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67
167화
“신기하군.”
마즈다리가 이동성 성벽에 뚫린 총안을 보며 말했다.
“분명 이동하고 있지만 이 위에선 흔들림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성에 달린 다리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똑똑한 것 같군.”
바센 라크 오라즌이 되물었다.
“똑똑하다고? 그냥 마법 아닌가?”
“음, 글쎄….”
마즈다리가 인식한 것은 모든 방향에 대해 기울어짐을 인식할 수 있는 자이로스코프에 대한 개념이었지만, 마즈다리에게는 아직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어휘가 없었다.
마즈다리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라크샤사들을 피해, 성벽의 그늘로 숨거나 이동성의 정원 안뜰에 심어진 나무와 수풀 사이에 몸을 숙였다.
제법 덩치가 있는 두 사람인지라 몸을 숨기는 것이 그리 능숙하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다행히도 라크샤사들은 바센이 지시한 대로 소란을 일으키고 있는 2조와 3조를 향해 달려가느라 둘을 제대로 바라보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요행은 여기까지인 듯싶군.”
조종실이 위치한 탑 가까이 오자 라크샤사들의 방비가 제법 철저해 보였다.
대략 스물 정도의 라크샤사들은 멀리서 일어나는 소란에 대해 잡담을 하는 등 다소 분위기가 느슨해 보였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침입자가 없는지를 철저하게 살피고 있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숫자가 제법 많군. 탑 입구까지 시야가 탁 트여 있으니 숨어서 들어간다는 건 어려워 보인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바센은 잠깐 고민했다.
“쓸 만한 마법은 없나? 저번에 해적들을 무찌를 때 보여준 마법이라면…”
마즈다리가 말했다.
“그 정도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시약이 필요하다. 시약을 마련하는 것 정도야 이제는 궁의 도움을 받는다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나선 날개가 버텨 주지 못했지.”
“흠.”
마즈다리가 부리를 긁었다.
“하지만 아무런 마법도 부리지 못할 거라면 따라오진 않았겠지. 괜찮은 마법이 있다. 하지만 한 구 이상의 시체가 필요하다. 그거라면 충분히…”
바센이 가로저었다.
“그럼 관두는 걸로 하지.”
“왜?”
“일단 시체가 필요하다는 건 라크샤사 하나를 어디선가 잡아 봐야 한다는 말인데, 그러기엔 시간이 걸린다.”
“과연.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건 알겠다. 미리 말을 해 두는 게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바센이 말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드래곤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마법을 쓰는 건 꺼림칙하다. 옛말에 마법은 악신과 드래곤의 것이라고들 하지 않나?”
“마법을 감지할지 어떨진 나도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그런 마법이라면 아껴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우리는 곧 드래곤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마즈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생각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놈들을 처리할 방법은 따로 없지 않나?”
“그냥 단순하게 해보는 게 좋을 거 같군.”
“단순하게?”
바센이 마즈다리를 위아래로 슥 훑어봤다.
“연기 좀 할 줄 아나?”
─┼
잠시 뒤.
마즈다리가 다리를 절뚝이며 라크샤사들 앞으로 걸어갔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아, 이것 참. 살았군.”
모두의 시선이 마즈다리에게 꽂혔다.
라크샤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마즈다리에 놀라며 당황한 기색이었고,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마즈다리가 두 손을 들며 말했다.
“그래, 나는 이번에 성에 침입해 온 이들 중 하나인데, 아무래도 일이 그른 것 같군. 너희들에게 항복하고 싶다.”
라크샤사 몇몇이 수근 대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빨 목걸이로 장식한 라크샤사 하나가 마즈다리에게 다가갔다.
“네놈이 그 하늘을 나는 탈것을 타고 온 놈들 중 하나냐?”
“그래.”
“왜 항복한다는 거지?”
마즈다리가 잠깐 동안 우두머리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바센이 라크샤사 뒤쪽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능숙하게 움직였다.
그리곤 라크샤사 하나의 오금을 걷어차는 동시에 목을 휘감더니 단검을 목 깊숙이 꽂아 넣었다.
