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82
082화
“하지만 카일, 내가 세자 자리를 포기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놓거나 할 수 없는 건 알고 있지? 이걸 결정한 이상 당연히 널 도울 테지만…”
“예. 제가 준비할게요.”
겨우 열두 살인 꼬마 애가 ‘준비’라는 말에 저토록 무게를 실을 수 있다니.
바센은 내심 감탄했다.
“그런데, 저건 어떻게 하지?”
바센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카일의 시선이 따라갔다.
“아, 마눈이요?”
오랜 시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던 문제는 풀어냈지만, 당장 앞에 놓인 문제는 아니었다.
마눈을 다시 왕궁으로 들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카일은 마눈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코카투를 타고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는 데아닌에게 향했다.
“원래라면 책임자가 알아서 해야겠지만…”
“그런데?”
“저대로 두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죠.”
그 말에 바센이 턱을 쓰다듬었다.
마눈은 거대한 괴수다.
드레이크의 활동 반경은 좁지 않아서, 저대로 있다가도 사람들이 있는 길이나 민가로 내려가게 되면 정말 큰일이 된다.
일견 허황된 소리지만 카일이 말을 하니 그럴듯해 보였다.
“어떻게?”
“수렵대신이 오면 설명하겠습니다.”
카일은 바센과 함께 코카투를 타고, 데아닌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그 와중에 카일은 마눈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데아닌은 처음엔 난색을 표하다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눈이 뛰쳐나간 나무 창살까지 내려오자 데아닌이 답했다.
“좋습니다. 카일 왕자님 말대로 하지요. 저야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지요, 수렵대신.”
그 말을 하고 카일은 바센과 함께 궁 안쪽으로 사라졌다.
데아닌은 의아하게 카일을 바라보았다.
수렵대야 연회를 준비하고 사냥을 준비하는 부서이니 왕족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책 읽기와 다른 학자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는 카일이 수렵대신을 챙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혹시…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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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즌, 궁의 기와 위에 걸터앉은 엘다르가 성운에게 말했다.
“네뷸라 님, 이걸로 괜찮은 겁니까?”
“왜?”
“저 셋째 왕자가 똑똑한 데다 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건 좋습니다. 생각을 들여다봐도 순수한 구석이 있고. 하지만…”
성운이 끄덕였다.
“내가 보여 주는 계시를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이지?”
“걱정되지 않사옵니까?”
성운이 답했다.
“별로.”
“왜죠?”
“로스트 월드를 플레이할 때야 게임 캐릭터라고 생각하니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지. 왜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느냐고. 근데 그때도 나는 플레이 잘했어.”
“…예.”
카일의 생각대로 성운은 될지 어떨지 확정되지 않은 첫 번째 계획에 모든 걸 걸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계획까지 연장했다.
성운의 이번 목적은 카일이 어떤 방식으로든 왕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고, 카일이 성운의 뜻을 하나하나 밝히는 지적인 유능함에 더해 자신의 뜻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솔함이, 바센이 세자 자리를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저 밑에 있는 게 사람들이라는 걸 알잖아. 각자의 뜻이 달라도 결국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주기만 한다면 상관없어.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는 거지.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더 잘됐잖아?”
왕은 당연히 카일인 쪽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바센 또한 포기하기엔 아까운 개체였다.
카일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바센이 왕이 되더라도 성운은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이 둘일 수는 없으니.’
엘다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되지는 않으시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서 카일과 네뷸라 님의 의지가 같았지만…”
“엘다르.”
“예?”
성운은 몸을 숙였다.
옆을 돌아본 엘다르가 흠칫했다.
성운은 엘다르의 이마에다 딱밤을 때렸다.
“앗.”
엘다르는 아프라고 때린 것이 아니라 환기의 의미임을 알았다.
“왜요?”
성운은 몸을 세우며 말했다.
“나는 카일을 그냥 결정한 게 아니야.”
지능은 하나의 요소일 뿐이었다.
성운은 카일 라크 오라즌이 태어나는 자리에 있었고, 학자들과 나누는 대화를 듣고, 써내는 글과 말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카일은 이전 세대의 영웅들과 그 가치를 존중하고 동시에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언젠가 성운의 뜻을 그르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르침 자체가 더 큰 의미가 될지도 몰랐다.
‘라크락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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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왕은 저녁 회의에 불참했다.
속병이 다시 도졌다는 이야기에 대신들 사이에 말들이 오고 갔지만 안평왕의 병증은 젊은 시절부터 계속 되었으니 대신들로선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행정대신 살루신 오가 회의를 주관했다.
