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27
027화
성운은 언젠가 ‘사후세계’를 만들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첫 부족을 정하고, 주변 적대 NPC들을 밟아 나가기 시작하면, 신성은 11레벨에 도달한다.
신성 레벨 11은 사후세계를 만드는 조건 중 하나로, 초반에 제대로 플레이하기만 했다면 도달할 수 있는 레벨이었다. 이때부터 플레이어는 준신격이라고 불리는데, 경험치가 상당히 오르지 않는 구간이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지. 게임 승리에 레벨은 부차적인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니까. 게다가 지금 나보다 빠른 사람은 없을 테고.’
물론 성운에게 거슬리는 플레이어가 있긴 했다.
‘놀을 부리는 놈도 11레벨 정도인 것 같긴 하던데… 당장 유의해야할 건 그놈이긴 하지.’
최근 몇 년간 성운은 상당히 바빴다.
라크락을 보조하면서 주변 NPC들을 박살 내는 동시에, 슬금슬금 영역을 넓혀오는 플레이어들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벌레의 소영역에 투자를 많이 했지만.’
라크락의 부족이야 워낙 멀리에 있어서 알지 못했으나 성운에게는 세 개의 벌레 무리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무리로 불렀지만, 성운은 태그 설정으로 이름을 지어 두었다.
하나는 ‘군집’으로 명명된, 메뚜기 떼였다.
라크락만을 보조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메뚜기 떼는 하나가 아니었다.
반도는 물론 반도와 이어지는 황야, 황야에서 뻗어 나가는 대륙과 산간 지방들, 북쪽으로 흐르는 강들까지, 메뚜기 떼가 활약할 수 있는 장소와 계절이라면 이 곤충 무리는 곡식을 멋대로 탐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운이 그간 파밍해 온 정수를 통해 메뚜기 떼를 조종하는 ‘피조물’을 창조해 냈기 때문이었다.
군집은 성운이 만들어 낸 피조물의 명령을 받으며, 성운이 접촉한 적도 없는 온갖 플레이어들을 훼방 놓았다.
다만 성운은 기회가 있더라도 이런 공격을 치명적이지 않도록 조절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 게임 이벤트로 자연 발생하는 메뚜기 떼 습격과 구분이 안 갈 테니까.’
로스트 월드는 단순한 돌발 이벤트의 경우 그게 시스템적으로 발생한 이벤트인지, 플레이어가 신성을 통해 만들어 낸 이벤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노련한 플레이어라면 어느 정도 심증을 굳힐 수 있겠지만, 그 정도라면 성운도 괜찮았다.
‘나는 구석진 자리에서 다른 플레이어들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무튼 메뚜기 떼의 악명은 대륙 중앙과 북해안에 자리 잡은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플레이어들에게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누군가는 벌레의 소영역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했지만, 다들 서로 주변의 플레이어만 의심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동 떨어진 지역에서 당장의 이득을 볼 수도 없는 성운이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는 플레이어는 없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끼리 서로 의심하도록 두는 것만으로도 신뢰에 손실이 가고 동맹을 맺을 확률을 떨구지. 게다가 농경은 길이 개척되면 기술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견제만이 답이야. 충분히 신앙을 투자할 만한 일이지.’
또 다른 하나는 ‘숙주’로 명명된 잡다한 벌레 떼였다.
과거 호숫가의 프로그맨 부족을 공격할 때 성운이 사용했던 벌레 집단으로, 당장은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성운이 피조물로 창조해 낸 군집의 대장이 있었으며, 이 숙주 집단의 대장은 끈기를 가지고 성운이 원하는 질병의 목록을 하나씩 채워 나가고 있었다.
성운은 이 벌레 떼야말로 시간이 지날수록 큰 쓸모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마지막은 ‘둥지’로 명명된, 역시나 잡다한 벌레 떼였다.
성운이 가진 벌레의 소영역의 경험치 파밍을 위해 마련된 집단으로 주로 거대한 개미 둥지와 벌집으로 이루어져 황야 아래의 남쪽 반도의 생태계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이들이 별다른 방해 없이 새끼 치고 영역을 키워 나가는 것만으로 성운은 벌레의 소영역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당장은 둥지를 운영하는 피조물이 없지만, 성운은 언젠가는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탈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지난 몇 년 간 큰 문제는 없었다.
