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98
198화
“…여긴?”
라민의 물음에 비온이 대답했다.
“모르겠나? 여긴 태초의 땅이다.”
라민은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그 풍경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들판이었다.
그 들판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노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럼 저흰 죽은 건가요?”
“그래.”
“네?”
“농담이다.”
라민이 빤히 비온을 바라보았다.
비온은 라민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만신전에 이르는 길은 많은 방법이 있지만, 죽지 않은 자들이 넘어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를 밟아야 한다. 물론, 더 빠른 길도 있지만 너희들이 들러야 할 곳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이곳으로 먼저 오게 되었다.”
“들러야 할 곳이요?”
“그래. 마차에 올라타라.”
라민은 무슨 마차를 이야기하는건지 의아해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분명 방금전까진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그림자 발견했다.
그것은 마차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네 개의 바퀴가 달려있는데 바퀴 하나만 하더라도 지름이 5미터는 되어 보였다.
바퀴 축 위에 얹혀진 마차 본체로 오르는 길은 높다란 계단으로 되어 있고 그 위는 커다란 범선의 갑판만큼 넓었다.
무엇보다 마차를 끌고 가는 것이 말이나 평범한 탈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장수풍뎅이였다.
모두가 마차 위로 올라갔을 때 장수풍뎅이가 말해왔다.
-내 이름은 헤캅이다.
라민은 유명한 수호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라민이 마차 난간에서 헤캅을 내려다보았다.
“문지기 헤캅이요?”
-지금은 마차 끄는 헤캅이지.
라민은 연장자 또는 윗사람으로 볼 수 있을 헤캅이 끄는 마차에 편하게 올라타 있어도 괜찮은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어,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단 것이냐? 나는 이 마차를 끄는 것을 영광으로 안다.
라민이 ‘그러실 것까지야’ 하고 말하려는데 비온이 먼저 말했다.
“헤캅, 서둘러 이동하지.”
-그래, 전쟁이 한창이니.
헤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민이 비온을 돌아보았다.
“전쟁이라뇨?”
“휘경을 찾아내면서 야천께서 분노하는 자의 음모를 역이용하셨다. 덕분에 분노하는 자는 큰 타격을 입었고, 지금까지의 전쟁에서와 다르게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때문에 전세계에서 연합왕국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그럼 저, 뭐랄까…”
라민은 서로 끌어안고 있는 휘경과 사이란을 돌아보았다.
라민은 비온을 향해 소근댔다.
“저 두 사람은 놔두고 저희는 다시 돌아가는 쪽이 전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지…”
비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이 중요한 만큼이나 너희를 부른 이유도 중요하다. 그리고 전쟁은 걱정할 것 없다. 모든 것이 그분의 뜻대로 되고 있으니.”
헤캅은 빨랐다.
하지만 풍경은 헤캅의 발놀림보다 더 빨리 변하고 있었다.
단순히 헤캅의 발이 빠르기 보다, 마차 자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고 라민이 생각했다.
태초의 초원을 어느 정도 가로지르자 거대한 설산도, 울창한 삼림도 시야에 들어왔다. 강도 있고 호수도 있었다.
과거에 대륙의 다른 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후세계들이었고 이후에 모두 태초의 초원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리자드맨들이 초원에서 안정을 느끼듯 드워프들은 산 속에서, 코볼트들은 땅굴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풍경을 바라보던 라민은 주란이 휘경, 사이란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가갔다.
사이란이 말했다.
“그럼 너는 교중과 휘경의 자손인거군.”
“위로 몇 대를 올라가야하지만,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당신의 이름도 받았습니다. 물론 저희 할머님은 그 이름을 물려받아도 되는지 늘 의심하셨지만…”
“상관없다. 휘경이 뜻한 것이니 당연히 허락할 것이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너의 핏줄은 무엘의 이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교중은 좋은 사람이니까.”
실컷 울어낸 휘경이 붉어진 눈가를 쓸어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너희도 여전히 내 후손이야.”
주란이 살짝 미소지었다.
교중은 휘경의 둘째 남편이었다.
소꿉친구였고, 사이란이 없을 때 휘경의 곁을 지켰고, 휘경이 자동성을 떠날 때 도망치는 것을 도왔다.
