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healer is too strong RAW novel - Chapter 108
110화〉
개와 늑대의 시간
도화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한국으로 왔다.
혼자는 아니었다.
3명의 청도복이 그를 도와주기 위해 함께했다.
모두 도화윤의 사형과 사제, 사매인 자들.
“HMCS 보고서를 해킹해서 봤는데, 약과 돈에 관여할 수 있었던 인물은 총 네 명인 것 같아용.”
4명 중 유일한 여자인 화화가 풍선껌을 푸ㅡ 불며 설명했다.
“하나는 당연히 장첸, 다른 하나는 클라운··· 이제는 류지환이죵.”
“쿄호호. 땅꼬마. 귀여운 척하지 마라.”
“죽는당, 당위지안.”
“쿄호호. 너 따윈 손가락 하나로도 이겨.”
화화와 당위지안이 불꽃을 튀기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빠직.
두 강대한 격이 격돌하며 허공에 마찰이 일어났다.
“그만하자~.”
둥글둥글한 목소리와 함께 곰 같은 손이 그들의 어깨를 다소곳이 눌렀다.
거대하고 푹신한 곰을 연상케 하는 외모의 사형, 팡시용이었다.
“우리끼리 싸울 거였으면 연무장에서 대련이나 하고 있지, 이 먼 곳까지 뭐 하러 왔겠니~.”
“죄송합니당, 사형.”
“쿄호호··· 죄송합니다.”
“화화는 이어서 말을 해 보거라~.”
팡시용의 말에 화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메모해 놓은 내용을 다시 읽어 나갔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장첸은 교도소에서 죽었고, 류지환은 실종 상태입니당. 한국 헌터 협회에서도 찾는 모양이지만, 이미 한국을 벗어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당.”
“그런데 장첸은 누가 죽인 거지?”
도화윤의 혼잣말에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솔직히 나는 대성께서 죽이신 줄 알았다~. 은혜든 원수든 꼭 갚으시는 분이니까~.”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사형. 그런데 대성의 수련실에서 이야기할 때 들었는데, 장첸이 죽었단 보고에 ‘안타깝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쿄호호. 클라운이 놈을 죽인 건 아닐까요? 수사가 시작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화화는 풍선껌을 짝짝 씹으며 그들이 눈치를 살폈다.
얼른 쉬고 싶은데 호텔 안에서 짐도 안 풀고 이게 뭔 짓이지.
“아··· 화화야. 남은 두 명은 누구냐.”
“옙, 도 사형. 다른 하나는 여진식이라는 류지환의 비서입니당. 〈나락〉에서 탈출한 뒤 HMCS 헌터랑 싸운 것을 마지막으로 목격된 바가 없답니당.”
“여진식? 들어 본 적 있는데~. 어디였지~?”
팡시용은 두툼한 턱살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HMCS 헌터입니당. 이름은 민시우. 최근 주가가 오른 헌터라고 합니당.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소문에 따르면 〈강원 S급 게이트〉 때 안에서 발록이랑 싸웠다고 합니당.”
“쿄호호. 발록? 설마 그딴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입 닥쳐! 나는 정보를 말한 것뿐이양!”
“하~ 하~. 발록이라는 건 정말 어이가 없구나~ 대체 급수가 어떤 헌터라든~?”
화화는 엄청난 속도로 자판을 두들겼다.
다른 사람들은 스마트폰도 간신히 쓰는 컴맹이라 그녀의 행동을 멀거니 바라만 봤다.
“이상하넹. HMCS랑 〈대한민국 헌터 중앙 협회〉를 들어가 봐도 급수가 안 나와 있어용.”
“그러는 경우가 있나?”
“뒤쪽 세계 사람이라면 몰라도··· 보통은 안 그러죵.”
도화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미 참고할 만한 사람 4명 중 1명은 죽고, 2명은 실종됐다.
마지막 남은 민시우란 놈에게 최대한의 정보를 얻어야 하는 상황.
‘류지환은 절대 한국에 없을 거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여진식이라는 비서 쪽인가.’
한국 HMCS와 헌터 협회의 압수 수색이 시작됐지만, 마약이나 판매 대금을 발견했단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가지고 있다는 소리인데.
장첸이 가지고 있었다면 잡혔을 당시에 기사가 떴을 것이고, 민시우가 찾았어도 그때 기사가 떴겠지.