첫 번째 회의 주제는 당연히 마눈에 대한 것이었다.
아침부터 궁에 있던 대신들이니 당연히 도망친 마눈이 오늘 하루 최고의 화젯거리임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눈을 잡아들였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구려, 수렵대신.”
그 말에 데아닌보다 빠르게 경비대장이 답했다.
“예. 저희 금군도 아직 대기 중입니다.”
“허, 해가 지도록 잡지 못했으니 날이 밝기 전에도 모르겠군. 그 전에 마눈이 사람을 상하게 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수렵대신?”
데아닌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말했다.
“다행히 마눈이 있는 곳은 찾아냈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오? 마눈처럼 거대한 덩치를 찾지 못할 수가…”
데아닌에게 시종일관 깐깐하게 구는 재정대신이 말을 꺼내자, 데아닌이 덧붙였다.
“바센 왕자님이 도와주셨지요.”
“…있지만, 왕자님이 도와주셨다니 참 다행이로군.”
“예. 이후 지켜보고 있는데 새벽 내내 돌아다닌 탓인지 움직이지 않고 잠만 자는 중이라 별 탈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행정대신이 말했다.
“그건 다행이지만… 폐하께서 걱정이 크신데, 내일 아침까진 금군을 움직일 수도 없고. 마눈을 찾아냈으면 서둘러 금군을 빌려 마눈을 몰아오지 그랬소?”
데아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눈이 도망치는 과정을 조사하다 보니 석연찮은 부분이 있어서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깜짝 놀랐다.
흰머리의 좌수관 수장 휘문이 질문했다.
“그럼 그 말은 오늘도 마눈을 데려올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일도, 앞으로도 마눈을 데려오지 않겠단 말인가?”
“예.”
“폐하께서 내려 준 임무를 무슨 핑계로 피하려고?”
데아닌은 서 있는 자리에서만 이야기하는 건 부족하다 여겼는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 회의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해 다른 대신 여러분들도 놀라셨을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으니 청컨대 들어 주십사 합니다.”
재정대신이 한 소리를 하려 했지만 행정대신이 손을 내저었다.
“좋소, 수렵대신.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데아닌이 말했다.
“오늘 아침 마눈을 쫓기 위해 마눈이 있던 정원으로 갔는데, 부러진 나무 창살을 들여다보니 벌레가 먹었더군요.”
재정대신이 핀잔을 주었다.
“설마하니 누가 그대를 골려 주려고 나무 창살을 갉아먹었단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마눈은 그런 벌레 먹은 자리가 없어도 아무 문제없이 나무 창살을 박살 내고 나갔을 걸세.”
“예, 물론 아닙니다. 저도 재정대신님처럼 생각했지요.”
“그런데?”
데아닌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카일 왕자님은 생각이 다르시더군요. 나무 창살에 벌레 먹은 자리 덕분에 나무 창살이 쉽게 부러지면서, 나무 창살에 연결된 돌기둥이 무너지지 않았고, 덕분에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요. 금군의 발견이 늦은 것도 당연했던 겁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누군가 고의로 갉아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랬더라도 금군에게 발견되어 매를 맞았겠지요.”
“결국 우연의 일치라는 거 아닌가?”
“아닙니다. 누군가 고의로 했으나 그것이 사람의 짓이 아니라면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건 누구겠습니까?”
그 말에 의아하게 데아닌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고, 경탄하며 눈을 크게 뜬 이도 있었다.
행정대신이 입을 열었다.
“설마하니 그대의 말은…”
“예. 야천께서 행하신 일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기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그대가 아니야.”
“예. 그래서 오늘 오후에 교단을 찾아가 사제들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야천께선 과거에 푸른 벌레신으로 불렸고 더 이전에는 이름 없는 딱정벌레 신이라고 불리셨습니다. 벌레를 통해 기적을 보인 일이 많았단 거죠. 사제들은 현장까지 와서 벌레 먹은 자리를 보았고…”
데아닌이 말을 하는 중간에 대회관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법복을 입은 야천교 사제였는데,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다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확인했습니다. 그건 야천께서 보이신 기적이 맞습니다.”
사제의 말에 행정대신이 말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슌 왕자님?”
슌 라크 오라즌, 안평왕의 둘째 왕자가 말했다.
“수렵대신이 사제가 직접 와서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고 하기에, 제가 직접 왔지요.”