라크샤사들은 모두 마즈다리를 보느라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바센이 라크샤사 시체를 조용히 내려놓으며 다음 대상에게 향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보시다시피… 일행이 패주를 하고 도망치는 와중에 다리를 삐었고…”
“잠깐.”
이빨 목걸이가 말했다.
“패주하고 있다고?”
“그래. 우리가 지고 있지. 허황된 계획이었어.”
또다시 라크샤사들이 수군거렸다.
가장 뒤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라크샤사의 심장에 칼날이 박혔다 뽑혔다.
라크샤사의 더운피가 돌로 된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 소리에 무심코 라크샤사 하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대략 열 보가 넘는 거리.
마즈다리가 바짝 긴장했다.
‘겨우 둘 밖에 못 줄이나?’
그렇지 않았다.
바센은 그 즉시 활을 들고 화살을 쏘았다.
이동성에선 흔히 들리는 바람소리와, 불을 밝히는 화로 소리에 묻힐 정도의 소음.
화살은 라크샤사의 눈을 꿰뚫었다.
바센은 그대로 튕겨져 나가 이미 죽은 라크샤사가 바닥에 머리를 찧어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붙잡았다.
그리곤 술에 취한 사람을 침상에 눕히듯 조용히 추슬렀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살아남은 친구들이 있으니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군. 다만 나는 길을 잃은 데다 다른 일행을 만날 방법도 없으니 항복하려고 한다.”
이빨 목걸이가 피식 웃었다.
“무슨 해괴한 종족인지는 모르겠지만 덩치에 비해 뱃심도 없나 보군.”
“날 조롱하는 건가?”
“너희 종족을 조롱하는 거지, 새대가리.”
“흐음.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마즈다리가 쉽게 수긍하며 받아들이자 당황한 것은 라크샤사들이었다.
“너희 종족은 그렇게 쉽게 모욕을 수긍하나? 자긍심도 없는 건가?”
“자긍심? 글쎄, 나는 딱히 별 느낌이 없는데.”
“무슨 말이냐?”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종족의 가치를 논한다는 건 그만큼 너의 시선이 저열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저열함에 대해 내가 무슨 감정을 느끼겠나?”
“이놈이…”
“그냥 짜증이 날 뿐이다. 너는 벌레에게 감정을 느끼나?”
“이노옴!”
이빨 목걸이를 한 라크샤사가 대노하며 앞으로 나섰다.
라크샤사 하나가 급히 그의 팔뚝을 잡았다.
“대장, 지금 뒤에…”
“놔라! 이 겁 없고 버르장머리 없는 새대가리의 부리를 쪼개 놓지 않고서는…”
“대장!”
이빨 목걸이가 돌아보았다.
바센의 칼날이 코앞까지 닥쳤지만, 그의 라크샤사 부하가 빠르게 몽둥이를 내밀며 몸으로 막아섰다.
칼날이 그 부하의 몽둥이와 가슴, 배를 베었다.
이빨 목걸이는 살았다고 생각했다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감각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볼 수는 없었다.
마즈다리가 검을 뽑아 이빨 목걸이의 등으로 꽂아 넣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 가슴에서 튀어나온 칼날이었다.
마즈다리가 빠르게 남은 라크샤사들을 눈으로 세었다.
‘열까지 줄인 건가?’
둘은 사각을 줄이기 위해 서로의 등을 맞대었다.
바센의 기습과 마즈다리의 기만에 잔뜩 성이 난 라크샤사들이 퇴로를 막으며 둘러쌌다.
바센이 말했다.
“마즈다리.”
“뭐지?’
“‘벌레에게 감정을 느끼’냐고? 너 그거 신성모독이다.”
마즈다리가 한숨을 쉬었다.
“…좀 봐주면 안 되겠나? 흑린에 투신하겠다고 생각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야천에 대한 내 믿음이 부족하군.”
“놈들을 다 처리하고 나면 생각해보지.”
거의 동시에 라크샤사 열 명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바센은 분명 한 명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호흡을 잘 맞추더라도 동시에 공격해 오긴 힘들다.
‘모두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중요한 건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막고, 무엇을 쳐내느냐.’
바센은 칼은 피했고 도끼는 칼날로 흘리고 몽둥이는 맞아 버텼다.
