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85
085화
슌 라크 오라즌은 고민에 빠졌다.
‘카일이 틀린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본래라면 왕은 역법 사제와 천문대의 예고 시간 중 둘 중 하나를 따르는 것이 관례.
그건 지금까지의 왕들이 천문에 그토록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특한 카일은 저 스스로 계산을 했고, 그 때문에 틀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일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틀렸다는 걸 몰랐을 리는 없어.’
슌은 자신의 동생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맏형인 바센보다도 더 빨리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슌은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야천교의 사제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쩌면…’
슌은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역법 사제와 천문대의 계산 모두 수많은 학자들이 내놓은 결과.
반면에 카일이 아무리 똑똑하더라도, 혼자 맞는 답을 내놓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일 혼자 옳은 답을 내놓은 것이라면?’
일식례의 시간이 틀리면 벌을 받게 되지만, 슌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어차피 왕족인 만큼 유야무야 넘어갈 것임을 알고 있기도 했다.
‘권력 남용인가? 그게 뭐 어쨌다고. 사실상 나는 다른 사람의 매를 대신 맞아 준 것 아닌가?’
슌은 카일이 예고한 시간에 일식례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궁에 혼돈을 가져왔다.
─┼
일식례 당일.
역법 사제와 천문대의 일식 예고 시간으로부터 두 시간 전, 카일의 일식 예고 시간으로부터 여섯 시간 전.
궁 한쪽에선 대신들의 급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천문대신, 말씀하시오. 그 계산이 확실한 것 맞소?”
행정대신 살루신 오의 다그침에 천문대신이 머리를 주억였다.
“저희 관원들과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확실합니다.”
그 말에도 대신들이 신통찮은 표정이자, 천문대신이 덧붙여 말했다.
“심지어 야천교 역법 사제들과도 대조해 봤습니다. 틀릴 리가 없습니다.”
“확신하시오?”
“예?”
살루신은 천문대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가 바라보는 것은 천문대신 그 자신이 아니라, 더 멀리 있는 이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일전에 첫 어전 회의에서 그대보다 그 드워프의 학식이 더 뛰어났소. 그리고 폐하께선 정답과 오답을 구분할 정도로 명민하셨지. 그런데도 확신할 수 있는 거요?”
“그건…”
“대답 잘하시오. 그 대답에 우리의 명운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니.”
천문학자는 몇 번이나 주저하다가, 곧 결심을 굳혔는지 입을 열었다.
“제가 옳습니다.”
살루신은 천문대신의 눈에서 정치적 판단이 아닌 학자의 자신감을 읽어 냈다.
“좋소. 그럼 서둘러 움직여야겠군.”
슌 라크 오라즌은 카일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살루신은 달랐다.
살루신은 카일이 둘 중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역법 사제와 천문대 관료들과 다른 일식 예고 시간을 내놓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폐하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이 대국의 학자들 모두가 틀렸는데 폐하 혼자 옳을 수는 없다.’
그러니 살루신이 생각하는 경우의 수는 하나뿐이었다.
‘이건… 일종의 기 싸움이라고 봐야겠지.’
왕과 신하 사이의 정치 알력은 라크락이 죽은 이후 끝없이 이어져 왔다.
어쩌면 라크락도 그랬을지 모른다고 살루신은 생각했다.
‘뇌룡대왕 같은 분이 엉뚱한 시각을 가리켜 일식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신하들은 자신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뇌룡대왕이 예고한 시간에 맞춰 일식례를 준비할 것이다.’
그 뒤에 일식례가 일식 시간에 맞춰서 열리지 못하면, 그것은 단순히 왕 혼자의 잘못이 아니었다.
일식례를 주재하는 곳은 야천교이지만 천문대신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도 이 행사와 관련되어 있다.
왕에겐 허물이 있어도 죄가 되지 않지만, 대신들은 달랐다.
제대로 일식례를 준비하지 못한 것을 빌미로 국법을 운운하며 대신들을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폐하는 뇌룡대왕이 아니다.’
카일은 라크락처럼 힘이 세지도, 라크락처럼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것도, 라크락처럼 존경을 받지도 않았다.