‘하지만 일단 정보는 얻어야 하니까··· 돈에 눈이 멀어 HMCS 헌터 놈이 감춰 뒀을 수도 있고.’
도화윤은 생각을 다 정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화 사매는 여기서 계속 정보를 찾아. 당위지안은 나랑 함께 민시우란 놈을 만나러 간다. 팡 사형은 여진식을 찾아봐 주세요.”
“알았다~ 그러마~.”
“오키요, 사형.”
“쿄호호, 그러죠.”
***
시우는 현장 텐트에서 보고서들을 읽었다.
그는 〈강원 S급 게이트〉의 총책임자였다.
처음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 했는데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국방부와 백건호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둘 중 하나에게 줄 수 없었고, 헌터 협회의 채우담은 김은주의 죽음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게다가 양준모 참모 총장에게 뱉은 말도 있어서··· 그냥 맡기로 했다.
오히려 HMCS 총본 소속의 헌터가 책임자가 되자 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돼 시우 입장에 서도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석연치가 않네.”
시우는 기밀 보고서를 읽고는 혀를 찼다.
S급 게이트가 발생한 걸 알면서도 주변국에서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치 다 함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이런 대형 악재는 서로서로 도와주는 게 암묵적 룰이었다.
왜냐하면 다음 악재가 누구에게 쏟아질지 모르는 게 헌터 세계였으니 말이다.
“하나같이 변명만 주저리주저리 해 놨네. 병력을 준비해 출동시키는 와중에 우리가 게이트 클리어한 걸 알았다고?”
그는 보고서를 찢어 버리고픈 마음을 삭였다.
그래도 독일이 있지 않은가.
에드워드도 HMCS 총본 차원에서 보내고 싶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포기했다고 한다.
HMCS는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하는 기관이지 게이트 클리어하는 곳이 아니라는 게 반박의 이유.
사실 맞는 말이었다.
그간 S급 게이트가 터졌을 때 HMCS가 지원을 간 곳은 없었으니까.
시우는 밖으로 나와 잠시 걷다가 아직 발동하고 있는 S급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기가 사라져 이제는 그 어떤 몬스터도 없는 곳에 웬 거대한 남자가 시가를 피우고 있었다.
“뭐야, 떡대. 언제 왔냐.”
“조금 전에 왔다. 여기는 사람이 없어서 조용하고 괜찮다고 생각하던 찰나였지.”
최대수는 시가 연기를 뿜어내곤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시우는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다른 방향의 지평선을 바라봤다.
드넓고, 삭막했다.
“민시우.”
“왜.”
“〈판데모니엄〉이란 곳과 너는 무슨 관계가 있지?”
“그건 왜 물어.”
“긴급회의 때 너에게서 미미한 살기가 나오더군. 그런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감정이 깊다는 소리겠지.”
최대수는 시우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시우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어 힘껏 내던졌다.
돌은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만큼 아주아주 멀리 날아가 사라졌다.
“민준이 암살한 놈이 뒤지기 전에 그러더군. 〈판데모니엄〉이라고.”
“그런가.”
“넌 아는 거 없냐.”
“마왕을 추종하고 마족과 뒷거래를 하는 놈들··· 우리 때부터 있던 놈들 아닌가.”
시우는 건조하고 감정 잃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이를 떠올리면 모든 게 다 미안해진다.
자신 책임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스승으로서 괜히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근데 그 작은 조직이 지금은 꽤 살벌해졌던데.”
“지난 회의 이후 나도 정보를 얻어 보려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정보 통제가 철저한 곳인가 보더군. 내부 고발자도 없고, 다른 나라에서도 잘 모르는 눈치야.”
최대수도 이상한 낌새를 느껴 놈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없었다.
마왕을 신봉하는 곳이니만큼 마족과 긴밀한 커넥션이 있을 거라는 추측뿐.
“그래, 생각보다 정보량이 적네. 사고를 치길 바라야 하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건 너만 알고 있어라.”
최대수는 종이 한 장을 시우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외국 지인 하나가 몰래 알려 준 정보다. 〈강원 S급 게이트〉가 터지기 직전, 자기네한테 온 팩스 내용이라면서.”
신문과 잡지에서 오려 낸 글자로 만든 조잡한 문장.
