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303
303화
성운은 정령들의 음색과 운율을 듣는다.
박자는 느리고 음은 높으며 화음이 다채롭고 소리의 높고 낮음이 부드럽게 교차한다.
하지만 성운은 정령들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해야할 일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다.
정령들 또한 성운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성운이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정령들은 별 의미는 없으나 여전히 감정을 지닌 부드러운 허밍으로 성운의 귀를 간질였다.
마즈다리가 말한다.
-도래자여, 어디부터 가시겠소?
성운은 박물관의 로비에 있다.
로비 정가운데는 직경 5미터 크기 정도의 아바르틴 모형과, 그 아바르틴 모형을 공전하고 있는 첫 번째 달 욘다 모형이 있다.
황동으로 만든 가느다란 띠의 기계 장치로 이루어진 공전궤도에서 이동하는 욘다는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위로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가느다란 황동 사슬에 묶인,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간판에 고딕 글씨체로 ‘Welcome to Avartin’이라고 적혀 있다. 이 공간이 성운 의식의 반영임을 증거한다.
성운은 아바르틴의 모형을 천천히 본다.
이 아바르틴 모형은 현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하다.
도심지에는 마천루들이, 황량했던 대지에는 녹음이 가득하다.
각 지역의 랜드마크나 고대 유적들은 본래보다 큰 사이즈로 만들어져 더 눈에 밟힌다.
성운은 대양 한가운데 투명한 받침 위에 올라선 별지기를 확인한다. 성운이 보기에는 주석 조형으로 보이는데 말끔한 표면 처리와 함재기까지 재현한 디테일, 음영을 살린 도색까지의 만듦새가 훌륭했다.
카일이 말했다.
-야천, 이곳에서 세 장소로 향할 수 있는듯 합니다.
성운은 고개를 끄덕인다.
아바르틴 모형의 바로 뒤는 ‘현재관’이다.
성운은 언젠가 저곳에 들려야할테지만, 아직 가야할 순서는 아니었다.
아바르틴 모형의 오른쪽은 ‘미래관’이다.
검정색과 노란색이 교차하는 띠로 길이 막혀 있으며, ‘공사중’이라는 붉은 팻말이 걸려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통로는 어둠에 잠겨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성운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애초에 박물관은 과거의 것들을 전시하는 장소다.
성온은 왼쪽으로 향한다.
‘과거관’이다.
성운이 가야할 곳은 아바르틴의 과거다.
박물관은 친절하게도 화살표로 성운이 가야할 곳을 이미 지시해두었다.
좌측통행을 유도하고 있으며, 과거관의 입구 오른쪽에는 출구가 있다. 출구는 이제 ‘현재관’으로 이어진다.
성운은 우선은 화살표의 지시대로 과거관에 들어선다.
과거관에 보이는 첫 번째 모습은 ‘원시 인류’라는 전시명이 붙은 작은 동굴 속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1/6 사이즈로 만들어진 유인원 모형이다. 성운은 이것을 ‘디오라마’라고 부른다는 걸 안다. 모형을 통해 특정한 상황을 재현하는 목적을 가진 전시품이다. 크람푸스가 알려주었다.
성운이 인간의 조상이라고 익히 알고 있는 유인원과 모습이 조금 다르긴 하다. 그렇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하긴 애매하다. 광대가 조금 더 크기도하고 목이 조금 짧은 것 같기도 하다. 자세가 더 구부정할지도 모른다. 성운도 고인류학적 지식에 대해 지구와 아바르틴 양방으로 조금은 알고 있다. 아바르틴 연구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종족 후보는 단연 인간이다.
‘물론 유전적으로 지구의 인간과는 다르지만.’
성운은 이 원시 인류에 대한 부분을 빠르게 지나치려다, ‘최초의 꿈’이라는 전시명 앞에 눈을 흘긴다.
원시 인류는 눈을 감고, 자리에 엉거주춤 앉아있다.
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배를 앓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성운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안다.
성운이 가만히 지켜보자, 모형의 위로 마젠타빛 조명이 쏘여지더니, 이 원시 인류가 눈을 뜬다.
눈꺼풀만이 아닌 관절부가 움직이는 것으로 성운은 이것이 단순한 모형이 아닌, 자동인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원시 인류는 과거의 존재들과 달리 보다 곧게 허리를 세우고, 손가락을 단단히 펼 수 있다.
성운은 다음 디오라마를 확인한다.
다음 전시품의 전시명은 ‘분화’다.
전시 내용을 확인하고 성운은 ‘최초의 꿈’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닫는다.
‘아바르틴에 존재하는 마법이, DNA에 영향을 주었군. 아우터 스페이스에선 신체가 정신에 영향을 주지만, 이너 스페이스에선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주는 거야.’
전시 내용은 그 전시명과 같다.
이 전시에는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세 원시 인류의 후손들을 드러낸다.
