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93
193화
강력한 전류는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멈칫하게 만들 수 있을만한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라민은 주란을 빗겨나가 그대로 달려가 이빨 요원의 목을 팔뚝으로 안은 다음, 힘을 주어 비틀었다. 빠각 소리와 함께 요원이 무너져내렸다.
아가닌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당신들은 대체…”
라민은 요원의 손에서 총을 집어들고, 탄약집과 칼집을 풀었다.
라민은 걸어와 주란에게 말했다.
“마법이에요? 그런 좋은 게 있으면 진작 말해주지.”
주란이 자신의 뿔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정령이 있다고 했었잖아요.”
라민은 주란이 휘경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엔 겹쳐보였다.
‘눈매가 좀 닮은 것 같기도.’
휘경은 라민에게 탄약집과 리볼버를 쥐어주고 아가닌을 돌아보았다.
“당장 그 성녀를 만나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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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민은 우선 시체를 숨긴 다음 주란, 아가닌과 함께 노역자 숙소를 벗어났다.
아가닌의 말에 따르면 예의 성녀는 지상으로 나오는 일 없이, 노역장 광산 깊은 곳에 있는 중앙 캠프에서 경비대의 감시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럼 숨어드는 게 어려운가?”
“꼭 그렇진 않다. 오히려 야간에도 야간 노역자 조가 돌기 때문에 그 사이에 껴들어갈 수 있으니까. 그보다…”
“그보다?”
“너희를 안내해주는 건 여기까지겠군. 정말로 이빨 요원인지는 몰라도 누군가 죽긴 했으니 오래지 않아 들통날 거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숙소에서…”
라민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 돌아가면 넌 괜찮을 것 같아?”
“음…”
“차라리 우리 협박을 받아서 안내했다는 게 나을 걸?”
아가닌은 한숨을 쉬고는 라민의 말에 동의했다.
광산 아득한 수직 갱도를 따라 만들어진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했다.
수직 갱도의 넓이는 좁지 않았기 때문에 외곽을 따라 만들어진 나무 계단의 난간 밖으로는 갱도를 위아래로 잇는 도르래도 넷이나 설치되어 있었다.
이 수직 갱도를 따라 내려가는 도중에 아가닌은 경비대는 물론이고 관리자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아가닌은 그때그때 야간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감독하고 있다거나 보수를 위한 기술자를 데려가고 있다는 식으로 속여 넘겼다.
아가닌이 말했다.
“이빨 요원들이 아직 안까진 들어오지 않은 분위기군. 그랬다면 더 어수선했을텐데.”
“그럼 잘 된 거 아냐?”
“아니지, 뒤늦게라도 수색을 시작할테니 퇴로가 막힌 거 잖아. 너희 둘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그 수 많은 경비대를 지나서 어떻게 빠져나가겠단 거야?”
라민도 이제와서는 방도를 알 수 없었다.
‘야천께선 그냥 내가 여기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라민 스스로 선택한 구렁텅이였다.
이제와서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자살에 가까운 일이지만 라민으로서는 그렇게 당혹스럽진 않았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일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라민은 꽤나 끔찍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런 유년기를 지나고 나서도 좋았던 시절은 휘경이나 스승을 만나던 잠깐의 시기 정도다.
그외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괴물로 살다가, 남쪽 대륙에 와서는 무법자가 되어 활보했다.
세상이 가하는 압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우느라 복잡한 것은 생각하며 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변했다.
제국은 뱀파이어를 받아주었고, 다른 목숨을 해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만들었다.
제국은 사회성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야수나 다름 없는 라민을 고등교육 기관에 밀어넣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지 않게 되자 라민은 여유를 얻었다.
여유는 사람을 사유하게 만든다.
그런 사유 자체가 라민에게 낯선 일이긴 했지만, 그 여유 덕분에 라민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까지 하게 되었다.
후회였다.
생존을 위해 소비해야만 했던 모든 시간들을 돌려받은데다, 대도시에서의 삶에 어울리는 도덕적 기준을 익혀나가면서 라민은 남들보다 몇 배나 긴 시간 동안의 삶을 돌아보아야 했다.
