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72
072화
전사 하나가 성가퀴 사이로 밖을 내다보다가 성벽 안쪽을 향해 외쳤다.
“놈들이 또 무장하지 않은 놈들을 줄 세우고 있습니다.”
라크락이 부관 퀘즐에게 말했다.
“뭐라고 생각하나?”
“모르겠습니다. 언덕 경사라도 줄여 보려는 걸까요. 저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뱀파이어는 그저 다른 종족의 목덜미를 물면 되는 것이니 다른 종족에 비해서 병력을 늘리는 게 더 용이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력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습니다. 아마 저들은 노예들인가 봅니다.”
퀘즐은 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라크락과 대항했던 리자드맨 부족의 족장이었다.
하지만 패배 후 라크락의 뜻에 감화되었고 퀘즐의 부족은 큰 피해 없이 검은 비늘 부족에 흡수되었다. 이제는 퀘즐 또한 검은 비늘을 가지고 있었다.
라크락이 말했다.
“노예라고 해서 저런 식으로 대하는 건 좋지 않을 텐데.”
“제 생각도 같습니다만, 아마 뱀파이어들은 저들을 노예 이하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하라면?”
“식량이지요.”
“식량.”
“예. 저희도 필요 이상의 군량은 버리지 않습니까. 저들은 이전 사티로스 마을에서 배를 불렸을 테고, 여기 산성을 지나 자동성, 그리고 오라즌에 이르기까지 단기 결전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여분의 식량은 쓸모가 없으니…”
“그 이유만은 아니다, 퀘즐.”
퀘즐은 고개를 돌려 라크락을 보았다.
라크락이 말했다.
“저 대륙의 나라들이 리자드맨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걸 알고 있나?”
“예.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를 괴물로 생각했었지요.”
“듣자 하니 우리 대장군이 일을 잘해 주었다더군. 단염과 적과의 땅을 오가며 많은 뱀파이어들을 상대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단염과 적과뿐만 아니라 석면과 금안, 만굴에도 리자드맨이 뱀파이어들을 물리쳐 줄 거란 이야기가 퍼졌다는 거야. 흑린이 백아를 이길 거라고 말이야.”
“아.”
그때 성벽을 향해 노예들이 달려왔다.
비무장한 사람을 쏘는 것은 전사의 사기를 떨어트리는 요소긴 했다.
하지만 라크락은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수비대장은 그대로 사격을 지시했다.
성가퀴 뒤에 숨어 있던 궁수들이 재빠르게 활을 쏘고 다시 성가퀴 뒤로 숨었다.
노예 하나가 즉사하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수비대장이 직접 활을 들고 노예의 숨통을 끊었다.
퀘즐이 라크락에게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저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노예들을 우리가 직접 쏘게 만들고 있군요.”
“그래.”
“저희는 성문을 열고 노예를 받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노예들은 우리에게 걸었던 기대를 저버리겠죠. 그럼 남은 노예를 통솔하기가 편할 겁니다. 뱀파이어들은 노예를 바로 식량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노예의 반발을 크게 살 수 있을 텐데, 저렇게 희망이 없다고 인식시키면 노예들도 절망하겠군요. 영리합니다.”
“그건 아니지.”
“예?”
라크락이 웃고는 말했다.
“그래서 그대가 나한테 졌던 것이다.”
퀘즐은 라크락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벙벙하게 바라보았다.
성곽 위의 수비대장이 라크락에게 말했다.
“라크락 님, 놈들이 세 번째로 비무장한 병사들을 대기시켰습니다. …계속 화살을 쏠까요?”
“대기해라.”
“…예? 아, 알겠습니다.”
그 말에 퀘즐이 라크락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 라크락 님. 안됩니다. 놈들이 노예가 아니라 뱀파이어면 어떻게 합니까? 손이 묶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닐 수도 있고, 무기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가리기 위해 앞서 두 번을 모두 쏘아 죽인 것이다. 게다가 뱀파이어라면 구분할 방법이 있지 않은가?”
