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85
185화
라민 솔로스트 무엘 또한 ‘선택받은 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만나보기도 했고, 과거에는 자신이 선택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곤 했었다.
물론 그보다 긴 세월 동안 그것은 망상에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선택 받았다고?’
마성의 정령은 라민의 머릿속에 말을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라민의 몸에는 여전히 그 감각이 남아 있었다.
손과 발끝에서 찌르르 타고 올라와 등골을 거슬러 올라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는 바로 그것.
용사 마힘이 달려오고 있었다.
마힘은 아직 라민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일부러야.’
용사들은 자신이 어떤 선물을 받았는지 숨기는 것이 관례였다.
어떤 선물을 지니고 있는지 상대가 알고 있으면 그에 대한 대응도 할 수 있으니까.
마성의 정령이 자신에게 힘을 몰래 쥐어주고 떠나간 것도 같은 이유로 보였다.
‘다음 한 방으로 끝낸다.’
어차피 라민으로서는 전투를 계속해서 이어갈 체력도, 피도 모자랐다.
라민은 미노타우르스 마힘의 도끼날을 피하고, 칼날을 받아내며 마힘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여기까진 어렵지 않아.’
지금까지도 마힘의 심부로 파고드는 것 정도라면 어렵지 않았다.
단지 그 다음 공격을 피할 수 없을 뿐.
철퇴가 내려쳐지고 단창이 찔러온다.
하나를 어렵사리 막더라도 다른 하나는 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라민은 왼손을 펼쳤다.
-파쯔쯔…!
대기가 손가락에서 튀어오르는 스파크에 우는 소리를 냈다.
라민은 왼손을 마힘의 가슴에 내질렀다.
“…!”
우뚝, 하고 마힘이 멈춰섰다.
마힘은 지신의 몸 전체에 타고 흐르는 격통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다.
‘겨우… 이 정도 고통으로 나를…!’
하지만 그것은 마힘의 의지와 무관한 일이었다.
사람의 몸에 있는 신경 신호는 미세한 전류를 통해 이루어진다.
때문에 외부에서 그보다 전류가 들어올 경우 신경 신호를 전달하는 과정이 차단 되며, 또한 신경이 이러한 전류를 잘못 받아들여 수축 또는 경직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근육으로 이루어진 심장 또한 다르지 않다.
마힘의 심장이 멈춰섰다.
심장이 밀어내던 피들은 동맥을 지나 미세혈관을 거쳤다가 정맥을 지나며 주춤했고, 산소와 이산화탄소 교환이 중지하며 잔뜩 부풀었던 근육은 물론 폐를 팽창하게 만들기 위한 호흡근육과 산소 교환이 중지했다. 마힘의 시각신경이 마지막으로 창공의 빛을 전달했다. 이내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 용사 마힘.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용사 마힘은 어떻게든 버티고 섰다.
마힘의 신체에는 분노하는 자의 손길이 닿아 있었다.
이성과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힘이 잠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라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적이 죽었다고 생각해도 한 번 더 확인하라고 하셨지.’
라민은 자신의 검이 가만히 서 있는 허수아비도 베지 못할 정도로 허술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마힘이 다시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순간, 라민의 검이 마힘의 투구와 가슴 갑옷 사이의 이음새로 흘러들어갔다.
마힘이 무릎을 꿇자 갑옷들 끼리 부딪치며 덜커덩 소리를 냈고 마힘의 머리가 떨어졌다.
라민은 마힘의 가슴을 밀어차며 뒤로 넘겼다.
피가 꿀렁꿀렁 쏟아지며 기낭 위를 덮었다.
라민이 침을 삼켰다.
잠시 잊고 있던 기갈이 다시 라민을 덮쳤다.
‘아니, 안되지.’
라민은 가로저으면서도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 아래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만 이 위에는 자신과 제 지운이 죽은 줄도 모르고 아픈 눈을 붙잡고 앓고 있는 와이번 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인 거고, 내 사냥감이니 상관없지 않나?’
라민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라민은 서쪽 대륙과 흑린 본토, 그리고 남쪽 대륙으로의 여정을 이어왔는데, 그중 가장 오랜 시기를 보낸 곳은 이 남쪽 대륙이었다.
법과 질서가 가장 미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라민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살고자 노력했다.
죄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았고, 여유가 된다면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도왔다. 그건 곧 야천의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라민은 자신이 흠 없이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개척지 한 여관에서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라민이 여관으로 들어서던 순간, 여관 주인의 돈을 빼앗은 강도가 라민을 밀치며 도망쳤다.
라민은 황망해하는 여관 주인에게 일주일치 방세를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강도를 쫓았다.
강도는 제법 발이 빨라 개척지 외곽까지 도망쳤지만, 라민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숨을 헐떡이던 남자는 돌아서며 검을 뽑았다.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젊은 청년이었다.
라민은 빼앗은 돈만 내놓는다면 돌려보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년은 긴장하고 있었고, 라민에게 꺼지라고만 했다.
이때 라민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말로 조곤조곤하게 설득을 하는 것이었다.
무장한 사람에게 맨손으로 다가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어쩌면 말로 잘 타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민이 선택한 것은 두 번째였다.
라민도 검을 뽑았고, 죽고싶지 않다면 덤비라고 말했다.
강도는 공격 해왔고, 라민은 그 강도를 죽였다.
이 일이 라민의 기억 속에 남은 이유는, 라민이 목마르고 허기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피를 마시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선택을 할 여력이 있었음에도 배를 채우기 위해서 강도를 도발했던 것이다.
‘그게 어때서? 다들 살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잖아?’
라민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탕!
총성 때문이었다.
