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253
253화
헤게모니아의 부름에 성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부름이 자신을 부르기 위해서가 아님을 안다.
그것은 그저 성토에 불과했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묻고 싶겠지.’
로스트 월드에서 ‘스킵’은 정말로 강력한 스킬이었다.
바람과 관련한 소영역과 흐름에 관한 소영역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스킵을 사용한다는 건 그와 비슷한 소영역을 투자하는 이동기를 포기해야 된다는 말과 다름 없다.
물론 스킵 그 자체를 이동기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크게 아쉬울 게 없다고 볼지도 모르지만, 신앙 소비가 상대적으로 과하기 때문에 효율적인 이동기는 아니다.
그리고 이동기를 포기하고서라도 얻고자 하는 이 스킵 스킬은 아주 강력한 능력이다.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도 잘만 사용하면 현신체끼리의 싸움에서 압도적이었지. 그리고 지금 스킵은 훨씬 더 강해졌고.’
헤게모니아가 처음 스킵을 사용했을 때 성운도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검을 휘두른다’는 단 한 순간을 제외하고 앞뒤의 순간이 모두 생략되었으므로, 사실상 방어도 불가능하고 반격도 불가능하다.
‘나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이 자리에 있으면 헤게모니아의 공격을 막을 수 있나?’
다른 플레이어들도 스킵 스킬의 존재도 알고 당연히 꽤 많이 택할 것이다.
하지만 헤게모니아만큼의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
‘위즈덤은 파이터 보단 메이지를 선호할텐데, 그럼 오히려 파이터에게 불리해. 전투에 대한 개인 역량만 놓고 보면 임춘식 정도나 칼을 맞대볼 수 있겠지만 역부족이고. 나머지는…’
성운의 머릿속으로 지금 존재하지 않는 로스트 월드의 플레이어들이 몇몇 생각났다. 헤게모니아만큼 잘했던 이들이므로 그 정도가 아니면 헤게모니아와 맞서 싸우긴 힘들고, 전쟁의 고유영역까지 손에 넣은 헤게모니아라면 더 어려울 것이다.
‘생략되지 않은 검을 휘두르는 동작 조차도 찰나에 불과해. 보고 막는 건 불가능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운은 수 차례 헤게모니아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윽고 반격을 통해 헤게모니아의 말을 죽였다.
‘대단한 능력을 잃어버린 건 아니지만 이동과 관련한 신앙 효율이 급감했을테고, 게다가 거슬리던 불운 능력도 사라졌어.’
헤게모니아는 천천히 걸었다.
수 미터 가량의 키 작은 나무들 사이로 달아오른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지나가자 그 열기만으로 주변이 타오른다.
분노하는 자가 걷는 자리는 모두 불꽃이고 지나온 길은 재 밖에 없다.
먼곳에서 신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 중 카자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통곡의 소리가 들려온다.
성운은 헤게모니아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헤게모니아?’
아무리 현신체가 필멸의 존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한 몸을 가졌고, 받아들인 감각을 가속화된 사고 능력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스킵 스킬이 더해진 이상, 헤게모니아의 공격을 보고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성운은 헤게모니아의 공격을 보기 전에, 막았다.
‘도약 후의 공격이 최단거리지만, 그렇게 하진 않겠지.’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아직 신앙 자원에 여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헤게모니아는 침묵을 통해서 깊은 분노를 가장하고 있다.
하지만 성운은 헤게모니아를 알았고, 그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헤게모니아 그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넌 지금 그 누구보다도 침착할테니까.’
그렇다면 성운이 그릴 수 있는 헤게모니아의 공격로는 몇 가지로 좁혀졌고, 그중 스킵과 공간참을 통해 그려낼 수 있는 공격은 더 한정적이었다.
성운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하기 위해선 검으로 베어야 하는 동작이 들어가는만큼 그 방법도 제한적이다.
‘…아니, 아니야. 헤게모니아는 여기서 기세를 잡기 위해서라도 나한테 한방을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치명적인 공격을 고집할 이유도 없지.’
그래서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스킵을 통해 사라졌을 때, 곧장 돌아섰다.
바로 거기에 헤게모니아가 있었다.
헤게모니아는 공간참이 아니라, 보다 근접해서 오른 주먹으로 성운을 내려치려고 했다.
‘그래, 이 공격으로 나는 큰 타격을 받지는 않지만, 땅바닥에 추락하게 된다. 그 다음 연계는 명확해. 스킵을 쓰지 않더라도 이 거리에서 지면을 향해 공간참을 휘두르면 바닥에 처박힌 나도 휘말리겠지.’
그러니 성운은 이 예측을 이미 헤게모니아가 등 뒤에서 나타나기도 전에 해냈다.
성운은 헤게모니아의 오른손을 잡아챘다.
갑옷을 두른 현신체로는 알 수 있을리가 없는데도,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크게 놀랐다는 걸 알았다.