“은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가장 하급의 뱀파이어들 중에는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는 이도 있습니다.”
“퀘즐, 그대는 그 정도 저급한 뱀파이어도 두렵단 말인가?”
퀘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절 모욕하지 마십시오. 저 개인의 용기를 이야기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위험부담을 져 봤자 지금 문을 열고 구할 수 있는 건 열댓 명뿐입니다!”
“눈을 좀 더 크게 떠라, 퀘즐. 그대는 셈이 빠르고 생각이 정연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해서 멀리 보지 못한다.”
그 말을 반박하려 했을 때, 퀘즐의 눈이 글자 그대로 크게 떠졌다.
성 안으로 푸른 나비 떼가 나타나더니 부드럽게 나선을 돌며 솟아오른 것이다.
성 안의 전사들의 시선이 나비에 꽂혔다.
푸른 나비는 분명 길조로 해석되었으므로, 전사들의 사기가 고양되었다.
하지만 라크락과 퀘즐은 그 나비가 단순히 전투 전의 고양감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신께서 허락하셨으니 이견은 없겠지. …문지기. 성문을 열어라.”
“예!”
“무장하지 않은 이들을 모두 받아라. 마지막 하나가 들어오면 문을 닫는다.”
“예!”
문지기가 대답함과 동시에 열린 성문으로 하프빈 하나가 뛰쳐나왔다.
라크락이 퀘즐의 허리춤에서 은검을 뽑았다.
“직접 노예들을 확인해라, 퀘즐. 은에 상처를 입으면 주의할 만한 뱀파이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별 볼 일 없는 뱀파이어거나,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달려온 사람이겠지.”
“…알겠습니다.”
성벽 위의 수비대장이 외쳤다.
“라크락 님! 놈들이 몰려옵니다!”
“전투를 개시해라!”
궁수들이 벌떡 일어나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수비대장이 외쳤다.
“성문으로 큰족제비를 탄 르나르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비무장한 이들은 모두 들어왔나?”
“성문 틈으로 보이십니까? 저기 닉스 여자가 마지막입니다.”
라크락이 문지기에게 말했다.
“내가 들어오면 문을 닫아라.”
“예?”
라크락은 문지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성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닉스 여자의 손을 잡아 성문 안쪽으로 던져 넣으며, 동시에 몸을 반회전하면서 반대쪽 손을 달려오는 르나르에게 향했다.
흉포한 큰족제비가 적의를 알아차리고 라크락에게 펄쩍 뛰었다.
라크락의 손에서 벼락이 쏘아져 나갔다.
─┼
-쾅!
큰족제비를 탄 르나르 출신 뱀파이어가 성문 앞에서 벼락을 맞는 걸 보고 샤이븐이 중얼거렸다.
“하! 아깝군.”
라크락은 곧장 성문 안으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문이 닫혔다.
어렵사리 달려갔던 기병들은 모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장군 하나가 샤이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 불찰입니다. 정말로 성문을 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기회를 놓쳤습니다.”
“아니다. 나 또한 성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운이 더 좋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 어쩔 수 없지. 본래 계획대로 간다.”
흑린의 리자드맨이 가진 각궁, 그리고 산성이라는 높은 위치에서 쏘기 때문에 뱀파이어들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적 산성은 2천 명의 병사 밖에 수용할 수 없으니 수적 우위는 확실했다.
‘지금까지 성을 상대해 본 경험은 많다. 심지어 적의 병력이 같았을 때도 이긴 적이 있어.’
샤이븐은 과거의 경험을 믿었다.
“계속 진격해라!”
샤이븐은 뱀파이어 군대는 다른 부대와 구분되는 강점이 틀림없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종족 구성이 다양하다는 것.
르나르 기병은 큰족제비라는 공격적인 탈것을 탄다.
속도와 지구력은 말에게서 밀리고, 실질적인 전투 능력은 코카투에게 밀리지만 큰족제비는 그 자체로 사나운 맹수다.
