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90
090화
성운은 엘다르가 말한 ‘그 지식’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마법 말이지?”
“예.”
연금술사가 알려진 외적인 지식은 신비 기술, 즉 연단술이나 연금술.
하지만 이 기술은 달리 말하면 ‘과학’이었다.
연금술사들은 과학자였고, 연금술 실험은 과학 실험이었다.
과학적 정합성에 엄밀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와 결합되어 있다는 흠결이 있었지만 실패로부터 발돋움하는 것을 기껍게 받아들이는 연금술사의 태도는 과학자의 그것과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이 더 철저히 숨기는 비밀들이 남아 있었다.
‘그건 바로 마성.’
이 땅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휘 라비나 무엘과 같은 존재처럼 ‘저주받은 자’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었다.
로스트 월드 설정상 이들은 고대의 악이 가졌던 힘의 잔재로 파지직처럼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거나 휘경이나 라비나처럼 핏줄로 연원되고 있었다.
각 마성은 전기나 화염, 확률이나 중력처럼 다채로운 힘과 관련된 속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성의 정령에게 힘을 받은 이들은 이런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성은 1차원적인 힘, 그저 초능력에 불과했다.
고대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지식에 의하면 이런 초능력을 엮어 더 고차원적인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법이었다.
“마법 자체는 소수만 사용할 수 있지. 그리고 앞으로 화약과 관련한 기술 발전으로 사회 양상이 변하는 것과는 별개니까. 카일이 보기엔 마법 운운을 해 봤자 괜히 휘문을 혼란스럽게 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법사는 아직 안 나왔으니까.”
마법사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하나의 대륙에서 절반 정도의 고대 유적이 파헤쳐지고 그에 따른 마법 지식이 하나의 장소에 모여 있어야 했다.
로스트 월드에서 ‘마법사의 탄생’은 과학 기술로 치자면 산업 혁명과 맞먹는, 시대를 가름하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마법사의 탄생이 늦어지고 있었다.
‘본래라면 게임이 시작되고 100년 내외로 등장하는데. 아무래도 플레이어 모두가 안정적인 플레이를 중시하다 보니 마성과 마법과 거리를 두고 있어서 그렇겠지. …다른 대륙에선 이미 나왔을지도.’
그나마 마성 중 하나를 종교 체계에 편입시킨 성운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선 마성 중 최소 하나는 갖추고 있어야 했으니까.
엘다르가 말했다.
“위즈덤이 유리할까요?”
“왜?”
“석면이 연금술사의 탑을 가져갔으니까요.”
“음, 마법사가 등장할 확률이 제일 높긴 하지.”
“걱정해야 될 부분 아닙니까?”
성운은 딴청을 피웠다.
“글쎄. 위즈덤은 자기 땅에서 제발 마법사가 안 나타나길 바라고 있을걸.”
─┼
동부 산맥 탐험단의 단장 바센 라크 오라즌과 그 모험단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은 선장 티오네 이티모를 태운 해적의 수치는 순항하여 바브린에 도착했다.
사티로스가 주종족인 단염이지만 항구 도시 바브린에는 정말 다양한 종족들이 오가고 있었다.
바브린 자체는 오라즌보다 작지만, 수많은 상선들이 자리한 항구만큼은 오라즌에 비견될 만했다.
갑판 위에서 바센이 티오네에게 말했다.
“배가 정말 많군.”
“오라즌에서 제일 가까운 항구니까요. 여기서 떠난 배들이 계속 서쪽으로 가서 암굴을 지나 단리까지 가죠. 그 다음으로 가는 배도 있고.”
“다음?”
티오네가 뭘 물어보냐는 듯이 바센을 돌아봤다.
“서쪽 대륙이죠. 뭐겠어요?”
전설적인 이야기꾼 오웬이 결국 저 서쪽 대륙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있긴 했다.
“그게 정말 존재는 하나?”
“정기적으로 오고갈 수 있는 뱃길도 없고 떠났다가 못 돌아오는 배들도 많아서 그렇지, 확실히 있긴 있죠.”
“아니, 내 말은. 그냥 커다란 섬일지도 모르잖나?”
바센의 의문은 한때 나라의 중심일 수도 있었던 이가 가질 법한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티오네는 그 자신감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기 서쪽 대륙에선 우리들을 동쪽 대륙으로 부른다더군요.”
“그럼 자신들은 뭐라고 부르지?”
“중앙 대륙이요.”
“왜?”
“자신들 서쪽에 서쪽 대륙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더라고요. 여기까지야 저도 자신이 없지만.”