기낭을 이루는 가죽은 쏟아지는 미노타우르스의 피를 다 머금지 못해서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고인 핏물에는, 짐승처럼 네 발로 시체 위에 엎드린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헉, 라민 씨, 괜찮으십니까?”
라민은 고개를 들었다.
고르고타 팔루가 엉거주춤 기낭 위로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뒤에서 꿈틀대던 와이번이 쓰러져있다.
고르고타가 방금 기낭을 기어오르다 와이번을 발견하고서 쏘아죽인 것이다.
라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웅덩이 위로 혀 내미는 모습만큼은 보지 않았길 바라면서.
“고르고타 씨?”
다행히 라민이 보았을 때 고르고타는 기낭 위를 기어오르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소식이 없길래 걱정이 되서 올라왔습니다.”
“전 괜찮은데요. 아래는 상황은요?”
“이런 전쟁통은 제 군생활에서도 처음입니다.”
고르고타가 거대한 곰치가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말에 라민은 농담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기낭의 가장자리를 향해서 걸어나가자 비행선 주위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볼 수 있었다.
마즈다리가 허공을 물 속 마냥 꾸물텅거리며 헤엄치는 거대 곰치를 유인하면서 마법으로 밀치거나 잡아당기거나 터트려댔다.
그럼에도 곰치는 태연하게 마즈다리의 마법에 저항하면서 비행선에 접근하려고 들었다.
“저 곰치는 마즈다리 님의 마법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마법에요?”
“네. 원래라면 그저 거대한 수호자라고해서 마법에 저항하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라민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마법 말고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요.”
고르고타는 의아해하다 라민의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제가 마즈다리 님에게 전달해보죠.”
“아뇨, 저렇게 생겼어도 분노하는 자의 수호자라면 당연히 지능을 가지고 있겠죠. 그렇다면 화를 낼줄도 알테고요.”
“네?”
라민은 뒤로 돌아가 미노타우르스 마힘의 머리통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다시 기낭의 가장자리로 가서 선 다음 외쳤다.
“이 못생긴 곰치야! 여기 누가 죽었는지 봐라!”
한창 마즈다리를 쫓던 거대 곰치는, 겉보기에는 느릿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건 일종의 착시였다.
거대한 것들의 움직임은 멀리서 보면 느려보이기 때문에.
라민이 다시 외쳤다.
“너희의 멍청한 소대가리 마힘이 죽었다! 너희가 가져가지 않는다면 우리 야천의 제물상에 올려야겠구나!”
옆에서 당황한 고르고타가 말했다.
“만신전엔 사람을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아니, 저도 알아요. 이건 그냥 도발이라고요.”
“…아, 그렇습니까? 저는 혹시나해서.”
“사람을 뭘로 보는 건지.”
두 사람이 떠드는 동안 거대 곰치가 비행선의 기낭 위쪽, 정확히 라민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즈다리는 퍽 당황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곰치는 이번만큼은 마즈다리의 방해와 공격을 신경쓰지 않고 비행선 위쪽으로 향했다.
라민은 도발이 먹혔다고 생각하고서 말했다.
“뭐야, 이제 배가 고픈 모양이군. 옜다, 가져가라.”
라민은 마힘의 머리를 힘껏 던졌다.
미노타우르스의 머리는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다 라민과 거대 곰치 사이의 허공 아래로 사라졌다.
-…이놈!
곰치는 더 속도를 냈다.
“못받아서 화가 났나? 이번엔 꼭 받으라고.”
라민은 뒤쪽에 숨겨뒀던 배낭을 집어들었다.
마힘의 배낭이었다.
그 배낭 안에는 비행선의 기낭을 터트릴 목적으로 가득 채워진 다이너마이트가 들어 있었다.
라민이 배낭끈을 쥐고 전력으로 집어던졌다.
라민이 고르고타에게 외쳤다.
“쏴요!”
“너무 가깝습니다!”
고르고타가 총을 겨누며 냉정하게 말했다.
너무 가깝다면 두 사람이 폭발에 휘말릴 뿐만 아니라 비행선에도 어느 정도 타격이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떨어지면…’
배낭은 포물선을 그리며 거대 곰치의 머리통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리만큼 떨어지자 배낭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만큼 작았다.
-탕!
고르고타가 즉시 재장전을 하는 것을 보고 라민이 직감했다.
빗나간 것이다.
‘그렇다면…’
라민은 왼손을 뻗었다.
새파란 전류 한줄기가 라민의 손끝과 다이너마이트가 든 배낭을 이었다.
시야가 점멸했다.
─┼
“정신이 좀 드나?”
라민은 목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올려다보니 기낭이 보였다.
갑판 위인 것이다.
라민은 어지러움에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아뇨. 머리가 좀…”
“마성을 사용해서 그렇다. 본래 직접 약초를 태워서 보충해야 하는데 정신을 잃고 있기에 당장은 임시 방편을 사용했다.”
라민이 옆을 보자 마른 풀잎들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잘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줬군.”
“음, 그 거대 곰치는요?”
“너의 공격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법에 저항하는 힘을 거의 잃었지. 덕분에 놈을 죽일 수 있었다.”
“아, 다행이네요.”
마즈다리는 무언가 고민하는듯 잠시 침묵했다.
라민이 사소한 불안감으로 말했다.
“왜요?”
“그리 다행은 아니다.”
“무슨 일인데요?”
“놈이 최후의 저항으로 비행선의 기낭에 손상을 입혔다.”
“네?”
“지금 천둥지기는 추락 중이다.”
“아니, 뭘 그걸 태연하게 말하는 거예요?”
라민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일어나자 갑판 위를 허겁지겁 뛰어다니는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보였다.
라민이 난간 밖을 바라보자,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지면이 보였다.
마즈다리가 초연하게 말했다.
“하늘을 나는 것은 다 떨어지기 마련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