첫째인 바센 라크 오라즌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것은 눈여겨볼 만하지만, 이제 와서는 카일이 유난히 뛰어나기보다 바센이 유난히 세자답지 못했던 것이 문제.
적어도 살루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희를 벌하실 수는 없을 겁니다, 폐하.’
살루신과 천문대신, 그리고 여러 대신들은 카일을 찾아갔다.
그리곤 카일이 예고한 시간에서 네 시간 당겨 일식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일이 말했다.
“…경들의 말은 알겠다. 그대들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시간은 늦지 않겠나?”
살루신은 카일이 순순히 포기했다고 판단했다.
“예. 어전 회의도 파하고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일식례이니, 정시에 열 수 있을 겁니다.”
“후, 좋다. 그럼 행정대신 그대가 천문대신과 함께 일식례를 준비하라.”
살루신 오는 미소를 숨기곤 자리에서 나섰다.
─┼
“기존보다 네 시간 이르게 말인가? 역법 사제와 천문대 관료들이 정한 시간으로?”
슌이 질문하자 살루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슌은 그것 또한 카일에게 뜻이 있겠거니 생각하곤 살루신이 말하는 대로 네 시간 빨리 일식례 준비를 끝냈다.
오라즌 궁 앞, 일식례 한 시간 전.
악기들이 연주되고 야천교 사제들과 슌이 장내에서 정해진 기도문을 읽어 가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살루신은 다른 대신들과 함께 자리에 섰다.
일식이 일어나는 순간 왕이 단상에 오르는데, 그 단상을 정확히 마주볼 수 있는 자리였다.
‘머리를 꽤나 쓰셨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이겼습니다.’
지루한 행사지만, 살루신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똑똑하고 명민한 것으로 알려진 왕자였지만, 그래 봤자 열다섯.
어린아이라는 한계를 벗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전 폐하도 그렇고, 이번에도 쉽게 넘어가겠군.’
그리고 일식이 예고된 정시.
카일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카일은 단상 위에서 대신들과 백성들을 슥 훑어보니, 마지막에 살루신을 바라보았다.
살루신 또한 카일과 눈을 맞추었다.
‘표정을 숨기는 재주는 뛰어나시군. 하지만 속이 끓어서 어찌하시렵니까?’
살루신은 눈웃음을 참기 위해 몇 번이나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뭐지?’
백성들이 하늘을 보고 웅성거렸다.
살루신도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구름이 껴 있긴 하지만, 해가 말갛게 보였다.
일식이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단상 위에 있던 카일은 지루한 듯 등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다가 끝내 한숨을 쉬었다.
“일식이 일어나지 않는군. 담당 사제가 여기 있나?”
슌이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예, 폐하.”
“아무래도 일식 시간이 잘못된 것 같으니 다시 알아보시오. 지금 일식례는 폐해야겠군.”
“알겠습니다.”
그 말에 천문대신이 앞으로 나가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폐하! 소인을 벌하시옵소서!”
“어찌 된 일인가?”
“저희 천문대가 일식 시간을 잘못 계산한 듯합니다.”
“어찌하여?”
그 말에 천문대신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모르, 모르겠습니다.”
“그럼 짐이 알려 주겠다.”
카일이 단상 위에서 말했다.
“역법 사제와 천문대 관료들 모두 오래된 산술과 천문 서책에 기대어 계산을 하고 있었다. 짐도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럼프라는 드워프가 이것을 발견하고 알려 주었지. 짐은 스스로 못남을 창피하게 여겨 이를 다른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았는데, 그대들도 똑같은 허물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
천문대신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폐하! 뇌룡대왕님의 저서에는 ‘하늘은 변치 않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뇌룡대왕 라크락.
입에 담는 울림만으로도 흑린의 백성에게는 경외심이 생기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카일에게는 아니었다.
“멍청한 것. 그것이 낡은 서책 아니냐? 그분들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왜 인정하지 못하는가? 그야 어쩔 수 없지. 그분들은 그 이전까지 다른 서책을 볼 수 없었으니. 하지만 우리는 그분들이 남긴 유산에 더해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저 멀리 만굴에서 쓰인 역법책은 읽어 봤느냐? 시간이 지나면 하늘의 움직임도 바뀐다. 내 이미 단서를 주지 않았느냐?”