《한국에서 발생할 게이트에 도움을 주지 마라. 너희가 두 번째 실험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처음엔 다들 장난인 줄 알았다고 하더군. 그런데 몇 시간 뒤에 S급 게이트가 발생하는 걸 보고는 누구도 도와주자는 말을 안 했다고 하지, 큭큭.”
당연히 그럴 것이다.
A급 게이트도 아니고, S급 게이트면 그 누구도 저 팩스를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터.
“다른 나라에서 지원을 안 온 이유가 고작 이 팩스 한 장 때문이다, 이거지.”
“이해가 안 되면서 이해가 되는 내용이지. 나 같아도 자국을 생각하면 안 보냈을 거야.”
최대수는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잊으라고는 안 하겠지만··· 만약 정민준의 죽음이 마족과 연관돼 있으면 어쩔 거냐.”
“뭘 어째. 가서 죽인다.”
“지금은 평화 협정 중인데?”
“들키지 않게 죽이도록 하지.”
최대수는 큭큭 웃더니 게이트 밖으로 천천히 나섰다.
시우는 팩스 내용을 다시 읽어 본 뒤 종이를 불로 태워 버렸다.
‘놈들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렵다면··· 다른 곳을 찔러 볼까.’
그는 머릿속의 몇몇 조직들을 곱씹었다.
***
루마니아 코바스나 지역의 한 대저택.
이 집의 주인이자 루마니아의 랭커이며 현 루마니아 원로원에 속한 발렌틴은 의자에 묶인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새벽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한 무리의 침입자들이 그를 묶어 두고 집안에서 일하는 식솔을 전부 죽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는 두 해 전 아내와 이혼했기에 현재 같이 사는 가족이 없었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가 돈이라면 전 재산이라도 다 주겠네!”
검은 콧수염 아래로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입을 벌려 외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발렌틴은 놈들이 원하는 바를 몰랐기에 적극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원로원에 있는 발렌틴이 맞죠?”
그때 아주 고운 목소리가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침입자들은 모두 흰색 로브에 흰색 가면을 쓰고 있어 성별이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맞···네. 자네들은 대체 누구인가? 아니, 누구인지 물어보지 않겠네! 원하는 게 무엇인가? 이 집을 원한다면 통째로 가지게나!”
“아하하. 무척 현명하시군요. 목숨을 가장 소중히 여기시다니.”
“그럼, 당연하고말고! 죽고 나면 돈이 무슨 소용이겠나!”
발렌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말에 동조했다.
침입자는 물끄러미 집안을 훑어보았다.
온갖 값비싼 장식품과 미술품이 응접실과 주방에 한가득했다.
“몇 가지만 솔직하게 대답하시면 풀어드리죠.”
“무, 무엇이든 물어보게! 내 거짓 없이 대답할 터이니.”
“감사합니다.”
가면 속의 인물은 흡족한 목소리로 끄덕이더니 질문을 던졌다.
“당신, 판데모니엄인가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듯 냉랭해졌다.
발렌틴은 눈을 홉뜬 채 상대와 다른 인물들을 일별했다.
흉악한 살기가 저택의 모든 공간에 빼곡히 들어찬 기분.
“그, 그게 무엇이지?”
“아하하. 그게 뭐긴요.”
발렌틴의 대답에 상대는 귓가에 속삭이듯 읊조렸다.
《모든 것은 〈판데모니엄〉의 아래로.》
그 찰나, 발렌틴은 잇몸 안쪽에 물고 있던 약을 깨물어 삼키고 밧줄을 터뜨린 뒤 상대의 목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ㅡㅡ!!”
찔렀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손을 보기 전까지는.
어느새 잘려 나간 손목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얘들아, 판데모니엄 맞대.”
“빌어먹을 박쥐 같은 분이시군요.”
“흑흑흑··· 죽음으로 속죄할지니···.”
“아하~ 마족에게 굽신거리는 것들은 벌을 받아야지!!”
침입자들이 제각각의 마력을 흩뿌리며 발렌틴을 향해 진노의 격을 방출했다.
발렌틴은 죽음의 공포로 턱을 딱딱 부딪치며 절규하듯 물었다.
“다, 당신들 누구야!!”
“누구기는.”
상대방이 가면을 벗으며 환히 웃음 지었다.
