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83
083화
“다시 한 번 경하드립니다, 폐하.”
카일에게 그렇게 말한 첫째 왕자 바센이었다.
카일의 사랑채에는 카일과 바센 두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카일은 무안해하며 말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말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폐하는 이제 일국의 왕, 아니. 대륙의 제일가는 나라의 왕이십니다. 만민을 굽어보는 자리에 오르셨으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건 압니다만…”
카일은 떼를 쓸 것이 아님을 알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바센은 만족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일이면 첫 어전 회의가 있겠지요.”
“예. 그래서 걱정이 되긴 합니다.”
“폐하께서 걱정이 되는 일도 있습니까?”
카일은 콧잔등을 긁었다.
“저라고 걱정이 없을 리가요. 오히려 저는 다른 사람들보다 걱정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흠, 오랜 시간 폐하를 보아 와도 그 생각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걱정 중 하나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말에 카일이 말했다.
“제 걱정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바센이 담담하게 말했다.
“내일 대신 중 하나가 이리 이야기하겠지요. ‘바센 라크 오라즌을 궁에서 내쳐야 한다’고요. 그것이 폐하의 걱정 중 하나가 아닙니까?”
그 말에 카일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센의 말이 맞았다.
다른 왕자가 궁 안에 있으면 왕권이 흔들릴 수 있다.
모반을 꾀하는 이들은 당연히 정통성이 있는 왕자를 원할 테니까.
둘째 왕자 슌 라크 오라즌이야 이미 궁 밖에 있고 야천교 사제이니 걱정이 없지만, 첫째인 바센 라크 오라즌은 다르다.
대신들은 바센을 내보내라 할 것이다.
카일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단상을 두드렸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더 가까워.’
바센이 모반할 생각이 없다는 건 대신들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럼에도 바센이 다른 사람의 간계에 휘둘릴 수 있다는 핑계만으로 바센을 궁 밖으로 내쫓을 이유는 충분하다.
바센이 정말로 모반을 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대신들은 왕이 제 뜻대로 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리 할 것이다.
‘현재 흑린은 대신들의 권한이 큰 나라다.’
그것 자체는 카일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 아무리 왕이 유능하다 하여도 한 사람일 뿐.
시조인 라크락도 부족장이었을 때 부족민들의 의견을 두루 듣고 가장 좋은 의견을 찾아내곤 했다.
왕이라는 지위에 자만한다면 나라가 패망에 이르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대신들은 한쪽의 의견으로 너무 치중되어 있어. 대부분 리자드맨이니까.’
리자드맨이니 결국 리자드맨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것은 당연하고, 많은 리자드맨이 귀족 계급이니 귀족에 우호적인 정책을 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이미 집단을 이루었으니 이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경향까지 있다.
안평왕은 이를 쉽게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가 버렸지만 카일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첫 회의 때부터 날을 세우게 되면 유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신하들도 경각심을 들게 하겠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카일이었지만, 정작 형인 바센이 연관되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카일이 말했다.
“제 걱정은 알아맞히셨지만, 그 방법은 아직 말씀하시지 않으셨군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센이 답했다.
“궁 밖으로 내보내라고 하십시오.”
“예?”
“대신들이 원한다면 그리 하란 말입니다.”
“하지만 형님은…”
“전 괜찮습니다.”
바센이 카일의 사랑채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았다.
“오히려 제 존재가 대업을 이루려는 폐하의 발목을 잡을까 겁이 납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오늘 찾아온 것입니다. 오히려 잘되었지요. 사냥을 하려고 해도 저 뒷산엔 제일 큰 것이 멧돼지 아닙니까. 아, 물론 마눈을 제외하고요.”
카일은 뭔가 생각한 듯 곰곰이 탁상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사냥, 사냥이라…”
“…음?”
“형님, 기왕 도와주시는 김에 더 도와주시겠습니까?”
바센은 카일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음을 알았다.
“예, 좋습니다.”
“아마, 형님께서도 그리 싫어하시진 않을 겁니다.”
카일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바센은 그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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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어전 회의.