-잡았다.
현신체인 플레이어를 붙잡는다는 건 의미가 있다.
신성과 신성 사이의 간섭 때문에, 붙잡힌 현신체는 더이상 이동기도, 스킵 스킬도 사용할 수 없다.
그리고 너무 가까운 거리기에 헤게모니아는 다른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뒤늦게 바꿔들었다.
반면 성운은 이미 검을 찔러넣었다.
-…!
빛이 폭발했다.
거대한 폭발의 반발력 때문에 성운은 헤게모니아를 놓치고 튕겨져나가는 것을 구경만 해야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튕겨져나간 헤게모니아는 마치 폭발하는 분화구처럼 용암을 쏟아냈다.
라스다실 폐허의 건물 몇 동이 난데없는 붉은 용암에 휘말렸고, 추락하던 헤게모니아는 허공에서 몸을 굴리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곤 분출되는 자신의 용암을 손으로 막았다.
-이건….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자신의 스킬을 처음으로 알아보았다는 걸 알았다.
성운이 사용한 스킬은 ‘파사의 빛’이라고 불렸다.
파괴력만 따지면 공간참보다 우위에 있는데다 잡다한 소영역을 조합해서 만들기도 쉽다.
하지만 공간참 보다도 높은 코스트, 그리고 결정적인 결점 때문에 플레이어들에게 선택되는 경우가 있었다.
‘파사의 빛은 좋은 스킬이지만 무조건 선딜레이가 존재하지. 인기 없을만 해.’
플레이어들은 앞이거나 뒤거나 딜레이가 있어서 반격을 당할 수 있는 스킬들을 낮게 취급했다. 그만큼 하이리턴이 돌아오지만, 결국 하이리스크 스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공격력은 충분히 강하지만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참을 선호했다.
성운도 일반적인 경우에서 공간참을 선호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의외성을 통해서 헤게모니아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두 번째 이유는 남은 신앙이 얼마없기 때문에 최대 효율을 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성운은 파사의 빛을 사용하기 위한 제한 조건으로 ‘접촉’을 걸었다. 이건 도구를 사용하는 ‘검으로 벨 때’ 보다 더 난이도가 높은 조건이다.
‘그렇다고해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헤게모니아는 이미 회복 과정을 스킵했다.
성운은 헤게모니아를 보며 생각했다.
‘역시 게임이랑 비슷해’
성운은 신이 되어 남아도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의 일부를 통해 검과 싸움에 대해 배웠다.
물론 직접적으로 배우게 되면 신의 위엄에 손상이 될 수 있으니 일반적으로는 어깨너머로, 정확히는 신이 가진 온갖 정찰 자원을 활용해 뛰어난 검술 지도자들이 검을 다루거나 싸움꾼들이 싸우는 방법을 보면서 배웠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겠지만 무리를 파악하고 흉내를 내는 건 신이 가진 능력치로 해내는 건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수준이 어느 정도 이르자 라크락과 같은 전설적인 투사와 관련한 주제를 이야기해도 말이 통했다. 성운에게 있어서는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성운은 그런 싸움을 알게 될수록,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그건 결국 필멸자의 싸움이지.’
피를 흘리는 존재들은 피를 모두 쏟아내면 죽게 된다.
하지만 신들은, 플레이어들은 그렇지 않다.
쏟아내는 피가 사라지는 신앙의 양과 비례할테고, 무한히 피를 쏟을 수야 없지만, 그럼에도 심장을 찔렸다거나 머리가 좀 갈라졌다는 이유로 죽지는 않는다.
‘게임이나 다름 없는 거야.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치명적인 상처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신앙이 HP바인 셈이지.’
헤게모니아가 다시금 달려든다.
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렬하다.
공간참이 터져나가면서 공간이 일그러지고 시야가 왜곡되고 빛이 굴절되면서 세상이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빛깔로 이어지다가 가장자리부터 느릿하게 회복되어갔다.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불가능해!
-뭘 말이지?
다음 공방에서 헤게모니아의 공격이 라스다실 폐허의 끝자락을 잘라낸다.
성운은 아슬아슬한 공격이었음을 알아차린다.
헤게모니아는 성운과의 싸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목적도 여전히 의식하고 있다.
-아무리 그 스킬을 쓰고 있다고해도 그렇게까지…
-그 스킬?
-시치미 떼지 마. ‘미래시’를 쓰고 있잖아.
성운은 헤게모니아의 날카로운 추리에 감탄했다.
-모를 줄 알았는데.
-그것말곤 설명이 안되잖아.
성운이 사용하고 있는 스킬은 ‘미래시’라고 불리는 스킬이었다.
이 스킬 유형은 미래를 읽는다.
미래를 읽는다고해도 먼미래가 아니라, 가장 먼 미래도 그저 몇 초 뒤의 일에 불가하다.
