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75
075화
라크락이 죽는다면 그들은 숨겨 놓았던 마음을 드러낼 것이다.
라크락과 자올 사이엔 지금 두 아들과 딸 하나가 있었는데 셋 모두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영리하고 용기 있었다. 아직은 누가 후사를 이을지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하지만 퀘즐.”
“예?”
“난 역시 왕의 자질이 부족한 듯싶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대륙에 라크락 님 같은 분은 앞으로도 없었고 뒤로도 없을 겁니다.”
“그런 말 마라. 이 땅에 태어날 후손들이 있는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라크락은 창날로 비탈 아래를 가리켰다.
악신은 노예와 뱀파이어를 가리지 않고 제 입에 쳐 넣고 있었다.
“이제 반절도 안 남았다. 반면에 산성을 빠져 나간 전사는 아직 반도 안 되는군.”
“예?”
퀘즐은 반사적으로 라크락의 손목을 잡았다.
“라크락 님.”
“난 몇 번이나 봤다. 분명 신의 힘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이 비탈을 따라 내려가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안 됩니다.”
“하지만 저 흡혈왕도 살아남을 것이다. 산성으로 우리를 막고 그 사이 대륙으로 내빼겠지. 아직 뱀파이어가 지배하는 마을이 많이 남았다. 저 악신의 힘도 건재할 테니 그 사이 대륙은 몇 년 동안 몇 번이나 전쟁을 겪겠지.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라크락의 시선은 비탈 아래로 향해 있었다.
퀘즐은 라크락의 시야 앞으로 걸어갔다.
“라크락 님의 말씀대로라면, 어찌되었든 저희의 승리입니다.”
“수많은 희생 끝에 얻게 되는 승리지.”
“그것도 승리입니다.”
라크락은 그제야 퀘즐을 바라보았다.
“퀘즐.”
“예?”
“넌 산수를 좀 더 배워야겠다.”
라크락은 퀘즐의 멱살을 잡고 메쳤다.
퀘즐은 세상이 빙글 도는 듯싶었다가 눈이 캄캄해졌다.
퀘즐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라크락 님!”
하지만 라크락은 옆에 없었다.
퀘즐이 성벽을 내려다봤다.
아낙세에 올라탄 라크락이 비탈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 앞에 거대한 악신이 천천히 라크락을 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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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성운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라크락에게 닿을 리는 없었다.
‘저런 바보 같은 짓을! 강신으로 라크락의 몸을 이동시켜야겠다.’
하지만 성운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신의 제사장이 강신 스킬에 저항합니다.」
‘…뭐라고?’
라크락은 제사장이다.
성운, 푸른 벌레신에 대한 믿음이 가장 신실한 개체이므로 성운의 뜻을 거스를 리 없었다.
다음 메시지가 떴다.
「강제로 사용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성운은 ‘아니오’를 눌렀다.
‘젠장. 강신 스킬을 저항하는데 강제로 사용하면 잠깐 동안 경직이 걸려.’
일상적인 상황에선 큰 페널티가 아니다.
하지만 신을 상대하고 있는 순간에는 이보다 큰 페널티가 없었다.
癤우삤瑜쇰씪는 거체를 돌려 긴 창으로 라크락을 향해 내리꽂았다.
창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아름드리나무가 내리꽂히는 수준.
하지만 코카트리스 아낙세가 재빨리 가속하며 창날을 피했다.
창을 뽑아내면서 흙먼지가 솟았다.
아슬아슬한 모습에 성운이 손을 불끈 쥐었다.
‘뭐 하는 거야? 도망가라고!’
성운은 기적을 사용했다.
붉은 나비 떼가 라크락의 주위를 맴돌았다.
푸른 나비는 긍정의 의미니, 보색인 붉은 나비는 분명 부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라크락은 걸리적거린다는 듯 나비 떼를 헤치고 나와, 癤우삤瑜쇰씪의 얼굴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癤우삤瑜쇰씪의 눈에 정확히 화살이 닿았지만, 그렇게까지 높게 쏘아진 화살에는 힘이 많이 부족했다.
