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49
149화
흑린의 동남쪽 끝, 마가넨.
부둣가에 엘프 하나가 집하장의 인부와 이야기하고 있다.
엘프의 검붉은 옷감에는 금실로 수가 놓여져 있지만 그저 부유하기만 한 상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바닷바람에 나부껴서 제때 손을 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발목에 휘감기지 않도록 소매와 바짓단은 끈으로 동여매어져 있다. 뱃사람인 것이다.
가늘게 뜬 눈은 웃는 것 같지만 눈동자가 검고 짙어서 그 속을 완전히 헤아리기 어렵다.
집하장의 인부는 엘프에게 화를 내며 따져 들다가, 곧 고분고분해지고, 대화가 끝날 무렵에는 머리를 꾸벅 숙였다.
대화가 끝날 무렵에 리자드맨 하나가 엘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많이 바쁜가?”
엘프는 길쭉한 귀를 씰룩이더니 바센 라크 오라즌을 돌아보았다.
“바센 왕자… 아니 단장님?”
“오랜만이군, 티오네 이티모, 선장.”
“선장이요?”
티오네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단장님 덕분에 이제 작은 선단의 주인이 되었지요.”
“그럼 선단주라고 불러야 하나?”
“하지만 선장이기도 하니, 그냥 선장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인부와 대화를 끝낸 티오네는 가까운 국수집으로 가서 바센 라크 오라즌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했다.
대륙 전쟁이 있는 동안 바센이 장군으로 군대를 지휘하고 있을 적에, 티오네는 전쟁 물자를 부지런히 수송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서 밀려 있던 차액을 궁으로부터 받았는데 그 덕에 큰 부자가 된 듯싶었다.
“심지어 다섯 번째 수차에도 가입했다고요.”
“다섯 번째 수차? 그게 뭐지?”
“아니, 설마 모르세요?”
바센이 고개를 끄덕이자 티오네는 제 입을 막았다.
“그럼 못들은 걸로…”
“뭐야, 내가 알면 안 되는 건가?”
“왕자님 정도면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고… 제가 또 말실수를…”
바센은 피식 웃었다.
“그걸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졸여질 것이라면 그냥 편히 말하지 그러나? 그게 뭔진 몰라도 비밀은 지켜 줄 테니.”
티오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비밀 상인 조합이에요.”
“비밀 상인 조합? 그냥 상인 조합이 아니라?”
“네. 옛날에 자동성에서 휘경이 대륙의 유명 상인들을 불러다 놓고 만들었다는 조합이죠.”
“상인들 사이의 전설 같은 건가?”
“뭐… 비슷해요. 흥미로운 부분은 전설이 아니라는 점이죠. 저도 제의가 오기 전까지는 그냥 전설로만 알았고요.”
바센은 가입하면 어떤 혜택이 있고 그 비밀 상인 조합이 목표로 하는 게 무엇이며, 그렇게 까다로운 조건으로 가입한 또 다른 대상들은 누가 있는지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바센이 보기에 티오네는 그리 답변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으므로 관두기로 했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 대단한 조합에 가입하게 된 거라면 축하하도록 하지.”
“고마워요. 참, 이번 남부 대륙행은 직접 결정하신 건가요?”
바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원래 동부 산맥에 갈 계획이었지만 일이 많이 틀어졌잖나? 게다가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물론이거니와, 듣자 하니 만신전의 신들께서도 그걸 원하신다더군.”
만신전, 이라는 단어에 티오네는 생경함을 느꼈다.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전후 최고의 화두였다.
엘프와 자린의 신이자 자신을 신들의 전령이라고 소개한 무영이, 선택받은 사제들에게 말해 준 이야기는 책으로 엮인 뒤 대륙 전역에 퍼져 나갔다.
이윽고 책만이 아니라 노상에서 공연되면서 ‘만신전의 여명’이란 이야기로 대륙의 문명권에 속하는 지역이라면 모두가 알게 되었다.
오랜 기간 바다를 오가느라 그 이야기를 뒤늦게 접한 티오네는 이제 그 이야기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 공연은 저도 봤어요. 어제도 이 앞 광장에서 하더라고요.”
“같은 공연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오라즌에서 매일 봤었지. 한 번은 내가 나오는 배역도 있더라고. 리자드맨도 아닌 드워프가 가면을 쓰고 연기하더군.”