왜냐하면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는 본래는 볼 수 없는 다른 플레이어의 순간순간의 스킬 선택이나 이동 방향 지정, 현재 보고 있는 장소를 띄우는 창 따위를 볼 수 있는 능력에 불과했다.
이런 류의 정찰 스킬이 그러하듯 별로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정찰은 수준이 낮더라도 보다 값싸게 활용할 방법이 있는데 잠깐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아봤자 쓸모가 없다고 느낀 것이다.
공간참과 같이 알고 있어도 막을 수 없는 스킬에 비교하면 큰 쓸모가 없어보인다.
물론 상대가 숨겨둔 비장의 한수가 있다면 그런 미래시도 쓸모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게임의 후반부까지 그렇게까지 대단한 비밀이 있을리가 없다.
성운도 그걸 노리진 않았다.
성운이 의식한 것은 로스트 사가에서 쓸모 없었더라도 지금은 다르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런데 뭐가 불가능하다는 거지? 미래를 보고, 그걸 막으면?
-아무리 미래시라고 해도 그렇게 구체적인 정보일리가 없어.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거야.
헤게모니아의 말이 맞다.
로스트 월드와 이 세계의 밸런싱에 차이는 있지만 상이하지 않다.
미래시 또한 상대의 의도중 몇 가지를 좁혀볼 수 있을뿐 명확한 미래가 그려지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헤게모니아가 정면에 있다면 검을 휘두른다는 건 알아도 검이 위에서 올지 아래에서 올지 양옆 중 어딘가에서 올지 알 수 없다.
그건 성운이 알아서 예측해야 한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해. 수 십 개의 미래 중에 서넛 정도로 줄일 수 있다면 그걸로 막을 수 있어.
-웃기지마!
헤게모니아가 검을 휘둘렀고, 성운은 가볍게 검을 받아넘겼다. 이미 보았던 궤적이다.
완벽하다고해도 문제 없는 궤적이었기에, 성운 또한 그것을 완벽하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헤게모니아의 ‘웃기지마’라는 한 마디에는 서넛 정도로 줄였다면, 이미 수 십 번의 격돌 중에 열댓 번은 맞았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성운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방어 스킬을 포기하고 미래시를 가진 이유는, 그쪽이 좀더 내가 잘하던 게임에 가까워지기 때문이었어.’
미래시를 가지게 되면 모든 상황이 좀더 단순해진다.
그렇게 되면 각 상황과 성운이 해야하는 동작들과의 관계도 명쾌해졌다.
약손이니, 잡기니, 콤보니, 필살기니 하는 건 결국 얼마나 리스크가 따르는가, 어떤 동작이 어떤 동작에 대한 카운터인가, 둘 중 무엇이 더 빠른가를 재어볼 수 있는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체계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체계를 통달하면, 상대의 모든 공격을 파훼하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적어도 성운이 검술을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랬다.
‘굳이 지적을 하자면 현신체를 먼저 드러냈던 것부터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었지. 그렇게 되면 패턴을 먼저 보여주게 되니까.’
모든 것들엔 나름의 리듬이 있었고, 이 리듬은 몸의 움직임은 물론 사고 능력과도 일치했다. 먼저 모습을 보인 이상 숨기는 게 더 이득인 스킬을 드러내게 되고 행동 패턴도 읽히게 된다.
이제 성운은 헤게모니아의 패턴을 대부분 알아차렸다고 판단했다.
‘확인하고 싶은 게 더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해.’
성운이 반격에 나섰다.
검이 몇 번이나 내질러진다.
헤게모니아는 자신의 신성을 소모해가며 막아야했다.
아무런 스킬이 담겨져있지 않다고해도, 신이 휘두르는 검은 그 자체로 신성 덩어리다.
필멸의 존재는 말할 것도 없고 상대가 사도 정도의 수준이라도 성운의 신성 레벨이라면 궤멸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헤게모니아는 거리를 좁힐지, 벌릴지 가늠하지 못하다 결국 물러난다.
성운은 알고 있었다.
‘내게 붙잡히면 다시 강한 공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 공격이야말로 성운이 헤게모니아에게 박아넣은 각인이었다.
근접했을 때 받았던 피해의 기억 때문에 성운은 헤게모니아의 행동을 더 예측하기 쉬웠다.
‘스킵. 하지만 패턴이 너무 또렷해.’
그리고 자신을 몰아넣는 공격에 헤게모니아 또한 약이 올랐다.
헤게모니아는 다시 한 번 성운의 공격 흐름을 끊기 위해 성운의 시야각이 닿지 않는 좌측에서 나타났다.
‘유감이야, 헤게모니아.’
하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성운의 페인트 동작이었다.
성운은 검을 내지른 헤게모니아의 손목을 팔꿈치로 감고, 오른손으로 단검을 뽑아 헤게모니아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널 모르기에는, 우리는 너무 많이 싸웠어.’
두 번째 파사의 빛이 대기중에 폭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