그때문에 오랜시간 핍박 받는 가문의 자손으로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가장 인정 받아야할 두 사람에게 확언을 받았으니 가문의 숙원이 풀린 셈이다.
라민이 헛기침을 했다.
“저, 사이란 님.”
“무슨 일이지.”
“저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계시는가요? 아무래도 저 사람은 물어보기가 좀…”
사이란이 작게 미소지었다.
“비온은 귀가 밝다. 방금 한 말이라면 모두 들었을 것이다. 말 하는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라민이 힐끗 비온을 바라보았다.
비온은 못들은 척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알지 못한다.”
휘경이 가로저었다.
“벌을 주시려는 걸지도 모르지.”
그 말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듯한 추론이었다.
휘경이 담담히 말했다.
“내가 오랜 세월 그 분의 사제를 참칭하고 다니며 사람들을 혼란하게 했지. 그러면서 그분의 힘을 빌려 기적을 일으켰어. 그러니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날 찾아내신 이유는… 날 벌주기 위해서가 아니겠어?”
사이란이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사이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지.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해둘 것 아냐.”
“…제가 그 일을 막을 겁니다.”
“야천을 위해 죽었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야천의 뜻을 거스르겠다고?”
사이란이 단호히 말했다.
“네. 그건 실수였습니다. 그분께 대적하게 된다면, 그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로 알겠습니다.”
“정말로?”
“예. 휘경. 야천께선 저희를 원하는대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책임도 지셔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야천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사이란의 말에 라민이 허둥지둥했다.
“자, 잠깐만요. 비온이란 사람이 귀가 밝다고 한 거, 당신 아니에요?”
“비온은 입이 무거운 자다. 그래서 그가 만신전의 심부름꾼인 것이고. 설사 야천께서 내 말을 듣게 되신다고 하더라도, 내게 화를 내시기 보다는 그저 내가 정말로 그분의 뜻을 거슬렀을 때 어떻게 처리할지 한 번 더 생각하시겠지.”
라민의 생각에도 그럴 것 같긴 했다.
야천은 만신전의 다른신들 보다 무정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비온이 말했다.
“탑이 보이는군.”
“탑?”
사이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의 탑이다.”
라민은 그것이 탑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땅과 하늘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얀 선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헤캅이 끄는 마차가 점점 더 다가가자, 그것이 자연 풍경의 일부가 아닌 인공물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가늘게만 보이던 백색 탑은 다가갈수록 점점 커졌고, 이내 백색 탑 아래에 만들어진 거대한 도시도 보였다.
라민도 저 백색 탑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시험의 탑은 만신전이 성립된 이후 만들어졌으며, 역시나 태초의 땅과 그보다 상위의 세계를 잇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처럼 누구나 상위 세계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험의 탑 내부는 복잡한 미궁처럼 되어 있으며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가 아니라면 저절로 출입자를 밖으로 내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비온이 말했다.
“죽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꿈 없는 잠을 택하지만, 원한다면 깨어난 뒤에도 태초의 땅에서 얼마든지 지낼 수 있다. 지지 않는 태양 아래에서 초원을 달리고 산을 오르고 강에서 헤엄을 칠 수도 있지. 하지만 보다 높은 세계로 오르기 위해서는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저 탑 아래 도시는 탑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언젠가 올라가기를 기원하면서 탑 아래서 지내다 만들어낸 도시지.”
라민이 질문했다.
“자격이 까다롭다고 들었는데요.”
“그래. 생전에 큰 선행을 베풀거나 뛰어난 학문적 지식을 갖추거나 전쟁에서 명예를 이루거나, 남들과는 특별히 구별되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사후에 그만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거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이들은 사후에 더 상위 세계로 가고 싶어했다.
덕분에 만신전에 속한 이들은 시험의 탑이 요구하는 가치들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도록 노력했다.
다만 의아한 건 탑 위의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데도 그렇게 한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알려진 건 신들과 조금 더 가까워진다는 것 정도.’
다만 탑이 저토록 거대한 것은 전체가 시험이 아니라 죄인이나 벌받아야 할 이들이 더 많은 시험을 거쳐야 하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라민이 곤란한 표정으로 비온이 말했다.
