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81
181화
라민 솔로스트 무엘도 몇 번인가 가루다를 본 적이 있었다.
모험의 세기는 그런 때였다.
과거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더이상 자신의 존재를 떨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좌절했다면, 이 기회의 땅에서는 언제든지 유명해질 기회가 있었다.
꼭 모험을 통해 괴물을 죽이고 고대 유적을 파헤치는 일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땅에 개척지를 짓거나 낯선 종족과 유대를 이끌어낸다면, 육종하기 힘든 식물을 기르거나 우물을 파낸다면 그 사람은 영웅인 셈이었다.
라민도 그랬으니까.
가루다들은 키도 크고 몸도 날랬기 때문에 모험가로서 명성을 떨치기 좋은 종족이었다.
그리고 그런 가루다들이 은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이곳에 남아 정착할 때에도 라민은 그 모습을 보았다.
젊은 가루다의 모습은 종족과 관계 없이 퍽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편이다. 프로그맨들과 딥원들은 어째서인지 위협적이라고 느끼기도 하는 편이지만.
하지만 늙은 가루다들은 그와는 완전히 반대다.
깃털이 빠지고 주름진 자리가 드러나고 부리 끝이 부러진 모습은 안타깝기도 하다. 작은 종족들처럼 단명하진 않지만 인간보다 특별히 오래사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전설 속의 마법사는… 시간 마저 속이고 있는 것 같은데.’
분명 젊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랬더라면 라민은 이 가루다가 혹시나 뱀파이어가 아닐지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 짙은 갈색의 깃은 이제 회갈색으로 옅어졌다.
하지만 목깃은 전보다 크게 부풀었고, 눈썹깃과 눈 아래의 회색깃은 이제 흰색에 가깝게 대비가 또렷해졌다. 부리는 여전히 검고 단단하다.
가루다 치고도 큰 2미터 40에 달하는 키며 벌어진 어깨 덕에 어지간한 트롤과 마주서도 당당할 풍채였다.
“인사는 조금 있다가 하지. 우선은 저 잡졸들을 처리해야겠군.”
“예.”
야천의 사도이자 만신전의 세 번째 사도, 이른바 제3 석, 또 달리 부르는 이름은 ‘비상하는 자’, ‘대마법사’, ‘도래자의 지팡이’.
가루다 종족들의 날지 못하는 저주를 아직 완전히 해주(解呪)하지는 못했지만, 마즈다리 자신은 그것을 극복해냈다.
마탑을 세우고 그곳에서 온 대륙의 고대 지식을 모으고 후대의 마법사들을 길러냈다.
그리고 고대의 힘으로 야천의 뜻을 적극적으로 행하니, 두려워하지 않을 적이 없었다.
마즈다리에겐 악명도 많았다.
소문에 따르면 단리에선 ‘깃털 달린 악몽’으로 불리거나, 까마귀와 생김새는 별로 관계가 없으면서도 ‘시체 까마귀’라고 불리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까마귀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기다리는 버릇이 있듯, 마즈다리가 발견되는 전장은 그 적들에게 끔찍해지곤 했다.
마즈다리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고르고타 팔루의 경례를 받고는 라민을 노려보았다.
라민은 당황했다.
‘뭐지? 날 알고 있나…?’
하지만 마즈다리는 입을 다물고서 그대로 라민을 스쳐지나갔다.
마즈다리가 말을 건 것은 고르고타에게였다.
“요원.”
“예.”
마즈다리는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로 바닥에 무언가를 슥슥 그려내기 시작했다.
“첩보부의 모든 이들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멀리서 실루엣만으로 알아볼 수 있겠나?”
“그건…”
“그럴 수 있길 바라지. 뭐, 다행히도 그렇게 어렵진 않으니.”
마법진을 모두 그린 마즈다리가 지팡이 끝으로 마법진의 가운데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자 마법진이 모두 사중으로 나뉘어 떠오르며 붉은 빛으로 빛났다.
순간 첩보부 건물 내부와 그 주변의 소음과 총성, 고함소리와 그 사이에 파묻힌 목소리들이 일시에 사라졌다.
라민이 의아해졌다.
‘소음을 차단한 건가?’
고르고타는 옥상 난간 밖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도 없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마즈다리가 하늘을 가리켰다.
