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31
031화
라크락은 자동성 점령을 쉽게 보지 않았다.
흙으로 지어 올렸다지만 사람의 키를 훌쩍 뛰어 넘는 높은 성벽은 그 자체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다.
하물며 성벽을 공격한다는 건 성벽으로 다가가기 전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견뎌야 한다는 말이고, 성벽 앞에 놓인 목책이며, 성벽 아래로 쏟아지는 돌덩이와 돌팔매질, 그리고 무방비하게 찔러 댈 창질을 극복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소금 광산을 취해야 한다면, 그렇게 피를 흘릴 게 아니라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을 쓰는 게 더 이득이다.’
반도의 북부를 점령하는 동안 라크락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의 검은 비늘 부족은 그리 큰 규모의 부족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검은 비늘 부족은 성장해야 했고, 다른 부족들의 기술을 습득하고 자원을 빼앗고, 땅을 점령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이런 적대적 행위는 다른 종족들에게 푸른 벌레신에 대한 반감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푸른 벌레신을 믿으라고 강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크락, 그리고 다른 리자드맨들도 그런 일을 탐탁지 않아 했다.
이미 적들에게 많은 것을 빼앗았는데 그들의 신념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는 도덕적인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라크락이 보기엔 강제로 신을 믿게 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신을 믿게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라크락은 수호자 스라티스의 목상 앞에 절을 올리는 행위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믿음은 마음속에서 오는 것이고, 거짓된 신념은 결국 더 강한 반감으로 돌아오리란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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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은 그 이유에 추가해서, 또 다른 이유로도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성운은 자신의 두 번째 종족을 탐색 중이었다.
쓸데없는 종족에 신앙 자원을 낭비할 수 없었다. 때문에 지금까지 라크락에게는 리자드맨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포교하는 일을 권하지 않았다.
신성 레벨이 오르면서 신앙 자원에 여유가 생겼고, 유연한 빌드를 선호하는 성운의 플레이 스타일에 따라 2종족 체제로 옮겨 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당장 선택해야 했고, 자신의 영역 안에서 어떻게든 쓸 만한 종족과 부족을 찾아야 했던 첫 번째 부족과 달리, 두 번째 부족은 플레이어의 상황에 따라 전략적 가치와 향후 빌드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플레이 방법에 따라 첫 번째 종족은 두 번째 종족을 발견하기 위한 오프닝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지. 두 번째 종족을 발견한 다음 기술을 모두 전수하고 첫 번째 종족을 쇠퇴하도록 내버려 둔다거나 말이야.’
그럴 전략이 필요한 게임도 종종 있긴 하지만, 이번엔 당연히 예외였다.
첫 번째 종족인 리자드맨들이 예상 이상으로 잘 성장해 줬기 때문에, 두 번째 종족은 리자드맨들을 보조할 수 있으면서 향후 확장 가능한 종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현재 반도의 북부는 검은 비늘 부족이 차지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반도 북부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넓은 지형이 유목 형태와 잘 맞는 게 다행이었지. 일부 산간 지역에는 검은 비늘 부족의 정주민들이 자리하고 있고.’
이들은 모두 같은 리자드맨이라는 점, 그리고 같은 신을 믿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잡다한 종족들이 있긴 하지만 모두 통제 가능한 선에 있다. 결국 중요한 건 반도 남부와 반도 북부 위의 황야 지역. 황야는 너무 넓어서 대륙, 북해안으로 맞붙는다. 반도 남부를 다 점령하고 난 뒤에도 대륙과 북해안은 이중 전선이나 다름없어. 이중에서 문제가 되는 건 대륙이 아니라 북해안이지. 리자드맨은 추위에 약하니까.’
상대적으로 추위에 강한 종족은 ‘털’이 있는 종족이었고, 다음으로 추위를 버티는 종족은 리자드맨들이 ‘민둥이’라고 부르곤 하는 오크, 엘프, 인간 같은 아인종이었다. 꼭 리자드맨만의 약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고블린처럼 체구가 작거나 양서류인 프로그맨들은 추위에 더 약한 편이었다.
‘사실 의복과 관련된 기술이 발전되면 리자드맨들이라고 문제될 건 없지만, 당장은 아니지.’
겨울 한 번을 나는 정도야 리자드맨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지만, 여름 잠깐을 제외하면 언제나 눈발이 내리는 지역에 리자드맨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럼 털이나 민둥이들인데… 털 달린 애들은 상대적으로 야수성이 강하단 말이지. 피지컬이 강하다는 면에서 리자드맨과도 포지션이 겹치고.’