르나르 궁기병은 다재다능한 전력이다.
코볼트 탈것은 주로 큰두더지를 키우지만 전투에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다.
그 대신 체구가 작기 때문에 적 궁수들에게 까다로운 과녁이 된다.
일반적인 평야에서의 회전이라면 숫자 말고는 전투에서 믿을 구석이 없지만, 공성전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적의 화망을 뚫고 성벽에 사다리를 놓거나, 성문을 부수기 위한 큰 망치를 조립할 도구들을 들고 달려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트롤은 큰 체구 때문에 제대로 탈 수 있는 동물이 없다.
하지만 체구가 큰 만큼 힘이 강력하다.
뱀파이어가 되면서 특유의 재생 능력은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가죽은 질기고 뼈는 튼튼하다.
르나르가 빠른 속도로, 코볼트가 작은 체구 때문에 적의 공격을 피하기 용이하다면 트롤은 적의 공격을 맞으면서도 전진할 수 있는 터프함이 있었다.
그리고 닉스와 사티로스는 부대의 전투를 책임지는 중심 병력이 된다.
공성전에서는 말을 탄 기병의 역할이 제한되지만, 닉스와 사티로스는 제대로 활도 쏠 수 있고 창도 내지를 수 있다.
비록 4세대 뱀파이어라 신체 능력이 일부 저하가 있더라도 각자 출신 종족의 특성을 살린 분업을 살린 전투가 지금까지 샤이븐을 승리로 이끈 주요한 원인이었다.
‘여기에 뱀파이어의 힘을 더하면…’
3세대, 즉 십인대장만 하더라도 체구보다 한 단계 높은 힘을 가졌다.
십인대장이 코볼트라면 르나르만큼의, 르나르라면 닉스와 사티로스만큼의, 닉스와 사티로스라면 트롤만큼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더 무거운 장구를 갖추고 더 무거운 무기를 드는 것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전사가 된다.
‘…틀림없이 이긴다.’
물론 그건 샤이븐의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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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은 전장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역시 샤이븐은 산성을 공략하는 방법을 몰라. 지금 세대의 지휘관 중에 산성을 끼고 싸운 개체는 거의 없으니까.’
경험 비슷한 것이라면 역시 산성을 쌓도록 명령한 라크락과 그의 전사들 정도였다.
라크락은 자올과 함께 지금 전투가 일어나는 첫 번째 산성을 지을 때 꼼꼼하게 지시했다. 첫 번째 산성을 모델로 해서 뒤이어 산성을 지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자올이 산성이 가지는 물리적 환경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라크락은 자신이 성을 공략하기 위한 지휘관이라면 어떤 부분이 난점이 될 것인지를 따졌다.
심지어 성이 완성된 다음에는 직접 전사들을 데려와 모의전을 치르기도 했다.
결과는 간단했다.
라크락은 아주 만족했다.
‘산성을 상대로 단기 결전은 좋은 선택이 아니지.’
성운의 생각대로 전황이 드러나고 있었다.
성벽을 공략하기 위해 트롤 출신과 르나르 출신 기병들이 앞장서서 달려가고, 뒤이어 다른 종족 출신 병사들이 달려 나간다. 사이사이 코볼트 출신 뱀파이어들이 껴 있다.
그 조합 자체는 괜찮았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산성에서 화살비가 쏟아지자, 닉스와 사티로스 궁수들이 반격을 시작한다.
하지만 리자드맨들의 각궁이 더 멀리 쏘아지고, 무엇보다 산성이 가지는 높이 차이가 절대적이라는 게 드러난다.
산성 아래까지 닿기도 전에 높은 각도의 비탈 때문에 뱀파이어들이 일방적으로 맞고 쓰러진다.
얼마 안 되는 힘 좋은 화살들이 산성의 성벽에 닿지만, 궁수들은 성가퀴 뒤로 숨은 다음이다.
쏟아지는 화살비 공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트롤과 르나르 기병이 성벽을 기어오르려고 한다.
