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칼날이 가면에 닿는 순간 라민이 생각했다.
‘단단하잖아?’
라민은 이빨 요원들이 쓰고다니는 가면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꽤나 쓸모있는 방호구임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제국의 강철 칼날은 가면을 벨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날카로웠지만, 검사는 언제나 베어낼 재질에 맞게 검을 휘두르는 법인지라, 붉은 가면은 자신의 가면 아래 얼굴이 베어지기 전에 물러날 찰나의 여유를 챙겼다.
깨어진 유리조각과 함께 반쯤 잘려나간 붉은 가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라민은 가면 아래의 얼굴을 보았다.
정확히는 주둥이였다.
“…리자드맨?”
사선으로 잘려나간 가면 아래의 리자드맨이 라민을 노려보았다.
“…놀랄 게 있나?”
그냥 리자드맨이라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연합왕국에도 리자드맨은 많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 리자드맨의 비늘은 검정색이었다.
물론 제국 출신이 아닌 검은 비늘의 리자드맨도 있을테지만, 라민이 알고 있는 검은 비늘 리자드맨은 모두 제국 출신이었다.
이빨 요원이자 검은 비늘을 가진 리자드맨 델은 가슴팍의 단검집에서 단검을 뽑았다.
라민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허리춤에 장검이 있긴 하지만 좁은 구역에서 멋모르고 검을 뽑아 휘두르다간 어딘가에 걸리기 십상이다.
‘물론 그건 좁은 장소에서 싸운 경험이 적을 때 이야기지.’
라민은 그대로 문을 걷어차며 델을 물러나게 했다.
양면으로 협공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복도에서 싸우는 쪽이 좋아보였다.
‘저 리자드맨의 시야에선 주란이 보이지 않을테니까.’
라민은 벽에 붙어 있는 주란을 힐끗 바라보았다.
신호를 줄 순 없다.
알아서 할 일을 하길 바랄 수 밖에 없다.
주란은 살짝이지만 고개를 끄덕인듯 했다.
‘좋아, 그럼…’
라민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열차 내부 상황을 알아보러 떠난 고르고타를 찾는 것.
그리고 셋이서 함께 탈출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눈 앞의 이빨 요원을 죽여야 했다.
‘제국은 마법사들을 통해서 실지렁이 신호를 주고 받지만, 연합왕국은 주로 비둘기를 쓴다지. 신호를 주기 전에 서둘러 이 녀석을 죽인다면…’
-탕!
라민이 앞으로 나가는 순간 총성이 들렸다.
총알은 라민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앞의 리자드맨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빗나가지 않았겠지.’
리자드맨 뒤에 이빨 요원 하나가 더 있었다.
델을 피해 사격을 하느라 라민을 제대로 조준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격 자체는 라민을 맞추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여기 뱀파이어가 있다! 8번칸! 8번칸으로!”
라민은 혀를 짧게 찼다.
델은 구태여 공격할 것이 없다는 눈치였다.
가만히 있어도 이빨 요원들이 라민을 포위할테고, 뒤에서 공격하게 두면 될테니까.
라민은 어쩔 수 없이 델에게 검을 내질렀다.
한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좁은 공간이라고해도 베기를 배제하고 사실상 창으로 다룬다면 검을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델은 반격하기 보다 할 수 있다면 뒤로 물러나면서 방어적으로 대응했으며, 단검도 곧잘 다루었다.
간간히 라민에게 대응해오는 것은 델 뒤에 있는 권총을 든 요원이었다.
라민이 말했다.
“뒤로 도망가기만 하고, 자신이 없나보지?”
델이 가로저었다.
“도발은 쓸모 없다, 라민 솔로스트 무엘. 난 싸움꾼이 아니다.”
“그럼?”
“관료지. 시킨 일을 수행하는.”
라민의 생각에 저런 대응이야말로 도발에 걸린 태도였다.
“제국을 배신한 이유는?”
“난 제국을 배신한 적 없다. 제국이 날 배신했다면 모를까.”
“그 경험 덕분에 날 매수하려 했던 건가?”
델은 라민의 질문을 무시했다.
“지금 항복한다면 그대의 앞으로의 처우에 대해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라민은 눈동자를 반바퀴 돌렸다.