성운은 반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리자드맨들 전체를 규합할 생각이었고 시간만 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규합된 리자드맨들은 자연히 다른 부족과의 우위를 차지하고, 동시에 영향력도 발휘한다.
힘이 약한 종족들은 자연스럽게 검은 비늘 부족의 신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느닷없이 북쪽에서 놀 무리가 등장했다.
성운은 반도 공략을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라크락을 북쪽으로 유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놀 무리는 NPC나 이벤트가 아닌, 플레이어가 부리고 있는 부족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잘린 귀 부족은 성운으로서도 상당히 경계할 만했다.
무리의 규모도 규모니거니와, 농경 부족이 아닌 유목 부족으로 전투력도 약하지 않았다.
리자드맨들에게 코카투가 있다면 놀에게는 검치호가 있었고, 활은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지만 금속 제련 기술이 리자드맨들 보다 좋았다. 분명 성운이 탐색하지 못한 곳에서 전해 받은 기술일 터였다.
‘단순히 발전 정도를 봐서는 내 레벨과 비슷할지도 몰라. 사후세계를 이미 만들었을지도.’
성운은 가늠되지 않는 상대 플레이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상황도 상정은 하고 있었고, 상대할 방법도 여럿 있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사후세계였다.
‘그래도 조건이 꽤 빨리 갖춰진 편이지. 레벨, 자원, 신앙. 그리고… 충분한 죽음.’
사후세계를 만들기 위한 조건은 네 가지였는데, 레벨과 흉물과 흉신 등 NPC를 죽여서 얻는 고급 자원, 그리고 신앙은 조건을 맞추기가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조건인 ‘죽음’은 아직도 아리송했다.
일단은 플레이어를 믿는 개체가 충분히 많이 죽게 되면 조건을 달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로스트 월드는 게임 내의 공식을 특별히 알려 주지 않아서 플레이어들이 계산을 통해 직접 알아 내야 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여러 개체가 죽어도 마지막 조건이 거의 오르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개체가 하나만 죽어도 눈에 보일만큼 상승했다.
‘해당 개체가 그동안 신앙을 얼마나 생성했는가를 기준으로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히 비례하진 않아. 역시 잘 모르겠단 말이지. 어쨌든 조건을 갖췄으니 상관없나?’
그러면서 성운은 ‘세계 창조 도우미 ver.2’를 켰다,
성운은 언젠가 사후세계를 만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스트 월드의 시스템에서 지원하는 세계 창조 도우미 ver.2를 사용해 틈틈이 사후세계의 모습을 만들어 보곤 했다.
성운이 스라티스를 만들 때 사용했던 ‘피조물 창조 도우미’처럼 세계 창조 도우미에도 성운이 예전에 사용했거나 다른 플레이어가 만들었던 수많은 세계들이 저장되어 있었지만, 이번 역시 새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기본 틀은 이미 만들어져 있긴 해. 그나마 다행이군.’
성운 지금까지의 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각 종족이 선호하는 사후세계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리자드맨들도 큰 틀에서는 비슷비슷했다.
특히나 문명을 막 일으킨 리자드맨들이라면야.
‘촉촉하고 습기 있는 공기에 푸른 들판, 따뜻한 햇볕이 내려쬐는 평야.’
성운은 라크락과 별잡이가 사후세계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름 안도했다.
크게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작업은…’
성운은 세계 창조 도우미의 탭을 여기저기 누르면서 준비를 했다.
플레이어에 대한 신앙을 가진 상태로 죽은 ‘영혼’들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것을 회수할지 여부는 플레이어에게 달려 있었는데, 그야 당연히 대부분은 그 영혼들을 회수하는 편이었다. 그래야만 사후세계를 만들 수 있으니까.
성운은 지금까지 수집한 동결 상태의 영혼들을 확인했다.
이 영혼들은 성운이 만들어 낸 사후세계에 첫 번째로 발을 들일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죽은 이들 중에 제일 레벨이 높은 건 역시 별잡이인가.’