카일이 왕좌에 앉은 가운데, 아침 일찍 시작한 회의에는 대신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카일이 왕위에 오르고 첫 회의였으므로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카일은 열다섯의 소년 왕이다.
하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왕이 되기 이전에도 이미 정치적 수완을 여러 번 드러냈다.
그러니 대신들 또한 이 왕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카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 아는 얼굴이지만 이 자리에 이렇게 모인 건 처음이로군. 당장 시급한 일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짐이 알아야 할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해 주었으면 한다.”
어린 리자드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회관에 울렸다.
그 때문일까, 이전의 안평왕 때부터 행정대신의 자리에 앉은 살루신 오가 입을 열었다.
“폐하. 바센 왕자를 궁에 둬서는 안 됩니다.”
흑린의 최고위 관료는 행정대신이었다.
그 행정대신의 자리에서 십수 년 동안 자리를 지킨 살루신 오.
그가 이 대신들을 대표하는 입이라는 건 카일도 잘 알고 있었다.
살루신이 계속해서 말했다.
“바센 왕자는 한때 세자였던 이. 폐하께서 바센 왕자와 절친하신 것은 알고 있으나, 바센 왕자가 궁 안에 있다면 모반을 하려는 이가 그를 말로 홀려…”
“좋다.”
“…왕권을 흔들 수도 있으며, 예?”
“내 방금 행정대신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았는가?”
카일이 이렇게 쉽게 동의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살루신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도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살루신은 안평왕 때와 같이 카일이 대신들의 권한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 생각에 바센 왕자는 수도인 오라즌 밖으로 내보내고…”
“그건 싫다.”
“…허나 바센 왕자가 오라즌에 남아 있게 되면.”
“어허.”
카일이 가볍게 왕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경은 어찌 짐의 생각을 그리 예단하는가? 형님에 대해 경들만큼이나 짐도 고민이 많았거늘.”
대신들이 보기에도 카일이 바센을 내보내자는데 동의한 것은 큰 양보였다.
양보를 크게 했으면 그만큼 대신들도 내어 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
살루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선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이야기를 하기 전에 미리 알아 두었으면 하는데, 우리나라에 아직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미개척지가 있음을 알고 있는가?”
“예.”
살루신은 고개를 숙였다.
“동부 산맥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그래. 여러 왕들께서 탐색을 보내었지만 산세가 너무 험하고 가팔라 중도에 그만둔 분들이 많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동부 산맥은 흑린의 황야 동쪽에 있는 산맥이었다.
하지만 몇 번인가 운 좋게 북해안과 반도의 땅 끝인 마가넨 사이를 오갔던 배가 있어서 동쪽 산맥 너머에 있는 땅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이 알려져 개척은 포기되었다.
흑린의 땅 안쪽에 있지만 산맥을 넘어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넘어오는 것도 없으며, 넘어 봤자 큰 이득도 없다고 생각하니 역대 왕들이 쉽게 포기했던 것이다.
카일이 본론을 꺼내들었다.
“지금까지는 동부 산맥은 크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저 서쪽에 단염과 적과, 금안과 만굴, 그리고 석면까지 다섯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으니 부국 강성할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될 일. 동부 산맥을 개척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살루신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러니 하고 싶으신 말씀은, 바센 왕자를 동부 산맥으로 보내자는 말입니까?
“그렇다. 내가 아는 큰 형님은 뛰어난 사냥꾼이면서 훌륭한 전사다. 마눈을 찾기 위해 혼자서라도 달려갈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사내지.”
살루신은 슬쩍 다른 대신들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이 보기에 동부 산맥은 큰 가치가 없었다.
거기에 사람을 보내 봤자 엄한 고생만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폐하는 아직 어리신 분. 듣자하니 아직도 오웬의 여행일지를 좋아하신다지. 모험에 대한 동경 덕에 형님에게 좋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는 건가?’