바센은 턱을 쓰다듬고 말했다.
“왜 상인들은 대륙을 건너서 거래를 하지 않지? 위험하더라도 수익이 예상되면 움직이잖아.”
“그 위험이 어느 정도 감수할 만할 때만 가는 거죠.”
“그렇게 위험한가?”
“단장님은 배를 많이 타 보지 않아서 모르시는 거예요. 해적이며 암초며 바람 불지 않는 해역이며 높은 파도며 바다 괴물이며 폭풍이며…”
“알겠어. 그만하지.”
티오네가 웃으며 말했다.
“저는 거래를 해야 하니 다녀오겠습니다. 배에서 편히 쉬셔도 되고 약속한 시간까지만 돌아오시면 항구에서 재미 좀 보고 오셔도 되고요.”
“배는 좁아 찌뿌둥하니 좀 걸어야겠군.”
바센은 수행원들과 함께 항구를 한 바퀴 돌면서 이색적인 물건을 살펴보았다.
절반 정도는 신기한 것도 있었지만 절반 정도는 흑린에서 온 물건들이라 따분한 구석도 있었다.
바센이 생각해 보니, 정말 신기한 물건이라면 여기까지 올 것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오라즌으로 갈 테니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그나저나, 별다른 기색은 없어 보이는군.’
해적의 수치에는 탐험단을 보조할 다른 사람들도 올라타 있었다.
바센은 그들 중에도 감독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는데 따로 바센을 미행하는 이는 없었다.
‘하긴 그렇게 눈에 띄게 따라 붙을 리가 없지. 아니면 상부의 명령을 받고 별 관심이 없거나.’
바센이 배로 돌아가려던 찰나 과일 가게를 발견해 멈춰 섰다.
흑린에서는 나지 않는 것들이 있어 바센은 과일 장수와 몇 마디 나누었다.
“그럼 흑린으로 바로 돌아가시는 거요?”
“그런데?”
“그럼 해적 안 만나게 해 달라고 신에게 잘 비셔야겠군.”
“해적?”
노움 과일 장수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곤란한 듯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더니 바센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야분 해적단을 모른단 말이오?”
“…모르겠는데.”
“참, 오라즌에서 오셨다고 했지. 바브린 주변 일대를 주름잡는 해적단이 있소. 주로 바브린을 빠져나가는 상선을 노린다더군.”
“단염은 그걸 보고만 있나?”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남쪽에서 올라온 워낙에 큰 해적단이라 배가 한두 척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요즘도 계속 바브린 일대로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시간이 지나면 흑린의 앞바다도 위험해지지 않겠소?”
바센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단염도 결코 병사들이 약하지 않는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촌 동네가 아니라 이런 큰 항구 도시까지 해적이 올라오게 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다.’
바센은 티오네가 초석을 사서 되팔 사시안에 가게 되면 카일에게 편지를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카일이라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보라는 건 거듭 말하면 더 중요해지는 법이니까.
그리고 바센은 이 이야기를 당연히 자신이 타는 배의 선장 티오네에게도 이야기했다.
“야분 해적단이요?”
“들어 본 적 있나?”
“전혀요?”
티오네가 웃으면서 말했다.
“항구 상인들은 다 그래요. 이야깃거리를 지어내거나 부풀리는 거죠. 그래야지 사람이 자기 가게에 오래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영업 전략이죠.”
“그건 나도 안다. 내가 자란 오라즌도 항구 도시였으니.”
“궁에서만 지냈잖아요?”
바센은 궁 밖에서 불한당들과 어울려 놀았던 시절이 더 많았다고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체면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티오네는 바센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참, 그러고 보니 궁에서 되도록 물건을 많이 실어 달라고 했는데, 제가 원하는 물량은 내일이 돼야 도착한다더군요.”
“내일까지 기다릴 건가?”
“아뇨. 나머지 군선에 남은 분량을 실을 거예요. 저희는 먼저 출발하고요.”
“그럼 군선의 호위를 못 받는데?”
“저희는 내릴 짐이 많은 데다 사시안에서 식량을 또 싣기도 해야 되니까요. 하루 정도 먼저 출발하면 오히려 시간을 아낄 수 있어요.”
“하지만…”
“배 위에서 지내는 시간은 식수며 식품이며 선원들 임금까지 전부 돈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니 바센도 할 말은 없었다.
배와 관련된 일은 전적으로 티오네 이티모가 맞기로 했던 것 아닌가?
“해적과 만나지 않길 빌어야겠군.”