“아니, 오라즌이면 리자드맨도 많을 텐데요.”
“듣자 하니 연기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라 다역을 맡아서 그렇다던데. 재밌긴 했어.”
“사실 어제 본 공연에선 단장님 역을 트롤이 하고 있더라고요.”
“…흥미롭군.”
티오네가 말했다.
“아무튼 만신전의 여명 끝에 나오는 그 이야기를 이제 저희가 수행하는 거죠?”
“그렇지.”
무영은 전쟁 때 죽은 암본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머나먼 남쪽 대륙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여정에는 증인이 될 사제들, 그리고 험난한 여행을 이겨낼 강인한 탐험가들이 필요하다고 일렀다.
바센이 바로 그 탐험단을 이끌게 되었고, 티오네는 탐험단을 태우고 남쪽 대륙으로 갈 선단의 선장이었다.
다만 바센은 조금 거짓말을 했다.
바센이 온전히 원한 여행은 아니었다.
바센은 전쟁의 승리 덕분에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지지 세력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대륙 전체는 아직 흑린이 모두 지배하기에는 너무 광활했다.
바센이 그저 버티고 있다가는 카일에게 부담이 될 터였다.
‘뭐, 카일이라면 어떻게든 해내겠지만.’
그렇지만 수고를 덜어내려면 자리에서 나와 주는 것이 좋아 보였고, 마침 자신에게 어울리는 장소도 있었다.
티오네가 말했다.
“과거에 약속했던 동부 산맥은 아니지만, 뭐 더 멀리까지 가게 되는군요.”
“모르는 일이지. 언젠가는 가지 않겠어?”
며칠 뒤, 각 제국령에서 모인 사제들과 선별된 탐험가들이 마가넨에서 출발했다.
다섯 척의 배는 마가넨에서 함께 출발해서 돌탄섬까진 함께 가지만, ‘검은 교단’이라고 불리는 딥원들의 지역을 피해 남부 대륙의 서로 다른 해안에 정박할 예정이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란 이유도 있지만, 해당 지역에 대한 기상과 해역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다.
혹여나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다섯 척 모두가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땅으로 가는 거야.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배 위에서 바센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 티오네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하니 이렇게 큰 배들이 뒤집어지기나 하겠어요?”
그리고 돌탄섬을 지나고 이틀 뒤, 티오네와 바센이 탄 ‘해적의 수치’호는 태풍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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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다!”
부둣가에서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봐야만 했던 웅장하게 솟은 선체를, 우습다는 듯 내려다보는 파도들이 갑판을 후려쳤다.
티오네가 외쳤다.
“뭐해! 물 퍼내!”
티오네가 타륜을 쥐고 시끄럽게 외쳐 댔고 바센은 무슨 일이라도 돕기 위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배는 왼쪽으로 30도 넘게 기울며 출렁거렸다.
“난간을 잡아요!”
그게 바센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다운 말이었다.
이후 이어진 것은 고함과 비명 소리, 세상을 으깨려는 듯한 거대한 파도 소리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배의 울음이었다.
바센은 눈을 뜨고 초록의 무언가가 보이자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제길, 슌이 봤다는 태초의 평원인가?’
그렇지 않았다.
눈에 잔뜩 묻은 모래알을 좀 털어 내자 관목이 자라난 수풀과 제법 빽빽한 숲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자 노란 모래사장과 그와 이어진 푸른 해변이 보였다.
떠오른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듯한 해가 비스듬히 맑은 바닷물을 관통하고 있었다.
‘몸이 데워지면서 정신을 차린 건가? 다행이군.’
어딜 얻어맞았는지 구르다가 배에 박은 건지 머리가 욱신거리긴 했지만, 다행히 부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불행한 점은 주변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아니, 그래도 주변에 부서진 배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군. 나같이 파도에 떠밀려 온 이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전에…’
바센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바닷물을 좀 마셨나 보군.’
물속에 있느라 열을 빼앗긴 탓인지 허기도 심했다.
바센은 해안가를 걸으며 다른 조난자를 찾기 전에, 우선 숲으로 들어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가까운 곳에 있는지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바센은 낯선 남국의 식물들 사이를 지나며 길을 좀 헤맸지만, 기대했던 대로 작은 못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닷가와 붙어 있어 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입을 대고 마시니 그렇지 않았다.