“그럼 저희도 시험을 치르는 건가요?”
“예외는 없다. 만신전이 성립된 이후 죽은 이들은 모두가 시험을 쳐야만 저 윗세계로 갈 수 있다.”
“…그렇군요.”
“물론 이번에는 아니다. 언젠가 죽으면 그렇게 될 거란 말이지.”
“아니, 방금 예외는 없다면서요?”
비온은 대답하지 않고 헤캅 쪽으로가 작게 중얼거렸다.
헤캅은 도시를 우회해서 백색의 탑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시험 없이 저 탑을 어떻게 오르죠? 저쪽에 뭔가 비밀 출입구 같은 게 있는건가요?”
비온이 답했다.
“아니. 탑에 들어간 이상 복잡한 내부를 지나야 한다. 물론 지름길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마차를 타고 왔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네?”
-덜커덩!
헤캅이 탑의 외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차는 다소 들썩이긴 했지만 90도에 이르는 각도 변화에도 아무도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탑을 향해서 중력이 작용하는 것만 같았다.
비온이 말했다.
“신기한가? 곤충들은 원래 땅과 측면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
“…어, 놀란 건 그쪽이 아닌데요.”
라민이 마차 밖을 내다보자 태초의 땅과 도시가 멀어지고 있었다.
라민이 말했다.
“탑의 내부가 아니라 탑의 외부를 올라도 된다는 게 알려지면, 이걸 이용하는 사람들도 생기지 않을까요?”
“이미 그런 이들이 있다.”
“…괜찮은 건가요?”
“괜찮다. 이 시험의 탑의 외벽을 올라올 정도면 충분히 윗세계로 갈 자격을 갖춘 것이지.”
라민은 탑의 높이를 가늠해보고 맞는 말이다 싶었다.
마차의 신비한 힘으로 하늘 저 너머까지 이어지던 탑은 곧 끝이 보여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태초의 땅은 둥글어지고 있었고,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빛으로 풍성하던 공간은 어둠과 어둠 사이로 점점히 박힌 별빛으로 가득해졌다.
라민이 그때 탑 아래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허공이 찢어지더니, 납작한 판 하나가 툭 불거져나왔다.
탑 위에서 보고 있으므로 그리 커보이지 않을을뿐, 본래 땅 아래에서 본다면 길이만 하더라도 수 십 킬로미터는 될 터였다.
“…저게 뭐죠?”
라민의 물음에 비온이 답했다.
“반환이 일어나고 있군. 바빠지겠어.”
“반환이요?”
비온이 휘경을 살짝 돌아보고 말했다.
“배후자라는 가짜 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짜 신을 믿고 죽은 이들이 있었지. 그들은 지금까지 분노하는 자의 세계에 붙들려 있었다. 하지만 야천께서 배후자를 죽이고 자신이 진정한 배후자임을 드러내셨다.”
“아, 설마 그럼…”
“그래.”
비온이 잘려진 땅을 내려다보았다.
“인과율의 힘으로 배후자를 믿고 죽었던 이들이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 것이다. 저 조각난 땅 위에는 반환되는 만신전의 신도들이 있는 것이지. 지금까지 작은 단위의 반환은 있었지만 저토록 거대한 반환은 처음 보는군.”
그때 또 다른 빛이 반환되는 땅 위로 나타났다.
머리에는 흰 물소머리뼈를 둘렀고, 그 아래의 몸은 밤하늘을 두른듯하다. 별빛과 흔들리는 오오라가 비치는 거대한 존재는, 조각난 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비온이 말했다.
“야천께서 땅을 섞으시는군.”
글자 그대로였다.
야천은 손을 뻗어 태초의 땅을 가르고 반환된 대지의 조각을 그 안에 천천히 끼워넣었다.
라민은 아주 잠깐이지만, 야천이 자신들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온이 말했다.
“우리는 저 분을 보다 가까이에서 다시 뵐 것이다. 이제 위를 봐라, 라민.”
라민이 고개를 들었다.
“윗세계에 다 왔으니.”
헤캅이 탑의 끄트머리 위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