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87
087화
살루신 오가 귀양을 떠난 뒤, 오라즌 궁 안의 많은 신하들이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재정대신 니르각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보기에 지금까지 살루신은 훌륭한 처세를 보여 주었다.
살루신은 자신만만했고 실력도 있었다.
살루신이 단순히 천문학적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신하들은 물론이고 대신들이 외국의 학문을 얕잡아 봐 어두웠던 것은 사실이다.’
카일 라크 오라즌은 오래전부터 궁을 출입하는 학자들이 외국의 학문을 경시하는 풍조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왕이 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가, 일식례가 일어나는 당일에서야 입을 열었다.
‘그건 역시 폐하께서 살루신을 꺾기 위해서였겠지. 살루신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 줄 다 아셨으니, 그때까지 침묵하고 계셨던 거다.’
필요하다면 언제까지고 인내할 줄 아는 현명한 왕이었다.
그래서 신하들은 두려운 것이었다.
특히 니르각은 더 그랬다.
카일이 능력을 보여 준 지금 입단속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이전에 뱉어 놓은 말들이었다.
‘젠장.’
카일이 왕이 되기 전, 정확히는 바센이 세자이던 시절 대신들은 두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센파와 카일파.
두 왕자 중 누구를 왕으로 만드느냐의 싸움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바센이 세자의 뜻이 없음을 보여 주고 안평왕 또한 카일에게 마음이 기울면서 흐지부지 되었으나, 살루신을 꺾기 위해 몇 년이고 인고했던 왕이라면 몇 년 전의 사건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그때 니르각은 완고한 바센파였다.
카일 개인이 싫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니르각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했고, 별다른 결함이 없다면 첫째 왕자가 세자인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둘째, 또는 셋째 아니면 또 다른 왕가의 핏줄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며 궁을 뒤흔들 테니까.
규칙은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 니르각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규칙은 때론 다르게 적용되기도 하는 것.
결국 카일이 왕이 되었다.
‘당시에 일이 이렇게 될 줄 어찌 알았을꼬?’
살루신은 시작에 불과했다.
최근 몇몇 대신과 신하들이 카일과 대면한 뒤 과거의 치부를 드러내고 처벌을 받았다.
살루신 정도면 오히려 온화하다고 봐야 했다.
대신이란 지위를 이용해 국고에 손을 대거나 백성을 괴롭힌 이들은 목이 달아나기도 했다.
숙청이라고 할 만큼 요란하진 않았다.
카일은 이미 백관들이 저지를 죄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할 수 없는 증거까지 수집해 둔 상태였다.
다른 대신들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처벌이 끝나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니르각에게도 이 조용한 바람이 불어왔다.
“니르각 어르신.”
“오, 유청이구나. 무슨 일이냐?”
좌수관으로 일하는 하프빈, 유청이었다.
카일의 또래로 궁에서 놀이 상대도 되어 주어 급은 그리 높지 않지만 카일이 아끼는 좌수관 중 하나였다.
때문에 최근 대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좌수관이기도 했다.
유청이 말했다.
“폐하께서 한 번 뵙자고 하십니다.”
니르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올 것이 왔군.’
니르각은 이른 저녁 무렵 카일을 찾아갔다.
“재정대신 니르각이 폐하를 뵙습니다.”
“앉지.”
바닥은 온돌로 따뜻한 데도 니르각에겐 차게만 느껴졌다.
“식사는 했나?”
“예? 아, 아뇨. 아직 못했습니다.”
“그럼 다과라도 들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청이 들어와 다과상을 내왔다.
카일이 설탕 과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양이 이쁘지 않나?”
“예. 장인이 조각한 것 같군요.”
“자동성에서 보내온 선물이야. 저 멀리 금안에서 설탕으로 만드는 과자라더군. 실제로 장인 대우를 받는데, 날씨가 더우면 다 녹아 버려서 그냥 설탕 덩어리가 된다더군.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모양이 이쁜 게 더 좋겠지?”
“그렇겠지요.”
“어서 들지.”
카일의 아이다운 모습에 니르각은 손자 생각을 하며 흐뭇하게 웃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폐하다.’
니르각이 말했다.
“그나저나 폐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는지…?”
카일이 찻잔에 입을 대었다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재정대신.”
“예.”
“어쩌다 보니 과거 행적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니르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스로 생각에 마땅히 잘못한 일은 없었다.
니르각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관료였다.
재정대는 특히나 국고를 관리하는 만큼 안평왕도 그의 책임 있는 의식을 높이 사서 그를 자리에 앉힌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허물을 만들어 내기도 쉽다.’
재정대신은 위험한 자리였다.
꼭 카일이 손을 쓰지 않더라도, 다른 대신들이 함정에 빠트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일과 관련하지 않더라도 강경한 바센파였던 것 자체가 발목을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니르각은 온 신경을 집중해 카일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카일이 말했다.
“얀파이 출신이라던데, 맞나?”
“아, 예. 폐하께서 어찌 그런 촌 동네를 아시는지…”
“이름에 성(姓)이 없는 대신들이 있기에 알아봤지.”
“예. 안타깝게도 저희 가문은 변변찮은지라, 이름난 선조가 없었습니다.”
니르각은 말하면서 얼굴을 살짝 숙였다.
성이 붙지 않는 이름이라는 건 신분이 천하다는 의미였다.