‘물을 담아갈 병이 있다면 좋을 텐데…’
못을 돌아보던 바센은 별안간 이상한 형체 하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기괴하게 생긴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등은 질긴 껍데기 같으면서 둥글었고, 주둥이는 길고 뾰족했다.
덩치는 겨우 하프빈, 그러니까 리자드맨 평균 키의 절반 정도 밖에 오지 않았다.
하지만 등이 아닌 앞부분을 천 가지로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바센이 찾던 주머니도 하나 들고 있었다.
바센이 처음 보는 종족이긴 하지만, 확실하게 사람으로 보였다.
이 종족은 팽골리안, 즉 천산갑과 닮은 종족이었다.
딱딱한 가죽으로 머리에서 꼬리 끝까지 덮여 있는 팽골리안은 위험할 때에는 공처럼 몸을 말아서 위기 상황을 피해 갈 수 있었다.
다만 팽골리안은 물을 퍼다 말고 뒤늦게 바센을 발견한 것인지, 뚫어져라 바센을 바라보고 있었다.
팽골리안이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있자 바센은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이봐.”
“…힉!”
새된 비명을 지른 팽골리안은 놀라서는 허겁지겁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니, 이봐!”
일단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에 바센으로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센은 뒤쫓기 시작했다.
팽골리안은 바센이 뒤쫓는 걸 알게 되자 공처럼 몸을 말았다.
“…어라?”
바센이 당황하는 사이, 공이 된 팽골리안은 경사를 따라 굴러가기 시작했다.
바센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당황하면서 팽골리안을 따라 달렸다.
팽골리안이 경사 끝에 도달하고 속도가 줄기 시작하자 바센은 따라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때 팽골리안 앞에 거대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센이 보기엔 기괴하게 생긴 종족이었다.
전체적으로 키와 체격과 같은 조건들은 트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얼굴이 우락부락하고 입이 죽 찢어졌고 눈꼬리는 바짝 올라가 화가 잔뜩 난 얼굴인데,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얼굴의 부분 부분의 색이 달랐다.
이 또한 바센이 처음 보는 종족이지만, 플레이어들에게는 라크샤사로 알려진 종족이었다.
트롤의 먼 친척이라 할 수 있는 종족으로, 늘 화가 난 듯한 얼굴과 개체마다 다른 색깔을 가진 얼굴이 특징이었다.
라크샤사는 팽골리안의 꼬리를 집어 들었다.
“마고! 또 일하지 않고 도망쳤구나!”
거꾸로 집어 들어 올려진, 마고라고 불린 팽골리안은 말린 몸을 풀면서 말했다.
“아이구, 재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아픈 차차가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그놈은 내버려두라고!”
“하지만 내버려두면 차차는 죽습니다요…”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다! 그런 병든 녀석 따위를 보살피느라 사원 건축이 지체되고 있지 않느냐!”
“하지만하지만 차차는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주인님이 매를 때려서…”
마고의 말에 라크샤사는 화가 났는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허, 이놈이!”
누가 보아도 라크샤사는 악질적인 주인이었고 팽골리안 마고는 친구를 도우려다가 도리어 매를 맞을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바센은 라크샤사에게 ‘그쯤 하지?’라던가 ‘그만둬라’라던가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는 트롤과 비슷한 덩치를 가진 종족이었고, 바센의 칼집은 파도가 치는 사이에 어딘가 빠져 버린 건지 비어 있었다.
그래서 바센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바위 하나를 집어든 다음 살금살금 라크샤사의 뒤로 접근했다.
그리고 라크샤사가 손을 쓰기 직전, 머리통을 후려쳤다.
-퍽!
라크샤사는 순간 충격 때문에 휘청이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컥, 누구…?”
‘역시 트롤이랑 비슷하군. 머리통이 단단해.’
바센은 라크샤사가 돌아보기 전에 다시 머리를 내려찍었다.
라크샤사는 그대로 쓰러졌다.
“헉!”
꼬리가 풀려난 팽골리안 마고는 쓰러진 라크샤사와 바센을 번갈아 보았다.
“아이구! 시상에나! 이럴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