바센의 생각을 들어 보긴 해야겠지만, 살루신이 보기에 바센이 즐기는 사냥은 수렵대에서 잘 정비한 숲 속에서 정해진 사냥감을 잡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왕족으로 자랐으니 험한 일은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들 또한 바센을 험지로 보낸다는 것에 큰 불만이 없어 보이자 살루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도 좋은 생각인 듯합니다.”
“그리하면 되겠나?”
“예.”
“그럼 선단(船團)을 꾸려야겠구나.”
“…예?”
선단, 즉 배를 무리 지어 보내겠다는 것.
지금까지 동부 산맥으로 개척을 떠난 이들은 모두 육로로 이동했으므로 살루신으로서는 선단이란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배 한 척을 가지고 선단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카일은 배를 무리 지어 바센에게 쥐여 주겠다는 뜻.
그런 배 무리를 운용하려면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라의 재산이니 당연히 그걸 지킬 군인들도 필요할 것.
살루신과 대신들이 생각한 개척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반문하는 살루신에게 오히려 카일이 핀잔을 주었다.
“뭘 놀라는가? 지금까지 동부 산맥 개척이 실패한 것은 모두 육로로 산맥을 넘으려고 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럼 당연히 배를 타고 산맥 반대쪽으로 가면 될 일일 텐데?”
“하, 하지만 폐하. 지금은 동부 산맥 너머로 이르는 해로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냥 육로로 하시는 게…”
“그러니 그 해로를 형님이 만들러 가는 것 아닌가? 언제까지 흑린에 놀리는 땅이 있어야겠느냐?”
“그렇게 많은 병력이 있으면 모반의 위험도…”
“어허. 형님을 견제할 사람을 두면 될 것 아닌가. 그걸 대수로운 걱정이라고.”
“하지만…”
“경은 왜 한 번 동의한 것을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되지 않아서 뒤집는가? 이것은 보자… 개척을 하려면 잡다한 맹수나 야수, 괴물들을 만나겠지. 옳지, 수렵대신이 담당하라.”
그러자 데아닌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알겠사옵니다.”
살루신은 데아닌을 노려봤다가 이대로 물러서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지만 카일도 만만하진 않았다.
“행정대신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으니, 조금 이따 더 이야기하지. 지금 대회관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살루신은 벌써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살루신과 다른 대신들은 카일이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볍게 압력만 넣으면 된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카일은 둥글둥글한 성격이었으므로 유하게 반응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카일은 첫날부터 작정을 하고 온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이라니요?”
“들어오라.”
대회관의 문이 열리고, 정면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키는 리자드맨보다 작지만, 몸집은 더 컸다.
머리에는 리자드맨들이 장식 털이라고 부르는, 머리카락과 수염이 잔뜩 자랐고, 맨들맨들한 피부 아래로 두터운 지방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드워프잖아!”
대신들이 술렁거렸다.
“저 천것이 어느 안전이라고?”
“호위는 뭣 하는 게냐? 저 땅딸보를 내보내지 않고?”
드워프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말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와 카일 앞에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하신 대로 왔습니다.”
살루신이 한숨을 참으며 카일을 돌아보았다.
“폐하, 도대체, 이게 뭡니까?”
“기술대의 럼프라고 하네. 자네들이 얼굴을 몰라봐도 어쩔 수 없지. 그는 얼마 전까지 노예였으니.”
“예? 이 드워프가 노예였다고요? 아니, 폐하. 저는 저자의 이름이나 지위를 물은 게 아닙니다. 왜 저 자가 이 자리에 왔냐는 겁니다.”
카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기술대신 자리가 비지 않았나? 그래서 그를 앉힐 생각이라네.”
그 말에 소수의 대신을 제외한 대신 대부분이 입에 침을 튀기며 카일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신성한 대회관에 드워프를 들이겠다니요? 절대 안 됩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왜 하필 드워프입니까? 드워프는 뇌룡대왕께서 흑린의 땅을 넓히실 때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던 불민한 종족입니다!”
저마다 떠드느라 귀가 아플 지경이었지만, 카일의 입에는 미소가 걸렸다.
‘역시 형님에 대한 이야기는 쏙 들어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