로스트 월드에서 전투, 전쟁은 좋은 해결책 중 하나고 성운도 자신 있었지만, 언제나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었다. 다른 종족들과 비교해 리자드맨들의 머리는 평균보다 좀 더 좋지만 전투와 대결에 치중된 측면이 있었다. 종족들은 외형을 제외하면 엇비슷해 보이지만 종족간 격차가 확실히 있었다.
‘오크? 최고의 번식 속도와 빠른 성장. 홀리오크 빌드 이전까진 스타팅 종족으로 쓰다가 버린다던가, 야만스럽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오크의 지능은 실제론 그렇게 낮진 않아. 언제나 쓰기 나름이지. 실제로 홀리오크는 메타를 장악했고. 하지만 피지컬 부분에서 리자드맨과 겹치니 탈락.’
성운은 후보가 될 만한 종족을 더 꼽아 보았다.
‘드워프? 육체 능력도 안 밀리는 데다 동굴과 산 지형에서 유리하지. 세공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고집이 너무 강해. 동맹조차 거스를 수 있는데, 리자드맨도 한 고집이 있으니 궁합이 안 맞아. 노움은 어떨까. 노움은 체구가 작지만 과학 기술에 대한 선호를 생각하면 극복 가능성이 있고, 지금까지 기술을 꽤 많이 발견해 낸 검은 비늘 부족과 궁합이 좋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종족과의 연합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개인주의적이야. 되도록 확장을 해야 하는 내 스타일과는 안 맞지. 엘프는 뭐, 최악이니 넘어가고. 하프빈은 다른 종족과도 잘 어울리는 데다 호기심이 많지. 여러모로 훌륭하지만, 체구가 작은 게 감점 요소다. 추운 곳을 싫어하는 게 종족 약점이기도 하고. 그럼 일반 종족 중에 선택할 만한 건 역시… 인간인가.’
성운은 인간의 약점에 대해서 생각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모든 종족과 마찰을 벌이기 일쑤인 데다 오늘 동맹이었다 내일 적이 되는 일이 빈번하지. 그렇다는 말은… 모두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이지. 육체 능력은 평균보다 낮지만 지능은 평균, 사회성은 높다.’
때문에 성운은 인간 종족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반도 안에는 인간 부족을 찾기 어려운 데다, 찾더라도 너무 작은 부족이거나 초점을 맞출 만한 괜찮은 개체를 찾기 어려웠다. 시간을 꽤나 들인 뒤에야 ‘자동성’을 발견했지만, 당시 시점에서는 자동성은 너무 큰 부족이었다. 라크락에게 기적을 이끌던 방식으로는 인간 부족에 신앙을 전파하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성주가 성내 인간들에게 강력한 세속주의를 펼치고 있군. 플레이어, 아니 신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 여긴 라크락의 도움 없이는 신앙만 낭비하겠군. 다행스러운 점은 주변에 다른 플레이어가 여기 접근하지 않는 것 같단 점이지. 시간을 두고 지켜봐도 되지 않을까? 반도 남부까지 완전히 정리해서 배후의 위험 요소를 없애 두고 싶은데.’
하지만 라크락의 검은 비늘 부족이 남부로 내려가기 전에, 잘린 귀 놀 부족이 북해안으로부터 나타났고, 성운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자동성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성운이 라크락에게 계시를 통해 황야 아래까지 부족을 올려 보냈을 때 검은 비늘 부족과 잘린 귀 부족의 정찰대가 몇 차례 마찰을 겪었고 그 때문에 문명 충돌 이벤트가 발생했다.
「문명 충돌!」
「서로 다르게 분화된 두 종족이 접촉했습니다. 두 부족 모두 경험치가 크게 오릅니다.」
「경고: 상대 종족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운은 이 메세지를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상대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종족이란 말이었다.
상대 부족의 크기나 목적성을 띄고 있는 움직임으로부터 당연히 예상된 결과이므로 성운은 놀랄 게 없었다.
성운이 ‘로컬 커뮤니티’ 탭을 누르자 다음 창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목록(1명)」
「헤게모니아」
이 주변 성운과 대화 가능한 플레이어가 한 명 있고, 그 플레이어의 닉네임은 헤게모니아였다.
익숙한 닉네임이었다.
‘잠깐, 이 이름은…’
성운이 불안감을 알아챈 순간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플레이어 ‘헤게모니아’가 귓속말을 요청했습니다.」
성운은 잠시 고민했다.
사람들마다 온라인 게임을 하게 되면 채팅에 대한 여러 가지 태도가 있는 법인데, 성운은 언제나 수신 차단을 선호했다.
