했다.
“…아니야.”
성운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됐군. 에이알이 돌아왔을 때 우리가 게임에서 유리한 지점에 있다는 걸 알면 좋아하지 않겠어?”
장완은 한숨을 쉬었지만,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