그 말에 천문대신이 몸을 덜덜 떨고 살루신은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놈의 드워프! 외국의 서책을 운운하신 것이…’
천문대신이 말했다.
“하오나, 폐하… 저희 흑린이 대국이고 암굴은 소국에 불과한데… 굳이 그런 지식을…”
“흑린이 아무리 대국이라 한들, 이 대륙 전체만 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느냐? 이 대륙 전체의 지식만 하겠느냔 말이다.”
카일이 돌아서며 말했다.
“관련된 이들을 국법에 맞게 처벌하라. 일식례 담당 사제는 다가올 일식에 맞춰 의식을 재정비하시오.”
일식이 일어난 것은 네 시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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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센 라크 오라즌이 배 위에 올라서자, 선상에서 오라즌의 항구가 보였다.
‘다녀 오마, 카일.’
바센이 모험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건 카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동부 산맥 너머를 개척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궁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지.’
3년 전, 카일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부터 바센은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하고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이런 모험은 너무 안온한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오라즌을 뒤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섭섭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상선 ‘해적의 수치’에 올라탄 순간부터 바센은 모험에 대한 열의로 차올랐다.
명목상 바센은 동부 산맥 탐험단의 단장으로, 세 대의 군선에 나눠 탄 150명의 병사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군선에 타지 않는다.’
바센이 타게 되는 배는 상선인 해적의 수치였다.
해적의 수치는 흑린에 고용된 배로, 오랜 시간 궁과 거래를 해 온 이티모 가문에 속해 있었다.
바센은 군선은 비좁고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갖추기 어렵기 때문에 상선을 대장선으로 삼아 타게 되었다.
‘그건 명목에 불과해. 내가 멋대로 병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관리 감독할 사람이 이 배에 타기 때문이지.’
현재로선 그 감독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바센은 해적의 수치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명부를 미리 입수할 수 있었고, 후보를 가늠했다.
‘첫 번째 후보는 역시…’
붉은빛이 도는 머리칼을 묶은 여자가 바센을 향해 걸어왔다.
“반갑습니다. 선장인 티오네 이티모입니다.”
“반갑군. 바센 라크 오라즌이다. 엘프였군.”
티오네의 귀가 쫑긋 움직였다.
“한 번에 알아보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매번 인간이나 엘프나 닉스나 하프빈이나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리자드맨만 봤는데.”
“하프빈이랑? 그치들은 아무리 커도 내 허리 반절 밖에 안 오는데.”
“웬걸요. 드워프랑 엘프랑 헷갈리는 사람도 있는데요.”
“음. 그래도 이해는 해줘야지. 인간 중엔 드워프 같은 사람이랑 하프빈 같은 사람도 있는걸.”
“그래도 절 보고 착각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바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티오네 이티모는 엘프 치고도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앞으로 계속 보게 될 텐데, 잘 부탁하지.”
“좋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점이 있는데요.”
“말하게.”
티오네가 헛기침을 말하며 말했다.
“아무리 귀하신 분이라 하더라도 제 배 위에선 제 말을 따르셔야 합니다. 이것을 따르시지 않을 거라면, 배에서 내리시고 다른 배를 찾아보셔야 할 겁니다.”
바센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불합리한 명령을 내리지만 않는다면야. 이 정도 조건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
바센이 생각보다 별다른 불만 없이 승낙하자 티오네는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되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외에는 이번 탐험단의 단장이신 데다, 제 배에 탄 손님이니, 최대한 배려해 드리죠.”
“고맙군. 근데 내 짐은 아직 안 왔나?”
“아, 짐은 혜사가 들고 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혜사? 예쁜 이름이군.”
티오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름? 이름이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근데 그것 말고 달리 부르진 않으니 이름이라고 생각하셔도 되긴 하겠습니다.”
바센이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티오네가 고개를 돌렸다.
“마침 저기 오는군요..”
바센이 시선을 따라가자 키 3미터의 웅대한 체격을 갖춘 오우거가 걸어오고 있었다.
“누가 1등 황훼사를 불럿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