“IZIZ랍니다. 잘 가요.”
퍼억.
〈111 화〉
돈과 약
– 거기 꽤 유명한 행사긴 해. 유명한 사람도 많이 참여하고.
“너도 참석하냐?”
– HMCS 총본 부회장 자리가 한가한 게 아니다.
“너 되게 한가해 보이던데.”
시우는 에드워드에게 ‘베를린 국제 아티팩트 경매’에 관해 물어보는 중이었다.
세계 3대 경매 회사인 필립스, 소더비, 크리스티가 주최하고, 마정석 전문 방산 업체인 록히드 마틴, 콜트, 미쓰비시, 키로프 등의 회사가 대거 참여한 이벤트.
옥션이지만 축제와 비슷한 개념으로 진행되며, 대기업들이나 대형 길드가 주로 참여한다고 했다.
– 그런데 네가 그런 행사에도 관심이 있었냐.
“초대장을 받기도 했고, 독일에 볼일이 있던 참이라서. 겸사겸사?”
– 가서 뭐 사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고?
“글쎄··· 아티팩트에 욕심내 본 적이 없는데. 최대수라면 몰라도.”
시우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라일라나 세이겐에게 받은 아이템도 선물이라 가지고 다니는 거지, 딱히 그 무기에 의존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아이템이나 아티팩트가 망가져 눈앞에서 죽어 나간 헌터가 얼마나 많던가.
시우는 예전부터 그런 헌터들을 숱하게 많이 봐 왔다.
물론 최대수처럼 규격 외의 인간이 단순한 템빨을 넘어 능력의 일환으로 사용하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지만 말이다.
– 이번에는 누구랑 같이 가려고?
“아무래도 혼자 가게 될 것 같은데. 다들 게이트 뒷정리하느라 난리가 아니더라고.”
– 그런데 너는 놀러 가도 돼?
“놀러 가는 거 아닌데.”
– ······.
“〈독일 헌터 협회〉 회장인 롤프 방겐하임의 정식 초청받고 가는 국가적 행사야.”
시우의 뻔뻔한 대꾸에 에드워드는 굳이 말을 더하지 않았다.
– 그건 둘째 치고, 〈판데모니엄〉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하려고?
“지금 하는 마약 사업··· 즉 실험이 지루하다고 했지. 새 실험은 게이트 만들기인 것 같은데, 규모가 커지는 사건에 집중하면 꼬리가 잡히지 않을까 싶어.”
– 알았다. HMCS 총본에서도 주의하고 있어야겠군.
시우는 걸음을 멈추고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하루도 조용하게 넘어가는 날이 없지, 아주.
“에드윈, 통화 나중에 하자. 손님이 왔네.”
그는 통화를 끊고 좁은 골목으로 눈길을 돌렸다.
***
“허억, 허억, 크흡, 후우.”
키가 크고 깔끔한 인상의 남성이 몸 여기저기에 피를 흘리며 도망가고 있었다.
늦은 저녁 아래 반짝이는 수많은 네온사인.
회색 거리를 다채롭게 꾸민 간판들과 비틀거리는 취객들이 서울 변두리 유흥가의 일상을 보여 주었다.
여진식은 와이셔츠에 까만 정장 바지 차림으로 열심히 뛰었다.
인적이 별로 보이지 않는 뒷골목이 보여 황급히 꺾어 들어갔다.
뒷골목엔 에어컨 실외기와 음식 쓰레기통, 빈 병을 담아 놓은 박스 같은 것들이 늘어져 있었다.
“허억··· 허억··· 후욱···.”
그는 실외기와 실외기 사이에 쭈그리고 앉아 비지땀을 닦아 냈다.
〈나락〉이 몰락한 후, 여진식은 일종의 대기 상태였다.
[금강 길드]에서 빼돌릴 수 있는 재산은 다 빼돌린 후, 소유한 던전이나 게이트도 몰래 팔아 버렸다.그 후에 내려진 명령은 ‘숨어’였다.
누구한테서, 왜 숨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여진식은 늘 그랬듯이 류지환의 명령을 이행했다.
오늘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했었는데.
“도망가기 힘들지요~.”
그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한 마리의 팬더 같은 인상의 남자가 여진식을 웃으며 쳐다보았다.