癤우삤瑜쇰씪는 한 손으로 눈을 훑어 내며, 칼을 내리쳤다.
‘제길! 죽었나?’
아니었다.
아낙세가 바닥에 내리쳐진 칼날을 훌쩍 뛰어넘어 내달렸다.
라크락의 손에서 쏘아진 번개 줄기가 癤우삤瑜쇰씪의 팔을 때렸다.
외피가 검게 타올랐지만 癤우삤瑜쇰씪에게 큰 타격은 주지 못한 듯했다.
‘뭐가 문제야? 가만히 있으면 이긴다는 걸 너도 알잖아. 궁으로 돌아가서 전사들과 떠들고 자올과 이야기하고 자식들 재롱을 보고 있으면 그만인데. 아직 젊잖아. 감히 왕권에 도전해 올 전사는 앞으로 수십 년은 없을 텐데.’
라크락은 거리를 두고 파지직의 힘을 빌려 癤우삤瑜쇰씪의 몸에 번개를 내리꽂는다.
‘도대체 왜…’
성운은 이제라도 기적을 통해 라크락을 지원한다.
성운의 마음이 돌아섰다는 걸 알면 강신 스킬을 허용해 줄지도 모르니까.
신앙을 상당히 소모하자 최초의 번개를 시작으로 하늘이 갈기갈기 찢어진다.
癤우삤瑜쇰씪은 피뢰침이라도 된 것 같다.
하지만 癤우삤瑜쇰씪는 그때마다 움찔할 뿐, 역부족이다.
번개 자체는 강력하지만 癤우삤瑜쇰씪에게 명백한 타격을 주기 위해선 디바인 랭크가 필요하다.
그리고 라크락은 강신 스킬을 거부한다.
‘그거냐?’
성운은 뒤늦게 라크락의 뜻을 알아차렸다.
계속해서 맴도는 라크락이 짜증나는지, 癤우삤瑜쇰씪은 드디어 활을 들었다.
거대한 화살이 라크락을 향해 쏘아졌다.
‘검은 비늘 부족 전사들 중 일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부족장의 명령을 어기기도 한다고? 그래서 부족장이었던 너는 신의 뜻을 어기겠단 건가?’
또다시, 라크락은 살아남았다.
수 미터의 화살이 비탈에 직각으로 꽂혔다.
뿐만 아니라 라크락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긴 것 같았다.
‘목숨 하나로 목숨 둘을 구하기 위해서? 그 망할 산수냐?’
라크락은 들리지 않는 성운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라크락은 아낙세를 꽂힌 화살로 몰았다.
아낙세도 라크락의 뜻을 이해했는지 꽂힌 거대한 화살을 향해 내달렸다.
아낙세가 화살을 발판 삼아 날아올랐다.
癤우삤瑜쇰씪은 감히 필멸의 존재가 자신에게 직접 뛰어오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머리를 방어하는 손은 없었다.
라크락은 창을 역수로 쥐었다.
라크락이 생각했다.
‘파지직, 부탁한다.’
-…알겠다.
라크락의 창이 손에서 떠나는 순간, 휘몰아치는 전기와 함께 癤우삤瑜쇰씪의 머리로 가서 꽂혔다.
하지만 癤우삤瑜쇰씪도 신이었다.
癤우삤瑜쇰씪의 해머가 라크락과 아낙세를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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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수 사냥꾼이자 천둥 도마뱀.
최초의 선택받은 자이자 검은 비늘 부족의 대족장.
흑린의 건국왕이며 뇌룡대왕.
리자드맨의 본이자 길을 여는 자.
그 누구보다도 왕다웠던 이.
그리고 셈을 잘했다고 알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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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제사장 ‘라크락’이 사망했습니다.」
「경험치를 잃었습니다.」
성운은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아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성운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괜찮다. …제사장 사망은 감당할 수 있는 일이야. 이런 사태를 상정해서 빠르게 인간 휘경을 제사장으로 둔 거고. 경험치를 꽤 잃었지만 레벨도 1밖에 떨어지지 않았어.’
성운은 정말로 그런지 생각했다.
가슴 한 구석이 아팠다.