하지만 성벽이 가지는 높이 차이는 적들의 진입을 어렵게 하는 것 이상의 용도가 있다.
전사들이 성벽에 올려놓은 머리통만 한 돌을 들어, 성벽 아래로 내던진다.
트롤은 물론이고 르나르가 타고 있는 큰족제비의 머리통이 돌을 맞고 으깨진다.
코볼트 따위는 트롤과 큰족제비를 죽이고 비탈의 경사면을 타고 굴러가는 돌에 맞고 날아가 버린다.
화살과 돌이 부족할 리는 없다.
흑린의 전사들은 적들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규모도 정확하게 파악했었으니까.
적에게 남은 것은 높은 세대의 뱀파이어.
‘하지만 뱀파이어에게 그런 특성이 있다고 해도 말이지…’
높은 신체 능력을 가진 뱀파이어 십인대장, 백인대장들이 화살을 몸에 박고서, 돌덩이를 피하면서 성문 앞까지 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문에 손이 닿을 수 있는 놈도 하나 없었다.
‘이쪽은 천둥 도마뱀이 있다고.’
-쾅!
라크락이 손을 뻗자, 운 좋게 성문 앞까지 달려온 뱀파이어도 하얀 수증기를 눈 코 입에서 내면서 쓰러졌다.
라크락은 향초를 곰방대로 피워 대면서 뱀파이어들을 우습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 큰 힘을 갈무리하며 필요한 곳에만 사용한 만큼 정신력에는 충분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3천 4백의 병력 중 6백의 병력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산성의 비탈 아래로 쌓인 시체가 몇 겹이나 되어서, 샤이븐이 기대했던 대로 경사가 완만해져 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경사가 더 완만해지더라도, 나머지 2천 8백의 병력을 그대로 성벽을 향해 돌진시키더라도 산성을 함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진 것이다.
이윽고 후열에 떠밀려 달려가다가도, 주저하더니 돌아서는 병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절대 이탈은 안 된다! 도망치는 놈들은 바로 목을 베겠다!”
샤이븐의 장군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 말대로 도망치려던 뱀파이어의 목이 아군에 의해서 잘려 나갔다.
샤이븐 입장에선 한 번 시작한 진격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해해. 후퇴해서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진격을 하게 되면, 방금 전 전열이 겪은 피해를 똑같이 입어야 하니까. 지금은 겨우 성벽 아래까지는 올 수 있으니 그 피해를 또 감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샤이븐이 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면 지금이라도 이대로는 산성을 공략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후퇴했겠지.’
성운이 당장 경계하는 것은 플레이어 절우비가 이 전투에 가세하는 것이었는데, 아마 최후의 최후까지 지켜볼 생각인 듯싶었다.
‘최후의 병력으로 샤이븐이 움직일 때 힘을 쓸 작정인가? 그럼 부대의 뒤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나 보군.’
성운은 뱀파이어 군단의 뒤를 바라보았다.
샤이븐의 시련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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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븐은 전황이 생각보다 풀리지 않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젠장, 어떻게 하지? 이대로 밤을 지새우면 병사를 다 잃는다.’
그때 샤이븐을 향해 달려온 파발꾼이 말했다.
“샤이븐 님! 급보입니다.”
“뭐냐?”
“하루하고 반나절 거리에서 트롤과 사티로스, 그리고 흑린의 코카투 전사들이 연합해 우리를 쫓고 있다고 합니다!”
“…뭐?”
멀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당장의 전투가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는 가깝다고 볼 수도 있었다.
‘병력을 후퇴시켜야 하나? 아니, 안 된다. 병사를 이미 너무 많이 잃어서 후퇴시켜 봤자 뒤에서 오는 적과 산성의 적이 합공한다면 막기 힘들다. 이제 와서 산성을 포기할 수는 없어. 차라리 산성을 어떻게든 공략해 내고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샤이븐은 파발을 떠나보내고 생각에 잠겼다.