“그렇다고 왕자님이 직접 오실 것까지야…”
“저는 이제 야천의 사제이니 자꾸 왕자로 호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듣자 하니 형님과 동생이 이번 마눈 찾기에 한 손씩 도움을 주었는데 저도 빠지려니 섭섭하더군요.”
슌은 일찌감치 야천교 교단으로 들어가 사제가 되었다.
데아닌은 슌에게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곤, 돌아섰다.
“따라서 마눈이 밖으로 나간 것은 모두 야천의 뜻. 저는 감히 야천의 뜻을 거스르고 마눈을 다시 들이기 위해 금군을 보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말에 불만을 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마눈을 잡아들이라 한 것은 안평왕의 뜻.
하지만 마눈을 내보낸 것은 야천의 뜻이니, 왕권을 지지하는 가장 큰 힘은 당연히 야천의 의지였다.
행정대신이 말했다.
“좋소, 데아닌. 그것이 야천의 뜻이라면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 하지만 궁금한 것은 마눈을 그대로 둬도 괜찮냐는 거요. 야천의 뜻을 알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건 야천교 사제들이지만, 우리는 그 전까진 백성들의 안전을 구가하여야 하지 않겠소?”
그 말에 다른 대신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데아닌이 말했다.
“그래서 저는 수렵대를 확대 개편하였으면 합니다.”
그 말에 대신들이 술렁였다.
“무슨 말이오?”
“만약 마눈이 저대로 있으면 저 산을 지나는 수많은 사냥꾼과 땅꾼, 보부상들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마눈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관리 감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산을 관리하는 저희 수렵대에 더 많은 인원이 배정되어야 합니다.”
타당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궁이란 서로가 서로의 권력을 견제하는 곳.
한 집단의 인력을 확충한다는 말은 새로운 힘이 생겨난다는 말이었다.
행정대신이 그런 우려를 대표해서 말했다.
“어, 그렇지만 수렵대신…”
“한시가 급한 일인 줄 압니다. 앞서 여러 대신들이 걱정한 것과 같이, 마눈은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짐승. 하물며 그 거대한 덩치를 생각하면 이를 쉬이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금군을 빌리고 싶으나 궁과 폐하를 지켜야 하는 금군으로 마눈을 지키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지. 현실적으로 생각합시다. 마눈은 짐승이니 어디서 그런 인력을 보충하겠소?”
“민간에는 산을 잘 타는 사냥꾼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고용하고 마눈을 추적하고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도록 할 사람들도 고용해야 하며…”
“인력만 보충하면 되겠소?”
“예? 물론 아니지요. 마눈이 이리저리 튀어 다니지 않게 하려면 먹이는 그대로 줘야겠지요. 소를 산중으로 옮기려면 수레도 필요할 겁니다. 수레는 산길을 가다 보면 잘 부서지니 그에 대한 추가 비용도 들 겁니다. 그리고…”
데아닌이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하자 대신들의 얼굴이, 특히나 재정대신의 얼굴이 구겨지고 있었다.
데아닌의 말을 부정하고 공격하고 싶지만 그랬다가 마눈이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을 때가 문제였다.
그렇다면 수렵대신 데아닌은 수렵대를 확대 개편해야 된다는 말을 부정한 사람부터 언급할 테니까.
“음, 대강의 이야기는 알겠소. 그럼 내일 아침까지 문서로 정리해서 폐하와 우리가 읽어 보면 어떨까 하는데.”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머리가 좀 아프긴 한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데아닌은 자리로 돌아갔다.
평소라면 데아닌은 이런 기회가 와도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왕자를 왕으로 만들고 싶다고 한들 그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몸을 보신하며 긴 시간을 들여서 궁의 사람들을 한 사람씩 자기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서 데아닌은 카일의 의지를 알아보았다.
‘카일 왕자님은 왕이 될 생각이신 거야.’
그렇다면 일은 더 쉬웠다.
어전 회의의 말석인 자리라지만 그 자리 하나도 누가 앉느냐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데아닌은 생각했다.
인력을 늘리고 재정을 확충하면 그 자체로도 권력이 생기고, 빈틈을 더 이용하면 사적으로도 이용할 수 있었다.
데아닌은 그 사적인 힘을 공적으로 유용할 생각이었다.
‘그 힘으로, 카일 왕자님을 왕이 되도록 돕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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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달 뒤, 안평왕은 바센 라크 오라즌을 세자에서 폐하고, 카일을 세자로 봉했다.
3년 뒤, 안평왕이 오랜 지병으로 사망하며 카일 라크 오라즌이 흑린의 11대 왕위에 올랐다.
카일의 나이 15세 때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