원시 인류 중 일부는 털이 없어져 인간 비슷한 것이 되었고, 다른 일부는 덩치가 커지고 털이 덥수룩해지며 빅풋 비슷한 것이 되었다. 놀라운 일부는, 털이 아닌 단단한 외피를 가지기 시작했다.
‘원시 아스타시디안인가?’
원시적인 마법이 존재하던 시기 이들은 자신이 꿈꾸던 몸으로 향해갈 수 있었음을 알았다.
성운은 드래곤에 대해 좀더 이해한다.
옛신들이 비의를 훔치고 꿈을 가두어도 어떤 존재들은 끝내 그것을 이겨낸다.
성운이 화살표를 따라 코너를 돌자 이어 압도적인 전시가 드러난다.
‘사람의 분화’라고 이름 붙여진 이 전시는 디오라마가 아니다.
대략 20미터 높이에 60미터가 넘는 길이를 가진 드넓은 벽면을 가득 채우는 인포그래픽이다.
이 인포그래픽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의 진화 체계다. 많은 색을 쓰지 않고 세피아톤을 유지하고서 실루엣과 자세만으로 서로 다른 종족의 외양을 설명해내는 것을 보고 성운은 만족을 느꼈다.
가볍게 인포그래픽을 훑던 성운은 고인류학자들이 관심을 가질 몇 가지 흥미로운 부분들을 발견해낸다.
그때 성운의 시야 구석으로 무언가가 움직인다.
성운이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야천, 무슨 일입니까?
카일이 이상 반응에 빠르게 대응한다.
마즈다리는 이미 허공을 날았다.
성운은 전시관 한켠을 들여다본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마즈다리가 돌아와 다시 어깨에 앉으며 말했다.
-도래자여, 이곳엔 우리 말곤 아무도 없소. 아직은.
카일이 진단했다.
-야천, 이곳은 그대의 기억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영향일지도 모릅니다.
성운은 이해한다.
-그 기억의 반영이 위험한가?
-위험할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기억의 내용에 따라 다를 겁니다. 위험하다면 그대의 기억에 따라 마계 심부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위험하다는 건 어떤 거지?
카일은 도마뱀 머리를 바짝 숙인다.
-외람되오나 듣기 전까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성운은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 검지 끝으로 카일의 고개를 들어올린다.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성운의 뜻을 알고 그렇게 한다.
성운은 흥미를 느꼈던 이 고대관의 초입을 미련없이 떠난다.
모든 일이 끝나면 언제고 다시 올 수 있을 것이다.
해야할 일은 이곳에 있지 않았다.
-내 동생은 숨바꼭질을 좋아했다. 잘하기도 했고.
성운이 걸어가며 말했다.
-한 번은 박물관에 갔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박물관처럼 숨박꼭질하기 좋은 장소는 많지 않지. 그 박물관이 동생의 구미를 당겼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머리가 굵어지면서 숨박꼭질은 유치한 장난이라고 생각했고, 동생과 놀기 보다는 의젓한 손위 형제로, 맏이의 역할을 해야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래서 같이 놀자는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
두 사도는 얌전히 듣고 있다.
정령들의 허밍은 그 음의 크기를 다소 낮춘다.
이들도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그래서 동생은 혼자서 놀이를 시작했다. 본래라면 내가 술래였을테지만 나는 거절했으니, 나는 물론이고 부모님과, 박물관 직원들 모두가 술래가 되었지. 아주 오랜시간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카일이 물었다.
-그리하여 어찌 되었습니까?
성운이 말했다.
-내가 찾았다.
성운은 기억을 되살렸다.
-커다란 동상 위에 올라가 있었지. 몸이 작아서 아래에서 올려다봐서는 찾을 수 없었고, 어린아이가 올라가기엔 너무 높다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동생과 같이 놀지 않았다면 거기에 숨을 거라고 상상하긴 어려웠지.
마즈다리가 말했다.
마즈다리는 성운의 감정을 읽었다.
-도래자여, 어찌 후회하는가?
무례한 말에 카일이 마즈다리를 지긋이 바라본다.
하지만 성운은 무례함을 느끼지 못한다.
-동생을 찾았을 때 사과하지 않고 나무랐다. 그 사실을 후회한다.
카일이 말한다.
-하지만 야천, 고통스런 기억은 아니군요.
-그래.
-어째서입니까?
성운이 답한다.
-동생이 내게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올라가있던 동상이 너무 딱딱하고 차가운데다 웅크려 있느라 다리도 저렸었거든. 내가 찾지 않았다면 자존심 강한 동생은 계속 거기 있었을 것이다.
카일은 성운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는 걸 본다.
카일이 말했다.
-그 기억으로부터, 마계 심부를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모르겠는데.
성운은 소전시관 ‘원시 아바르틴’을 넘어 다음 소전시관 ‘마법의 여명’에 들어선다.