‘야천께서 말씀하시는 주체적인 삶은 어디에 있나이까.’
라민도 델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곤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검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큰 움직임이었다.
델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듯, 뒤로 크게 물러나면서 단검의 가드 부분으로 검을 막으려 들었다. 검을 봉쇄하고 그대로 체격 차이를 노린 몸싸움을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라민의 동작은 기만이었다.
라민은 한 걸음 더 들어가면서 뻗었던 팔을 가볍게 당겼다.
라민의 검술을 한 번 겪었던 델은 그 동작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던진다!’
델의 생각이 맞았다.
라민은 당긴 팔을 재차 뻗으며 쥐고 있던 검 손잡이를 놓았다.
델은 이렇게 쉽게 읽히는 동작을 보여줬는지 의아해하면서, 라민의 손에서 떠나 회전을 시작한 칼날의 경로를 벽에 붙어 피해냈다.
-퍽!
둔탁한 소음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델이 돌아보자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요원의 가슴에 검이 손잡이 앞까지 꽂힌 것을 볼 수 있었다.
애초에 델 자신이 아닌 등 뒤의 요원을 노린 것이다.
“이런…!”
델이 다시 라민을 바라봤을 때 라민은 이미 옆 침대칸으로 뛰어들어가고 있었다.
라민은 비어있는 침대칸의 창문을 열고 그대로 몸을 내뺐다.
몸을 반쯤 밀어넣었을 때 델이 한 손에는 단검을, 한 손에는 권총을 겨누고 있는 걸 보았다.
고무동력총 한 발이 발사된 순간 라민이 창틀을 박차고 객차의 지붕을 잡고 올랐다.
총알이 라민의 신발 밑창을 긁으며 날아가버렸다.
“제길.”
델이 객차의 천장을 바라보자 라민의 발소리가 울렸다.
델은 총을 들고 위를 겨누었다가, 약한 관통력의 고무탄성총이 철판을 뚫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총알을 아끼기로 마음먹었다.
뒤늦게 도착한 이빨 요원이 말했다.
“뱀파이어는 어딨습니까?”
“객차 위로 올라갔다. 요원 절반은 앞에서, 요원 절반은 뒤에서 올라간다. 서둘러!”
라민은 달리는 열차 위에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전차는 말이 달리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푸른 들판과 야트막한 산들이 이어진 풍경이 아름다웠다.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상황이 아니라면 넋을 놓고 바라보고만 싶었다.
전방을 바라보자 자연스럽게 후드가 벗겨졌다.
‘바보같긴.’
타는 듯한 열기가 얼굴에 덮치자 라민은 다시 후드를 쓰며 뒤로 돌아섰다.
객차 뒤에서 손 하나가 뻗어나오더니, 객차 지붕을 짚고 누군가 기어올라왔다.
이빨 요원이었다.
“저기 있습니다!”
라민은 권총을 쏘았다.
-탕!
하지만 총알은 빗나가며 객식의 지붕을 때리며 자그마한 불꽃을 일으켰다.
거리는 충분히 가까웠지만, 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 조준이 잘 되지 않았다.
“화약 권총입니다! 총을 들고 있습니다!”
라민이 앞뒤를 바라보니 요원들이 객실 지붕 위에 손을 올리고 올라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델이 외쳤다.
“뱀파이어가 총을 들고 있다! 신호와 함께 동시에 올라가! 여기서 죽는 이는 분노하는 자께서 그 명예를 인정할 것이다!”
라민은 앞뒤를 바라보다가 몸을 숙이며 객실 지붕 위에 손을 올렸다.
‘효율적으로.’
휘경에게서, 그리고 스승에게서, 그리고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을 겪으며 라민이 내린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었다.
그것은 효율이었다.
뱀파이어의 목숨은 곧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 그리고 목숨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삶의 방식은 ‘선택받은 자’가 되었을 때도 그대로 적용 되었다.
‘마즈다리가 복잡한 설명을 하긴 했지만, 결론은 마성을 쓰고 나면 심력이 떨어져 피곤해진단 말이지.’
마른 약초를 태우는 것으로 회복할 수 있지만 그런 여유가 언제 날지는 모른다.
그러므로 라민의 생각에 마성은 언제나 효율적으로 사용 되어야 했다.