“아니, 그대는 성이 없어 부끄러운 건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왜지?”
“저희 선조들은 흑린이 세워질 때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카일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다른 귀족 출신들이 자신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명예를 빌려 관료가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것 아닌가? 그건 그대의 유능함이 아닌가?”
그 말에 니르각은 마음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랐다.
천민 출신이라는 자격지심이 있으면서도 제 힘만으로 다른 귀족 출신 관료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궁에서 드러내 보일 수 없었다.
궁에서 일하는 우수관의 출신 성분은 귀족.
그들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선 그들처럼 행동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니르각은 늘 급급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왕이 오늘 그 능력을 인정해 준 것이다.
니르각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생각하신다면, 감읍할 따름입니다, 폐하.”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짐은 재정대신이 수렵대신과도 친하게 지내면 좋겠는데.”
“예?”
“수렵대신도 귀족 출신이 아니지 않은가? 둘이 생산적인 설전을 벌일 때도 있지만 가끔은 감정을 앞세우는 것 같아 걱정이 되었어.”
니르각이 수렵대신 데아닌에게 날을 세우는 것도 그 자격지심에서 비롯되었다.
데아닌은 언제나 귀족 출신들을 오히려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니르각은 데아닌을 공격하는 것으로 귀족의 무리에 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니르각은 진심을 다해 말했다.
“예, 물론입니다. 폐하 뜻대로 하겠습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짐이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이게 전부야.”
“예?”
니르각은 깜짝 놀라 반문했다.
“아, 이게 끝은 아니지. 그러고 보니 또 손주를 봤다고 들었는데…”
이후 이야기는 니르각의 집안 경조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때쯤 해서는 니르각의 긴장도 모두 풀려서 가벼운 농담까지 던질 정도였고 카일의 사랑채를 나설 때는 카일의 명으로 유청이 쥐여 준 설탕 과자까지 한 아름 안고 가게 되었다.
‘폐하는 자신이 왕이 될 때 방해하려 했던 대신까지 이렇게 품으려 하시는 건가? 흑린이 참으로 귀한 사람을 왕으로 모시게 되었구나. 모두 야천의 은혜다.’
니르각은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니르각이 나간 직후 카일이 앉아 있던 사랑채의 왼쪽 미닫이문이 열렸다.
카일이 열려 있는 문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대가 보기에도 재정대신이 위험한 사람인 것 같나?”
“…아닙니다.”
“그럼 이야기는 끝났군. 그대도 이리 와서 맛 좀 보지.”
카일의 말에 대답한 이는 주저하다가 일어나 카일의 앞에 앉았다.
비늘이 희고 눈동자가 붉은 리자드맨, 데아닌이었다.
“재정대신은 성실한 사람이야. 그대랑 사이가 조금 좋지 않다고 해서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폐하?”
데아닌의 생각에 니르각은 위험할지도 모르는 대신이었다.
물론,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당장은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이미 위험한 대신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가 되었으니 카일의 입지는 더 없이 단단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데아닌 생각에 위험한 이들이 처리되었으면 이제 위험할지도 모르는 이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카일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재정대신한테도 말했지만, 그대도 재정대신과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군.”
“하지만…”
“하지만?”
카일이 실눈으로 데아닌을 보았다.
“그대는 그대가 칼춤을 즐기고 있다는 자각은 없는가?”
그 말에 데아닌은 흠칫 몸을 굳혔다.
과거 카일을 왕으로 만드는 것을 돕겠다고 생각한 이후 데아닌은 카일을 위해 매진했다.
그리고 왕이 된 이후로는 그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수렵대신은 여전히 대회관의 말석이었지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마눈 관리를 핑계로 얻은 인원과 재원은 착실하게 각 대신들의 치부를 들추고 약점을 찾아내는데 사용되었다.
데아닌은 그 모든 것을 왕을 위해서라고, 카일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 스스로를 위해서 아니었던가?’
사실 카일이 니르각에게 했던 말은 데아닌에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니르각의 자격지심은 귀족 관료들에게 편입되기 위한 발로로 작용했고, 반면 데아닌의 자격지심은 귀족 관료들을 이기기 위한 발로로 작용했던 것이다.
데아닌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다.
‘이 자리는 니르각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만든 자리였구나.’
카일은 단순히 머리가 좋은 왕이 아니었다.
조숙하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늙은 현자 같은 현명함이 있었다.
‘어찌 보면 이 충성도 폐하께서 불어넣으신 것 아니던가. 그럼 이 칼도 폐하의 뜻대로 사용해야겠지.’
데아닌은 니르각이 사용했던 찻잔에 차를 붓고는 들이켰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재정대신과 잘 지내보도록 하지요.”
“좋은 생각이군. 그대는 앞으로 더 바빠질 테니, 자꾸 궁 내부의 싸움에만 집중해서는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 주전자를 만졌다.
“차가 식었군.”
“예. 시간이 오래 되었으니.”
“미리 말하지 그랬나? …유청아, 차가 식었구나.”
그러자 곧장 유청이 차 주전자를 달그락거리며 가져왔다.
유청이 떠나자 카일이 데아닌의 찻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 뿔이 난 연금술사는 어찌되었지?”
“휘 라비나 무엘 말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아닌이 차의 온기로 입술을 덥힌 뒤 말했다.
“이미 궁에 도착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