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96
096화
-아직 싸워 볼 만하지 않나?
‘……’
-날아오는 화살이라면 불태워 버릴 수 있다.
마즈다리는 마성의 정령 ‘썩은 손’이 떠드는 소리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변에 도열한 병사 전부를 죽일 수도 없고, 그들을 따돌릴 수도 없었다.
‘화풀이 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마즈다리는 후방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엘크 위에 올라탄 트롤 기사에게 눈길이 갔다.
갑옷 자체는 실용성을 우선했고 얼굴을 가리는 투구를 썼다.
하지만 기사가 엘크 옆구리로 늘어트린 물방울 모양 방패 위로 그려진 문장이 낯익었다.
‘내가 아는 그 문양이 맞다면 항복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마즈다리는 두 손을 들고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항복하겠다.”
마즈다리는 허리띠를 풀고 매고 있던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병사 하나가 마즈다리의 발치까지 와서 허리띠와 거기에 매여 있는 약병과 검, 그리고 가방을 가져갔다.
마즈다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저것들이 없어도 위험한 사내인데, 괜찮겠나?”
그 말에 마즈다리가 주목하고 있던 엘크 기사가 엘크를 탄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기사의 입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로 위험하다는 이들보다 안전한 이들은 없지.”
“허세라고 생각하나? 나는 너를 구워 버릴 수도 있다.”
기사는 엘크에서 내리더니 말없이 전진했다.
가신으로 보이는 이가 기사에게 외쳤다.
“가,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위험한 자입니다!”
하지만 기사는 아랑곳 않고 전진했다.
기사는 투구를 벗었다.
트롤의 얼굴은 어느 종족의 심미안을 가져다 대더라도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종족이 보더라도 공포스럽다고 느낄 얼굴이긴 했다.
마즈다리는 그 얼굴을 보고도 표정을 움직이지 않는데 성공했다.
‘용기 있는 가루다나 흑린의 리자드맨 전사 정도나 도망치지 않겠지.’
트롤이 말했다.
“나는 석면의 왕, 데르말딘 부사. 속선(束線)께서 주목하시는 자다. 연금술사들은 늘 신과 겨루어 보고 싶어 하니 그대의 힘으로 날 태우는 게 빠를지, 그대가 신벌을 받는 게 빠를지 시험해 볼 기회로군.”
이번에는 마즈다리도 입을 벌리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왕족일 거라고 짐작했지, 진짜 데르말딘일 줄이야.’
-흠, 왕이거나 말거나. 나는 저자가 말한 겨루기가 기대되는데. 어때, 도전할 건가?
‘멍청한 놈. 불길이 데르말딘에게 닿기도 전에 내 몸이 수십 갈래로 동강 날걸?’
속선은 과거 얽고 설키는 신으로 불렸던 석면의 신을 말했다.
신벌을 내리길 즐겨서, 신벌을 받는 이들이 갈가리 찢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고, 실제로 그렇게 발견되는 시체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시체의 배후를 찾다 보면 정말로 악인이었던 경우가 빈번했기 때문에 석면이 법치주의, 혹형주의로 발전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런 신의 관심을 받는 이라는 것과, 목숨을 걸고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저주받은 자에게 가까이 근접할 수 있는 용기는 별개였다.
신에 대한 믿음이 광기에 가깝다면 또 모르겠지만, 마즈다리가 보았을 때 데르말딘 부사는 눈빛과 태도에서 이지적인 면모가 보였다.
‘트롤의 대부족장이자, 북부 대공, 석면의 왕이라 불릴 만하군.’
-감탄할 때는 아닌 것 같군.
마즈다리는 내키지 않지만 썩은 손에게 동의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시험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지.”
“잘 생각했다, 가루다 연금술사.”
“하지만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 한낱 연금술사를 붙잡는데 이 정도의 노력이 필요한가? 일국의 왕이 직접 나선다고? 지금까지 연금술사의 탑을 내버려 두었으면서?”
데르말딘이 말했다.
“연금술사들은 자신들의 지식이 외부에 쓸모없어 보이길 바란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 지식들이 쓸모 있다는 사실은 너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흠.”
“연금술사의 탑을 지금까지 내버려 둔 건 너희가 쓸모없어서가 아니라, 너희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지. 사람들이 불신자를 싫어한다고 해서 불신자가 만들어 낸 유용한 것까지 싫어할 리는 없지 않느냐?”