처음 선택받은 자가 되었던 순간, 용사와 싸울 때 심장을 노렸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사람의 몸 중 가장 취약한 곳이 심장이므로 라민은 심장을 노렸다.
‘그냥 전기를 팡팡 뿜어내봤자… 옛 학자들이 서술한 전기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에너지 대부분이 대기를 지나면서 방전된단 말이지.’
그것은 에너지 낭비다.
선택받은 자의 숫자가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으므로 전기에 대한 학문도 그리 발달했다고 볼 수 없었지만, 라민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른 나무는 전기와 친하지 않지만 물에 젖은 수건은 전기와 친하다.’
라민은 자신의 손을 객실의 지붕에 올렸다.
‘고무는 전기와 친하지 않지만 쇠는 전기와 친하다.’
얇은 철판으로 이루어진 객실의 지붕을 따라 전류가 퍼졌다.
전류는 이제 막 객실 지붕으로 올라서던 이빨 요원들을 타넘었다.
옛 선택받은 자들이 보여준 화려한 전기 불꽃은 없었다.
이빨 요원들은 심장근이 수축하며 그대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세 구의 시체가 선로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뱀파이어가 기이한 힘을 씁니다!”
“마법사인 것 같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던 정보와 다릅니다!”
“저희 만으로는 대응이…”
요원들은 혼란에 빠진 것 같았다.
모두 죽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 다시 지붕 위로 올라오려는 용기 있는 요원들이 없었다.
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택받은 자다! 저건 전기야!”
델은 알아차렸지만 요원들을 달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애초에 통로에서 자신을 지져 죽이지 않은 것은 라민이 이 순간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앞뒤 차량에서 건너 뛰어라! 신발 밑창은 전기를 막아준다.”
라민은 이제 효율성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할 때, 앞선 객실 차량 창문으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르고타였다.
요원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소리를 내어 말을 하진 않았지만, 파닥파닥 흔들리는 개구리 손으로 보아 누가 해석해도 차량을 건너 뛰어 오라는 것으로 보였다.
라민이 달리기 시작하자 객실 지붕 아래에서 총이 아무렇게나 겨냥되어 쏘아졌다.
얇은 자리는 뚫렸지만 그렇지 못한 총탄도 있었다.
라민은 전력으로 달려 객차 사이를 건너 뛰었다.
-투웅…!
라민이 객차를 건너 뛰는 순간, 객차와 객차 사이를 잇는 대차 연결부에서 빛이 솟았다.
라민이 몸을 숙이며 내려보자, 주란이 손을 털며 일어나고 있었다.
주란이 라민에게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누님. 막 연결을 끊었습니다.’
라민이 되물으려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렸다.
대차 연결부가 붉게 달아올라 끊어져 있었다.
열차의 동력은 선두에 있는 증기기관이 있는 동력 차량에서 오고 있으므로, 당연히 대차 연결부가 끊어진다면 그 뒤의 차량은 속도를 잃고 처지게 된다.
열차는 직선 주로를 달리고 있었기에 끊어진 객차와는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라민이 일어나 멀어지는 객차를 보자, 문을 열고 델이 나타났다.
델은 라민을 겨누었다가, 거리가 너무 멀어 소용없음을 알고 총구를 내렸다.
“고르고타 씨는요?”
“요원들에게 붙잡혀 계셨죠. 제가 도왔습니다.”
라민은 지붕에서 내려와 고르고타와 합류했다.
고르고타가 말했다.
“요원들을 따돌리긴 했지만, 이 차량에 타고 있다는 게 들킨 이상 이대로 열차를 계속 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고르고타가 지도를 꺼냈다.
“루베일 계곡이 가까워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도보로도 이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속 구간에서 뛰어내릴 수 있을 겁니다.”
주란이 말했다.
“괜찮을까요? 이유는 몰라도 저희의 동선을 들킨 것 같은데.”
고르고타가 고민하는 표정이 되자 라민이 말했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상황이 최악은 아니야. 놈들이 동선을 알고 있다는 건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안다는 말로 볼 수도 있으니까.”
“무슨 말이죠?”
라민이 말했다.
“루베일 계곡으로 가도 휘경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지 확신하지 못했는데, 사실은 아니라는 말이야. 오히려 휘경이 저기 있기 때문에 놈들이 우리 동선을 알아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