“아래가 아니라 위를 봐라 요원. 첩보부 인원이 있는지 확인해라. 지금 나와 너희 둘을 제외하고 방금 이 주변 일대의 모든 사람들을 1km 위로 전송시켰다.”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고르고타와 라민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가면을 쓰고 검은 옷을 입은 것들은 그 단리놈들이겠지. 나머지는 내가 받아낼 것이니, 혹여 내가 놓치는 이가 있다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해라.”
“…예! 알겠습니다.”
마즈다리는 하늘을 한 번 훑어보더니 손으로 허공을 그러잡았다.
그러자 가면을 쓰지 않고 검은 옷도 입지 않은 첩보부 사람들이 마치 나부끼는 낙엽처럼 부유하더니, 천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은 이빨 요원들은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콰직!
몇 개의 비명소리가 가까워지다, 음산하게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멎었다.
중간중간 마즈다리가 놓친 사람들을 고르고타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략 오십 명 정도 되는 이빨 요원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져 납작해지자, 주변은 고요를 되찾았다.
무게를 잃고 흔들리며 천천히 추락하던 첩보부 인원들이 그제야 바닥에 착지했다.
무리들이 모여 옥상을 바라보고 떠들었는데, 마즈다리가 손을 들었다 내리는 걸 보고 라민은 뒤늦게 아래 사람들이 경례를 한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바닥에 떨어진 시체들을 가리키거나 부상자를 옮기는 등 곧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라민이 주변의 풍경을 보았다.
이빨 요원 몇 명은 옥상에 떨어지기도 했기에 바닥을 검붉은색으로 적셔가는 시체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마즈다리가 변명하듯 말했다.
“하나하나 집어서 죽이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지. 그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이 당할테니까. 그렇다고 일거에 소거 시켜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분류하기 쉽게 정리했지. 다행히 잘 된 것 같군. …아, 요원.”
“예?”
“심문할 이들을 남겨놓는 게 좋았다고 생각하나? 내 마법으로 죽은 이를 잠깐 동안 되살려 말을 하게 만들 수는 있을텐데.”
고르고타가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도님. 저희 정보에 의하면 바세니올에 있는 이빨 요원 대부분은 등급이 낮습니다. 작전 입안자와 직접적 관계를 가진 이를 아는 이는 없을 겁니다.”
“뭐, 그렇겠지.”
고르고타가 알고 있기에 마즈다리는 아직 동부 전선에 있어야했다.
첩보부 요원인 자신도 그렇게 알고 있으니 당연히 이빨 측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즈다리가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시나리오는 생각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변변찮은 요원들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
그 증거는 이빨 요원 중 살아남은 이가 없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특정한 종류의 마법을 한두 차례 막아내는 ‘마법막이’를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간부급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사도와 첩보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주변 상황은 마즈다리가 통제할 것으로 보였다.
첩보부는 황제의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황제는 신의 뜻을 따르려 한다.
물론 신들께선 작은 일에는 명확히 뜻을 알려주지만 큰 흐름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반면 사도는 신들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존재였다.
사도 또한 큰 흐름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지만, 황제는 물론이고 첩보부에도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첩보부의 입장에서는 만신전 사제의 계시를 기다리는 것 보다 더 편한 것이다.
하지만 고르고타의 생각과 달리, 마즈다리는 아래로 내려가 일면식도 있을 첩보부의 간부를 만나는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라민은 다가오는 마즈다리를 보며 당황했다.
“어, 어라?”
“닮았군.”
“네? 누, 누구랑요?”
마즈다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부리를 부닥쳐 딱 하고 소리를 냈다.
“아니, 됐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너희 둘, 해가 밝는대로 서문으로 와라.”
고르고타가 말했다.
“저희 둘 다 말입니까?”
“그래. 너, 군인이었지? 동부전선에서 싸운적 있지 않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우리 구면 아닌가?”
고르고타는 의외라는듯 대답했다.
“맞습니다. 저희 부대가 섬에 고립되어 있을 때 사도님께서 와주셨었죠. 스쳐 지나갔을 뿐이라 기억하지 못하셨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총 솜씨가 괜찮더군. 눈도 좋아보이고. 덕분에 오늘 죽이지 말아야할 사람을 안 죽일 수 있었다. 난 틀림없이 두 명 정도는 놓칠 거라고 생각했거든.”