사후세계는 로스트 월드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우선, 사후세계는 신앙을 믿는 이들의 ‘사후세계관’을 결정하는 요소였다.
이를테면 ‘지옥’이라는 사후세계를 만든다면, 신은 자신의 사제들에게 지옥의 풍경을 꿈을 통해서 보여 줄 수 있다.
그리고 사제들은 지옥의 풍경을 통해 악인은 끝없는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신도들에게 퍼트리는 것이다.
‘그걸 통해서 도덕과 윤리를 지키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지만,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지.’
이 지옥이라는 개념은 플레이어의 역량과 활용 유무에 따라 바꿀 수 있었다.
꼭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족’을 공격하면 지옥에 간다거나, ‘특정한 신’을 모욕하면 지옥에 간다는 식으로 신앙을 믿는 종족 전체에 일종의 거짓된 도덕률을 강제할 수도 있었다.
이런 종류의 플레이는 로스트 월드에서 흔했다.
또한 ‘지옥’을 쓰는 경우 ‘천국’ 개념도 같이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길 밖에 없다면 신을 믿을 이유가 없으니까. 채찍이 있으면 당근도 있어야 하는 법이지.’
따라서 ‘특정한 종족’을 공격하면 천국에 간다고 믿게 만들거나, ‘특정한 신’을 모욕하면 천국에 가는 식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후세계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므로, 단순히 믿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천국과 지옥’ 사후세계는 지금 만들 수 없었다.
‘그러려면 최소한 두 개의 사후세계가 필요하니까. 지금은 하나 밖에 만들 수 없어. 윤회도 어렵지. 심판관들이 필요하니까.’
결국 지금 성운이 만들 수 있는 사후세계는 ‘다른 세계’라고 불리는 분류 밖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도 다른 세계 또한 유서 깊고, 쓸모가 많은 사후세계였다.
‘발할라, 삼도천, 스틱스 강, 림보… 성격은 많이 다르지만 죽어서 가게 되는 독립된 공간이라는 개념이지.’
이런 세계들은 사후세계관이 확장되면 단독 공간이라기보다 다른 사후세계로 이어지는 공간으로 쓰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쓰이는 건 아니었다.
‘발할라만 해도 사후세계는 라그나로크를 대비한 전사들의 훈련 장소 같은 곳이었으니까. 사후세계는 정말로 플레이어가 사용하기 나름이야. 생각해 보면 사후세계관을 잘 짜 넣는 것만으로 승리한 적도 있었고. …그건 운이 좋긴 했지만.’
사후세계가 존재하는 이상 영혼들은 불멸이었다.
그 영혼들이 가진 지식이나 힘을 사용하기 위해선 막대한 신앙이 소모되기 때문에 활용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게임이 초반을 지나 후반으로 갈수록 영혼들은 플레이어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성급할 필요는 없어. 아직 많은 일들이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유연하게 생각하자.’
성운은 사후세계의 이름을 ‘태초의 초원’으로 이름 지었다.
앞으로의 확장 가능성을 열어 둔 일종의 가제였다.
그러자 세계 창조 도우미에서만 봤던 태초의 초원이 성운의 발아래 나타났다.
성운은 자신의 소지품 창을 열어 영혼들을 손에 쥐고서 넓게 흩뿌렸다.
수백의 영혼들은 정처 없는 푸른 나비가 되어 초원 위에 내려앉았다.
저 스스로 나비인 줄 알았던 영혼들은 풀잎과 꽃과 흙바닥에 닿자 곧 자신이 리자드맨이었음을 기억해 내고, 죽어 있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이 태초의 초원에서는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며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며 끝없이 지친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리자드맨들이 잠시 눈을 감고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가늠했다.
햇볕에 따듯하게 몸이 데워진 리자드맨들은 다시 잠들었고, 아닌 이들도 꿈이면 깨어나고 싶지 않아 눈을 감은 채 잠시 그대로 있었다.
기어코 눈을 뜨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 바라보게 될 풍경이 무엇일지 기대하면서.
성운은 몸을 숨겼다.
성운이 직접 인도해야 할 영혼이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