회피와 동시에 꼬리로 라크샤사 하나를 받아넘기고 그대로 머리통을 걷어찼다.
-빠각!
삽시간에 일어난 일에 라크샤사들이 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라크샤사의 목이 볼품없이 늘어나 있었다. 목뼈가 부러져 빠진 것이다.
바센이 말했다.
“이제 아홉.”
─┼
라크샤사 모두를 죽이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센과 마즈다리는 죽은 라크샤사의 옷감에 칼날을 닦아낸 다음 그대로 탑으로 향했다.
“여기가… 제어실인가?”
바센은 다소 어리둥절했지만, 마즈다리는 감탄하는 모양새였다.
“놀랍군. 마법 제어에 가까울 거라 했는데, 이래서야 기계에 가깝지 않나?”
노출된 톱니바퀴들과 제어봉들이 있었다.
바센은 언젠가 가 보았던 자동성의 안쪽 풍경을 떠올렸다.
뭔가 적혀 있긴 했는데 바센이 보기에 글자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바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흠, 불행히도 놈들 중 하나를 살려 두는 게 좋았을 것 같은데…”
“아니, 기다려 봐. 알 것 같군.”
마즈다리는 제어봉들을 툭툭 당기고 밀었다.
“뭔지 알고 하는 건가?”
“이동성은 아니지만 비슷한 유적을 본 적이 있어. 여기 손잡이들 마다 적힌 문양들이 그것의 의미와 같다면, 그리 틀리지 않을 거야.”
마즈다리가 조작하며 말했다.
“내가 없었으면 어쩔 생각이었지?”
“움직이는 걸 멈추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않겠나?”
바센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가방을 가리켰다.
마즈다리는 바센이 다른 모험단원들로부터 무언가 받아 가방에 넣고 있을 때 그리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가방에서는 화약 냄새가 짙게 나고 있었다.
“괜히 물어봤군.”
마즈다리는 고대 유적 하나를 자신이 살렸다고 생각하며 제어봉을 조작했다.
“이제… 됐다.”
마즈다리가 마지막으로 제어봉을 당기자, 이동성의 토대, 저 깊숙한 땅 아래에서 깊은 고동 소리가 들려오는 듯싶었다.
아주 느리게, 이동성이 멈춰서고 있었다.
바센은 탑에 난 창문으로 성벽 쪽을 보았다.
제법 빠르게 움직이던 풍경이 천천히 느려지고 있었다.
“됐군. …마즈다리?”
바센이 돌아보자, 마즈다리는 완전 반대 방향 창문으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마즈다리가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바센.”
“뭐지?”
“사과 하나 해도 되겠나?”
“뭘?”
“아까 칼싸움할 때는 왜 굳이 힘든 길로 가는가 욕했었다. 자네 말이 맞았군. 아껴 두길 잘 했어.”
바센은 대답하지 않고, 마즈다리가 바라보는 창문으로 걸어갔다.
무언가 있었다.
거대한 존재였다.
사람에게 따뜻한 온기를 전해 주는 횃불과 화로 따위로는 그 존재를 모두 밝힐 수 없었다.
빛 아래 보여지는 것은 다리 정도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수십 보에 이를 길이에, 드러난 네 개의 다리는 한 두 사람으로는 끌어안지 못할 정도로 두껍다.
-너희들인가? 그 역겨운 ‘화약’ 냄새를 흩뿌리며 나타난 것들이?
목소리는 저 하늘 위에서, 눈으로 생각되는 노랗게 빛나는 두 개의 점으로부터 들려왔다.
-나 ‘위대한 아슈라다’에게 다시금 도전해 온 필멸자들이 너희냐고 물었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이 거대한 존재는 그리 화난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화낼 가치조차 못 느끼고 있거나.
바센과 마즈다리는 둘 다 속으로 아슈라다가 자신들이 없는 셈 쳐주길 기대하며 창문 옆으로 숨었다.
바센이 말했다.
“…잠깐, 내가 뭘 아껴 두라고 했었지?”
마즈다리가 지팡이를 들었다.
“마법 말이야.”
마즈다리가 자신의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아슈라다의 발아래, 바닥에 쓰러진 라크샤사 시체들이 부글대며 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