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290
290화
자린은 높은 위도 덕에 제국의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날이 선선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린에서 계속 살아온 엘프 메이 곤타에겐 아직 춥다고 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날은 종일 청명했고 구름 없이 밝았던 덕에, 빌딩에서 보여지는 창 밖 풍경이 이뻤기에 그래도 노곤함이 덜했다고 메이는 생각했다.
퇴근 후 대형식료품점에 들린 메이는 습관적으로 즉석 식품 매대를 들렀다가, 신선 식품 매대로 걸음을 옮겼다.
‘할머니에게 즉석 식품이나 데워 드릴 수는 없지.’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 메이의 할머니는 주말이 되면 메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다른 종족에 비해 비교적 장생하는 엘프들인만큼 손윗사람을 모시는 예절에 깍듯한 편인데, 그게 아니더라도 메이는 할머니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할머니는 항상 밝고 쾌할한 성격인데다 사람과 대화하길 좋아했다.
‘그 대전쟁 시기를 살아오셨는데 어떻게 그런 성격인지 모르겠어.’
연합왕국과 제국이 벌였던 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있다.
메이의 세대는 그렇지 않지만, 메이의 윗세대 어른들만 하더라도 보육원 출신이 즐비하다.
참으로 끔찍한 세상이었다.
메이는 그런 할머니에게 위로가 될만한 음식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신선 식품 매대를 서성였는데, 문제가 있었다.
정작 메이가 요리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줄 아는 요리가 거의 없었다.
천라망에 올라오는 요리 레시피들을 참고로 하여 도전하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사실 그쯤되면 메이의 할머니가 요리를 하게 된다. 그럼 메이는 할머니가 해준 맛있는 엘프 전통식을 먹을 수 있겠으나, 할머니를 위한 한끼라는 의미는 없다.
‘…그냥 주문할까?’
식사 시간이 다소 늦어지긴 하겠지만 메이가 보기엔 그쪽이 나아보였다.
먼저 주문을 할 요량으로 할머니에게 어떤 음식을 먹고 싶냐 묻고자 휴대전화로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할머니는 휴대전화를 낯설어하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메이는 허기를 느끼며 잰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나 왔어. 저녁 시키려는데 뭐 먹을… 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메이는 못보던 신발이 있는 걸 알았다.
할머니의 오랜 구두는 아니었다.
엘프 정통 양식의 비단신인데, 아주 생소하지는 않다. 엘프들은 축제날 입을 전통 복식 정도는 두어벌 갖추고 있으니까. 메이도 옷장과 신발장 한켠에 비슷한 디자인의 복식이 있었다. 게다가 전통주의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평상복으로도 입고 다니니까.
단지 메이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다른 사람의 신발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 오셨군요?”
다행히 신발의 주인은 바로 얼굴을 드러냈다.
메이는 그 사람을 보자마자 기묘한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는데, 당연히 낯선 사람이 집 안에 있으므로 할머니가 걱정되고, 때문에 그 사람을 보게 되면 크게 당황하거나, 아니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눈을 마주치자마자 메이는 입을 살짝 벌리고 멍 때릴 수 밖에 없었다.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메이 곤타 씨 맞으시죠? 할머니께서 곧 오실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할머니… 친구분… 이신가요?”
메이는 말을 하고도 후회했다.
같은 엘프 종족이니 지인인가 생각은 했지만, 친구라기에는 너무 젊어보였다. 메이 곤타 자신 보다도 두어살 어리게 보이는데, 엘프 나이는 엘프도 짐작하기 어려운 편이므로 꼭 그렇진 않을 거라고 메이는 생각했다.
“친구? 네. 그럼요. 친구죠.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요?”
“제가 할머니에게 꽃관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죠.”
“아, 문화회관 선생님이시구나. ”
메이는 저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 곤타의 할머니는 정기적으로 지역 문화회관에서 여러가지 수업을 수강하고 있다.
들어보진 못했지만 할머니라면 꽃꽃이 수업도 들어봤을 것이다.
낯선 엘프는 배시시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비슷하네요.”
“그럼 오늘은 어떻게 저희집에 오신건지…”
메이는 우선 안심해도 될만한 사람이라 판단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부엌에서 푸근한 요리 냄새가 퍼진다. 무언가 뭉근하게 끓고 있는데다 기름 위에서 뭔가 자작자작 튀겨지는 소리도 들린다. 이 요리 냄새는 매캐하기 보다 구수하고 살갑다. 심지어 엘프는 메이가 언젠가 요리를 제대로 해먹을 다짐으로 사놓고 몇 번 걸치지 않았던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다.
“저, 너무 놀라진 마세요.”
“네?”
“할머니가 계단에서 발을 헛딛으셔서, 넘어지셨어요.”
“네에?”
“그래서 제가 급하게 병원에 데려갔다가, 약 받고 부축해드려 왔어요. 손녀집으로 가는 도중이었어서 집보다 손녀집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하셔서요. 다행히 병원에선 근육이 살짝 놀랐을 뿐이라서 내일만 되도 붓기가 빠질 거라고 하네요. 지금은 약 드시고 주무시고 계세요.”
메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할머니, 괜찮아?”
그 낯선 엘프의 말대로였다. 이불을 살짝 들춰 다쳤다는 부위를 확인했는데, 사실 어디가 부은 것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메이가 불을 켜서 확인하려는데 할머니가 깨어났다.
“메이 왔니?”
“할머니, 계단에서 넘어졌다며? 괜찮아?”
“괜찮아. 놀라서 살짝 접질린 거야.”
“놀랐다니?”
“그분은 안 가셨지?”
“그분? 할머니 친구?”
“그분이 나보고 친구래니?”
“어? 아냐?”