마즈다리가 말했다.
“화약 이야기로군.”
“……”
“화약 제조법이라면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다. 그 기술은 막 발견되었을 뿐이니 자원만 있다면 충분히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을 거야. 그걸 어디 쓸지는 몰라도.”
데르말딘이 고개를 저었다.
“화약이 아니다.”
“아니라고?”
“넌 몰랐겠지만 이미 내통하는 연금술사가 있었지. 우리는 이미 화약의 제조법을 안다. 아니, 그 이상이지.”
내통자가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연금술사의 탑이 석면의 기사들에게 침략당하게 된 주요 원인은 새벽 중에 열린 도개교 때문이었다. 그 도개교로부터 기사들이 암습을 해 온 것이다.
분명 내부에 범인이 있기 때문이었겠지만, 연금술사들은 기사들을 피해 급하게 도망치느라 범인을 잡을 겨를 따윈 없었다.
“그럼 뭘 원하는 거지? 그냥 불신자들을 사냥하길 원하나? 신이 그걸 바라고 있기 때문에?”
“아니.”
데르말딘이 말했다.
“나는 마법을 원한다.”
마즈다리가 황당해했다.
마법은 수위에 오른 연금술사들만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이었다.
“마법은 원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얻을 필요는 없다. 마법이 정확히 뭔지도 궁금하지 않고.”
“그럼?”
“단지 그 힘이 필요할 뿐이지. 그 내통자가 짐작하기론, 마법은 마치 신과 같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더군. 이미 붙잡은 연금술사들도 그리 말했고.”
“미신에 불과해. 고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너희는 그 고대의 이야기를 믿지 않느냐?”
마즈다리는 부리를 부딪쳐 “딱” 하고 소리를 냈다.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를 원하는 거군? 너의 말에 굴종하는?”
데르말딘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가루다라서 그런가? 이해가 빠르군. 다른 연금술사들은 그렇지 못하던데.”
“…다른 연금술사들은 어떻게 되었지?”
“다들 몸이 약하더군. 말 몇 마디 하고 죽어 버렸지.”
마즈다리는 일어나서 데르말딘의 목을 움켜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붙잡힌 연금술사들은 악명 높은 트롤 고문을 겪은 것이다.
연금술사의 탑에서 연금술사들은 학파에 따라 서로 경쟁했고 마법과 같은 귀중한 지식은 서로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절대 무력으로 빼앗는 일은 없었다.
그것이 규칙이었다.
하지만 탑 밖의 존재가 이제 와서 그 모든 규칙을 깨 버린 것이다.
데르말딘이 말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법사가 될 만한 이들이 누구인지 귀띔 정도는 해 주더군. 최고의 연금술사는 단연 마즈다리라고.”
“나보고 마법사가 되라는 것인가?”
“지금까지 수집한 연금술사들의 모든 지식을 주겠다.”
“그 다음은?”
“마법사로서 힘을 사용해 석면의 위대함을 널리 알려야지.”
“……”
마법사가 되는 건, 정말이지 끌리는 이야기였다.
데르말딘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마즈다리는 무사히 도망치는데 성공한다면 대륙 각지로 흩어진 연금술사들을 찾아다니며 지식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무리한 요구를 해서라도 말이지. 큭큭.
탑은 무너졌으니, 탑의 규칙도 깨어진 셈이니까.
애초에 마즈다리는 자신의 지식이 거의 마법사에 근접했다고 보고 있었다.
겨우 몇 조각이 부족한 것이다.
그 애달픔이 그를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즈다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연금술사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가루다라는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데르말딘이 말했다.
“물론 너는 그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과거에 너희 가루다들은 우리 트롤들이 나라를 세울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더군. 이번이 다시 그 명예를 회복할 기회가 아니겠나?”
저주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밖에서 자란 마즈다리에겐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여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유쾌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생각해 볼 시간은 있나?”
“넌 이것이 제안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다른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내 선택이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던 데르말딘이 무표정하게 돌아섰다.
“좋다. 하지만 긴 시간은 줄 수 없어. 너와 같은 마법사 후보가 막 우리 땅을 빠져나갔으니까.”
마즈다리는 포박당한 뒤 성의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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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위망을 뚫고 나갈 연금술사는 누가 있을까? 얀? 아니면 탈레이? 그것도 아니면 휘 라비나 무엘?’