‘이게 끝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라민은 이 여행이 죄값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직 갱도를 끝으로 이어 수평 갱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라민은 앞서고 있는 주란의 등을 보았다.
‘죄 없는 이도 있지.’
주란이 돌아보자 라민은 시선을 느낀 것인가 하고 놀랐는데, 그건 아니었다.
주란이 말했다.
“가까이 있다고 해요. 저기, 바로 앞.”
아가닌이 말했다.
“중앙 캠프는 여기서 좀더 나아가야 하는데…”
아가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앞에서 소음이 있었다.
곡괭이질 소리였다.
나눠진 통로 중 한 곳에서 소리가 나고 있었다.
“이쪽은 야간 작업조가 있을텐데.”
주란이 말했다.
“이쪽에 있어요. 가죠.”
아가닌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자 라민이 말했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아.”
아가닌은 주저하다 말했다.
“…아니, 여기까지 왔으니 계속 안내하지.”
세 사람은 갱도의 가장자리로 몸을 붙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앞서 나가던 아가닌이 뒤를 돌아보며 기름 전등을 껐다.
그리곤 말 없이 손짓했다.
세 사람은 야트막한 돌무더기 뒤로, 통로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쓸모 없는 놈들.”
그렇게 말한 것은 코볼트였다.
이 시궁쥐를 닮은 종족은 한 손에는 짧은 말채찍을 들고 있었고, 자신 앞에 있는 노역자 무리를 향해 짜증을 냈다.
“더이상은 못한다고? 너희가 뭔데 그걸 결정하고 말고를 정하지?”
그 말에 노역자 하나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하지만 반장님, 내려와야 할 교대조가 내려오지 않은지 한나절이 지났습니다. 저희는 하루를 넘겼고요.”
“높으신 분들이 사정이 있다지 않느냐? 그것과 별개로 오늘 산출량은 채워야 하고. 그런데도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다고?”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닙니다. 밥은 커녕 물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쓰러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역자 뒤로는 실신한듯 몸을 누인 노역자가 셋이나 있었다.
“닥쳐라.”
코볼트 반장은 권총을 꺼내 노역자의 머리에 가져다댔다.
“저 내리막의 광차만 끌고오면 될 일 아니냐?”
“하지만 저희만으로는 힘에 부쳐서…”
“그래, 됐다. 넌 일을 해야지. 필요없는 건 저것들을 치워야겠군.”
코볼트가 쓰러진 이들에게 걸어가자 노역자들은 감히 코볼트에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못했다.
그때 통로 저 편에서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인간 여자였다.
다른 노역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넝마 같은 옷감이지만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몸을 펑퍼짐하게 가리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제 복장이었다.
하지만 가죽으로 만든 목줄이 메어졌고, 목줄을 이는 두 개의 사슬을 당기듯 인도하는 사람과, 여자를 감시하는 듯 뒤따르는 무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여자는 얼굴이 면포로 가려져 있었는데, 라민은 주란이 말하기도 전에 곧장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머리의 뿔 덕분이었다.
“…휘경.”
휘경이 메마른 입술로 말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휘경의 말에 코볼트는 멈춰섰다.
노역자 하나가 말했다.
“아닙니다, 성녀님. 성녀님이 도와주신다고해도 지금 광차는 오르막 앞에 서 있는지라…”
“제가 뒤에서 밀면 됩니다.”
“뒤에서요? 안됩니다. 저희가 힘에 부치면 광차가 뒤로 밀려갈 겁니다. 너무 위험합니다.”
노역자가 재차 만류하자 코볼트가 허공에 채찍을 휘둘렀다.
“이 망할 것이. 저것이 도와준다는데 네가 뭐라고 됐다고 하는 거냐? 이봐, 괴물. 정말 할 수 있겠나?”
“네.”
“그럼 해봐라.”
라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노역자는 여덟이었고, 그 중 움직일 수 있는 것 다섯이다.
하지만 휘경을 둘러싼 경비대만 하더라도 여섯이다.
정말로 광차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라면 코볼트가 명령을 해야하는 건 노역자들이 아니라 휘경을 감시하는 경비대 인원들이어야 했다.
하지만 경비대는 휘경이 저 아래 광차를 향해 걸어가자 쇠사슬을 놓아주었다.