“당신이 가져간 것을 내놓으세요~ 그리하면 자비가 당신의 이마를 적실 것입니다~.”
“제가 가져간 것이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 지금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코는 남들보다 좋답니다~. 아주 멀리서 떨어트린 한 방울의 올리브오일도 맡을 수 있을 정도죠~.”
“······.”
“지금 당신에게서 나는 마약 냄새는 무엇일까요~?”
여진식은 무작정 발을 놀렸다.
불현듯 이제야 생각이 났다.
대성에게는 황도복, 청도복, 적도복의 부하가 있다고 했던가.
거한 팡시용은 허리춤에 찬 거대 쌍절곤을 붕붕 돌리더니 여진식에게 날렸다.
약 20미터를 날아간 쌍절곤이 여진식의 등을 부술 듯이 치더니, 요란한 알림을 울렸다.
“음, 이번 점수는 높지 않군요~.”
상대에게 대미지를 입힐 때마다 점수가 올라가는 팡시용의 스킬.
[천점유희: 层出不究(끝없이 이어져라)] – 등급 : A++-내용 : 「제한 시간 내에 1,000점을 달성하면 상대를 15분 동안 조종할 수 있다.
[천점유희가 진행되는 동안 타깃은 팡시용의 공격으로 죽지 않는다.대미지를 입힐 무기는 어떤 것이든 자유.
만약 제한 시간을 넘어서도 1,000점을 얻지 못하면, 타깃이 받은 대미지가 팡시용에게 전부 양도된다.」
“당신에게는 제 스킬이 발동된 상태입니다~. 아무리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으니 포기하시는 게 좋습니다~.”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어둠을 밝히듯 다가왔다.
여진식은 지끈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모텔에서 조용히 칩거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문이 부서지면서 저 곰 같은 놈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묻지도 않고 바로 곤봉을 미친놈처럼 휘둘러 댄 탓에 신발만 신고 서둘러 도망쳤던 것이다.
“청도복··· 대성께서 보내신 분입니까?”
“이야~ 맞습니다~. 대성께서는 지금 많이 분노하고 계십니다~. 투자를 많이 하셨는데 돈도, 약도 사라져 버렸으니 말이죠~.”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러십니까?!”
여진식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다급히 물었다.
“장첸은 감옥에서 죽고~ 클라운은 지명 수배로 자취를 감추고~ 대성께선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까요~?”
“그렇다고 제가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하~ 하~. 클라운이 가져갔나요~?”
팡시용은 부드럽게 웃으며 여진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등짝에 메고 있던 쇠몽둥이를 손에 들었다.
“저는 진심으로 모르는 일입니다··· 그저 숨어 지내라는 명령을 듣고 조용히 지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클라운은 어디로 갔을까요~?”
“모릅니다, 정말! 저도 기다리고만 있는 상황입니다!”
“네~ 그러셨군요~.”
쇠몽둥이가 여진식의 어깨를 가격했다.
빠ㅡㅡㅡ 악!!
“크으윽!!”
“음~ 잡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천 점을 얼른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팡시용은 쇠몽둥이를 내려놓고 다른 아이템을 꺼냈다.
거대한 팔시온이었다.
완만한 곡선의 날카로운 검날이 어둠에서도 그 자태를 고고히 빛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킬이 발동되는 동안엔 절대 죽지 않습니다~.”
팡시용은 힘껏 검을 내리 휘둘렀다.
지ㅡ잉
그런데 검날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으음~?”
그의 눈앞으로 웬 종이 한 장이 나타났다.
“해제.”
빠바바바박!!
종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웬 쇠구슬들이 산탄총처럼 튀어나와 팡시용의 몸 여기저기에 처박혔다.
“으아아악~!!”
그는 한쪽 눈을 부여잡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굉음을 질렀다.
쇠구슬 하나가 눈알에 처박힌 듯했다.
“황정구라는 헌터의 기술입니다. 나름 쓸 만하죠.”
여진식은 얼얼한 어깨를 잡고는 태연히 설명을 이어 갔다.
“스킬 제한 시간이 곧 다가오지 않으시나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팡시용은 흠칫하더니 바닥에 떨어트린 쇠몽둥이를 다시 쥐고 여진식을 노려봤다.
“다정했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네요. 조금 진정하시는 게···.”