“…과찬이십니다.”
“쓸만한 요원이 필요하다.”
“뜻대로 하겠습니다.”
라민이 말했다.
“잠깐만요. 저는 학교도 가야 되는데요?”
“알아서 해라.”
“뭘 어떻게 알아서 하란 말이에요? 해 뜨기까진 몇 시간도 안 남았다고요.”
“지금부터 나는 마탑에 들려야 한다.”
“이봐요!”
고르고타는 말리고 싶었지만 따지고보면 라민은 마즈다리와 나이가 비슷할 터였다.
갑작스런 깨달음에 고르고타는 당혹스러워졌다.
마즈다리는 귀찮다는듯 라민을 무시하고 난간을 향해 걸었다.
“저기요? 저 착하게 잘 살았거든요?”
마즈다리가 난간 위에서 고르고타를 돌아보았다.
그다음 고르고타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원, 쟤 책임지고 데려와. 쟤 때문에 가는 거야.”
고르고타가 각 잡힌 차렷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옙! 알겠습니다.”
라민은 황당하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마즈다리가 도약해 하늘을 날아가버리자 그 마저도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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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즈다리가 아무런 후처리도 없이 떠나버렸기 때문에 고르고타는 마즈다리가 어떤 마법을 썼고 어떤 명령을 내려야했는지 설명해야 했으며, 학교 휴학 문제와 평행국 뱀파이어 여행 절차를 새벽간 진행하느라 집을 찾아가 잠자고 있는 교수와 대학교 직원, 평행국 심사관 등을 순차적으로 깨우며 첩보국 수첩을 내밀어야 했다.
그 일을 다 끝내고나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자동차를 타고 서문으로 향했다.
고르고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지만, 서문에는 이미 마즈다리가 서 있었다.
마즈다리 옆에는 다른 사람도 한 명 있었는데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차량이 멈춰서자 마즈다리가 말했다.
“늦었군.”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차는 잘 가지고 왔군. 비행장까지 운전하지.”
“네?”
그렇게 말하곤 마즈다리와 또 다른 일행이 차량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고르고타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바로 운전을 시작했다.
마동-증기 복합 차량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선에 타는 겁니까?”
“그래.”
“…저희가 끝까지 몰라야할 비밀은 아니겠지요?”
마즈다리가 말했다.
“비행선에 올라탄 다음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뭐 상관없겠지. 우리는 서쪽 대륙으로 간다.”
“네?”
서쪽 대륙이란 명칭은 오라즌을 중심으로 했을 때의 말로, 남쪽 대륙에서도 그 호칭이 굳어진 덕분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어들에게 서쪽 대륙이란 단리가 지배하고 있는 제2 대륙을 의미했다.
“그럼 북쪽으로 가서 배를 타고 본토로 갔다가…”
“아니. 남쪽으로 간다.”
“…네?”
“이 땅이 둥글다는 것 정도는 알텐데. 이 남쪽 대륙에서 남쪽으로 다시 내려가면, 서쪽 대륙의 북부에 도착하게 된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무슨 문제를 말하는 거지?”
고르고타가 주저하자 라민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전선을 지나야 하잖아요!”
“그래. 우린 전쟁터를 가로지른다.”
“그게 무슨…”
마즈다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그게 최단 경로다. 어차피 제국은 모든 방면이 전장이다. 어딜 가든 전쟁터를 가로질러야 하는 건 똑같아.”
“아니, 그 전에 제가 왜 단리에 가야하냐고요.”
그 말에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던 마즈다리의 동행인이 말했다.
“누님.”
“…누님?”
“저희는 휘경을 만나러 갑니다. 저에게는 조상이시고, 누님에게는 어버이 되실.”
라민은 세 가지 의문 중에 제일 황당한 것을 반문했다.
“잠깐, 내가 왜 당신 누님이에요?”
마즈다리의 동행인이 후드를 벗었다.
젊은 인간 남자였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종족이 아니라 이마 위에 있었다.
이 사람의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었다.
“제 이름은 휘 주란 무엘입니다. 당신이랑 공유하는 이름이 있으니, 저희는 가족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