성운과 마즈다리, 카일이 도착하고자 했던 곳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성운은 제 손목에 벼락을 휘감은 오크 ‘태고의 마법사’, 그리고 자그마한 빛덩이를 움직이는 코볼트 ‘요술쟁이’, 눈을 감고 자신의 심상 세계에서 그림자로 돌아다니는 드워프 ‘비의 탐색자’와 같은 디오라마를 가볍게 눈으로 흘기며 지나쳤다.
바닥의 화살표 진행 방향 또한 몇 가지 생략해버렸다.
성운이 잠시 멈춰서서 구석에 정교하게 숨겨진 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는 게 빠를 것 같은데.
카일이 긍정했다.
-예, 도움이 될 몇 가지 도구를 챙길 수도 있을 겁니다.
성운은 전시관에 존재하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전시관의 가벽을 만들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패널이나, 박물관을 가꾸는데 썼을 각종 도구들과 청소 용구들이 존재한다.
성운은 그중 붉은색 페인트 통과 붓을 집어든다.
-이게 좋겠군.
마즈다리가 호응했다.
-좋다. 간결하나 함축된 마법적 가치가 뛰어나군.
성운은 좁은 복도를 걸어가 장막을 거두자, 다음 소전시관의 입구가 드러났다.
‘시스템의 탄생.’
성운은 한손에 페인트 통을, 다른 한손에 페인트 붓을 들고 소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정령들의 노래가 고조된다.
이 소전시관은 원형을 이루고 한 바퀴를 둘러보는 구조다.
가운데에는 ‘최초 라스다실’, 즉 마계 심부의 상징인 검은 바위가 놓여져 있고, 화살표를 따라 벽면의 설명과 그림, 인포그래픽을 읽어내릴 수 있다. 규모는 적지만 몇 개의 디오라마도 놓여져 있다.
성운은 주변을 둘러보다 ‘시스템을 짜고 있는 태고의 마법사들’이란 설명 앞으로 걸어간다.
페인트 통의 뚜껑을 까고 거기에서 붓을 푹 담근다.
그리고 붉은 페인트에 흠뻑 적셔진 붓으로 전시 설명을 칠한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비명 비슷한 소리가 이어지더니, 성운이 붓을 떼자 멈춘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도래자여, 정답이오.
카일은 성운이 정확히 무엇을 해냈는지 설명했다.
-방금의 수정을 통해 옛신들 시스템의 기반 코드 몇 가지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코드는 조금 침식되어 있어 옛신들에게 있어 간헐적인 오류를 일으켰을테고, 이제 완전한 오류로 전환되어도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마즈다리가 보론한다.
-게다가 이 신비는 놈들이 가진 내적 마법 감각과 이어져있지. 저들은 스스로 둔해진 것도 모를 거요.
성운이 말했다.
-그럼 이제 그 오류를 더 키워보도록 하지.
성운은 페인트 통을 발로 걷어찬다.
페인트 통은 왈칵 쏟아지더니 흰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페인트를 쏟기 시작하고, 계속해서 페인트를 쏟아내고, 그리고 그 물결이 끊이지 않는다. 페인트는 계속해서 쏟아져 웅덩이를 이룬다.
성운은 가볍게 허리를 숙여 붓을 적시고, 몸을 들어 전시물 위에 붉은 페인트를 칠한다.
시스템의 비명이 터져나온다.
성운의 붓질은 가볍고 난삽해보이지만, 모두 정확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
성운은 ‘시스템의 탄생’이라는 이 소전시관 내부에 발걸음을 옮기며 작업을 이어가고, 소전시관은 금새 성운이 남긴 붉은 발자국과 붓질에 젖어든다.
카일이 말했다.
-야천, 이미 메인 거버넌스가 와해되었습니다.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도래자여, 외우주에서도 드디어 변화가 시작되었다. 욘다가 흔들린다.
성운은 이따금 뇌에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처럼, 안에서 밖으로, 의식을 뒤집는다.
성운은 바우스탄 성소에서 잠시 깨어난다.
두 사도가 성운의 심상 세계를 지키듯, 호출할 것도 없이 스라티스와 오랜 성운의 창조물들이 성운의 외부 세계를 지키고 있다.
천사라 불리는 옛신들의 창조물 하나가 간섭해오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운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 프로그맨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다시 의식 아래로 침잠하고, 고개를 든다.
붉은 페인트로 뒤덮여 있던 어지러운 소전시관의 풍경이 뒤바뀌어 있다.
성운이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자, 마즈다리가 말했다.
-도래자여, 그대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마성의 정령들이 심술이 났군.
-문제가 생긴건가?
-그렇진 않다.
카일이 말한다.
-저들이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모양입니다.
바뀐 풍경에도 소전시관의 전체적인 형태는 바뀌지 않았다.
단지 붉은 페인트가 붉은 벨벳천으로 바뀌어 있다. 어차피 형태와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성운은 신경쓰지 않는다.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전시 그 자체다.
성운은 잠시 고개를 돌려 소전시관의 이름을 다시 확인한다.
이름이 바뀌고 있다. ‘시스템의 탄생’이 아닌 ‘도래자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