-궁금하다면 간수를 불러 마법사가 되겠다고 해라. 데르말딘 폐하의 충성스런 수하가 되겠다고.
마즈다리는 자신의 왼손이 떠드는 소리에 또 부리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통로를 지나가고 있던 간수가 철문 뒤에서 힐끗 바라보고 지나갔다.
-아니면 탈출 방법을 찾아보는 게 어때? 창문은… 좀 좁나?
마즈다리는 힐끗 위를 바라보았다.
천장 꼭대기에 비죽 난 창문은 그저 밤낮이 바뀌는 것을 알려 주는 것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도 지나가기 힘들어 보였다.
-아니면 저 철문 정도면 녹이고 갈 수도 있겠는데.
‘속선이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아무거나 선택을 하란 말이다. 난 지루하다고.
마즈다리는 왜 자신이 이런 망할 것을 손에 달고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자조했다. 머리가 굵어질 무렵부터 자주했던 생각이었다.
‘미안하다, 썩은 손. 나도 내가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군.’
-뭐라고? 좁은 곳에 있다고 정신이 나간건가?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저기.
‘잠깐만 조용해 볼 생각 없나? 지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멍청아, 창문을 보라고.
마즈다리는 다시 고개를 올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림자에 가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사람의 머리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메뚜… 기?”
하지만 저것이 메뚜기의 얼굴이라면 그 몸집이 결코 작지 않을 것 같았다.
마즈다리가 당황하는 가운데 메뚜기가 말했다.
“이대로 말하긴 좀 그렇군. 안으로 들어가겠다.”
그렇게 말한 메뚜기는 창문에서 멀어지는가 싶더니, 도움닫기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음 순간 마즈다리가 있는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마즈다리는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었다.
“두려워 마라, 나는 신의 심부름꾼이니.”
그 말에 마즈다리는 손을 치우고 메뚜기를 천천히 살폈다.
메뚜기는 옷가지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두 발로 서 있었다.
하지만 옷 사이로 드러나는 몸은 곤충의 근육을 생각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마즈다리가 말했다.
“신의 심부름꾼이라고?”
순간이동.
커다란 메뚜기가 그저 뛰었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크기의 창문을 관통할 수는 없다.
마법이 아니라면 기적뿐이다.
“그렇다. 나는 혼고, 야천의 창조물 중 하나다.”
“야천? 흑린 리자드맨들의 신 야천을 말하는 거냐?”
“그래.”
“왜 야천이…?”
“그분은 모든 곳을 지켜보고 계신다.”
연금술사들은 불신자지만, 그만큼 신들을 노골적으로 탐구할 수 있었다.
많은 신들이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역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야천의 영역은 상당히 넓다고 판단되긴 했다.
야천의 힘 또한 그저 입소문에 불과하지만 몇 가지 알려져 있기도 했다.
야천의 첫 번째 사도인 라크락, 그리고 야천의 힘을 대변하는 괴수 스라티스, 그리고 메뚜기 떼를 다스리는 황폐함의 혼고.
“속선은 데르말딘을 이용해 내게 접근하더니 야천은 자신의 수호자를 보내는군. 이곳은 야천의 영역이 아닌데 두렵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속선이 이곳을 지켜보지 않는다.”
“자신하나?”
“자신하냐고? 확신한다. 야천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때는 성운이 긴급 호출을 통해 제3 대륙의 플레이어들을 불러들인 순간이었다.
성운은 모든 플레이어의 시선이 대륙에서 거둬지는 시점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즈다리가 물었다.
“심부름꾼이라면, 뭘 전하기 위해 온 것이지?”
“야천의 예언.”
마즈다리는 흥미가 동했다.
“말해라.”
“이는 야천의 예언이다. ‘그대는 석면의 마법사가 된다.'”
그 말에 마즈다리가 웃었다.
“지금 당장 이 지하 감옥을 탈출하면 신의 예언을 깰 수 있겠군.”
“내가 이곳에 잠입할 수 있는 건 신이 나에게 부여한 힘 때문이다. 넌 이곳을 탈출할 수 없다. 속선이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리고 예언은 끝나지 않았다.”
“남은 예언은 뭐지?’
혼고가 말했다.
“‘마법사가 된 너는 석면을 배신한다.’ …여기까지가 예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