“이노오오오오옴!!!”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여진식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한번 휘두를 때마다 엄청난 파괴력에 돌바닥이 깨지고 건물 벽이 부서졌다.
여진식은 입술을 깨물고 그의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 냈다.
콰아아앙!!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하는 것이냐아아!!”
“그게 쥐의 전략이니까요.”
여진식은 어느새 꺼낸 코팅지를 곧장 해제했다.
팔시온의 검날이 나타나며 빠른 속도로 팡시용의 복부를 베어 냈다.
“크아아아악···!!!”
“감사합니다. 스킬이 발동되는 동안엔 제가 안 죽는다죠?”
곧이어 둘 사이로 핀 뽑힌 수류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꽈아아ㅡㅡ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들며 일대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건물 외벽이 휩쓸리는 통에 소방차가 몇 대 도착했다.
소방관들은 건물 옆, 골목 중간에서 상반신이 고깃덩어리가 된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후우.”
여진식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다른 골목으로 도망쳤다.
대성이 청도복을 직접 보낼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국내에 있을 게 아니라 해외에···.’
멈칫.
순간 엄청나게 흉악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의 앞뒤로 느껴졌다.
팡시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대한 격.
여진식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앞에 나타난 인물을 바라봤다.
“무슨··· 볼일이시죠?”
음산하고 축축한 목소리가 흰색 가면 너머에서 들려왔다.
“저기요오~~~ 개새끼님~~? 가지고 있는 것들 다 내놓으세요오오오~~~~~. 킥킥킥.”
***
“네가 장첸을 붙잡았다는 HMCS 헌터냐?”
“그걸 왜 물어.”
“돈이나 마약의 행방을 물으러 왔다.”
도화윤은 상대를 노려보며 물었다.
알고 있는 게 있다면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변화가 있기 마련.
“몰라 그딴 거. 클라운이 불 질러서 탔나 보지.”
그러나 시우의 심드렁한 얼굴이나 음성에서는 동요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제3의 상황을 툭 던진 까닭에 도화윤은 혼란스러웠다.
‘불? 그러고 보니 현장에서 불이 났었다는 것 같은데··· 류지환은 화염 술사니 충분히 태워 먹고도 남을 것이고.’
만약 불에 타 버렸다는 결론이 나오면 좆 되는 건 도화윤의 몫이었다.
고작 그런 말로 대성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을 리가 없었던 것.
“쿄호호. 잘 생각해라. 네 대답에 따라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으니.”
“모른다고 했잖아. 난 귀찮으니까 간다.”
“이게 미쳤나!!”
도화윤의 암기가 시우를 향해 날아갔다.
팅!
그러나 어느새 구축한 시우의 마력 실드에 막혀 암기는 튕겨 나갔다.
“뭐야, 병신 같은 옷이나 입은 것들이.”
“벼, 병신 같은 옷?!”
“응? 그때 〈나락〉에서 치우, 리우인가 하는 애들이 입었던 옷이랑 똑같네.”
【좁밥이랑 세쌍둥이였던 놈들이다! 셋 다 똑같이 생겼다!】
시우의 말에 도화윤과 당위지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쿄호호. 치우와 리우라면 청도복 예비였던 놈들 아닌가요? 감히 청도복의 명예를 실추시키다니.”
“그딴 거 내가 알 바냐. 유니폼 입고 놀고 싶으면 운동장에나 가.”
“이 도복은 네까짓 놈이 함부로 비하할 수 있는 옷이 아니다.”
도화윤은 격을 개방했다.
위압적인 기운이 인근 반경을 짓누르고 엄청난 압력을 행사했다.
“이 청도복은 대성께서 직접 하사하신 전투복! 너는 오늘 피를 토하다 죽을 것이다!”
도화윤은 뾰족하고 단단한 손톱을 빼 들었다.
매일 뜨거운 모래와 전갈의 독에 담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강룡독조.’
코끼리도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강대한 독기와 벼린 손톱이 상대를 향해 창날처럼 찔러졌다.
투콰ㅡㅡㅡㅡ!!
응축된 마력이 상대를 지나쳐 지반을 으깼다.
시우는 공격을 가볍게 흘려 낸 뒤 머리를 긁적였다.
“멍청한 제자 새끼의 제자라 그냥 넘어가 주려 했더니, 내가 생각을 잘못했나 보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짙은 마력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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