“아니아니, 맞아. 할머니 친구야. 메이야.”
“응.”
“할머니 친구한테 잘 해줘야 한다.”
“어? 어. 알겠어.”
“할머니는 약 때문에 졸립다. 밥 때 되면 깨워주련?”
“응.”
“꼭 깨워야 한다. 알겠지?”
“알겠어.”
메이는 불을 켜지 않은 방안에서 거실의 조명만으로 드러나는 할머니의 표정을 보았다.
단순히 피곤하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언가 더 없이 만족스러워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냥 문화회관 선생님 아닌가? 얼굴이 예뻐서 그런가?’
메이는 거실로 나와 할머니 친구의 얼굴을 다시 보자마자 그럴 수 있겠다 싶긴 했다.
할머니는 옛날부터 예쁜 사람만 보면 늘 금방 사랑에 빠져버려서, 그렇게 시작했다 결국 망한 사랑을 메이 앞에서 회고하곤 하였다.
‘근데 할머니…, 이 나이 차이론 시작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메이는 주방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할머니 친구가 저녁이 다 되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오라는 말에 마음을 놓고 그렇게 했다. 낯선 사람이 집안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서둘렀는데, 메이는 곧 후회했다. 씻고 거실로 나오자 결국 불편하게 할머니 친구와 자신 둘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친구는 이런 상황을 개의치 않는지 요리에 열중하고 있었고, 사회성이 다소 떨어지는 메이는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찾으려 했다. 정작 그 방법도 할머니의 친구가 열어주었다.
“괜찮으시면 뉴스 좀 틀어주실래요?”
“아아, 그렇죠. 그렇죠. 오늘 난리던데.”
메이는 그저 관용적으로 ‘난리’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었다.
메이가 보기에도 정말로 큰일이었다.
일이 바쁜 것과 별개로 하루종일 회사는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계속되는 한 가지 주제가 있었다.
‘신들께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신’과 ‘내려오셨다’ 모두 중의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 의미에 대해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견을 가지고 말했고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말했다.
그도 그럴것이 ‘달맞이 계획’이라는 세기의, 초유의 사건이 있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므로.
제국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것이다.
메이는 리모컨을 조작해서 화면수신기를 켰다.
“아, 딱 맞췄네요.”
화면 안에는 말끔한 정장을 차려 입은 오크가 앉아있다.
오크가 안경을 살짝 고쳐쓰면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제국의 시민 여러분. 오라즌 공영 방송, 제국 24시의 데스크 아나운서 말로코 야나프델 인사드립니다. 현재 긴급 편성된 뉴스에 놀라셨을 것으로 압니다. 이미 천라망이나 속보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신 분들도 있고, 각 지역 대사원에서 발표한 걸 알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분들이 지금 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계시지 못하죠. 저희 특별 편성 뉴스 ‘신들께서 내려오시니’는 향후 사태가 진정되는 국면까지 24시간 연속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정규 편성 방송들은 천라망 접속 후, 오라즌 공영 방송국 누리집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자, 황궁에 나가 있는 요탄 기자와 연결하겠습니다. …요탄 기자? 들립니까?”
아나운서 말로코의 등 뒤에 있던 큰 모니터에 아스타시디안 종족의 기자 요탄이 뜬다.
아스타시디안 치고는 작은 몸집에다 낮은 확률의 장애로 태어나는 녹색과 청색이 섞인 화려한 변성 무늬의 집게발이 눈에 띈다.
“예! 황궁 앞뜰에 나와있는 요탄입니다.”
“요탄 기자. 도대체 저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아나운서 말로코의 도발적인 물음에 요탄은 큰 집게발을 흔들었다.
“이곳은 현재 상황에 대해 황궁의 공식적인 발표를 기다리는 기자들과 오라즌 시민들로 무척 북적이고 있습니다. 오라즌 시청 당사는 공식적인 발표가 없을 것이라고 했죠. 하지만 오라즌 중앙 사원에서는 황궁을 통한 공식 발표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우선 저희는 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봅니다.”
“분위기는 어떤가요?”
“열광자 단체는 물론이고 일반 중앙 사원 신도 모임, 세속주의 단체나 환경주의 단체들까지 온갖 팻말과 표어를 들어올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단체들이 있는데도 의견은 하나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냐는 겁니다. 정확히는, 왜 신들께서 이곳에 내려와 계시느냐는 겁니다.”
말로코는 고개를 끄덕인다.
“공식 발표는 아직이지만, 제국군이나 중앙 사원 등을 통해 저희가 취재한 자료가 이미 있죠?”
“예.”
요탄은 능숙한 기자인듯하다.
갈무리하고 있는 자료를 들여다보지도 않고 설명을 시작한다.
“기상청 위성 관측 자료에 따르면 금일 오전 05시 37분 경부터 라스다실 폐허 심부 나락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 직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만신전의 신들께서 몸으로 화하시어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몸으로 화하셨다’, 이건 우리가 익히 기록되거나 관측된 자료에서 말하는 ‘강신’이나 ‘현신’, 또는 그 두려운 전쟁에서 보였던 ‘화신’의 모습과는 다른 말처럼 보이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몸으로 화하셨다’는 건 중앙 사원 사제 내부자의 말을 빌린 것입니다.”
“어떻게 다르죠?”
“다른 존재의 몸을 빌려 혼만이 내려오는 강신, 진정한 신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현신, 아직까지도 연구가 필요해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신과 달리 신들께서 피와 살로 된 육체, 신성을 두르지 않은, 날것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입니다.”
“피와 살로 된 육체라고요?”
“예.”
“그 말은…”
“네, 네. 맞습니다. 바로 그거. 저희가 걱정하는 바로 그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