휘경은 절그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갔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노역자들도 뒤따랐다.
사람의 키만큼이나 솟은 커다란 광차는 대략 30도 각도의 오르막 아래에 멈춰있었다.
라민은 어떠한 동력 장치도 부착되지 않은 걸 보고 놀랐다.
연합왕국을 위해 자원을 캐낸다지만 결국엔 모든 요소들이 형벌로 작용하는 것이다.
휘경이 말없이 손을 얹자, 노역자들이 광차에 연결된 밧줄을 당겼다.
광차는 힘에 부친듯 거의 움직임이 없다가, 노역자들이 비명에 가까운 기합을 쓰고나서야 가까스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라민은 휘경이 호흡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들었다.
기합과 끙끙대는 소리, 그리고 광차가 느리게 선로 위에서 마찰을 하며 기어오른 소리가 이어졌다.
반쯤 올라왔을까, 코볼트가 노역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말했다.
“또 게으름 피우지?”
노역자 중 하나가 발이 미끌리며 쓰러졌다.
워낙에 위태로웠으므로 언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간신히 버티던 광차가 천천히 뒤로 굴렀다.
하지만 더 나쁜 일이 일어났다.
“성녀님!”
라민은 혀를 찼다.
휘경을 걱정한 노역자 하나가 광차 뒤로 달려온 것이다.
하지만 휘경은 이미 광차 뒤에서 빠져나오고 있다.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노역자만 깔려죽을 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휘경이 광차 뒤에서 벗어나는 대신, 광차의 바퀴와 선로 사이로 자신의 발을 끼워넣은 것이다.
으적, 하고 살과 뼈가 쇠 사이에서 뭉게지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휘경이 신음을 삼키고 심호흡했다.
“세상에, 성녀님…”
“뭐해? 빨리 당겨!”
쓰러졌던 노역자는 물론이고, 발이 끼인 휘경까지 다시 광차를 밀었다.
코볼트는 멍청한 짓을 했다며 비웃었다.
더이상 참지 못한 주란이 달려나가려 했을 때, 라민이 주란의 어깨를 잡았다.
라민은 자신의 가슴께를 가볍게 두드리고 손으로 반원을 그렸다. 그다음 검지로 가볍게 코볼트를 가리켰다. 자신이 우회해서 공격할 때에 맞춰서 움직이란 신호였다. 주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가파른 구간을 넘어온 광차는 오르막을 모두 넘어섰다.
휘경은 벽을 짚고 절뚝거리며 걸어오다 몸을 숙이더니, 면사포를 넘기고선 토해냈다.
“멍청하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발을 끼워넣어?”
휘경은 침을 한 차례 뱉고 다시 면사포를 썼다.
“여러분, 이런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배후자께선 저희의 고통을 전부 알고 계시니… 모두 보답받을 겁니다.”
휘경은 그렇게 말하며, 다소 절뚝이지만 이제 벽을 짚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노역자들이 휘경의 발을 보며 자신들끼리 소근거렸다.
뼈가 부러지고 인대가 끊어졌던 휘경의 발은 이미 회복되고 있었다. 찢어진 살가죽 아래로 회복되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코볼트 관리자가 휘경의 등에 대고 말했다.
“정말로 모르는거냐,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냐? 그 배후자가 그렇게나 잘난 신이라면 왜 너희가 고생하는 걸 보고만 있는 거냐? 그냥 너희를 여기에서 꺼내주지 않고?”
휘경이 우뚝 멈춰섰다.
“배후자께선 저희가 벌 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웃기지 않나? 자신을 믿는 이들이 벌 받기 바라는 신이라. 오랜만에 그게 보고 싶어졌는데.”
휘경은 말 없이 멈춰섰다.
옆에 있던 경비대는 코볼트를 제지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며 휘경을 흘겨보았다.
코볼트가 말했다.
“저번에 보니 괴물 너는 목이 반쯤 끊어지고도 되살아났었지. 늘 궁금했던게, 그럼 어떻게 해야 널 죽일 수 있냐는 거지. 머리통에 총알이 박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궁금하지 않나?”
“그건…”
“어차피 너희 신은 벌을 바란다고 하지 않았나?”
코볼트가 휘경의 머리를 노리고 권총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