말로 떠드는 것도 전략이 될 수는 있지만, 말로 떠드는 시간에 그냥 개체를 하나라도 더 컨트롤하는 쪽이 더 좋지 않은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대화가 좀 필요해 보여. 어쩔 수 없지.’
성운은 귓속말을 받은 다음, 화상 채팅 요청을 보냈다.
‘이러면 단순한 채팅보다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으니까.’
다만 화상 채팅이라고 하지만 보여지는 것은 ‘신 외형 도우미’로 만든 서로의 캐릭터일 뿐이었다.
헤게모니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응답이 없다가, 곧 화상 채팅을 받았다.
성운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역시나 얼굴은 완전히 가리는 뿔 투구를 쓴 모습이었다. 쇠로 만들어진 투구 안쪽은 어두컴컴한 그림자로 덮여 있지만 두 눈만이 불꽃으로 타올랐고, 관자놀이에서 뻗어져 나온 한 쌍의 뿔은 위로 꺾이며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투구 아래로는 그에 어울리는 흉갑이, 등 뒤쪽으로는 붉은 오라가 쉼 없이 이글거렸다.
헤게모니아가 먼저 입을 뗐다.
“앗, 깜짝이야.”
쇠 투구 안쪽으로 울리는 근엄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었다.
“뭐야 왜 놀라? 귓속말은 그쪽에서 걸었는데?”
“당신 캐릭터가 그렇게 생겼는데 안 놀라게 생겼어?”
“그쪽도 만만찮은데.”
“아무튼…”
헤게모니아가 말했다.
“오랜만이군, 네뷸라.”
성운이 생각하기에, 캐릭터가 상대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니 닉네임으로 불리는 것도 그렇게 어색하진 않았다.
성운이 편하게 대꾸했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성운은 성격이 좋지 않았다.
헤게모니아가 다소 당황했다.
“…아니, 네가 맨날 수신 차단이라 대화는 못했지만 게임도 많이 했고, 그, 로스트 월드 마지막에 나랑 게임했던 거 기억 안 나?”
“기억나긴 하는데, 우리 여기서 10년 넘게 지냈거든? 가물가물할 만하지 않아?”
“아니지. 그건 완전 명승부였다고.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데?”
성운은 그 말이 맞는지 검토해 봤다.
“아닌데. 완전 시시했는데. 메타 따라가는 홀리오크 전략에 내가 카운터했고 그냥 그대로 먹혔던 거 아닌가? 명승부라고 하려면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냥 시시하게 끝났잖아.”
“…음.”
헤게모니아가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투구를 붙잡았다.
성운은 헤게모니아가 생긴 것과 달리 마음이 여린 친구겠거니 짐작했다.
헤게모니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래. 좋아. 마음의 정리는 끝났다. 이번에야말로 승부다, 네뷸라. 기필코 끝장을 내주지.”
“또 멍청한 소릴.”
“뭐?”
“누구 좋자고 치고받자는 거야?”
헤게모니아가 멈칫했다.
“로스트 월드는 기본적으로 프리 포 올, 다전제 게임이다. 만인이 만인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데 랭킹 1위랑 랭킹 2위랑 초반에 나가떨어지잔 말이야?”
초반부터 강대강으로 전멸전을 하는 건 생각해 볼 문제였다.
로스트 월드는 결과적으로 스타팅을 어떤 식으로 플레이 했느냐가 중반과 후반의 모양새를 결정짓는데, 초반의 작은 손해 하나가 최후에는 막심한 피해로 돌아오기도 했다.
초반의 손해를 만회한다고 해도 상대는 빠른 기술 발전으로 멀찍이 멀어졌다면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우리가 앞으로도 많은 게임을 할 거라면 호승심에 불타서 한번 붙어 볼 수도 있겠지. 걸어볼 만한 도박이야. 강력한 라이벌을 없애고 기술과 영토를 얻고 영역 일부를 가져갈 수 있으니까. 별다른 피해 없이 승리한다면, 다른 플레이어보다 더 유리한 지점에 서겠지. 하지만 우린 다음 게임이 없다, 헤게모니아. 이 한 판이 끝이야.”
헤게모니아가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뒤통수를 긁었다.
“나도 알아. 기분 좀 내 본 거야.”
성운이 보기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헤게모니아의 플레이 스타일은 성운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순무식해 보이지만 미세 전투에서 동물적인 감각이 있었고, 멀티태스킹에 능했다. 그리고 성운이 실재로 통계 사이트에서 헤게모니아를 검색하면 ‘초반에 치고받아서’ 이익을 낸 경우도 많았다.
성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상대의 유리한 점을 따라가 줄 이유는 없지.’
채팅도 결국 게임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