“걱정 마세요. 저도 해적 이야길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해적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
다음날 바브린 앞바다, 수평선 위를 바라본 티오네는 비명을 질렀다.
“해, 해적이다!”
바센은 티오네 옆에서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었다.
티오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채우는 모래주머니와 당장 먹지 않을 식수와 식료품을 재빨리 버리도록 지시했다.
마지막은 선원 개인이 각자 마련한 엉성한 병장기로 무장할 것을 명령했다.
해적선으로 보이는 배는 모두 세 척.
바센이 봐서는 해적선이라는 확신이 없었지만, 티오네는 배 모양과 속도, 그리고 명백하게 추격해 오는 모습을 보고 해적으로 확신했다. 다른 선원들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도망칠 수 있나?”
“해적의 수치는 해적선으로 쓰이기도 했어요. 비교적 가벼운 나무로 만들어진 데다 돛도 커요. 바람을 잘 받죠. …이걸론 부족하지만.”
해적선도 조건은 똑같을 터였다.
반면에 최소한의 식료품을 제외하곤 아무런 짐도 싣지 않았을 거란 점이 달랐다.
“초석은?”
“그걸 운반하기 위해서 가는 거잖아요? 그걸 다 버릴 거면 저도 차라리 뛰어내리는 게 나아요.”
“그래도…”
티오네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해적선은 물에 뜨기만 한다면 불필요한 구조물은 다 떼 내는 개조도 해요. 그러니 어차피 따라잡히는 거죠. 약간의 짐이라도 버리는 건 시간을 벌면서 군선들이 따라붙을 시간을 벌려는 거예요. 운이 좋으면 오늘 오전에 초석을 싣는다고 했으니 반나절 정도 밖에 차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여기서 바람만 더 세차게 불어 준다면…”
티오네는 두 손을 쥐고 눈을 감고 기도했다.
바센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티오네가 한쪽 눈을 뜨더니 바센을 노려보았다.
“뭐 해요? 빨리 기도 안 하고?”
바센은 한숨을 쉬고 엉성한 자세로 티오네를 따라했다.
안타깝게도 야천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줄 수 없었는데, 성운에게 아직 해풍의 소영역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윽고 가장 작고 날렵한 해적선 하나가 해적의 수치 옆으로 따라붙었다.
해적들의 소리치는 소리가 바센에게까지 들려왔다.
“형님! 저것 보십쇼. 짐을 두둑하게 실어 배가 나가질 못 합니다요!”
“으하하하! 얘들아! 오늘 저녁엔 거나하게 마실 수 있겠구나! 하얀 거미신 님에게 기도한 보람이 있군.”
“다른 놈들 오기 전에 저희가 잽싸게 올라타는 게 어떻겠습니까?”
“흠, 기다려라. 아직은…”
말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지면서 양측에서 화살이 오갔다.
하지만 해적들의 경우엔 갑판이 높아 제대로 쏠 수 없었고 지형이 유리한 해적의 수치에선 활잡이들 솜씨가 형편없었다.
‘하얀 거미신? 비슷한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바센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책을 펼쳐 두고 하는 공부는 스스로도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는 자신이 있었다.
바센은 흑린이 자랑하는 각궁을 꺼내 들고 갑판 밖으로 상체를 디밀었다.
-휙!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해적 하나의 미간에 명중했다.
소란스럽게 떠들던 해적들이 조용해졌다.
바센은 다른 사람의 사정을 봐주는 취미는 없었다.
멍하니 있던 해적의 관자놀이에 또 화살이 박혔다.
그제서야 해적들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활을 들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바센을 향해 화살을 쏘아 댔지만, 바센은 돛대 뒤로 숨은 뒤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아스타시디안이 소리쳤다.
“배를 옆으로 붙여라! 당장 배에 올라탄다!”
추가 달린 밧줄들이 던져지더니 해적의 수치 난간을 휘감아 고정했다.
반대쪽 끝 또한 고정된 상태.
배가 기우뚱 하더니 해적들이 밧줄을 기어올랐다.
하지만 해적의 수치 위에 있던 선원들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겁에 질려서만은 아니었다.
응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려던 바센 또한 잠시 갑판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았다.
“어떤 놈이 작은 형님을 쏜 거냐!”
해적들이 재빨리 밧줄을 타고 갑판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바센이 아닌, 크고 시커먼 그림자가 서 있었다.
“1등 황훼사, 해적 실타.”
“…헉!”
“해적, 배에서 버린다.”
오우거의 발길질 한 번에 해적 셋이 바다로 튕겨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