별안간 샤이븐은 자신의 입술과 턱을 타고 흐르는 뜨거움을 느꼈다.
샤이븐은 깜짝 놀라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 냈다.
‘코피잖아?’
샤이븐은 뱀파이어가 된 뒤로 한 번도 코피를 흘린 적이 없었다.
뱀파이어의 심장은 느리고 둔하게 뛰기 때문에.
‘설마… 계시인가? 불길하군.’
샤이븐은 신의 뜻을 헤아리려 했다.
“샤이븐 님! 큰일입니다!”
샤이븐은 자신의 생각을 방해한 병사를 향해 소리쳤다.
“뭐냐?”
“죄, 죄송합니다.”
“하루하고 반나절 거리에서 적 부대가 오고 있단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돌아가라.”
“아, 아닙니다.”
“뭐?”
“다른 문제입니다.”
“뭐지?”
“노예들이 병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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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노예들은 손이 묶인 채 각자 정해진 장소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주변에는 뱀파이어 병사들이 경계를 하고 있었지만, 전투에 차출된 이들 때문에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뱀파이어 노예들은 병사들을 피해 조그맣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 속에서 나누어지는 대화는 누가 누구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모두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야.”
“끌려 나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다 죽었을걸.”
“아니. 아니야.”
“뭔가 아는 것 있나?”
“아, 저 친구가 네 번째로 끌려갔던 친구 같은데. 끌려갔다가 방금 돌아왔잖아. 맞지?”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조그마하게 움직인다.
“그래. 난 봤어.”
“뭘 봤단 말인가?”
“성문 말이야.”
“성문?”
“뱀파이어들이 뭘 하는지 봤어. 뱀파이어들은 사람들을 줄 세워 두고 흑린의 산성을 향해 달려가라더군.”
“세상에.”
“죽을 게 뻔하잖아? 아무리 흑린이라고 해도 적이랑 노예는 구분 못할 텐데.”
그림자가 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줄이었던 사람은 다 죽은 것 같아. 하지만 세 번째는…”
“세 번째는?”
“어떻게 됐지?”
“성문으로 들어갔어. 리자드맨들이 성문을 열어 준 거야. 푸른 나비들이 성 위로 맴돌더니, 문이 열렸어.”
잠시 노예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거짓말이지?”
“리자드맨들이 왜?”
“이유는 몰라. 그래서 세 번째는 모두 살았어. 그대로 전투가 시작돼서 네 번째 줄이었던 나는 돌아온 거고. 그러니 나도…”
이야기를 하던 노예는 벌떡 일어섰다.
“이봐, 앉아. 뭐 하는 거야?”
“저기 보초가 있다고. 안 보여?”
“…난 맞서 싸워야겠어. 리자드맨들이 우리를 구해 주기 위해 적 앞에서 성문을 열었다고. 이야기는 모두 진짜였던 거야.”
그 말에 모두가 마음속에 품고 있었으나 또 실망할까 기대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생명을 얻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일어선 노예가 그림자 속에서 말했다.
“일어나.”
“그, 그럴 필요까진 없지 않아? 리자드맨들은 우리를 위해 싸워 주는 거잖아”
“하지만 뱀파이어가 이긴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죽는다. 노예로서 비참하게.”
“리자드맨이 이길지도 모르잖아?”
“그럼 우리는 노예로서 구원받겠지. 비참하게.”
“…비참해지지 않을 방법이 있나?”
“흑린의 리자드맨들처럼 싸우는 거지. 싸우다 죽으면 전사니까. 용기를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던 이들을 위해서 싸운 셈이니까.”
누군가 중얼거렸다.
“옳군.”
그 말에 하나, 둘 노예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뱀파이어 병사 하나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노예들을 돌아봤다.
“뭐 하는 거냐, 너희는?”
뱀파이어 병사가 한 걸음, 다가왔다.
뱀파이어 병사가 들고 있던 횃불에 노예들을 비추자, 그 순간 노예들이 뱀파이어 병사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