아닐지도 몰랐다.
「알림: 위대한 희생! 모두에게 존경받던 라크락이 죽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라크락의 죽음에 슬퍼합니다.」
성운은 코웃음 쳤다.
플레이어의 최고 레벨 캐릭터가 사망하면 나오는 알림으로, 플레이어 대부분이 비아냥으로 생각했다.
‘…누굴 놀리나.’
성운은 가까스로 마음을 회복했다.
그렇게까지 슬퍼할 일은 아니었다.
성운에게는 사후 세계가 있으니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사후 세계를 확장하다 보면 영웅이었던 라크락은 확실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성운은 라크락의 영혼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뭐지?’
성운의 앞에 라크락의 영혼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성운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상태창이 떠올랐다.
「개체 ‘라크락’이 사도로 등극했습니다.」
「사도 ‘라크락’이 신성 레벨을 획득했습니다.」
성운은 상태창을 읽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럴 리가. 라크락이 사도가… 되었다고?’
사도(使徒).
신을 보좌하는 존재들.
신의 창조물들이 성장하거나, 드래곤과 같이 특별한 존재들이 신앙에 편입되면 ‘사도’가 될 수 있었다.
특히나 ‘평범하고 일반적인 개체’가 성장을 이루면 사도가 되기도 하는데, 이를 ‘승천’이라고 불렀다.
사도는 독자적인 신성 레벨을 얻으며 신의 명령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신앙을 퍼트린다.
성운은 자신의 눈을 비비고 다시 읽었다. 상태창은 그대로였다.
‘불가능해. 승천하기 위한 조건이 부족하다고.’
승천의 조건은 모두 네 가지.
해당 개체가 영웅, 즉 21레벨 이상일 것.
또한 해당 개체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을 것.
그리고 해당 개체가 신에 대한 믿음을 내면화하고 있을 것.
‘이 세 가지 조건 중에 레벨은 확실히 도달했지만, 나머지는 모르겠어. 라크락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긴 했지. 하지만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는 경계가 모호해. 게다가 세 번째 조건은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지. 해당 개체의 마음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얼마나 나를 믿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니까. 승천은 플레이어가 시키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무엇보다도, 네 번째 조건은 틀림없이 아니지…’
네 번째 조건, 1백만 이상의 신앙.
‘내 신성 레벨인 11의 신앙 최대치는 겨우 10만이야. 사도가 등장하기 위한 신앙 최대치 1백만이 되려면 신성 레벨이 21은 돼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성운은 신앙을 확인했다.
「999998/10K」
「999997/10K」
「999996/10K」
…
빠르게 1씩 줄어들던 신앙은 곧장 차올랐다.
「10K/10K」
성운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했다.
사도를 만들기 위해 소모되는 신앙보다, 더 빠른 속도로 신앙이 공급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도대체 어디에서 신앙이 온다는 거지?’
성운은 전장을 내려다봤다.
모두가 기도하고 있었다.
거대한 악신은 여전히 서 있다.
라크락에게 분이 쌓였는지, 그 시체 위로 또 다시 망치를 내려친다.
하지만 그 악신 앞에서 모두가 도망가지 않고, 기도하고 있었다.
산성을 빠져나가던 흑린의 리자드맨들과, 뱀파이어 노예들.
심지어 백아의 뱀파이어들마저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악신과 맞서 싸우던 라크락을 본 것은 성운만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라크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라크락이 무엇을 위해, 왜 악신과 맞서는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라크락 덕에 살아남았고, 라크락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터였다.
라크락은 그 의지대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본이 된 셈이었다.
라크락이 옳았던 것이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겨우 이 숫자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앙이 아니야.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성운은 알아차렸다.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는 게임이었지만, 이 세계는 아니었다.
시스템은 그저 이 세상을 게임의 형태로 유지시키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숫자로서 만들어지지 않는 마음과 신념, 믿음을 숫자로 표기하면 오류처럼 나타날 수도 있었다.
저 줄어들지 않는 신앙이 그 증거였다.
상태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사도 ‘라크락’이 강림(降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허가하시겠습니까?」
「네/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